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펠바운드 (Spellbound, 2024) B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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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펠바운드 (Spellbound, 2024) B평

by 김영준 (James Kim)

  전설적 노장들이 모였지만 그 힘이 이제 예전 같지 않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와 루카스필름을 거쳐 픽사 스튜디오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토이 스토리’의 아버지’ 존 래시터와 드림웍스 애니메이션에서 경력의 대부분을 보낸 ‘슈렉의 어머니’ 비키 젠슨, ‘디즈니 마에스트로’ 앨런 멘켄, 그리고 또 한 명의 디즈니 레전드인 린다 울버튼이 스카이댄스 애니메이션에서 의기투합하는 프로젝트로 화제가 된 뮤지컬 애니메이션 ‘스펠바운드’는 이미 몇 년 전부터 기대작으로 주목을 받고 있었다. 애플 TV+가 이 작품에 상당한 기대를 갖고 계약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거듭 지연되었다. 급기야 양사간 파트너쉽이 만료되면서 넷플릭스가 계약을 통째로 인수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이제야 선을 보이게 되었다. 스카이댄스 애니메이션에서 래시터의 첫 작품이었던 ‘럭 (페기 홈즈, 2022)’이 전형적인 픽사 스타일 소재에서 출발했다면 이번엔 보다 디즈니 스타일에 가까운 소재라고 할 수 있겠다.

 

  디즈니, 픽사, 그리고 드림웍스에서 각각 긴 세월에 걸쳐 역사적인 작품들을 만들어 온 그들이지만 이번 결과물은 그 명성의 총합은 커녕 평균에도 크게 미치지 못한다. 마법에 걸려 괴물로 변해버린 왕과 왕비를 보호하며 십 대의 외동딸 공주 엘리안(레이첼 지글러)가 대신 왕국을 통치하고 있는데 (벌써부터 한숨이 나오지 않는가!) 마침내 마법을 풀 단서를 찾아 부모님을 되찾기 위한 모험을 시작하게 된다는 내용. 특정한 동화, 설화, 민담 등의 소스를 정해놓은 것은 아니고 여러 소재를 섞어 새로 구성한 세팅으로 보이는데 이 마법의 왕국은 그리 독창적이지도 않고 설정의 디테일도 떨어진다. 들짐승과 날짐승이 뒤섞이고 유럽식 왕국과 중화권 복색이 뒤섞였다는 외에 무엇이 이 공간을 규정하는지 아리송하다. 그들의 과거 프로젝트에서 많은 요소들을 다시 한 번 끌어오지만 결정적으로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릴 마법의 재료는 찾아볼 수 없다. 나란히 자리한 빅 네임들의 무게감을 생각하면 그리 두드러진 경력이 없는 작가들의 팀 작업에 스크린플레이를 맡겨둔 점도 의문이다. 플롯은 평면적이고 갈등은 뚜렷하지 않다. 심지어 어린 공주의 왕좌를 노리는 사람도 없을 정도로 눈높이를 낮추었는데 마지막에 드러나는 문제의 실체와 메세지는 뜻밖에 다른 눈높이에 위치한다 (유감스럽게도 여기서 밝힐 수 없다). 한편 디즈니가 오랫동안 겪어온 진통을 지켜본 증인들이 다수 참여해 있어 그런지 디즈니 특유의 고질적 트라우마, 그러니까 좋게 말하면 정치적으로 올바르고자 노력하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과하게 몸을 사리는 현상 역시 그대로 나타난다. 이를테면 강하고 독립적인 소녀 주인공을 위해 (비단 '프린스 차밍'만이 아니라) 모든 또래 소년을 제거하여 로맨스를 원천 배제시키는 설정이 그렇다. 보조 인물들을 인종, 성별, 심지어 성적지향 등에 있어 중립적이거나 모호하게 만들고 동물이나 상상 속 친구를 사이드킥으로 적극 활용하는 점 역시 마찬가지이다. 한 마디로 (드림웍스 출신의 감독 젠슨을 논외로 하면) 디즈니 레전드들이 다른 스튜디오에 모여 디즈니 유사품을 만든 아이러니한 상황인데 퀄리티는 현저하게 떨어지는 것이다. 


  앨런 멘킨 역시 그의 오랜 파트너 작사가 글렌 슬레이터와  ‘탱글드 (나단 그레노와 바이론 하워드, 2010)’ 이후 처음으로 새로운 애니메이션 뮤지컬 작업에 나섰는데 아무래도 새로운 느낌은 조금 덜하다. 가령 이 작품의 오프닝 ‘My Parents are Monsters (앨런 멘켄과 글렌 슬레이터)’은 장면의 내용과 곡의 분위기 모두에 있어 ‘탱글드’의 오프닝 ‘When Will My Life Begin (앨런 멘켄과 글렌 슬레이터)’을 연상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그때도 비뚤어진 액자를 바로 맞추는 장면이 있지 않았나?) 또한 메인 테마인 'The Way It Was Before (앨런 멘켄과 글렌 슬레이터)'는 레이첼 지글러의 예쁜 목소리가 잘 드러나는 아름다운 발라드이지만 마치 포스트-프로즌 시대의 'Colors of the Wind (앨런 멘켄과 스티븐 슈월츠)'처럼 들린다. 지난 14년간 달라진 시대 분위기와 시장의 요구 역시 부득이한 변화를 야기한다. 과거 그는 (마치 공식에 맞추는 것처럼) 다섯 개 정도의 뮤지컬 넘버에 각각 고유하고 선명한 역할을 부여하여 (어린이 관객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정확한 타이밍에 배치하였다. 그런데 이제는 그것이 쉽지가 않아 보인다. 이 작품만 보아도 내용상 안타고니스트의 노래가 다가올 시련을 암시하는 장면이나 소녀가 사랑에 빠졌음을 노래하는 아름다운 러브 테마가 들어갈 장면이 없다. 그러다 보니 주인공 소녀의 의지, 용기, 혹은 내적 갈등을 담은 솔릴로퀴가 여러 번 등장하게 하거나 부득이 유사한 앙상블을 여러 번 연출하는데 아무래도 예전에 비해서는 덜 효율적인 느낌이 있다. 일례로 (우리 모두 기다리던) 사이드킥의 익살스러운 원맨쇼는 노배우 존 리스고의 'I Could Get Used to This (앨런 멘켄과 글렌 슬레이터)'로 등장하기는 하지만 아쉽게도 전체적인 스토리나 주제에서 다소 분리되어 있다. 반면에 기대에 부합하는 곡이 있다면 모험의 테마라고 할 수 있는 ‘Look for the Light (앨런 멘켄과 글렌 슬레이터)’다. (해와 달의 오라클로 분한) 네이선 레인과 타이투스 버지스의 노련한 리드와 지글러의 발랄한 매력이 조화를 이루면서 긍정적인 에너지를 전달한다.

 

  이렇듯 많은 부분에서 이 작품은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면 긍정적인 부분도 있다. 래시터가 픽사에 있을 때, 특히 2010년대에 이런 작품 제작을 추진했다고 생각해보라. 픽사 특유의 병적인 프로세스에 말려 들어가서 상상도 하기 어려운 형태로 만들어졌을 수 있다. 베이 에어리어 커뮤니티 센터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하는 싱글맘이 생활고에 시달리면서 빛을 잃어가는 부모님을 봉양하는데 (벌써부터 한숨이 나오지 않는가!) 실험적 치료제에 희망을 품고 애틀랜타로 향하지만 임상 테스트 명단에 들지 못해 소득 없이 발길을 돌리고, 그러다가 우연히 만난 포츈텔러 겸 시타 연주자가 던져 준 단서에 따라 경계 공간으로 진입하여 어린 딸과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는 부모님을 이끌고 빛을 찾아 헤매다가… 우울해지니 그만하자. 그러니 이 정도로 막은 것이 다행일 수도 있는 것이다.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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