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6. 제우스 재수학원
by 김영준 (James Kim)1. 38년 전통의 제우스 재수학원은 여러분과 함께 영광을 이루어 낼 것입니다. 재수(再修) 없는 세상을 위한 여러분의 동반자. 제우스 재수학원. 서울시 동대문구 신설동 소재. 티이엘(TEL) 000-0000.
2. 제우스 재수학원의 뒤에는 '제우스 재단'이 버티고 있다. 제우스 재단은 40년 가까이 대한민국의 사교육 발전 및 사교육비의 지수적 증가에 기여해 온 유명 교육그룹이다. 초기 2년 동안 사설보습학원으로 탄탄한 자리를 다진 제우스학원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 재수시장으로 눈을 돌렸고, 곧 업계 1위의 강력한 재수전문학원으로 거듭났다. 그렇게 이어져 온 38년의 명맥이 오늘날 명문 중 명문으로 찬양받는 제우스 재수학원의 역사다.
3. 제우스 재수학원의 강사진은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전직 고등학교 교사라고 한다. 공교육의 현장에서 환멸을 느낀 비운의 교육자들이 백년지대계의 큰 뜻을 펼치는 곳이 바로 제우스 재수학원이라는 뜻이다. 일선 학교에서 근무했다는 경력은 그들의 충분한 자질을 의미하며, 정년이 보장된 학교를 뛰쳐나와 사설 학원으로 뛰어 들어왔다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결심에 의한 것임을 의미한다. 즉 제우스 재수학원은 일선 교사만큼의 자질과 보통의 일선 교사 이상의 결단력을 가진 참 교육자들이 공공의 의무가 아닌 서비스업 마인드로 공부를 지도해 주는 곳이다. 물론 여기에 줄 서서 수강등록을 해야 할 만큼 유명한 인기강사는 없다. 다만 약 10개월간 꾸준히 함께 쳇바퀴를 돌아줄 수 있는 진실된 마라토너들이 있을 뿐이다.
4. 제우스 재단은 자체적으로 '교육 연구소'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 문제집을 만들어 제우스 재수학원에 공급하고 남는 것은 시중에 팔기도 한다. 제우스 언어영역(정가 12300원), 제우스 수리탐구(정가 9600원), 제우스 사탐과탐(각 권 정가 8800원), 제우스 외국어영역(정가 9600원), 제우스 논술교실(정가 15400원), 등이 모두 '제우스 중앙연구소'에서 만들어진 교재들이다. 제우스 재수학원에서는 이 이외의 다른 문제집은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학원에 등록하는 학생은 누구나 어김없이 이 제우스 시리즈를 구입해야만 한다. 교재 구입을 거부하는 것은 자유인데 학원 내의 모든 커리큘럼이 위 교재들에 맞춰서 진행되니 안 사고 개기더라도 그 점은 유의할 필요가 있겠다.
5. 제우스 재수학원의 원장 선생님은 대머리 수학 선생이다. 정말 머리털이 한 올도 없다. 원장의 직함을 가지고도 일선을 떠나지 않는 것을 두고 스스로는 '교육자의 열정'이라고 자부한다. 실력과 경륜을 겸비한 일종의 '플레잉 코치'라는 것이다. 그런데 다른 선생들의 생각은 달라 보인다. 대놓고 내색은 못하지만 '늙어서 주책'이라는 표정이 역력하다. 학생들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가 수업 시간 내내 오른손 검지 손가락을 문제집 뒤쪽 답안지 파트에 끼워 놓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답을 보고 문제를 풀어주는 수학 선생이다. 무능하다는 얘기다. 모르는 척 시침을 떼고는 있어도 애들도 알 건 다 안다.
6. 공통수학을 맡고 있는 수학계 넘버 3 (전체로는 넘버 9쯤 된다고 한다)의 P선생은 흡사 꼬들꼬들한 라면을 연상케 하는 곱슬머리를 가졌다. 그 역시 수학강사로서 자기 실력이 원장보다 낫다고 자부한다. 답을 보고 문젤 풀어주는 선생이 무슨 선생이냐는 게 그의 솔직한 생각이다 (2006년 12월 29일, 소장파 수학선생들의 모임, 속칭 '소수모' 연례 집회 중 만취로 꼭지가 돌아버린 나머지 홧김에 실토, G선생 등 다수가 들었다고 증언하였으나 본인은 절대 그런 일이 없다고 잡아뗌) 허나 어쩔 수 없이 그의 포지션은 공통수학이다. 이 서열이라는 것은 그렇게 생각만큼 간단한 것이 아니다. 제우스 재수학원의 강사들은 서로 고등학교 선후배 사이다. 경상북도 출생-신라고 졸업-서울대 졸업이라는 끈끈한 지연과 학연의 끈으로 이어진 처지다. P선생은 원장 선생의 신라고 5년 후배에 서울대 5년 후배다. 고로 원장 선생은 P선생의 신라고 5년 선배에 서울대 5년 선배다. 게다가 P선생을 제우스로 불러들인 장본인이다. 그러니 답안지 커닝하며 애들을 가르친다고 따지고 나설 수 있는 처지는 아니다.
7. 종종 원장 선생은 P선생을 닥달한다. "이봐요. P선생. 자네 이렇게 해도 되겠어? 기억 안 나? 자넬 여기 꽃아준 건 나야! 그런데 자네가 고 따구로 하면 누구 얼굴에 똥칠하는 거겠어? 어이?" 그때마다 P선생은 이를 바드득 가는데 그렇다고 고향 선배에 고등학교 선배에 대학 선배이자 자길 제우스에 '꽃아준' 양반한테 대들 수는 없어 속으로 울분을 삼킨다. 원장은 종종 노골적으로 P선생을 부린다. 과제물 채점이나 교무실 청소와 같은 사소한 일에서부터 회식자리 예약이나 발렛 파킹과 같은 궂은일을 모두 맡긴다. P선생의 평생 소원은 "내가 갈 데가 없어서 이 후진 학원에 있는 줄 아냐?" 이 한 마디를 원장 면상에 대고 질러 보는 것이다. 혹은 원장 얼굴에 진짜 똥칠을 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라고 생각한다.
8. 제우스 재수학원에서 가장 훤칠하기로 유명한 언어영역의 C선생. 유부남임에도 불구하고 반듯한 외모와 쇠모루가 달려있기라도 한 듯 진중한 목소리로 인기가 높았다. 이 양반의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술. 전날 술만 먹고 왔다, 하면 '루돌프 사슴'과 같은 코를 해 가지고 나타났다. 뭐랄까, 그건 완전히 썩은, 그리고 찌든 표정이었다. 한의대를 지망하여 재수학원에 등록한 허모시기는 C선생의 얼굴을 이렇게 평가한다. '딱 봐도 간이 안 좋은 얼굴' 확실히 C선생의 얼굴은 새까맣다.
9. C선생이 원래부터 애주가였던 것은 아니다. 제우스에 들어오기 전까지 그는 소주 두 잔에 얼굴이 벌개지는 사람이었다. 그의 사전에서 '절주(節酒)'와 '금주(禁酒)'라는 단어가 사라지게 된 것은 5년 전 제우스에 들어오면서 부터다. 면접 당시 원장 선생은 그에게 딱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이봐요. C선생. 술은 좀 하나?" 이후 원장 선생과 집 방향이 같다는 이유로 전담 술벗이 되면서 C선생은 많은 면에서 달라지게 되었다. 첫째 주량이 크게 늘었고, 둘째 안색이 나빠졌으며, 셋째 담당학급이 예체능 반 3개에서 인문 자연반을 포함한 9개로 늘었다. 봉급도 그에 비례하여 세 배가 되었다.
10. 12년 입시 선생 경력의 B선생은 C선생이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제우스의 언어영역을 주름 잡는 '핫 플레이어'였다. 최상위 1퍼센트 만을 모아놓은 테크노과학반과 그다음 5퍼센트를 모아놓은 민족사관/외국어반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인문/자연반을 전담했다. 책도 썼다. '제우스 언어영역'의 14판, 15판, 16판에는 그의 이름이 첫 번째 주저자로 올라가 있다. 그런데 5년 전 C선생이 들어오고부터 입지가 영 약해진 모양새다. 인문 자연반 여섯 개를 그에게 내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표면상 상위그룹에만 집중하라는 원장의 배려였지만 사실상 일을 빼앗긴 셈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라고 B선생은 주장한다. 원장이 술을 못하는 자길 제치고 같이 술 먹는 C선생을 밀어주고 있다는 것이다.
11. "학교선생이든 학원선생이든. 선생이 좋은 게 뭔지 알아? 바로 아주 앞서 나가지 않아도 된다는 거야. 선생은 아주 천천히 뒤따라만 가면 되는 거야. 내년이 된다고 교과서가 통째로 바뀌나? 제도야 바뀌지! 그런데 그래서? 이봐요. 선생님들, 내 얘기 명심해요. 내가 지금 이 짓을 삼십 년 넘게 하고 있는데 그때랑 지금이랑 문제가 크게 달라졌을까? 아니지. 심화형이니 사고형이니 말은 거창해졌어도 결국 가르칠 건 똑같거든. 오히려 더 쉬워졌잖아. 신유형 연구? 그거 천천히 해도 돼. 몇 년에 한 번만 따라잡아 주면 되는 거야. 얼마나 편해? 세상에는 실시간으로 변화에 적응하여야 하는 분야도 있어. 그런데 우리는 몇 년! 어때? 신나지? 술맛 나지? 그런 의미에서 시원하게 파도 한 번 돌자!" 원장 선생이 언젠가 회식자리에서 술 먹고 한 일장 연설의 일부다 (신설동 최고의 단란주점 '보물섬' 여급이 증언).
12. 예체능반을 전담하여 공통영어를 가르치는 K는 이제 고작 서른 둘이다. 종종 그보다 나이가 더 많은 학생이 클래스에 들어오는 경우가 있다. K는 젊고 미남이라 인기가 많다. 재수생들에게 인기가 많아서 뭐한담. 사실이 그렇다. 별로 실속이 없는 인기다. 그가 돋보이는 이유는 제우스의 다른 영어 선생들이 하나같이 늙다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정말 실속이 없는 인기다. 나머지 영어 선생 넷의 나이를 합치면 자그마치 이백살을 넘는다. 그들의 영어발음은 하나같이 딱딱하고 전근대적이다. 서너 살 때부터 영어를 배워 온 애들이 좋아할 리가 없는 것이다.
13. 그 중 가장 연장자인 L선생의 강의는 졸리기로 유명하다. '5교시의 L'이라는 관용구가 만들어질 정도다. 점심을 배불리 먹고 가뜩이나 식곤증이 밀려올 5교시 무렵에 L선생의 강의를 들으면 정신과 육체가 분리된다는 소문에서 만들어진 말이다. 실제 그의 발걸음이 지나쳐 간 교실마다 가련한 영혼들은 폭풍처럼 6열로 책상 위에 드러눕는다. L의 목소리는 아련한 엄마의 자장가처럼 작고 고요하며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아득해진다. 기차의 덜컹거림처럼 잠의 여신을 불러 내는 그 악마의 박자 속에 '너무 졸리다'와 '그래도 졸아선 안돼'라는 두 개의 마음이 혈투를 벌인다. 개중에는 미처 그 혼미감을 이기지 못해 졸도하는 녀석마저 있다. L선생의 강의를 앞두고는 너도 나도 자판기로 달려가 캔커피를 뽑아 마신다. 오죽했으면 동서식품과 롯데칠성음료에서 L선생에게 감사패를 전달했다는 소문마저 돌았다.
14. 다음으로 연장자인 M선생은 학생들에게 조금 뻔뻔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그의 영어 발음은 쉽게 말해 염치가 없는 수준이다. "어 토탈 오브 피프티 오어 레스 인디케이트츠 어 스로우다운 인 매뉴팩쳐링 화일 어 토탈 오브 어보브 인디케이트츠 언 익스펜젼…" 그래서 그는 자주 학생들에게 읽기를 시킨다. 1일이면 첫째 줄, 2일이면 둘째 줄, 대개 그런 식이다. 어떤 날에는 제비 뽑기로 시키기도 한다. M선생이 인기가 없는 결정적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읽는 걸 시킴으로 강의 시간의 대부분을 허비하는데 수강생들이 재수학원에서 원하는 것은 그런 게 아니기 때문이다. 잘라 말하자면 그에게는 학원 선생 특유의 속 시원한 족집게적 허풍이 없었다. 권태와 무료에 찌든 전형적인 무능 선생이었다. M선생은 화도 곧잘 낸다. 시답지 않은 이유로 교사의 권위를 내세우다 잘 먹히지 않을 때다. "학교에서 만나던 꼴통 선생 여기에도 하나 있었네." 누군가의 비아냥이었다. "피 같은 돈 갖다 바치고 고작 이렇게 배워야 해?" 또 다른 누군가의 비아냥이었다. B1반에서는 침묵시위가 있었다. M선생이 물으면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 식이다. A1반에서는 보다 노골적인 무단 땡땡이마저 있었다. M선생의 강의 시간만 되면 일부러 옥상 휴게실에 올라가 퍼질러 자는 것이다.
15. 그럼에도 불구하고 M선생의 자리는 굳건했다. 원장 선생의 신라고 3년 후배에 서울대 3년 후배에다가 개인적으로도 절친한 사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원장 선생은 오히려 인기좋고 젊은 K선생을 불러다가 혼내었다. "이봐요. K선생. 젊은 친구가 패기 있고 애들도 잘 이해하고 다 좋은데… 그래도 선생이 애들을 가르쳐야지 인기 얻으려고 몸부림쳐서 되겠어요? M선생님을 봐요. 얼마나 제우스의 표본 같으신 분입니까? 좀 옆에서 보고 배우세요. K선생이 똥오줌 못 가릴 때부터 선생의 길을 걸어오신 분입니다." 미적분 계산을 질문하러 교무실을 찾아갔던 누군가에 의해 그 소문이 퍼졌다. 모두들 황당하다는 표정이었다. 인기 좋던 K선생은 그로부터 몇 달 후 가정사를 이유로 사직서를 제출했고 그가 가르치던 네 반은 모두 M선생에게 넘어갔다. 웩, 졸지에 M선생에게 영어를 배우게 된 불운한 네 반의 수강생들은 구역질을 해대었다.
16. 제우스 재수학원의 학급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테크노과학반, 민족사관외국어반, A1반, A2반, A3반, A4반, A5반 (이상 자연계) B1반, B2반, B3반, B4반, B5반 (이상 인문계), 예체능반. 이상 총 13개이다.
17. 제우스 재수학원의 강의실은 다음과 해외 유명 대학 이름으로 붙여져 있다. 아이비리그(브라운, 컬럼비아, 코넬, 다트머스, 하버드, 프린스턴, 펜실베이니아, 예일)는 말할 것도 없고 여기에 스탠포드, 듀크, 유씨엘에이, 엠아이티, 유씨버클리가 포함된다. 물론 여기서 공부하여 브라운, 컬럼비아, 코넬, 다트머스, 하버드, 프린스턴, 펜실베이니아, 예일, 스탠포드, 듀크, 유씨엘에이, 엠아이티, 유씨버클리에 들어간 사례가 실제로 있었던 것은 아니다. 원장 선생은 해외 유명 대학으로 강의실 이름을 붙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18. 제우스 재수학원의 등원 시간은 08시, 하원 시간은 18시이다. 오전에 다섯 교시를 진행한 후 12시 30분에 점심시간, 이후 오후에 다시 다섯 교시를 진행한다. 또한 지원자를 대상으로 석식 후 23시까지 야간자율학습을 진행하고 있다. 즉 같은 학급에서 생활하는 수강생들은 하루에 열다섯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된다. 선생들은 일교시부터 십교시까지 담당한 반을 가르치고 6시에 퇴근한다. 야간학습의 감시를 위해 과목 별로 한 명의 선생씩 돌아가면서 남기는 하지만 대개는 짬밥이 안 되는 젊은 선생들의 몫이다.
19. 하루 열다섯 시간을 같은 방 안에 앉아 있다보니 별 일이 다 있다. 서로 눈이 맞는 경우도 허다하다. 눈에 보이는 게 따로 없으니까. 수상한 소문이 퍼지던 남학생과 여학생이 어느 날 갑자기 동시에 학원을 나오지 않으면 그건 일백 퍼센트 '사랑의 도피'다. 심지어 늦깎이 공부를 시작한 자식 둘 딸린 서른아홉 아저씨가 스물여덟 약대 지망생(어느 재수학원이나 이런 수강생이 꼭 있다)에게 반해 난리 법석을 피우는 일마저 생긴다. 다른 건 몰라도 그 아저씨 부인은 너무 불쌍하다. 뒤늦게 공부한다고 돈도 벌어오지 않는 남편 때문에 애들 둘을 혼자 키우며 어떻게든 생활비를 줄여보려고 아둥바둥하고 있을 텐데. 인간적으로 너무하다. 아저씨는 천벌이 두렵지도 않은 걸까? 애들 얼굴이 눈앞에 아른아른 거리지도 않는 걸까? 간혹 함께 사라졌던 남녀 한 쌍 중 한 명이 (열에 아홉은 남자 쪽이다) 슬며시 학원으로 다시 돌아오는 경우도 있다. 어찌된 영문인지, 얼마나 면상의 피복이 두꺼우면 그러고도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는 건지 모르겠다.
20. 재수학원이라는 곳도 오래 다니면 이력이 붙는다. 어쩌다가 재수를, 욕심이 나서 삼수를 하는 경우야 적지 않지만 학원을 바꿔가며 5년이고 6년이고 다니는 사람들마저 있다. 재수에도 '맛'이 들리는 것이다. 처음엔 가고 싶은 명문대 인기학과를 위해 치루는 대가라며 스스로를 위안하지만 마음에 굳은살이 배기면 별 어려움 없이 즐기게 된다. '이대로도 꽤 나쁘지 않아. 학원 와서 공부하고 저녁땐 도망가서 친구들이랑 놀러 다니고……. 집에서 빈둥빈둥거리는 것보다 훨씬 낫잖아." 이런 경향은 좀 사는 집 애들일수록, 굳이 흥미가 없는 대학에 부모의 강요로 들어가야 하는 애들일수록, 수능 응시 횟수가 많을수록, 병역 문제가 걸리지 않은 여학생일수록, 심해진다. 실제 그렇게 몇 년을 다니는 아이들을 꽤 보았다. 그들은 괴로워하지도 힘들어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그냥 지금처럼 사는 게 익숙할 뿐이야."
다시 한 번 20. 인간이란 꼭 대학을 가야만 완성되는 존재일까? 사방이 흰색 페인트로 칠해진 제우스 재수학원의 통자 복도 한가운데에 서면 누구나 철학자가 되고야 만다. 지글지글 끓는 머리를 식히러 옥상에 올라가면 근심 가득한 청춘들의 한숨 같은 담배 연기가 자욱하다. 그건 마치 뭉게구름처럼 떠서 제우스 재수학원의 하늘을 까맣게 뒤덮는다. 그래서 하늘이, 흐리다. 저 너머 길 건너 대성이나 고려나 종로나, 또 어떤 재수학원의 하늘도 마찬가지다. 가야 할 놈과 가지 말아야 할 놈과 가도 그만이고 안 가도 그만인 놈이 한 자리에 모두 모여 이렇게 머리 터지게 기도해야 하는 이유란 무엇인지는 며느리도 모른다.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이다. 저 아래 안락한 땅에서는 일선 교사만큼의 자질과 일선 교사 이상의 결단력을 가진 참 교육자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회식을 나선다. 네온사인이 찬란한 유흥의 거리로 들어간다. 금요일 저녁만 되면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아마도 내일 아침에는 삐뚤어진 코가 아직 제 자리로 돌아오지 못해 헤롱거리는 선생들이 들어와 자습을 시킬 테다. 토요일 아침 강의는 늘 그렇다. 해가 떨어지면서 네온 간판엔 서서히 불이 들어온다. 치직. 치직. 치지직. 제우스 재수학원. 자랑도 아니면서 마치 자랑거리인양 찬란하게 어둠 속에서 빛난다.
(2001년 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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