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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7. 로즈빌라에서 생긴 일

낙농콩단/Season 1-5 (2000-2005)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01. 10.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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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스북 주소는 알아도 집 주소는 몰라요.
위스퍼 주소는 알아도 치트챗 주소는 모르는데 
그건 그 사람이 치트챗를 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포스트 잇 가득 누구의 것도 아닌 그 사람 주소이지만
정작 그 사람이 어디 사는지를 몰라요.
- 작자 미상 -


  내가 로즈빌라로 이사하게된 것은 지난 2000년 봄. 예상치 못한 순간에 예상치 못한 이유로 벌어진 일이었다.

  당시 나는 이스트 빌리지 가든에 살고 있었는데 (뉴욕 맨하튼의 이스트 빌리지가 아니다. 그냥 그런 이름을 가진 어느 소도시 동쪽 지역 아파트먼트 중 하나다.) 갑자기 집세를 올리겠다는 통보를 받았다. 덧붙여 감당하지 못할 입주민은 모월 모일 모시까지 방을 빼라는 메세지도 함께 도착했다. 세계를 긴장하게 만들었던 Y2K 사태에 대한 우려가 겨우 사라져가는 무렵의 일이다. 북적이는 낯선 도시의 한복판에서 지갑을 통째로 잃어버린 기분으로 나는 한동안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되려 현실적인 기분이 들었다면 그럴 법한 설명이 될까? 집세야 매년 오르기 마련이지만 그래봐야 2퍼센트에서 3퍼센트다. (내가 겪은 가장 심한 경우라고 해봐야 5퍼센트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19퍼센트다. 예를 들어 월세 1,000 달러에 했던 계약이라고 가정하면 다음 달부턴 매달 1,190 달러를 내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쯤되면 관계 법령에 저촉되는 수준이 아니냐며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뭐, 결과적으로 아무런 힘을 쓰지 못했다.

  통보는 계약이 만료되는 모든 세대에 전달되었다. 집주인들과 부동산 매니져들과 관리 사무소가 서로 입을 맞춘 건지 어쨌는지 자세히는 모르겠다. 나는 인상된 집세를 감당할 돈이 없었다. 내 경우 (기존 월세가 1,150 달러였으므로) 한 달에 218.5 달러를 더 마련해야 했다. 다시 말해서 일년으로 치면 2,622 달러가 주거비로 더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내 한 달 급여에 맞먹는 금액이다.) 갑자기 19퍼센트나 올리면 당최 감당할 수가 있나. 자그마치 19퍼센트나. 한숨 섞어 올려다 본 하늘은 마른버짐처럼 비적거렸다.

  데드 라인을 일주일 앞두고 비슷한 처지의 이웃들과 함께 인근 브리또 푸드 트럭 앞에 모였다. 그 중에는 지난 12개월 동안 친하게 지내오던 사람도 있었고 서로 거의 왕래를 하지 않고 살던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공통점이 있었다. 이스트 빌리지 가든을 떠나야 한다는 것. 나름 마지막 만찬. 살이 조밀하게 들어찬 마히마히 (Mahi-mahi, 만새기) 살코기가 백열등 불빛에 번들거렸고 깨끗이 닦이지 않은 레드 컵에는 할라피뇨 조각이 붙어있었다. 토틸라보다도 큰 할라피뇨였다. 굉장히 큰 할리피뇨여서 푸드 트럭을 통째로 그 안에 넣을 수도 있을 것처럼 보였다. 바람이 불지 않음에도 위태롭게 흔들리는 그 곳에서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중에는 이미 이사갈 곳을 정한 사람도 있었고 여전히 감도 잡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중요하기는 하지만 어떤 방법으로도 속 시원히 해갈될 수는 없을 가을 가뭄같은 대화였다. 마른 땅은 거북이 등처럼 갈라졌고 입김같은 열기가 스믈스믈 피어올랐다. 모두가 피난처를 찾고 싶어하면서도 그게 어디있는지 몰랐다. 

  그러다가 로즈빌라 이야기가 나왔다. 누가 먼저 그 이야기를 꺼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어쩌면 바람이 실어다 준 소문인지도 모르겠다. 언덕 두 개 넘어 동쪽에 위치한 신축 독신 빌라. 이스트 빌리지보다 더 동쪽으로? 그러면 이름이 이스트-이스트 빌리지? 파 파 이스트 빌리지? 아니었다. ‘로즈빌라’가 그곳의 이름이었다.나는 반신반의했다. 사실 모두가 반신반의했다. 지금보다 평수가 작은 스튜디오. 관리비를 포함하여 월 1,050 달러의 집세. 모든 세대가 동일 면적에 동일 집세를 지불한다는 이야기. 하지만 정말 믿기 어려웠던 것은 향후 5년 동안 집세를 올리지 않겠다는 약속이었다. 마치 이스트 빌리지 가든에서 밀려난 나 같은 사람들 들으라고 하는 이야기 같았다. 믿을 수 있을까? 일단 그런 내용이 계약서에 명기되어 있었다.

  정말? 그럴리가? 물음표를 던지면서도 트럭과 트레일러는 끝없이 동쪽으로 빠져나갔다. '출근은 옛집에서 퇴근은 새집으로'라는 모토를 차량 옆면에 붙이고 찾아온 이사짓 센터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들은 이스트 빌리지 가든에서 살던 방 그대로 로즈빌라로 옮겨주겠다는 내용의 전단지를 뿌렸다. 향간에는 로즈빌라에서 고용한 자들이라는 소문도 돌았지만 정확히 밝혀진 바는 없었다. 며칠 후 나도 그들의 뒤를 따라 로즈빌라로 이사를 시작했다. 나는 이삿짐 센터를 따로 고용하지 않았다. 그냥 직접 옮겨가기로 했다. 시간 당 몇 달러에 빌릴 수 있는 유홀(U-Haul) 트럭을 렌트하여 직접 짐을 싸고 옮기고 풀기로 했다.

  로즈빌라의 첫인상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새로 만들어 진 단지 답게 깔끔하고 아담했다. 특히 무엇보다 진입로 양쪽에 사열해 있는 포플러 나무가 마음에 들었다. 바람이 불때마다 그들은 좌로 우로 천천히 손짓하는 듯 움직였다. 그럴때면 주객이 전도된 비정한 논리에 쫓기듯 이사하는 과정에서 생겼던 울분의 감정들이 하나둘 녹아내리는 듯 했다. 마른 버짐 같던 하늘도 어느 새 청명한 가을 향기 속에 녹아 들었다. 새로운 시작. 새로운 마음가짐. 새로운 미래. 그런 생각을 했다. 

*


  나는 차츰 로즈빌라에 이상한 점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먼저 로즈빌라에는 동호수의 개념이 없었다. (아니! 설마 없기야 하겠나. 관리사무소 사람들은 알고 있겠지만 굳이 입주자들은 알 필요가 없었다는 편이 훨씬 더 정확한 설명일 것이다.) 그저 본관에서 엘레베이터를 타고 영문과 숫자의 조합으로 된 자신의 주소와 영문 대소문자와 숫자와 특수문자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비밀번호를 입력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면 엘레베이터는 저절로 집 앞에 도착했다. 신기한 일이었고 편리한 일이었으나 한편으로 알 수 없는 것이 많았다. 내가 본 로즈빌라의 모습이란 진입로의 포플러. 나무와 로즈 넝쿨에 휩싸인 거대한 본관 건물이 전부였다. 도대체 전체 크기가 얼마 정도인지, 어떤 구조로 만들어져 있는지, 구체적으로 내가 사는 곳의 위치가 어디쯤인지, 내 위층에는 아래층에는 누가 살고 있는지, 그 어느 것도 알 수가 없었다. 창밖을 내다보면 잘 가꾸어진 정원이 내다보였다. 높은 층인 것도 같았다. 15층에서 어쩌면 20층 정도? (응? 이름은 빌라인데?) 나는 평생 그렇게 높은 건물에 살아본 적이 없었다. 그런 건물은 대도시에 갔을 때 외에는 볼 수 없었다. 밖에서 본 로즈 빌라도 전혀 고층 건물처럼 보이지 않아 혼란스러웠다. 도대체 어떤 구조로 지어진 건물인가? 엘레베이터를 타는 순간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기라도 한단 말인가?

  더 이상한 일은 이사 일주일째 되던 날 일어났다. 한밤 중 가만히 일어나 창 밖을 내다보았는데 아무 것도 없었다. 까만색 크레파스로 아주 꼼꼼하게 칠해놓은 도화지를 마주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착각이 아니었다. 아침이 되어도 창 밖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멍한 기분이 들었다. 관리 사무소에 전화를 해야하나? 그런데 뭐라고 설명을 한단 말인가? (우리집 창 밖으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서 문의드립니다?) 내 스스로 생각해도 정말 바보같은 설명이었다. 나는 망설이다가 포기하고 출근을 했다. 다녀오면 거짓말처럼 다시 창 밖 풍경이 돌아와 있을 거라고 기대를 하면서. 그러나 최근 후 다시 돌아왔을 때에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창 밖으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까만 도화지. 무한하면서도 유한한 어둠. 

  본관의 관리사무소로 향했다. 전화보다는 직접 가서 설명하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무실은 비어 있었고 포니 테일로 머리를 묶은 금발 소녀가 혼자 남아 컴퓨터로 열심히 솔리테어를 하고 있었다. 나이는 열다섯에서 열일곱 살정도. 어설프게 연한색의 립스틱을 칠한 표가 났다. 게임에 열중하느라 누가 있는지도 모르는 눈치였다. 내가 쭈빗거리며 앞을 서성거리자 소녀는 고개를 빼꼼 내밀고 내게 말을 걸었다.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그게… 정말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저희 집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어요.
  그 시점에서는 그렇게 설명할 수 밖에 없었다. 소녀가 대꾸했다.
혹시 주소와 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아니요. 그건 아니에요.  
그러면요? 집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단 말씀이 무슨 뜻이시죠?
그게… 창 밖으로 아무 것도 보이지가 않아서… 

  그러자 소녀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이. 그리고는 마우스를 따닥거리며 뭔가 작업을 하더니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오세요. 저를 따라오시면 되요. 
  소녀를 따라 엘레베이터에 올랐다. 마스터 키 같은 것을 꽂고 복잡한 버튼 몇 개를 눌러 주소를 완성하자 엘레베이터가 아래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문이 열렸을 때는 아케이드가 펼쳐졌다. (우리 빌라의 지하에 이런 곳이 있었다고?) 일렬로 늘어산 상점들의 빨갛고 노란 전등이 어지럽게 반짝이는. 마치 동화의 나라에라도 온 듯한 그런 기분이었다. 포니 테일이 타박하듯 말했다.
여기서 사시면 됩니다.
뭘요?
  그녀는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는 크게.
- 창 밖 풍경이요.
  그 단정적인 말은 사각으로 잘려진 두부의 절단면처럼 깔끔하고 하얀 느낌을 주었다. 그래서 나는 내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뭐라고요?
창 밖 풍경이요. 창 밖 풍경. 방금 저한테 물어보셨잖아요!

*


  어렸을 적 내 꿈은 화가였다. 그림이 좋아 화가가 되어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나고 싶었다. (결국은 이탈리아는 커녕 리틀 이탈리아에도 못 가보았지만.) 왜 하필 이탈리아였을까? 구체적인 목표가 있었던 걸까? 아니면 유럽에 대한 막연한 환상과 동경이었을까? 아직도 잘 모르겠다. 

  지금 내 앞에는 이탈리아의 풍경이 펼쳐져 있다. 

  베니스의 운하다. 왼편과 오른편으로 자리잡은 수상 건축물과 하늘을 날아다니는 갈매기, 그리고 수상 버스와 곤돌라. 여기는 베니스다. 나는 내 집 거실에서 창 밖을 내다보고 있다. 거기에 베니스가 있다. 베니스에도 유명한 예술학교가 있나? 내가 꿈꾸었던 이탈리아가 어쩌면 베니스였을 수도 있었을까? 그건 잘 모르겠다. 나는 항상 유학을 꿈꾸었지만 사실 그 소망의 단계를 넘어설 용기를 단 한 번도 가지지 못했다. 

  조금 전 아케이드의 상점에서 나는 신용카드로 베니스를 샀다. 정확히는 베니스의 풍경을 샀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내가 구입한 상품의 정확한 이름은 ‘베니스에서의 하루’다. (한 달에 800 조가비. 조가비가 뭐냐면 로즈빌라의 아케이드에서 사용하는 화폐 단위다. 1 조가비는 1.2 센트다. 그러니까 800 조가비는 9.6 달러다. 이 골치아픈 환전 시스템을 왜 만들었는지 나도 의아하다.) 어쨌든 그렇게 베니스를 샀다. 비록 화가가 되어 정말 유학을 떠나지는 못했지만 이제 이탈리아에 사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질 수는 있게 되었다.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커튼만 걷어내면 언제나 이탈리아의 베니스가 그 자리에 있다. ‘베니스에서의 하루’는 한 달에 800 조가비 짜리 상품이므로 한 달이 지나면 창 밖에서 사라질 거라고 점원은 설명했다. 굳이 강조하자면 다시 까만색 크레파스로 채워진 깜깜한 벽으로 돌아갈 거란 뜻이다. 무한하면서도 유한한 어둠. 그것을 막으려면 추가 결제로 기간을 연장하면 된다고 했다. 같은 풍경이 지겹다면 다시 상점에 방문에 다른 풍경을 구입하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피렌체의 두오모나 시스테인 대성당을 떠올렸다. (피렌체 근처에는 아주 유명한 예술학교도 있다.) 그렇게 묘한 설레임이 시작되었다. 어떤 꿈이라도 꿀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처럼. 

*

  그리고 얼마 후 그 사건이 일어났다. 아케이드의 환전소에서 2,000 조가비를 바꾸고 가구점에서 100 조가비 짜리 화병을 사오는 길에 (그렇다. 로즈빌라에서 꾸며야 할 것은 창 밖 풍경만이 아니었다. 벽지, 가구, 액자, 앨범, 각종 집기류, 심지어 배경음악까지!) 나는 익숙한 뒷모습의 여성이 엘레베이터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목격했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확실했다. 나는 서둘러 뛰어가 엘레베이터를 잡으려고 했지만 아슬아슬하게 놓치고 말았다.  아! 어디로 갔을까? 그럼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녀는 자기만의 주소와 비밀번호를 입력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엘레베이터는 그녀의 집 앞에서 열렸을 것이다. 이 엘레베이터가 어디로 갔을지 나는 알 수가 없었고 알 길도 없었다. 육중한 엘레베이터 앞에 서서 나는 그녀의 이름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바늘귀에 실을 꿰 듯 그녀의 이름을 떠올리는 것은 쉽지 않았다. 

클레어.

  하루 종일 묵직하게 달라붙어 있던 그 의문은 저녁 설겆이를 마치고 쇼파로 돌아와 앉는 순간에 거짓말처럼 풀렸다. 뻥하는 소리와 함께. 차갑고 시원한 물이 마음 속으로 쏟아져 들어가는 듯 했다. 클레어. 그녀와는 5년 전에 헤어졌다. (잠깐! 정정하자. 헤어진 것이 아니다.) 그녀는 5년전에 사라졌다. 바람처럼 연기처럼. 어느 순간 그녀에게로 향하던 모든 길이 사라졌다. 원래 없었던 것처럼. 없는 주소. 없는 전화번호. 없는 동창. 없는 지인. 없는 직장… 그렇게 그녀는 없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다시 관리사무소로 향했다. 포니 테일 금발 소녀는 ‘또 너야?’라는 표정을 지어보았다. 마우스를 던지듯이 밀어놓고 사무용 의자를 발로 밀며 끌어 내게 다가왔다. 
또 왜요? 창 밖이 또 안 보여요? 그럼 이번엔 안과를 가셔야 할 듯 싶은데….
그게 아니고….
신용 카드가 막혔어요? 결제 승인 취소?
그게 아니고… 입주민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해서요.
입주민이요? 왜요? 
아는 사람을 본 것 같아요. 여기 주민인 것 같아요.
본 것 같은 거예요? 확실히 본 거예요?

 나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포니 테일은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으로 안경을 꺼내 쓰고 내게 다시 물었다.
어떻게 아는 사이에요?
그런 것까지 밝혀야 하나요?
어떻게 아는 사이냐고요.
예전에 만나던 사이라고 해두죠.
  포니 테일은 까만 뿔테 안경 너머로 힐끔 나를 올려다보고 히죽 웃었다. 짖궂게.
좋아요. 그럼 이름은 알겠죠?
클레어.
성은?
몰라요.

  포니 테일은 키보드 타이핑을 멈추었다.
예전에 만나던 사이인데 성도 모른다고요?
음… 그게.
얼마나 오래 만났는데요? 하룻밤?
  정말 요즘 애들은 당해낼 수가 없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3년이요. 3년을 만났다고요. 그 사람이 성을 말해준 적이 없어요. 정말 이상하게 들리는 건 아는데….
예, 굉장히 이상하게 들려요. 아신다니 다행이네요. 
B. 성이 B로 시작하는 건 알아요. 그러니까 클레이 B.
뭐야? 클레어 B.라고요? 무슨 고객 서비스 센터 같은 곳에서 만났나요? 아저씨가 고객이고 그 여자분이 상담사? 어쩌면 여기가 아니라 저 멀리 인도 같은 곳에서 찾으셔야 할지도 몰라요. 아니면 말레이시아나.
아니에요. 그냥 일종의 게임 같은 거였어요. 서로에게 신비감을 주는.
오케이, 짐작이 가요. 아주 지저분하게들 노셨군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니까.

  벌써부터 진이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 사무실엔 이 여자애 하나 밖에 없는 건가?
이런 부탁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가요?
말도 마세요. 사람 찾아주느라 외팔이 도배장이보다도 바쁘답니다. 뭐, 잘 이해는 안가는데 가끔은 알 것도 같고… 어쩌면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찾아야 할 사람도 보고 싶은 사람도 많아진다는 뜻인가보죠.
  자기가 한 말이 쑥스러웠던지 포니 테일은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 말을 이어갔다. 
어디보자. 로즈빌라에 클레어 B.에 해당하는 이름을 가진 입주민이 1,637명이에요. 전부 다 당연히 여성이라는데 제 오른손을 걸죠.
  1,637명? 한 공동 주택에 클레어라는 이름과 B로 시작하는 성을 가진 사람이 1,600명이 넘는다고? 클레어라는 이름만 1,600명이 넘어도 말이 안될 판에? 그렇다면 이 빌라가 도대체 얼마나 크다는 이야기야? 여기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이야기여? 사무실의 쪽창으로 나는 밖을 다시 내다 보았다. 어지럽게 팔을 뻗어올린 로즈넝쿨이 본관 건물을 집어 삼킬듯 감아 올리고 있었다. 
혹시 클레어 B.의 출생년도는 아세요?
그럼요. 1975년도요.
  포니 테일은 안경테 끝을 씹으면서 다시 모니터 화면에 얼굴을 들이 밀었다.
29명. 29명으로 좁혔어요.
그래도 너무 많군요. 한 공동 주택에 1975년생 클레어 B.만 29명이라니.
보채지 말고 가만 좀 있어봐요. 카우보이 아저씨. 클레어 B.가 태어난 주는 어딘가요?
  나는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깜깜한 도화지 같던 기억 창고에 전구가 반짝 들어왔다.
네브레스카. 그런 이야기를 언뜻 한 적이 있어요.
  포니 테일이 자리에서 일어나 만세를 부르듯 두 팔을 번쩍 들어올렸다.
- 이제 4명! 고맙긴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


  참 악필 중의 악필이다. 포니 테일이 아무렇게나 휘갈겨 쓴 메모지 한 장이 내 손에 있다. 네 개의 주소가 이위에 적혀있다. 이 중의 하나가 클레어 B.의 집일 것이었다. 아니, 나머지 셋도 물론 클레어 B.의 집이겠으나 내가 찾는 클레어 B.의 집은 아닐 것이었다. 나는 여전히 1975년에 네브래스카에서 태언난 클레어 B.가 한 공동 주택에 네 사람이나 살고 있을 확률에 의구심을 갖고 있었다. 

  포니 테일은 자기 권한으로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했다고 말했다. 이 이상은 사생활 침해라고도 했다. 이제 내가 직접 가서 그 사람을 만나보는 방법 밖에 없을 거라고 했다.

  엘레베이터에 올라타서 첫번째 주소를 입력했다. ‘Elegance75’. 내가 아는 클레어가 지어내었을 법한 주소는 아니었다. 그래도 모르는 일이다. 세상은 정말 빠르게 변하고 있고 그에 맞춰 사람들도 정말 빠르게 적응하고 있으니. 어제 내가 알았던 사람이 내일은 모르는 사람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녀가 사라진지 벌써 5년이다. 현재의 그녀를 내가 잘 아는 사람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위험한 일일지도 몰랐다.

  로즈빌라의 엘레베이터는 한 번에 한 명 씩만 탈 수 있도록 고안되어 있었다. 그리고 입력된 단 하나의 주소를 향해서만 움직였다. 운이 좋다면 곧바로 내가 아는 클레어를 찾을 수 있겠지만, 운이 나쁘다면 생판 모르는 사람의 집에 세 번이나 불쑥 들어가게 될런지도 모른단 뜻이었다. (결국 무단 주거침입이 아닌가!) 이제껏 나는 단 한번도 우리 집을 제외한 다른 곳에 가 본 일이 없었기 때문에 바싹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로즈빌라에 사는 몇몇 사람들 주소를 알기는 하지만 한번도 진짜 찾아가 본 일은 없었다. 

  ‘Elegance75’라는 클레어를 우아하다고 표현하기는 어려운 것으로 밝혀졌다. 양쪽으로 갈래머리를 따고 멜방바지를 입고 있었으니까 (말괄량이 삐삐처럼!) 아무래도 우아하다고는 할 수 없을 터였다. 물론 사람마다 우아함의 기준이 제각기 다르기에 갈래머리에 멜빵바지 차림의 여성을 우아하노라 정의내릴 수 있는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내게는 조금 어려운 일이었다. 그녀는 양치질 중이었는데 내가 저벅저벅 걸어들어가자 칫솔을 입에 물고 외쳤다. 
으어으어.
  나중에 생각해보니 ‘누구세요’라는 뜻이었던 것 같다. 우선 그녀는 내가 찼던 클레어 B.가 아니었고 양치질 중이었으므로 나는 급히 되돌아 나왔다. 그녀는 내 뒷통수에 대고 ‘으어어어어’라는 말을 남겼는데 나중에 생각해봐도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무단 주거침입으로 신고하겠어요? 아니면 지금 양치질 중이니 나중에 다시 찾아와 주시겠어요? 생각해보면 사실 이런 점도 로즈빌라의 문제다. 각 유닛에 현관문이 없고 초인종이 없다. 엘레베이터가 도착해서 열리면 바로 남의 집 거실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너무 위험하다. 조금은 무섭다.

  물론 그렇다고 무작위적으로 아무나 드나들 수는 없기는 하다. 어떤 이들은 로즈빌라를 하나의 나무에 비유한다. 그러면 각자의 집(유닛)은 가지의 마지막 끝부분이기 때문에 어느 한 곳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줄기와 줄기를 거쳐야 한다. 따라서 (지금처럼) 정확한 주소를 알고 방문하는 것이 아니면 특정인의 집을 찾을 방법이 없다는 설명이다.

  그래도 불안하다면 다른 사람이 들어올 수 있는 영역을 표시하는 방법도 있다. 지하 아케이드 상점에서 1,000 조가비에 구입할 수 있는 노란색 테이프로 접근 권한을 설정할 수 있다. 가령 거실까지는 누구나 볼 수 있도록 공개하고 방은 사적 공간으로 남겨 두려면 방의 경계에 테이프를 붙여 라인을 그리면 된다는 것이다. 만약 거실마저 공개하고 싶지 않다면 엘레베이터에서 내리는 바로 그 자리에 노란색 테이프로 라인을 만들면 된다. 두번째 클레이 B.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그녀는 누구도 자기 집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원치 않았는지 방문객이 거실로도 들어올 수 없도록 라인을 만들어 두었다. 나는 깨끔발을 들어 거실 안을 들여다보려 애썼다. 그러나 텔레비젼과 전축이 있는 맞은 편 벽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Blue#134330’라는 주소의 클레어였다. Blue? 134330? 역시 내가 아는 클레어의 취향에 맞는 이름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어떻게 하지? 난감해진 나는 그녀의 집 엘레베이터 바로 옆 방명록에 메모를 꽂아두기로 했다. 사실 그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그토록 많은 눈꺼풀 아래 
누구의 것도 아닌 잠이고픈 마음이여.
- 제임스 C. (2000.01.13.17:48) 


  그녀가 정말 내가 아는 클레어이라면 이 문구가 뜻하는 바를 알아채지 못할리가 없을 것이다. 그녀는 릴케의 시를 좋아했으니까 릴케의 묘비명 또한 모르지는 않을 것이며 자기집 방명록에 누군가 넣어놓은 메모가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지 못할리가 없을 것이다. 물론 그리고 내 이름도 적었다. 제임스 C. 우리가 관계의 신비로움을 위해서 서로의 성을 숨기고 퀴즈처럼 맞춰가며 지내던 그 시절의 이름을. 

*


  세번째 클레어는 ‘MotoR-Cust0merServ1ce’라는 흡사 고객센터 직원 같은 주소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정말 고객센터 직원이었다. (모토로라 고객 서비스센터에서 호출기 담당 고객 문의 전화 응대 서비스 직원으로 일한다고 했다) 그녀는 물론 내가 찾는 클레어가 아니었는데 그래도 친절하게 나를 맞아 주었다.
사랑합니다. 고객님. 어서오세요. 반갑습니다.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화들짝 놀란 나도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받았다. 생전 모르는 사람이 불쑥 집안에 들어왔는데 방문해주셔서 감사하고 사랑한다니. 되려 멋쩍어져 실례가 많았다며 사과하고 재빨리 되돌아 나가려고 했는데 그녀가 나를 불러 세웠다. ‘MotoR-Cust0merService’라는 이름의 클레어 말이다. 그녀는 핫 코코아를 한 잔 주겠노라고 했다. 이유를 몰랐으나 거절하고 나갈 수 만은 없는 일이었다. 첫번째와는 다른 이유로 멋쩍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집은 화려한 문양의 실크 카페트로 꾸며져 있었다. 매캐하고 몽롱한 향 냄새가 코를 찔렀다. 선반 위에는 황금 코끼리와 비슈누인지 크리슈나인지 어떤 신화속 인물의 조각상이 보였다. 갑자기 포니 테일의 말이 떠올랐다. ‘어쩌면 여기가 아니라 저 멀리 인도 같은 곳에서 찾으셔야 할지도 몰라요.’ 

어떤 일로 저희 센터에 방문하시게 되셨나요? 사용하시는 모토롤라 호출기 제품에 문제가 있으시면 1번, 호출기 제품 구입 문의는 2번….
아니요. 저는 클레어 B.를 찾아다니고 있는데요.
제 이름이 바로 클레어 B.입니다, 고객님.
그게 아니라 아는 사람을 찾아왔는데 아무래도 잘못 집을 찾아온 것 같아요.
  그녀는 잠시 골똘히 생각하는 듯 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겠습니다, 고객님. 꼭 그 분을 찾으시길 바라겠습니다. 
고마워요. 그럼 저는 가보겠습니다.
사랑합니다, 고객님. 오늘도 행복한 하루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내가 알던 클레어는 외모가 눈에 띄는 타입이 아니었다. 잘 꾸밀 줄도 몰랐다. 울보였다. 약간의 대디 이슈가 있었다. 잘 흘리고 잘 잃어버렸다. 한 마디로 보호 본능을 일으키는 타입이었다. 그녀와 함께 있을 때면 나는 실제의 나보다 더 어른스러운 사람이 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누군가를 챙겨줄 수 있는 사람. 누군가를 돌봐줄 수 있는 사람. 그녀가 떠나던 순간부터 나는 첫사랑을 믿지 않았고 산타할아버지를 믿지 않았고 그 어느 것도 믿지 않았다. 

  마지막 클레어의 집은 비어있다. 'Gurumhatsal'이 마지막 클레어의 주소다. 무슨 뜻이지? 소리나는대로 읽어본다. 그. 림. 햇. 살. 그림 햇살? 이번엔 잘 모르겠다. 아리송하다. 어렵다. 내가 아는 그녀라면 이런 이름을 지을까.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그녀를 잘 알았던 것은 아주 오래전의 일이다.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으리라 믿었던 것도 오래 전의 일이다. 그녀가 예전의 모습처럼 남아있으리라는 보장이란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Gurumhatsal. 다시 읽어보니… 구루마흐샬? (“어쩌면 여기가 아니라 저 멀리 인도 같은 곳에서 찾으셔야 할지도 몰라요?”) 아니면 어떤 암호 같은 것인지도 몰랐다. 그녀는 내가 찾는 클레어일 수도 있었고 아닐 수도 있었다. 어쩌면 그냥 내가 아케이드에서 엉뚱한 사람을 보고 착각했을 수도 있고 어쩌면 내가 아는 클레어는 이 로즈빌라에 살지 않을 수도 있었다. 

  네번째 클레어는 노란색 테이프를 붙여놓지 않았다. 어디에도.

  하나의 방이 있다. 이 방의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내려면 과연 어디에서부터 살펴 보아야 하는 것일까? 간단하다. 정답은 액자다. 액자에는 사진이 들어가 있다. 둘러보는데 액자가 보이지 않는다. 네 번째 클레어는 거실에 단 하나의 액자도 두지 않았다. 큰 것은 물론이거니와 작은 것도 하나 없다. 그렇담 다음 차례는 앨범이다. 앨범에도 사진이 들어가 있다. 맨 위에 있는 한 권을 꺼낸다. 이 방의 주인이 비교적 최근에 꺼내보았던 것일테다. 숨을 한 번 깊게 들이쉬고 천천히 내쉰다. 그리고는 한 장을 넘긴다. 

  아무 것도 없다. 

  네번째 클레어는 어떤 사람인가? 방에 액자를 두지 않는 사람이다. 앨범에 아무 것도 꽃아두지 않는 사람이다. (그럴바에 왜 액자며 앨범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으나 아는 사람인지도 확실치 않은 남의 일을 두고 이러쿵 저러쿵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상하게도 서서히 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네번째 클레어가 내가 찾고자하는 그녀인지 궁금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창문으로 다가가 내려져 있던 블라인드를 걷었다. 촤아아악. 아무 것도 없었다. 그녀는 남들 다하는 '창 밖 풍경' 하나 제대로 걸어 놓지 않는 사람이다. 쇼파에 앉아 보았다. 아직 쿠션이 고른 것이 산지 얼마 되지 않은 쇼파다. 방문객의 메모를 확인하러 현관에 나가보았다. 역시 아무 것도 없었다. 단서가 더 필요했다. 그녀는 어느 곳에도 노란색 테이프를 붙여놓지 않았다. 말인 즉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이었다. 어쩌면 방에는 일기장이 있을 것이다. 공책이나 가계부가 있을런지도 모른다. 나는 클레어의 글씨체를 알기 때문에 한 번 보기만 한다면 내가 찾는 클레어가 맞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어쩌면 굴러다니는 책이나 레코드를 보면 뭔가를 알 수 있을런지도 모른다. ‘저니’나 ‘포리너’ 혹은 ‘REO 스피드웨건’같은 록밴드의 앨범이 있으면 클레어일 확률이 높았다. 릴케의 시집이나 스타인백의 소설집이 있으면 내가 아는 클레어일 확률이 높았다. 문 하나만 열면 된다. 어려운 일이 아니다. 손잡이를 잡아 오른쪽으로 돌리고 앞으로 슬그머니 밀면 그걸 알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어쩐지 모를 죄책감에 마음이 무거워져 왔기 때문이다. 주인이 없는 사이에 내가 이래도 되는 것일까. 이 집의 주인은 내가 자신의 방까지 들락거리는 것을 과연 원할까. 그러한 의문의 대척점에는 호기심이 있을 터였다. 나는 진심으로 이 집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고 싶었다. 이대로 돌아간다면 반드시 후회하고야 말 것이었다. 죄책감의 무게와 호기심의 무게, 둘 중에 어느 것이 더 무거울까. 그리고 앞으로 더 무거워질까. 

  결국 나는 그 방문을 열어보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에 메모를 남기고 (역시 같은 릴케의 인용이다.) 그녀의 집을 빠져나와 엘레베이터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안도와 후회가 거짓말처럼 교차했다. 오후에는 꼭 작업을 하기로 마음먹었으나 일 또한 영 손에 잡히지 않았다. 네 명의 클레어 B. 그 중에서 두 명은 확실히 아니다. 남은 둘 중의 하나. ‘Blue#134330’라는 주소의 클레어 B. 아니면 ‘Gurumhatsal’라는 주소의 클레어 B. 

  방에 돌아와 보니 'Blue#134330’이라는 주소의 클레어 B가 남기고 간 방명록이 보였다. 

메모를 보고 답례로 찾아왔어요. 
제가 아는 분 중에는 제임스 C 라는 분이 없는데 혹시 오해가 있었는지 모르겠네요.
제가 아는 분이 맞다면 다시 제 집에 방문해주세요.
- Blue#134330 (2000.01.13.18:12)


*



  로즈빌라로 이사하는 사람들의 수는 점점 늘어났다. 자연스럽게 분위기도 많이 바뀌었다. 어느 순간에 남의 집을 오가며 구경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이다. 한편으로는 시설이 확충되었는데 그 중에는 이해할 수 없는 것도 많았다. 우선 포니 테일 아가씨가 일일이 찾아주지 않아도 이름과 출생년도만으로도 주소 검색이 가능해진 것이다. 그러니까 호기심에 혹은 어떤 이유로 다른 사람의 집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의 집에 마구잡이로 들어가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걸로도 모자라 엘레베이터에는 새로운 빨간 버튼이 생겼다. 열림 버튼과 닫힘 버튼 바로 아래. 하얀색으로 ‘Random’이라고 적혀진. 그 버튼을 누르면 엘레베이터는 무작위적으로 아무 집 앞에나 가서 멈추었다. 로즈빌라에는 워낙 많은 사람들의 워낙 많은 집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기에 정확히 어디쯤가서 언제 어떻게 멈출런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말 그대로 무작위였다. 

  처음에 나는 왜 그런 버튼이 있어야 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왜 모르는 사람의 집에 가려고 하는거지? 가서 뭘 하려고? 그러나 세상에는 의외로 모르는 사람의 집에 가고자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들 중 일부는 거짓말처럼 우리 집에 들어왔다. 문을 열고 저벅저벅 들어와서 집안 구석구석을 둘러보았다. 라보르트나 헤르메스 조각상을 만지작거리기도 하였고 사진이 들어있는 액자를 힐끔거리기도 하였다. 그러다 지치면 냉장고를 열고 물을 따라 마시기도 했고 화장실에서 일을 보고 가기도 했다. 심지어 가끔은 일기장을 읽어보기도 했다. 그들은 포스트 잇을 가지고 다녔고 모든 것에 포스트 잇을 붙이면서 품평하기 시작했다. 수집품 멋있어요. 어디서 사셨어요? (키득키득) 사진 속의 요리는 다 직접 만드신거에요? (키득키득) 집구석에 거미줄이 있네요. (키득키득) 사진은 언제 찍은거에요? 나도 알프스에 한번 올라가 보고 싶다. (키득키득) 냉장고 좀 바꿔요. 너무 구형이잖아요. (키득키득) 어제는 일기를 건너 뛰었네요. 언제 다시 올릴건가요? (키득키득) 집 안이 너무 조용해요. 배경음악이라도 좀 깔아 놓으세요. 지하 아케이드 상점에 가면 200 조가비면 싱글 트랙 하나를 1,200 조가비면 앨범 한 장을 사서 배경음악으로 깔아 놓을 수 있어요. (키득키득)

  한동안 나는 그들이 신경쓰여서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집에 있을 때는 집에 있기 때문에. 집에 없을 때는 집에 없기 때문에. 방문객들의 존재를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급기야 로즈빌라에서는 각 유닛의 입구마다 그런 방문객의 수를 집계하는 화면을 방명록 옆에 걸어주었는데 외출하고 돌아왔을때 현관에 걸려있는 숫자가 올라가 있으면 이상한 기분이 들고는 했다. '내가 없는 동안 누군가 우리 집에 들어왔다가 나갔구나.' 그 중에는 우리 집의 주소를 알고있는 벗들도 있을테지만 엘레베이터의 빨간 버튼을 누르고 무작위적으로 찾아온 그런 종류의 사람들도 있을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신경이 예민해졌다.

  한편으로는 조금 더 집안을 단장하는데 신경을 쓰게 되었다. 아침마다 걸레로 마룻바닥을 훔쳤고, 꽃병에 물을 주었으며, 볕이 잘 들도록 블라인드를 올렸다. 행여나 빨래와 설겆이가 밀려 게으른 사람처럼 보이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어떤 날은 외출했다가도 설겆이를 하지 않은 것이 생각나서 급히 되돌아오고는 했다. 내가 항상 배경 음악을 틀어놓기 시작했던 것도 바로 그 즈음이었다. 바흐의 브란덴브루크 협주곡 3번 G마이너로 시작해서 여섯 편의 전곡을 모두 커버하는게 주된 레파토리였다. 아무래도 가요나 팝송보다는 고상하게 보일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누구의 버전인지도 모를 그것을 들으며 나는 베니스의 운하를 내려다 보았다. 뭔가 뿌듯한 느낌이었다. 내가 집에 있을때나 없을때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은 울려퍼졌다. 어느새 현악기의 진동에 맞추어 무수한 음표와 음표가 춤을 추는 곳으로 변했다. 어느 날 그는 집에 돌아와서 전축에 붙어있는 포스트 잇을 하나 발견하였다. 음악 좋네요. 잘 듣고 갑니다. (키득키득) 클래식이라니. 고상한 분이신가봐요. (키득키득) 아주 깊은 곳에서부터 피어올라온 어떤 것이 마음을 가득 채웠다. 이상한 일이지만 누군가의 관심이 적잖이 만족스러웠다. 너무 오래 한 가지 음악만 걸어놓으면 사람들이 욕할거야. 언제 한번 아케이드에 내려가서 괜찮은 판을 하나 사 와야겠어. 그 무렵 '창 밖 풍경'의 정해진 기한이 다 되었고 나는 800 조가비를 지불하고 베니스를 피렌체로 바꾸었다. 

  수집품들이 잘 보이도록 진열장을 하나 샀다. 거실에 아주 잘 보이는 곳, 들어오자마자 볼 수 있는 곳에 두었다. 일기장도 깔끔하게 포인트 10의 바탕체로 타이핑하여 눈에 잘 띄는 곳에 올려 놓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로즈 빌라에서의 생활에 재미를 느끼고 있었다. 집에 돌아올 때는 꼭 현관 위에 걸린 숫자를 확인했다. 오늘은 세명이 들어왔다 갔구나! 오늘은 다섯 명이나 왔다갔네! 그런 식으로. 방문자가 많은 날에는 기분이 좋았고 방문자가 적은 날에는 실망스러웠다.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 나는 깔끔하고, 단정하고, 고상하고, (평범한 직장인이 아니라) 언젠가 유명한 화가가 되기를 소망하는 사람이었다. 또한 베니스와 피렌체를 사랑하고, 일기를 꼬박꼬박 쓰고, 사진 찍기를 좋아하고, 바흐의 브란덴 부르크 협주곡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나에 대한 모든 이미지는 '보여지는' 대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실제로 그런 사람이 되는 것보다 그런 사람처럼 보여지는 것이 훨씬 쉬웠다. 쉬운 일이다. 내가 원한다면 나는 얼마든지 내가 원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 그렇게 보여질 수 있었다. 그렇게 보여지면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다. 실제의 나는 어떤 사람인가? 정말로 깔끔하고, 단정하고, 고상하고, 언젠가 화가가 되기를 소망하고, 이탈리아를 사랑하고, 일기를 꼬박꼬박 쓰고, 사진 찍기를 좋아하고, 바흐의 브란덴 부르크 협주곡을 좋아하고, 과연 그런 사람인가? 나조차 확신할 수 없을 정도였다. 순전히 그것은 컴퓨터 게임을 하는 것처럼 분기적 선택의 문제였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산다는게 뭐 별거냐. 남들 다 하는데로 따라 사는거지. 아무리 바보같고 부질없는 짓이라도 적당히 어울려 따라가면서 다들 그냥 이렇게 사는거지. 나 먹고 살기도 힘든 세상이기는 하지만 남의 생활에 흥미도 좀 가져주고. 그만큼 나도 남의 관심을 받아보고. 역시나 뭐 그런 것이다. 다른 사람의 생활과 다른 사람의 생각에 포스트 잇을 붙이는 법도 배웠다. 그리고 아직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네 번째의 클레어, 'Gurumhatsal'의 집에도 매일같이 찾아갔다. 하지만 늘 비어 있었다. 나는 단 한 번도 그녀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녀가 그 곳에 살고 있다는 흔적 또한 발견하지를 못했다. 지푸라기라도 잡아보자는 심정이었을까. 그럼에도 나는 네 번째 클레어의 집에 찾아가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다보면 훌쩍 하루가 지나갔다. 하루가 지나가고, 다시 하루가 지나가고, 또 다시 하루가 지나가고. 나의 집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듯이 그들의 집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었고, 나의 생활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듯이 그들의 생활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었고, 구름의 어디쯤을 디디는지 모를 그런 생의 한가운데에서도 전혀 두려움을 느끼지 못했다. 모두가,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모두가, 그렇게들. 언제 무너질지 몰라도. 언제 사라질지 몰라도. 지금 당장은 도배를 새로 하고, 화분을 새로 들이고, 액자를 사다 걸고, 음악을 사다 걸고, 달러를 조가비로 교환하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하고, 바꾸고, 걸고, 바꾸고, 쓰고, 바꾸고. 현관에 걸려있는 숫자를 확인하고. 많으면 많은대로 적으면 적은대로 슬퍼하고 기뻐하고 노여워하고 즐거워하고. 정말이지. 산다는 건 뭐 별거 없지 않은가? 


*



  어느 순간 로즈빌라는 엄청나게 규모가 커졌다. 수백개의 동이 새로 올라갔거나 올라가는 중이었다. 물론 새로 만들어진 동이 구체적으로 어디에 어떻게 위치하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이는 공간적 이해력과는 또 별개의 문제였다. 로즈빌라로 이사오는 사람들이 어마어마하게 많을 거라는 소문이 있었다. 소문은 (가끔 아니 땐 굴뚝에도 피어 오르기도 하지만) 괜히 흘러다니는 법은 없는 법이다. 타코 가게의 마히마히처럼 거기에 있는 분명한 이유가 있기에, 소문은 소문인 것이다. 매일 아침 출근할 때마다 꾸역꾸역 몰려드는 이사 트럭의 행렬을 보고는 했다. 다음 날도 그랬고 그 다음 날도 그랬다. 역시 그런 것이었다. 저 많은 입주자들을 수용하려면 수백개의 동이 새로 올라가도 모자랄 것이었다. 소문에 의하면 따로 집이 있는 사람들도 로즈빌라에 집을 하나 갖는 것이 유행이라고 했다. 또다른 소문에 의하면 반대로 로즈빌라에 집을 하나 마련해 놓고 다른 곳에 가서 사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혹자는 이러다가 세상 모든 사람들이 로즈빌라에 집을 한 채씩 가지게 될 것이라고도 했다. 어쩌면 그만큼 충분한 집이 생기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아 보였다. 마치 로즈빌라는 무한의 3차원 부지를 가진 게이티드 커뮤니티 같았다. 나도 내가 로즈빌라의 어디쯤에 살고 있는지 몰랐다. 이웃들이 로즈빌라의 어디쯤에 살고 있는지도 몰랐다. (당연히) 클레어가 로즈빌라의 어디쯤 살고 있는지도 몰랐다. 어쩌면 그녀는 나와 바로 옆, 혹은 바로 위쯤에 살고 있을런지도 몰랐다. 그러나 아무도 그런 구조 따위에 더 이상 궁금증을 갖지 않았다. 그저 그렇게들. 도배를 새로 하고, 화분을 새로 들이고, 액자를 사다 걸고, 음악을 사다 걸고, 달러를 조가비로 교환하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하고, 바꾸고, 걸고, 바꾸고, 쓰고, 바꾸고. 현관에 걸려있는 숫자를 확인하고. 많으면 많은대로 적으면 적은대로 슬퍼하고 기뻐하고 노여워하고 즐거워하기에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 아침. 나는 네번째 클레어 B의 집에서 새로운 흔적을 발견하였다. 매일 매일 찾아왔던 노력이 헛되지 않았던 것이다. 여전히 유닛은 비어 있었다. 액자가 걸려있지 않았고 앨범도 텅 비어 있었으나 못 보던 전축 하나가 거실에 덩그러니 세워져 있었다. 전축은 경쾌하게 돌아가며 배경음악이 나왔다.

Every rose has its thorn
Just like every night has its dawn
Just like every cowboy sings his sad, sad song
Every rose has its thorn

  록 밴드 ‘포이즌’의 ‘Every Rose Has Its Thorn’이다. 클레어는 80년대 록음악의 팬이다. 어쩌면, 어쩌면, 어쩌면 이 집의 주인은, 네 번째의 클레어 B는 내가 찾는 바로 그 클레어 B가 맞을런지도 모른다. 모든 장미에는 저마다의 가시가 있다. 마치 모든 밤들이 그들의 새벽을 가지는 것처럼, 또 마치 모든 카우보이들이 그들의 슬프고 슬픈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정말 그렇다. 그렇지 않은가?)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녀가 집 꾸미기에 신경을 쓰기 시작한 것일까? 내일은 어쩌면 까만색 크레파스로 칠해놓은 듯 새카맣기만 한 그녀의 '창 밖 풍경'이 꽃단장을 할런지 모른다. 내일은 어쩌면 그녀의 사진이 거실 액자에 걸릴런지도 모른다. 어떻게 변했을까? 뭐하고 살았을까? 어디서 무얼할까? 이직도 그때 그대로일까? 다리가 떨려 바닥에 주저 앉았다. 끝없이 반복 재생되는 ‘포이즌’의 노래를 들으며 나는 그렇게 그 곳에 몇 시간을 앉아 있었다. 어쩐지 익숙한 향기가 나는 듯 했다.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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