나의 사랑스러운 새 휴대폰에 관하여
by 김영준 (James Kim)휴대폰을 오 년째 쓰고 있구나, 하고 처음 셈을 하였을 때에는 별 생각이 없었다. 하나, 둘, 셋, 넷, 그리고 다섯, 그래서 오 년째로구나. 조금 더 써서 그게 육 년째가 되고 칠 년째가 되면 어때. 전화만 되면 되지. 미니 디스크(MD) 플레이어가 있는데 그깟 엠피쓰리 플레이어 없으면 어때? 고화소 디지털 카메라가 있는데 그깟 휴대폰 카메라 (기껏해야 백 몇십만 화소짜리) 없으면 어때? 휴대폰은 전화만 잘 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평균 13개월의 휴대폰 교체주기를 자랑하는 대한민국에 살면서도 감히 몇십 만원씩이나 주고 휴대폰을 바꿀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참고로 알아보자면 미국인의 평균 휴대폰 교체주기는 21개월, 캐나다인의 평균 휴대폰 교체 주기는 30개월이다. (LG경제연구원 통계자료)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겨우 13개월에 한 번씩 휴대폰을 바꾼다. 13개월조차 종전보다 길어진 결과이며 젊은 층에서는 훨씬 더 짧다고 한다. 이쯤 되면 확실히 문제가 있다는 게 휴대폰 하나로 66개월을 버틴 내 생각이다.
나의 전 휴대폰으로 말할 것 같으면 최신 기술의 정수만을 모아 정수박이에 고이 들이부어 탄생한 2000년 최고의 모델로, 종전까지 열어까기형(플립)이 지배하던 업계의 흐름을 고이접기형(폴더)로 전환시킨 선두 주자 중의 하나다. 특히 YAMAHA 미디칩으로 구현한 16화음의 벨소리와 65000 컬러의 컬러풀한 메인 창, 그리고 당시 혁신적인 기술로 평가받던 7가지 무지개색 외부 LED창을 구현함으로 많은 인기를 끌었다. 아직까지도 잊을 수 없는 당시의 텔레비전 광고를 떠올려 보도록 하자. 한 남자가 바(Bar)에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다. 그는 어쩌다, 우연히, 갑자기, 돌연히 바의 반대쪽 끝에 있는 8등신 미녀를 발견한다. 그녀 역시 뭔가를 마시고 있다. 수작을 걸기 위해 남자는 휴대폰을 꺼낸다. 당해업계에서 '따다' 동사로 구현하는 바로 그 짓거리를 시도하기 위함이다. 다만 그는 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목표물에게 다가가는 번거로움을 구태여 감수하지 않는다. 대신 놀랍게도 바의 매끈한 평면을 따라 자기 휴대폰을 - 그 휴대폰은 나의 전 휴대폰과 똑같이도 닮았다 - 쭈욱 밀어버린다. 휴대폰은 마찰력과 공기 저항, 기타 등등력 등을 무시하며 세차게 미끄러지며 7색의 조화로움을 외부 창에 뽐내는 기적을 이루신다. 그 모양새가 얼마나 강렬무비한 매력을 풍겼던지, 광고의 그 다음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할 정도다. 아마 남자의 휴대폰을 받아든 여자가 야릇한 미소를 지어 보였고 그걸 본 남자가 다시 음흉한 미소로 화답을 했던가, 아마 그랬을 것이다. 피차 알 거 다 아는 이 선수 중의 선수들 사이에서 굴러, 아니 밀려다녔던 것이 바로 나의 전 휴대폰, 혹은 같은 기종의 휴대폰이었더랬다.
어쩌면 '전 휴대폰'이라는 네 글자짜리 말은 '반갑습니다'가 '방가'가 되고, '남자친구'가 '남친'으로 압축되는 요즘 같은 시대에 필요 이상으로 길고 복잡한 말이다. 하지만 살다 보면 '전 휴대폰'이라는 표현을 반드시 써야만 하는 때가 결코 없는 것은 아니기에, 나는 이를 대체할 한 두 음절짜리 21세기형 축약용어가 가까이 시일 내에 등장할 것으로 예상했다. 발음하기 쉽고, 타자로 치기도 쉽고, 재미도 있으며, 무엇보다 '고장 난 과거' 내지는 '해지되어버린 인연'에 대한 복잡 미묘하고 쓸쓸한 감정이 담뿍 담겨있는 것으로 말이다. 그러나 내 예상은 보기 좋게 틀려버렸다. 이제는 더 이상 아무도 '전 휴대폰'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는 듯하다. 모두가 새 휴대폰이 생긴 지 (바꾸어 말하자면 전 휴대폰이라는 개념이 성립한 지) 불과 며칠 만에 그런 건 까맣게 잊어버리기 때문인 것일까? 일전의 그 통계를 다시 들먹여보자. 한국인은 이제껏 평균 3.7개의 휴대폰 단말기를 사용했다고 한다. 그럼 과거의 휴대폰이 적어도 세 개는 된다는 소리다. 여기서 ① 평균이라는 개념의 무심한 대담성과 ② 나 같은 별종이 있어 66개월 동안 단 한 개의 휴대폰만을 사용하였음까지 감안한다면, 어떤 사람은 세 개 이상의 휴대폰을 사용했다고도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다. 하긴 ex-걸프렌드도 세 명이 넘어가면 헷갈리기 시작하는 법이 인데, 사람도 아닌 전자기기를 세 개 이상 과거 속에 기억해야 한다면 '전 휴대폰'이라는 모호한 개념이 주는 정신적 부담감을 쉬이 견뎌내지 못할 것은 확실한 일이다.
각설하고. 이제 나의 새 휴대폰에 대하여 이야기해 보도록하자. 사건은 통화 음질이 심각히 저하되고 배터리 수명도 단 하루를 가지 못하게 되어버린 나의 '전 휴대폰'과 결국 재계약을 포기하면서 시작된다. 그래도 100개월은 써야지 마음먹고 버텼었는데, 아무래도 최근 들어 매뉴얼에 없었던 자동 절전기능까지 (일정시간 쓰지 않으면 알아서 꺼진다) 보여주었던 것이 결정적이었지 싶다. 그리고도 미련이 참 많은 나는 새로 휴대폰을 구입하기까지 꼬박 두 달이 걸렸다. 나의 새 휴대폰은 한 손에 쏙 들어오는 작고 예쁜 까만색의 것으로 열어까기(플립)도 아니고, 고이접기(폴더)도 아닌 밀어 올리기(슬라이드)이다. 감히 휴대폰을 바꿀 생각을 하지 못할 때는 몰랐는데, 막상 바꾸고 나니 그 기분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더라. 그리 안 나쁜 것이 아니라 사실 꽤 좋다. 꽤 좋기만 한 게 아니라 상당히 사랑스럽다. 불면 날아갈라 쥐면 꺼질까 금지옥엽 품에 넣고 산다. 사실 83.7g 정도라면 나의 전 휴대폰보다 훨씬 가벼운 것이라 주머니에 넣고 있어도 크게 불편함이 없다.
어찌 아끼지 않을 수 있을까. 멀리서 보면 초콜렛 덩어리라 해도 믿어질 만큼 단순한 디자인에 가장자리를 따라 숨어있는 곡선미가 유려하다. 달콤하고도 깊은 검은색이 주는 색감의 세련됨도 무시하기 어려운 매력이다. 또한 디지털 터치 센싱의 조작 버튼은 섬세함의 결정체로 손이 살짝 스치기만 해도 딸기색 불빛이 번쩍 들어온다. 어찌 이를 둔중하고 투박한 플라스틱 케이스를 씌워 그 아름다움이 빛을 발하지 못하도록 만든단 말이오. 그건 여자친구가 절세의 미인인데 하필 차도르를 씌워놓는 것만큼 미련한 짓이다. 내가 나의 새 휴대폰을 검은색 주머니에 고이 담아가지고 다니는 데는 이런 이유가. 있다. 벨이 울리면 주머니를 끌러서 휴대폰을 꺼내고, 다시 전화를 받아야 하는 불편함이 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괜히 여기저기 긁혀 흠집이 나는 것보다 차라리 불편함을 감수할 생각이다.
그런데 그만 며칠만에 물에 퐁당 빠뜨리고 말았다. 사랑스러운 나의 새 휴대폰을. 세수를 하다가 전화를 받으려 했던 것이 화근이다. 물속으로 깊이 침잠하는 까만 덩어리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꼭 거짓말 같아서 조금의 현실감각도 느껴지지 않는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펑펑 운다. 산신령이 펑하고 나타나 묻는다. 얘야 예서 왜 울고 있느냐?, 휴대폰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 여기 이 애니콜 SCH-B540이 네 휴대폰이냐? 아닙니다. DMB폰인데? 그래도 아닙니다. 그럼 여기 이 모토로라 Z MS 600이 네 휴대폰이냐? 그것도 아닙니다. 초 슬림한데? 그래도 아니란 말입니다. 그럼 네 휴대폰은 대체 어떻게 생겨먹었더란 말이냐? 까만 초콜릿처럼 생겼습니다. 아하, 알겠다. 이게 바로 네 것이로구나. 예, 맞습니다. 그게 바로 제 것입니다. 제 사랑스러운 새 휴대폰입니다. 오냐, 착한 아이로구나. 욕심을 부리지 않았으니 네 것을 돌려주리라. 다만 조금 기다려라. 물에 젖었으니 먼저 수리를 해야겠구나. 전원을 끄고, 배터리를 분리하고, 안을 좀 뜯어봐야 하겠다. 꼭 그래야 하겠습니까? 그냥 두었다가 나중에 문제 생기면 애프터서비스도 제대로 못 받는단다. 잠자코 내가 하는 대로 지켜보거라. 산신령은 휴대폰을 뜯는다. 슬라이드 사이로 교묘히 침투해 들어간 물방울을 떨궈내고, 기판 쪼가리를 떼어내 드라이기로 송송 말린다. 그러다 크게 탄식한다. 아아, 고감도 터치 패드가 나갔구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너의 사랑스러운 새 휴대폰이 더 이상은 손대면 토옥하고 터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안됩니다, 그럼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어찌하긴. 새것으로 교환을 해야지. 수리비는, 어디 보자… 3만 2500원이구나.
(2006년 0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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