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이 미 투 더 문 (Fly Me to the Moon, 2024) B평
by 김영준 (James Kim)과연 로맨틱 코미디는 다시 위대해질 수 있을까. 새천년이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박스 오피스를 뒤흔드는 지위를 유지하던 이 역사적 장르는 인터넷과 소셜미디어 시대의 사회, 경제, 문화적 ‘실시간’ 격변으로 방향을 잃어버린지 오래다. 최근 10년간 크게 흥행에 성공한 로맨틱 코미디를 찾기가 어려울 정도인데 사실 해당 시기에 이 장르에 좋은 소식이 될만한 사건이 거의 없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미투, 욜로, 틴더, 힌지, 범블, 인스타그램, 틱톡, 래디칼 페미니즘, 젠더 갈등, 제너레이션 갈등, 지구 온난화, 경제적 양극화의 심화, 노라 애프런의 타계, 낸시 마이어스의 공백, '프린스 차밍' 신화의 해체, 기사도 정신의 종말, 혼인률 감소, 이혼률 증가, 환경 호르몬의 영향 (아마도 Y 염색체에 미치는), 핫 스파이시 펌프킨 라떼의 등장, 워킹 타이틀의 사업 확장, 매튜 매커니히의 대오각성, 리처드 커티스의 장기 사바티카, 스트리머 시대의 개막, 극단적인 연애 리얼리티 쇼의 난립, LGBTQ 로맨스 시장의 성장, 젠더리스 룩, 제 3의 화장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DC 익스텐디드 유니버스, 우디 앨런 사관학교의 폐업, 월트 디즈니 컴패니의 20세기 폭스 인수, 본연의 의미와 너무 멀어져 버린 21세기 버전의 정치적 올바름, Gen Z 라이징, 극우 라이징, Gen Z 극우 라이징, COVID-19 팬더믹, 가짜뉴스와 저널리즘의 붕괴, 유튜브와 팟캐스트가 만들어 낸 확증편향의 시대, 캔슬 컬쳐, 가치 실종, 공감 결여, 개인화를 넘어 파편화, 라이브-액션 인어공주, 라이브-액션 알라딘, 캐슬린 케네디, 바펜하이머 논쟁, 얼마 전 발표된 케이티 페리의 신곡(미안하지만 도저히 조롱하지 않을 수가 없다)까지… 이 시기 티켓파워를 갖추고 ‘롬-콤 적령기'를 맞은 젊은 배우들 상당수가 스판덱스를 입고 블루스크린 앞에서 존재하지 않는 적과 싸우는 바람에 인력난이 가중된 것도 문제지만 (그래서 가끔씩 산드라 블록이 돌아온다) 앞서 열거한 대혼란 속에서 남녀노소 모든 관객이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랑스럽고 달콤한 연애담을 만든다는 것이 이제 더 이상 가능하지 않아졌다는 사실이 근본적인 문제일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그렉 벌란티의 신작 ‘플라이 미 투 더 문’의 배팅 규모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1억 달러 버짓 프로젝트에 현재 최고 개런티를 받는 여배우 중 하나인 스칼렛 요한슨의 캐스팅은 로맨틱 코미디가 다시 블록 버스터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가늠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물가 상승률과 애플 스튜디오의 공격적 투자를 감안하더라도 이 정도 규모 제작비의 로맨틱 코미디는 꽤 이례적인 편인데, 특히 지난 십 년 간은 (뮤지컬 포맷에 제목 그대로 올-스타 캐스팅을 다시 데려오는 작업이 필요했던) ‘맘마미아! 히어 위 고 어게인 (올 파커, 2018)’와 조지 클루니와 줄리아 로버츠의 역사적 팀-업을 성사시킨 ‘티켓 투 파라다이스 (올 파커, 2022)’를 제외하면 심지어 5천만 달러 이상 제작비가 들어간 사례도 찾을 수가 없는 실정이다. ‘로스트 시티 (아론 앤 아담 리, 2022)’나 올해 개봉한 ‘더 폴 가이 (데이빗 레이치, 2024)’처럼 기본적으로 목돈 들어가는 액션물 위에 로맨스를 더한 경우에나 비슷한 버짓이 가능했을 뿐이다.
문제는 그 낙관적 투자의 근거를 찾을 수 없다는 점. 틀에 얽매이지 않는 여자와 고지식한 남자의 스크류볼 코미디는 조금 올드한 구성이고 그 자체만으로는 (전술한 바와 같은 최근의 혼란스러운 분위기 때문에) 적절한 밸런스를 잡는 것조차 까다롭다. 냉전 시대의 스페이스 레이스와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이라는 소재로 인해 무대를 1960년 후반으로 가져가지만, 반대로 말하면 이제 이런 이야기는 그런 시대적 세팅 위에서나 가능하다는 뜻일 수도 있다. 더하여 역사적 사건과 픽션이 뒤섞이며 빚어지는 부자연스러움 역시 좋은 소식은 아니다. 이 작품은 ‘실화에 바탕한 믿을 수 없는 이야기’라는 현대 영화 마케팅의 스위트 스팟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 두 주인공 켈리 존스(스칼렛 요한슨)와 콜 데이비스(채닝 테이텀)는 가공 인물이고 캐릭터 설정에 참고한 실존 인물들이 있기는 했어도 그들 사이의 로맨스와 에피소드는 순전히 지어낸 이야기다 (註1). 그런데 이들이 아폴로 루나 프로그램이라는 국가적 대형 프로젝트에 핵심 플레이어로 역할을 하고 그것이 티격태격을 거듭하는 갈등과 충돌의 원천이기도 하다 보니 서서히 현실감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지점이 온다 (사실 ‘발사’ 책임자가 ‘홍보’ 담당자와 밀고 당길 일이 얼마나 있겠으며,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발사를 그 남자 혼자 하고 홍보를 그 여자 혼자 하겠는가? - 적고 보니 마치 ‘가십걸’ 대사처럼 들려서 문득 자괴감이...). 물론 픽션이 으레 그런 식의 과장을 곁들이는 것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니 여기까지는 이해할 수가 있다. 그런데 백업 버전의 달 착륙 페이크 비디오를 준비한다는 설정의 등장은 사실과 허구의 관계가 모호하게 만들며 문제를 묘하게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물론 이것이 존스와 데이비스의 갈등을 클라이맥스로 치닫게 하면서 프로젝트의 최종 성패와 연동하여 긴장감을 불어넣는 강력한 모멘텀으로 작용하기는 하지만, 한편으로 달 착륙이 조작되었다는 음모론을 믿는 사람들이 여전히 얼마나 많은지를 생각해보면 상당히 위험한 선택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현실감을 저 멀리 달까지 보내버린다. 사적인 호감과 공적인 긴장을 유지하던 두 남녀사이의 아슬아슬한 균형을 깨버리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과도하게 시선을 잡아 끄는 이슈에 완전히 무게를 실은 탓에 작품 전체를 흔들리게 만들 정도다. 이러한 후반부 전개가 타당한 선택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좀처럼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용두사미의 결말은 극 중 요한슨의 대사를 떠올리게 만든다. “차라리 (제이슨) 베이트먼을 데려왔어야 하는데 (註2).”
(2024년 08월)
(註1) 잘 알려진 것처럼 정부와 NASA는 아폴로 프로그램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돌리는데 큰 공을 들였다. 이 작품의 내용처럼 홍보 전문가를 고용한 것도 사실이며 홍보 전문가와 직원들 사이에 상당한 의견 충돌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라고 한다. 하지만 로맨스는 순전히 지어낸 이야기라고 한다.
(註2) 원래 요한슨의 대사는 "I think we should’ve gotten Kubrick"이다. 가망이 없어보이는 백업 버전의 문 랜딩 촬영장을 보면서 스탠리 큐브릭이라도 데려와서 촬영했어야 한다는 뜻인데 아폴로 11호의 문 랜딩 장면을 큐브릭이 촬영했다는 음모론자들의 주장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대사로 보인다. 한편 제이슨 베이트먼은 이 작품의 초기 제작 단계에서 감독으로 합류하였으나 이후 의견 차이를 이유로 중도 하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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