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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8. 열두살 정치인생

낙농콩단/Season 1-5 (2000-2005)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01. 1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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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 존경하는 학우 여러분! 옷깃을 여미게 하는 날카로운 바람도 어느덧 물러가고 이제는 따사로운 햇살이 옷깃을 스치는 봄이 다가왔습니다. 봄은 언제나 새 봄입니다. 그리고 새 봄은 언제나 새 학기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3월 새 학기의 시작은 우리가 새로운 학년으로 진급하여 새로운 반으로 편성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습니다. 편성이 달라졌습니다. 판이 갈렸습니다. 판이 갈리면 으레 새로운 일꾼도 필요하게 됩니다. 옛말에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 했습니다. 바야흐로 새 천년이 시작되는 2000년, 새 천년 새 학기가 시작되는 2000년 3월! 목전에 다가온 전교 어린이 회장 선거의 의의는 과연 크다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번 선거에 우리 광룡 초등학교의 운명이 걸려있다 생각하기에, 또한 여러분의 큰 일꾼으로 한 몸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기에, 과감히 전교 어린이 회장에 출마하게 된 6학년 3반 김덕출입니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여러분, 광룡 초등학교의 유래를 아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광룡 초등학교가 그저 누가 “학교를 세우겠다," 그래서  "그럼 세워라," 그리고 "예 알겠다," 뭐 이런 식으로 덜컹 만들어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대단히 잘못 알고들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광룡인으로 진정 마음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대대로 내려오는 우리 학교의 전설을 아십니까? 초대 이사장님이 일곱마리의 용이 손에 손을 잡고 스카이다이빙을 하는 꿈을 계시로 삼아 결연한 의지로 첫 삽을 파올렸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물론 학교를 만들기 직전에 골프장 인허가 취소 통보를 받은 건 사실입니다. “골프장이 안된다면 차라리 사학이나 꾸려보자”라는 말씀을 하신 것도 (잘은 모르겠지만) 사실은 듯 합니다. 하지만 그 자리에 무도장이나 고고장을 만들 수도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 장발장이나 사라장을 만들 수도 있었습니다 (농담입니다). 하지만 그 대신 장차 국가의 미래 동량이 될 인재들을 키워낼 교육의 터전을 세우셨습니다. 용광로마냥 펄펄 끓는 그 뜨거운 애국심을 어찌 우리가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광룡이라는 이름. 그 이름은 또 어떻습니까. 미쳐버린 용입니다. 미쳐버린 용. 매드 드래곤. 이름만큼은 주변의 어느 학교보다 위력적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광룡인인 것입니다. 매드 드래곤 피플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금은 어떻습니까? 지금 우리 학교의 위상이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습니다. 모든 상황이 좋지만은 않습니다.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고학년 학우들이라면 대강 아실겁니다. 몇 년 전, 우리 광룡의 초대 이사장님이 교육부의 혹독한 비리 감사를 받으시던 도중 심근경색으로 작고하신 이후 우리 광룡의 위상이 크게 위협받고 있습니다. 이사장님이 안 계시니 그 크고 높았던 뜻을 우리 학생들이라도 이어받아 실현하였어야 합니다. 우리 광룡의 명운이 걸린 그 중차대한 길목에서 누가 등장했습니까? 여러분! 예, 그렇지요. 33대 어린이회장 곽삼출입니다. 유약하고 무능하기 그지 없는 33대 어린이회장 곽삼출이가! 바로 우리 광룡을 망쳐 놓은 것입니다. 곽삼출이가 무슨 짓을 했습니까? 기억력이 좋지 않을 학우들을 위해 손으로 꼽아봅시다. 첫째, 우열반이 평등의 원칙에 위배된다고 폐지하였습니다. 둘째, 방과 후 나머지 수업이 학생 휴식권을 침해한다고 폐지하였습니다. 셋째, 민의의 통로라나 뭐라나 멍멍이 소리를 하며 36개의 건의함을 신설하며 학생회 운영 자금을 탕진하였습니다. (그 사소한 건의 내용을 해결하느라 들어간 인력과 비용과 에너지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넷째, 교내 폭력 서클인 백원만파를 해체하는데 온 힘을 쏟느라 다른 일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이 인근의 다른 초등학교들은 어땠습니까? 오로지 앞을 향해 매섭게 달려갔습니다. 그 사이 우리 광룡만 처참하게 뒤쳐져 버린 것입니다. 지금 주변을 둘러 보십시오. 인근 유치원 학부형들이 우리 광룡의 진학률을 문제삼고 있습니다. 자녀들을 우리 광룡에는 보내지 않겠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정말 문제 아닙니까, 여러분! 


  방법은 없습니다. 여러분. 평등 좋죠. 인권도 좋죠. 정의도 좋습니다. 하지만 진학률 없는 평등의 실현은 무의미합니다. 단언하는데 진학률 없는 인권의 실현도 무의미합니다. 진학률 없는 정의의 실현도 역시 무의미합니다. 그래서 저 김덕출이가 여기 이 자리에 여러분의 일꾼이 되겠다고 나왔습니다. 김덕출이가 누굽니까.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날품을 팔아가면서 아홉살이 되던 해 극적으로 광룡 초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리고 광룡을 사랑하는 마음에 매년 반장선거에 출마했고 지금까지 여섯 번 모두 반장을 했습니다. 특히 5학년 9반의 반장을 역임하던 작년에는 곽삼출이 킬러로 통했습니다. 실세인 그의 눈치를 보느라 아무도 나서서 그를 막지 않을 때, 저는 단기필마로 당당히 뛰어나가 곽삼출이를 제지했습니다. 그래서 우열반과 나머지 수업은 사라졌음에도 백만원파는 아직 활개를 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광룡이 완전히 무너지지 않은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박수한번 쳐주십쇼! 


  그런데 말입니다. 여러분! 


  저 김덕출이가 귀염둥이반에서 개구장이반으로 반을 옮긴 전적이 있다는 사실을 들어 중상과 모략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김덕출이가 철새라고도 말합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정말 그렇게 쉽게 귀염둥이반으로, 아니 개구장이반으로 옮길 수 있었겠습니까? 아닙니다. 쉬운 결정이 아니었습니다. 눈물로 지새운 밤이 있었습니다. 베갯잇을 적셔가면서! 우리 광룡의 미래를 생각했습니다. 4년동안 몸 담았던 귀염둥이반에 대한 의리나 명분 대신에 명문 광룡을 택한 것입니다. 여러분, 작년 5월 개구쟁이반의 우두머리자, 광룡 학생회의 전설이며, 전 광룡 학생회장을 역임하신 조유팔 선배님께서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때 저는 귀염둥이반의 서열 38위에 불과했습니다. 애송이에 불과한 저를 두고 조유팔 선배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덕출아, 네가 필요하다. 


  덕출아, 네가 필요하다. 그 한 마디의 말은 끊임없이 귓가를 맴돌았습니다. 그 간곡한 말씀을 저는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고뇌에 고뇌를 거듭한 끝에, 다음 날 새벽 첫 차를 타고 달려갔습니다. 조유팔 선배님의 자택 앞에 돗자리를 펴고, 손도끼를 옆에 놓은 다음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이 우둔한 아우를 용서해 주십시오, 이 우둔한 아우를 용서해 주십시오.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계속해서 머리를 땅에 찧었습니다. 이마가 피로 범벅이 되었지만, 조금도 아픈 줄을 몰랐습니다. 오히려 시원했습니다. 드디어 이 한 몸을 광룡을 위해 제대로 굴려 볼 수가 있겠구나 하는 뿌듯함이 밀려왔기 때문입니다. 좋습니다, 여러분. 저 김덕출이가 철새라고 생각하시면 그리 생각하십시오. 돌을 던지고 싶으시다면, 돌을 던지십시오. 하지만 저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죽을 고비를 숱하게 넘겨서 지금 이 자리에 온 저입니다. 저는 반드시 개구쟁이반의 대표이자, 제 32대 어린이 회장을 역임하신 조유팔 선배님의 정치적 적자로서 광룡 어린이회장에 출마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저의 뜻이고, 조유팔 선배님의 뜻이며, 광룡인 모두의 뜻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또, 여러분! 


  저 김덕출이가 3학년 7반 반장으로 재임하던 당시에 학생회비를 떼어 먹었다는 근거없는 소문도 돌고 있습니다. 제 모가지와 김덕출이, 이 이름 석자를 걸고 말씀드리는데 결단코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차세대 실내화 주머니를 단체로 구입한 이른바 '스레빠 사업'에 대해서 한 말씀 드리자면, 사정이 좀 깁니다. 제가 너무 억울하고 분통해서 오늘 이 자리에서 여러분들께 한 말씀, 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광룡 학생회를 만장일치로 통과한 실내화 주머니 단체 구입건을 맡아서 진행한 장본인이 바로 이 여기 서 있는 김덕출이올시다. 그때 실내화 주머니가 개당 이천 칠백원, 우리는 비용을 일괄적으로 걷었다가 남으면 돌려주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아시다시피 단체로 구입하면, 그 뭐다냐, 조금 쌉니다. 원래 시장에서 물건을 사도 한꺼번에 많이 사면 좀 빼주고 그럽디다. 그게 다 사람 사는 정이고, 세상 돌아가는 이치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실내화주머니도 한꺼번에 삼천개를 구입하니 어땠겄어요. 조금 돈을 빼주었겠지요. 뭐, 돈 계산은 아랫사람들이 해서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가만있어봐. 이봐 주실장 그게 얼마였다고? 아, 그래 이천 삼백 삼십원!) 개당 이천 삼백 삼십원에 구입하게 된 거였습니다. 이천 칠백원씩 받았는데 이천 삼백 삼십원씩 주고 샀으니, 일인당 삼백 칠십원씩을 돌려줘야 맞겠습니다. 뭐, 원칙적으로는 그렇다는 얘깁니다. 


  아, 그런데 그건 어디까지나 산술적이 계산일 뿐이고. 여러분들이 실상을 아시면, 절대 이 김덕출이에게 뭐라고 못 하실 것입니다. 저기 저 몇몇 분들은 웃으시는데, 정말입니다. 지금 남의 험담하기 좋아하는 몇몇 사람들이 저를 궁지에 몰아넣으려고 함정을 판 겁니다. 그 작자들도 이걸 다 알아요. 절대 떼어 먹은게 아니라는걸. 뿐만 아니라 그 중에는 그때 같이 있었던 사람도 있어요. 그런데 어찌해서 지금 그런 소리가 나올 수가 있는지 저는 정말로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광룡의 이름으로 청문회를 한다면, 오케이, 기꺼이 나가겠습니다. 나가서 광룡 초등학교의 교칙이 아직 지엄하고, 정의가 살아있다는 증거를 제가 몸소 보여주겠습니다. 최근 몸이 조금 좋지 않아서 걸어서 출두할 수 있을지 휠체어를 타고 나가야할지는 모르지만 나가긴 나가겠습니다. 참말입니다. 털어서 먼지 하나 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만은, 이 김덕출이는 털어서 먼지 하나 나지 않을 것임을 자신합니다. 그만큼 자신있다는 뜻입니다. 제 열두살 인생을 모두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이 김덕출이 이렇게 껄렁껄렁하게만 보여도, 여자는 안 울리고, 거짓말은 안 합니다. 이 두 가지만은 하늘이 무너져도 확실히 지킨다는 것 아닙니까. 멋지지 않습니까? 찐하게 박수 한 번 쳐주이소! 


  죄송합니다. 흥분하면 지가, 고향이 고향인지라, 사투리가 좀 튀어 나옵니다. 뭐 너무 고깝게 보시지 마시고. 이것도 다 이 김덕출이의 인간적인 모습이겠거니 생각해 주십시오. 


  그럼 다시 진정하고. (단상 위의 물을 들이킨다) 우리는 광룡 초등학교를 위해서 열심히 일할 사람을 어린이 회장으로 뽑아야 합니다. 거만하거나 뽐내지도 않고 항상 겸손한 자세로 여러분들의 심부름을 할 수 있는 사람을 어린이 회장으로 뽑아야만 합니다. 그게 누구겠습니까? 이 기호 3번 김덕출이가 아니겠습니까? 한때 불순한 세력들이 20명이 넘는 용역깡패를 고용해서라도 죽이고 싶어했던 이 김덕출이가 아니겠습니까? (그게 무슨 얘기입니까! 얼마나 이 김덕출이가 놈들에게 눈엣가시였다는 뜻이 아닙니까!) 그만큼 현재 광룡 전교 어린이회의 지도부는 썩었습니다. 그 후계를 자처하는 이들도 마찬가집니다. 경쟁자들의 험담을 하지는 않겠습니다. 팩트만 말하겠습니다. 모 후보는 급식비를 6개월 연체했습니다. 모 후보는 아무 이유없이 내내 주번을 면제받고 살았습니다. 모 후보는 과거에 불량학생들과 어울려 입에 아폴로를 물고 콜라텍을 휘젓고 다니던 사람입니다. 빨갱이물이 찐하게 들어 있는 모 후보는 사상이 불순합니다. 모 후보는 2004년 9월 당시 광룡 어린이방송에 출연해서 광룡의 근간이 되는 자유학습경제를 부정했던 사람입니다. 모 후보는 작년 러닝 메이트로 뛰었던 부학생회장 후보와 성적(性的) 스캔들이 있었습니다. 모 후보는 제작년 담임 선생님과 성적(成績) 스캔들이 있었습니다. 세상에 마상에! 도대체 이래도 되는 겁니까? 이런 사람들에게 도대체 어떻게 광룡의 미래를 맡길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들의 선거만큼은 어른들의 잘못된 선거를 닮아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금품이나 향락을 주고 받아서도 안되고, 폭력이 동원되어서도 안됩니다. 깨끗하고 공정한 선거, 어떻습니까? 제 말이 맞습니까? 틀립니까?


  싸랑하는 학우 여러분! 

  기호 3번, 이 김덕출이에게 귀중한 한 표를 던져 주십시오. 제가 전교 어린이 회장에 당선이 되면 저는 먼저 광룡의 뼈대를 세우겠습니다. 규율이 잡힌 학교, 어린이회 직속의 '광룡 개구쟁이 정책 문제 연구소'와 엄격히 선발한 용사들로 이루어진 특수 단체 '애국 청년 해우단'을 운영하여 반동분자들을 제압하겠습니다. 우열반과 주번 연동제를 부활시켜 경쟁력있는 학교로 발전시켜 나가겠습니다. 방과후 나머지 수업 죽을 때까지 해서라도 좋은 중학교 많이 보내는 명문 광룡 이름 한 번 들어봅시다. 이 동네 유치원 학부형들이 우리 학교에 얼라들 보내고 싶어서 몸이 달게 한 번 만들어봅시다. 백날 쓰잘떼기 없는 건의함 36개는 다 철거해버립시다. 그 대신 여러분이 원하시는대로 체육시간을 늘리고, 첨단 휘트니스 시설이 겸비된 트레이닝 센터를 세워 건강한 광룡인을 양성하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광룡을 사랑이 넘치는 학교, 오고 싶은 학교, 졸업하기 싫은 학교로 만드는데 노력하겠습니다. 


  빛나는 광룡의 미래, 찬란한 관룡의 미래, 저는 실내화가 걸레가 되도록 열심히 뛸 것입니다. 여러분의 소중한 한 표, 이 김덕출이에게 던져 주십시오.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그리고 부지런히 노력하겠습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기호 3번, 6학년 3반 김덕출이었습니다.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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