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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 떡볶이 공수 대작전

낙농콩단/Season 1-5 (2000-2005)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02. 1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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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문은 야속하게도 굳게 걸어 잠겨있다. 야속한 배때기는 저녁을 먹었음에도 굶주림을 소리로써 호소했다. 하루 끼를 꼬박 챙겨먹고도 굶주림을 논하다니! 실로 염치 없는 일이다. 허나 염치 없는 일이라하여 그대로 묻어 수만은 없는 법이다. 문제가 있으면 해결을 해야한다. 우리가 밤까지 학교라는 끔찍한 공간에 갇혀있는 이유도 문제가 거기에 있고 고로 풀어야 하기 때문이다. 시간이 되면 (그러니까 정확히 8 30분에서 8 45 사이의 묘한 타이밍이 되면) 하나 둘씩 서서히 공허한 눈빛을 보이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부터 우리들은 일종의 조직을 만들었다. 일종의 비결단. 말하자면 비밀 결사 단체다. 단체의 목적은 오로지 하나. 삼엄한 경비를 뚫고 학교를 빠져나가 밤참을 사서 다시 되돌아 오는 . 역시 자랑스러운 조직의 자랑스러운 일원이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우리들의 왕성한 식욕이나 때와 장소를 가리지 못하는 허기에 대한 책임을 우리에게만 물어서는 아니될 것이다. 그건 순전히 가장 왕성한 활동력을 지니고 있는 한창 때의 우리들을 강제로 가두어 두었기 때문이다. 아침마다 우리들은 꾸역꾸역 공장같은 건물에 몰려 들어왔고 육중한 교문은 우리들을 세상으로부터 격리시켰다. 한번 그렇게 닫힌 교문은 밤이 되어야 다시 열렸다. 이미 한낯의 태양은 어디론가 사그라들고 처량한 달빛만이 정처없이 비추는 하교길. 누가 그랬던가? 십대가 아름다운 시절이라고. 뱀파이어도 아닌데 태양을 적이 언제인지 가물가물하고 비행기 못타보고 이코노미 클래스 증후군이 생겼는데 아름답기는 개뿔. 이렇게 때를 잘못 잡아 찾아오는 식욕도 이유가 있다. 자연의 섭리를 거슬러가며 이렇게 종일 앉아있으니 생체 시계가 서서히 엉망이 되는 것이다. 나아가 못할 허무감을 이겨내려면 먹어서라도 풀지 않고서야 방법이 없는 것이다.

  정리해보자. 아침 8시에 시작한 학교 수업은 오후 5시가 넘어서야 끝난다. 그리고 야간자율학습은 저녁 6 30분부터 10 30분까지다. 야간자율학습. 야간은 맞는데 결코 자율은 아니라는 점에서 야간자율학습이라는 이상야릇한 표현의 묘미가 있다. 결국 8시간 동안의 주간타율학습과 4시간 동안의 야간자율학습, 합이 12시간이다. 그러니 사람이 미치는 것이 당연하다. 너도 나도 서서히 괴물이 되어가는 같다. 어제는 3학년 6반의 어떤 녀석이 정학을 맞았다고 한다. 자율학습시간 도중 학교 매점에 무단 난입하여 국진이빵 2상자를 먹어치웠다고. 상자가 21봉지였나 24봉지였나 그렇다고 하던데 그걸 남김없이 뱃속에 밀어 넣었다고 한다. (물론 죄다 자리에서 괴어내었고 놈의 배를 갈라 확인해 필요도 없이 학교 당국에서는 이를 증명할 있었다.) 3학년 4반에서도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또라이는 평소 자기가 상습적으로 괴롭히고 돈을 뜯던 같은 아이들 몇을 자율학습시간에 화장실로 불러다가 자길 때려달라고 윽박을 질렀단다. (? 이상하지만 정말이다.) 소문에 따르면 제대로 맛깔나게 때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성질을 버럭 내기도 했다고. 겁을 먹은 다른 학생들이 어절 없이 최선을 다해 구타하기 시작을 했는데 결과적으로 전치 6주가 나와 놈이 병원으로 실려가는 코미디가 벌어졌다. 하나가 입원했으니 병결, 얼결에 일곱명은 정학, 졸지에 여덟 명이 빠져버린 3학년 4반의 분위기는 사막처럼 황량하게만 보였다. 

  3학년 2반에서는 다른 종류의 사고가 있었다. 간이 밖으로 튀어 나온 어떤 녀석이 자율학습시간에 휴대전화로 문자 메세지를 보내다가 까탈스럽기로 유명한 노처녀 물리한테 걸린 것이다.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고등학생이 휴대전화를 가지고 다니다니! 아직 휴대전화가 없는 물리는 역정을 내었다. 번개처럼 그것을 낚아챈 물리는 액정 화면에 미처 지워지지 못하고 남은 은밀한 사랑의 속삭임을 읽는다. '나도 정말 졸려. 그치만 쉬는 시간에 . 나도 사랑해. 하트.’ 휴대전화만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상대 역시 없는 물리는 순간 특유의 히스테리가 발동했다.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자면) 투포환 선수처럼 휴대전화를 빼앗아 창문 밖으로 던졌고 몸의 반동을 이용해 연결 동작으로 녀석의 따귀를 갈겼다고 한다. 지금 부터가 하이라이트다. 맞은 놈이 그냥 가만히 있었다면 좋았으려만 글쎄 눈에 스파크를 내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 주섬주섬 벨트를 풀더니만 덜컥 바지를 내렸다는 것이다. ( 역시 목격자에 증언에 의한 것인데) 새하얀 백양표 팬티가 모습을 만천하에 드러내자 악랄하다는 노처녀 물리도 당황한 나머지 그만 뒷걸음질을 쳤다고 한다. 또한 정신이 아닌 이야기다. 

  럭키 세븐. 3학년 7반에서도 희한한 일이 일어났다. 전교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는 공식 찰떡 커플의 이야기다. 등교길에도 붙어 있고, 수업시간에도 붙어 있고, 자율학습시간에도 붙어 있고, 하교길에도 붙어 있던 애들 사이에 드디어 사랑의 결실이 맺어졌다는 (? 이게 축하할 일이 맞나?) 것이다. 향간에는 점심시간마다 여자애가 남자애 무릎에 앉아 밥을 먹었기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그런다고 들어서는 것이 아기라면 세상은 아기들로 바글바글거릴 것이라며 다들 손사래를 쳤더랬다. 약간의 경멸감과 약간의 수치심을 담아 우리들은 수근거렸으나 정작 장본인들은 떳떳했다. 스무살은 아기를 가져도 되는데 열아홉살은 안되냐는 것이다. 듣고보니 되는 같기도 하고. 뭐라고 말이 없다. 이상 이야기하기도 싫다. 이만큼 정신 아닌 이야기가 있을까. 

  이런 정신나간 일들이 양말공장, 아니 학교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는 것은 순전히 하루 12시간 사람들을 곳에 쳐박아 두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너도 나도 슬슬 미쳐가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무슨 사회심리 실험에 끌려온 모르모트처럼. 가로 세로 열걸음쯤 되는 아주 협소하고 조그마한 (아마도 빛이 한쪽에서만 들어오는) 공간에 기운 넘치는 60 개체 정도의 생명체를 가득 밀어넣고 반복해서 스트레스를 가하면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아마 답을 얻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더러는 미치고, 더러는 미칠 지경이 되고, 더러는 미쳤는지 모를 상태가 되고, 더러는 차라리 미치는게 낫겠다 싶어질테니까. 

*

  야간자율학습이라 불리우는 시간 동안의 강제적 자율학습 중간에는 20분간의 쉬는 시간이 있다. 그러니까 19 50분에서 20 10분까지. 사이에 물도 마시고, 화장실도 갔다오고, 기지개도 펴고, 숨도 돌리고, 담배도 태우고 (? 이건 아닌가?) 그런 이유에서 만들어진 시간일 것이다. 20 10분이 되면 어김없이 종은 치고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앉아야 한다. 그리고는 정적이 흐르는 자율 학습시간이 이어진다. 

- , 허기는 시간만 되면 뭉클뭉클 피어오르는 것일까?

  3학년 7 광선유가 빗날니퍼로 전선을 손보다 말고 말했다. 겁도 없이 전원을 차단하지도 않은 채였다. 그럴다고 오해하지는 마시라. 그는 소사가 아니라 우리 조직의 일원이다. 

- 이유가 있겠어? 우리가 여섯시에 저녁을 먹었으니까 그렇지. 그게 소화되는데 두시간쯤 필요할 것이고 그럼 여덟시지. 원래 사람은 그즈음 잠을 청해줘야 이상 배고픔을 이상 느끼는데. 우리는 열시까지 야자를 해야하잖아. 그러니 잠을 수가 없고, 고로 속이 채로 시간을 보내야 하는거고, 고로 겪지 않아도 좋았을 허기를 느끼고, 그런거지. 이유가 있겠어?" 

  옆에서 케이블 타이를 건네주던 같은 지대공이 무심하게 대꾸한다.

  사실 우리의 바람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다. 밖에 나가서 야식을 사가지고 돌아오는 것이다. ( 얼마나 소박한가!) 사실 대단치도 않은 일이다. 하지만 학교의 누구도 그걸 허락해주지 않았다. 우리는 야간자율학습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다. 야간자율학습을 하긴 하되 먹으면서 하겠다는 것일 뿐이다. 그게 무리한 요구라고 묵살씩이나 한단 말인가. 그래서 우리는 '그렇다면 학교 매점을 10시까지 운영해달라' 요구했다. 그것도 비용을 이유로 묵살되었다. 학교가 파서 너희들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답변의 요지였다. ‘전교야식연대 위원장을 맡고 있는 3학년 7반의 지대공은 행동력으로 똘똘 뭉친 녀석이어서 학교측의 그런 오만한 태도에 팔장을 끼고 있지만은 않았다. 플랜카드를 걸었다. ‘학교 매점을 전면 민영화하라 내용이었다. 또한 교장의 이름을 붙인 허수아비에 불을 질렀다. 그는 현장에서 체포되어 독방에 갇혔지만 이내 우리들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우리는 학교에 훼미리마트나 김밥천국이나 롯데리아가 들어올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영웅은 필요했다. 어쩌면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야식이 아니라 영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엄정한 항의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해.

  그의 마디에 우리들은 열광했다. 사실 말은 너무 어려워 제대로 이해하기도 힘들었고, 사실 배가 고팠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무척이나 단순하다. 밥이 궁할때 밥을 주면 열광하고 빵을 원할때 빵을 주면 열광한다. 마리 앙뚜와네트의 목이 달아난 것은 밥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빵을 주었기 때문이다. (아닌가?) 아무래도 쿨한 발상의 전환을 이해하기에 당시 민중들이 너무 굶주려 있었던 같다. 만약 그녀가 우리에게 대신 빵을 주겠다고 한다면, 육중한 철제 교문과 두명의 정예 담임교사의 순시를 뚫고 우리에게 대신 빵을 주겠다고 한다면, ! 기꺼이 영혼이라도 팔았으리라. 어쨌든 우리들은 바로 '엄정한 항의'라는 것을 위해 당번을 정해 야식을 조달하기로 했다. 분명한 저항 의사를 전달하면서 맛난 야식까지 먹는다니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

  7 50분이 되었다. 이제 오늘의 당번을 정할 시간이 되었다. 전교야식연대 위원장이자 3학년 1반의 반장인 지대공이 회의를 주재했다. '오늘의 메뉴' 정하고 제비뽑기로 임무를 완수할 동지를 선발하기 위한 회의는 언제나 엄숙하고 진지한 분위기였다. 오늘이 벌서 삼일째다. 첫날의 거사는 실패로 끝났다. 막중한 임무를 띠고 급파된 일기백은 학교를 빠져나가기도 전에 순찰을 돌던 작문한테 걸리고 말았다. 20 17. 학교 서측 근처였다. 그는 비밀 조직의 일원답게 끝까지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까지 단순 땡땡이에 단독범이었노라 주장하였다고 한다. 따귀를 왼쪽 오른쪽 골고루 맞고 지하 체육실로 질질 끌려 들어가면서까지! (물론 체육실 매트 위에서 먼지가 풀풀나도록 얻어맞게된 까닭은 땡땡이도 월담도 아닌 주머니 속의 담배갑때문이었다고.) 떡볶이를 먹지 못한 것보다 가슴 아픈 것은 동지가 작살나게 맞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보다 가슴 아픈 것은 우리들의 항의가 좀처럼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는 절망감 때문이었다. 둘째날은 거의 성공할 했다. 서울시 대표 중학 체조 선수 출신이었던 3학년 5반의 가담항은 담을 훌쩍 뛰어 넘어 학교 바깥으로 나가는데 성공했다. 다만 다시 돌아오지는 못했다. 학교 안쪽과는 달리 바깥쪽 도움닫기를 공간도 없었고 디딜 공간이나 써먹을 장대도 없었다. 우리는 하교길에서야 비로소 차갑게 식어버린 양념통닭 마리를 안고 교문 밖에 쭈그려 앉아있는 그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고 녀석을 안고 통닭을 안고 울었다. 식어버린 통닭보다 가슴 아픈 것은 배고파도 배고프다고 말할 없는 슬픈 현실이었다. 

  그리고 삼일째. 당연히 오늘의 거사는 중요하다. 이번에도 실패하면 우리들의 열정 또한 어제의 양념 통닭처럼 차갑게 식어버릴 것이다. 또한 아직 전교야식연대에 들어오기를 꺼리는 다른 학우들에게 좋지 못한 메세지를 주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반드시 성공시켜야 했다. 지대공도 점을 지적했다. 

- 제군들, 우리는 지금 일종의 분기점 위에 있다. 

  오늘의 임무는 소림시장 세번째 골목, 욕쟁이 할머니의 떡볶이로 정해졌다. 누군지 몰라도 오늘 나갔다와야하는 사람은 단단히 먹겠군. 사실 나는 떡볶이보다 마지막까지 최종후보로 경합을 벌이던 계란빵에 우유 쪽에 마음이 끌렸다. (하지만 있겠는가. 민주주의 다수결이라는데.) 3학년 1 반장이자 전교야식연대 위원장 지대공의 손에서 16 시험지가 여섯 조각으로 잘라 나누어졌다. 그는 엄숙한 표정으로 하나의 조각을 모두가 있도록 높이 쳐들었다. 그리고 끄트머리에 유성 매직으로 점을 찍었다. 파란 잉크가 기름지게 번져나갔다. 저걸 잡으면 당첨. 우리 모두를 대신하여 떡볶이를 우리들에게 배달해 오게되는 것이다. 종이 조각은 가로로 , 그리고 세로로 , 접혔다. 긴장된 표정으로 모두들 제비를 뽑았고, 나도 하나를 집어 들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 아냐.

- 나도……. 

- 나도 아닌데…….

  아쉬움과 안도가 빠르게 교차했다. 다들 부담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제비를 늦게 확인할 수록 부담은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꿀꺽, 침을 삼켰다. 나도 왼손으로 감싼 오른 손바닥 안에서 조심스럽게 제비를 확인하였다. ! 파란 ! 파란 잉크가 동그랗게 얼룩져 있었다. 당첨이었다. 오늘 밤참을 사러가야 하는 억세게 재수없는 놈이 바로 나로구나. (, 물론 욕쟁이 할머니에게 욕도 오지게 먹고 와야 하고 말이다.)

  물론 오늘의 계획은 그럴듯하게 보였다. 어제와 그제의 경우와는 감히 비교할 없을 정도이기는 했다. 계획을 짜면서도 3학년 5 우유부는 평생 이런 기막힌 야식 공수작전은 보지 못할 거라며 감탄을 금치 않았다. 혼자만의 책임이 아니라는 점이 조금 위안이 되었다. 이번 작전은 어제처럼 당번 사람의 운동신경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 전체의 총력이 조화를 이루어야 비로소 성공이 가능한 것이었다. 3학년 2반의 어도단은 CCTV 위치를 파악했고 사각지대를 빠짐없이 평면도에 표시했다. 3학년 9반의 광선유는 만약을 위해 전기 선을 보아 두었다. 여차하면 학교 전체의 전원을 내려버릴 심산이었다. 3학년 6반의 풍노도는 3 굽이진 복도 화재 경보기를 작동 시키는 역할을 맡았다. 작전의 진행로와 반대편에서 소란을 일으키자는 속셈이었다. 전교 3 3학년 1반의 해일속은 교무실 앞에 숨어 있기로 했다. 교무실에서 감독 선생님들이 나오면수학의 정석 들고 달려가 변태적 계산이 필요한 질문을 던져 적절히 시간을 지연시킬 의도였다. 3학년 4반의 견강부와 3학년 11반의 강투석은 통신 보안을 맡았다. 우리 반을 통틀어 휴대전화를 가진 녀석들이라고는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하나의 휴대전화를 들고 출발하여 미리 약속된 포인트에 도착할 때마다 녀석들과 문자 메세지를 주고 받기로 했다. 한편 3학년 1반의 1분단 뒷자리에 앉은 치하문은 운동장의 전체적인 상황을 주시하는 역할을 맡았다. 눈을 책으로 향하면서 실제로는 운동장을 바라보는데 그는 이력이 있었기 때문에 일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

  동지들의 열렬한 환영이 쏟아졌다. 모두들 결연한 표정이었다. 3학년 1 반장이자 전교야식연대 위원장 지대공이 앞에 나서서 나를 끌어안아 주었다. 따뜻하고 포근함에 그의 진심이 느껴졌다. 

- 문도야, 공문도야, 손에 우리 조직의 사활이 달려있다.

  알고 있었다. 나는 너무도 알고 있었다. 기대와 걱정으로 짬짜면처럼 뒤섞인 모두의 눈길이 안쓰러워 눈길을 돌리니 그들의 주린 배가 보였다. 나는 우리 조직원들의 눈을 하나 하나 가만히 바라보았다. 결연한 의지같은 것이 눈에서 눈으로 전달되었다. 말하지 않아도 있는 초코파이만이 아니다. 나는 짐짓 호기를 부려본다. 

- 짜식들, 걱정말고 공부나 열심히들 하고 있어라. 조금만 기다려라. 형님이 번개처럼 다녀와서 터지게 먹여주마.

  모두들 박수를 친다. 마치 이미 야식이 도착하기라도 것처럼 환호가 넘실거린다. 20 09. 아직은 소란을 피워도 좋을 시간이었다. 

-  자, 남았다. .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자.

  미련을 남기지 않고 나는 교실문을 드르륵 밀고 나간다. 발걸음도 위풍당당하게.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돌아봐야 미련만 남을 뿐이다. 보내는 사람들도 매달리지 않는다. 매달려봐야 어차피 나가야 했다. 아직 20 10분이 되지 않았다. 비어버린 복도는 황량했다. 한기마저 느껴졌다. 조용히 걸으며 나는 계획의 강점과 약점에 대해 생각했다. 모두가 맡은 역할이 있고 하나의 마음으로 계획의 성공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허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정작 알카트레즈를 어떻게 빠져나가며 어떻게 다시 들어올 것이냐는 부분에 대한 계획은 없었다. 지대공은 말을 하지 않았다. 나도 점을 눈치챘다. 학교에 들어오고 나가는 길은 오로지 우뚝 솟아있는 정문뿐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팔뚝만한 두께의 창살이 물샐 없이 배열되어 있다. 안에 들어온 사람으로 하여금 충분히 위협을 느끼게 할만한 것이다. 결국 정문이 아니고는 사람답게 나가고 들어올 길이 없는 셈인데, 문제의 문이 하루 대부분의 시간 동안 닫혀 있다는게 문제다. 열려있는 시간은 오전 7시부터 오전 8시까지, 그리고 오후 10시부터 오후 11시까지. 외의 시간에는 굳게 잠겨 있으며 학생이 아닌 사람들만 통과시켰다. 아니면 담장이다. 2미터 높이의 벽돌담이고 위에는 철조망이 고정되어 있다. 3학년 5반의 가담항과는 다르게 나는 체조선수 출신이 아니었다. 장대 높이 뛰기를 수는 없었다. 날개가 있어 위로 날아올라 넘어갈 있는 것도 아니다.

  더구나 탈출에는 일단 나간 다음에 다시 기어 들어올 있어야 한다는 (탈출의 본질적 정의를 흐리는) 치명적 문제가 있었다. 나갔다가 다시 들어온다라고? 문이 열려있어도 쉬울까 말까한 소리다. 나는 우선 몸을 벽에 바싹 붙인다. 벽과 하나가 되어 감시망을 뚫고자 위함이다. 그리고 귀를 쫑긋 세운다. 복도 바닥이 울리는 소리로 감독 선생의 동태를 파악하고자 함이다. 발소리가 지나간 길만을 골라 일층까지 내려간다. CCTV 설치된 현관이 나타난다. 시계를 쳐다본다. 9, 8, 7, 6약속한 시간이 다가온다. 5, 4, 5과연 녀석들은 시간을 맞춰 전기를 끊을 있을까. 2, 1. 지금이다! ! 하는 소리와 함게 세상이 깜깜해졌다. 주어진 시간은 10 뿐이다. 칠흑보다 진한 어둠을 뚫고 담벼락까지 내달린다. 판옵티콘이라도 되는 옥상의 감시탑은 끊임없이 돌아간다. 학교 담장에 가까스로 다다를 무렵에 다시 전기가 들어온다. 다시금 달을 닮은 타원형의 불빛이 애꿏은 운동장의 흙바닥 위에서 공전한다. 밝아졌던 세상이 어두워지고 어두워졌던 세상은 이내 밝아진다. 천천히 어둠을 따라 이동한다. 미리 숙지한 CCTV 사각지대만을 따라 은밀하게 움직인다.  

*

  20 13. 다시 학교 담장에 바싹 붙었다. 마치 담장과 하나가 것처럼. 아직까지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어둠 속에서 복도쪽 창문의 동태는 눈에 간명하게 들어왔다. 1층과 2층과 3. 가장 구석 계단이 있는 곳에 감독 선생님들이 위치하고 있다. 학주는 중앙 계단에 아예 책상과 의자를 갖다 놓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다. 조금 전의 순간 정전 때문에 학주를 제외한 감독 선생님들의 동태는 잠시 어수선해졌지만 이내 위치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 우리의 바람대로 단순 정전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내려면 시간이 조금 걸릴 것이다.

  20 19. 숨을 크게 몰아쉬고 3학년 4 견강부의 휴대전화를 꺼냈다. (아니 도대체 이렇게 무거운 것을 어떻게 들고 다닐까.) 문자 메세지를 3학년 11 강투석의 휴대전화로 보낸다. 익숙치 않아 자꾸만 엄지 손가락이 헛돈다. 번을 지우고 다시 썼다. 무슨 의미가 있어 보내라는 암구호가 아닌 했다. 그럴 바에야 쓰기 쉽게 짧게라도 만들 것이지.  

/ 동측 담장에 달이 걸렸다네. 손을 뻗어 잡을 있다면 좋으련만. /

  쉽게 말하자면 첫번째 포인트에 도착했다는 뜻이다. 휴대전화를 조용히 닫았다. 그러나 작은 소리도 크고 웅장하게 들릴 정도로 세상은 고요해져 있었다. 어디선가 울어 제끼는 새의 노래와 세상 어느 곳에서 달려와 세상의 또다른 어느 곳으로 달려가는 차의 울음, 그리고 이른 귀뚜라미의 방정맞음, 멀리 보이는 아파트 단지의 불빛은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같은 간격으로 배열되어 있었고 하늘 곳곳의 가로등은 의미없을 뿌연 불가루를 공중에 뿌렸다. 

  20 23. 답장이 바로 오지는 않았다. 조금 늦어지는 것은 아닌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잠시 눈을 감고 임무를 완수했을 때의 모습을 그렸다. 아마 나는 엄청난 환영 속에 교실로 입성하게 것이다. 감독 선생님의 눈을 피해 책상 아래에서 손에서 손으로 비닐 봉지가 전달될 것이다. 감독 선생님의 눈을 피해 우리는 비닐 봉지 속의 떡볶이를 입에 집어 넣을 것이다. 역시 감독 선생님의 눈을 피해 고개를 숙이고 떡볶이를 오물거리며 공부하고 있는 척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기뻐할 것이고 자랑스러워 것이다. 우리는 불합리한 강요에 맞서 싸웠고 끝내 이긴 것이다. 문제는 떡볶이를 먹느냐 마느냐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의 권리를 증명하는 것이다. 우리는 오라면 학교에 오고, 가라면 집에 가고, 공부하라면 공부하고, 쉬라면 그때 쉬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교련 선생이 아니라 누구도 교련하듯 우리를 다룰 수는 없다. 몰래 밖으로 나가 떡볶이를 사오고 눈을 피해 그걸 씹으면서 우리는 마음것 조롱할 것이다. 우리를 이렇게 가두어 놓은 사람들을. 자율 학습을 강제로 시키는 사람들을. 

  바로 그때였다. 어디선가 그림자가 나타났다. 소스라치게 놀랐다. 경비 아저씨나 순찰 중인 감독 선생님 하나에게 걸린 알았다. 아찔했다. 나도 체육실로 끌려가 먼지나게 맞을 알았다. 그림자는 말했다. 

- 달도 밝은 밤이로다.

  자세히 보니 그는 3학년 10 역세권이라는 녀석이었다. 휴우, 다행이다. 까딱했으면 우리 조직이 산산히 와해될 했다. 가방을 들쳐 모양새를 보자니 역세권이도 야간자율학습에서 도망치는 중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긴 그는 순순히 열시까지 남아있는 법이 없었다. 매일 감시를 피해 담을 넘었다. 집에 빨리가서 저녁을 먹고 드라마허준 봐야한다는게 이유였다. 그의 벗들은 입버릇처럼 3 얼마나 중요한 시기인데허준때문에 인생을 포기할 수는 없지 않겠냐, 그를 설득하려고 들었다는데 그는허준때문에 감동을 받아 한의사가 된다면 도리어 인생을 성공하는게 아니겠느냐 천연덕스레 대꾸했다고 한다. 정말 소문대로 독특한 녀석이었다. 

- , 너도허준보러 가냐?

- 아니, 나는 야식 사러가는거야.

- 아하, 그러니까 너도 그러니까 조직…….

- 맞아. 전교야식연대라고 하는거야.

- 이름이야 어쨌든.

  그는 야식에 관심이 없었다. (관심이 있을 이유가 없었다. 언제나 아홉시가 되기 전에 집에 갔으니까.) 안의 휴대전화가 드르륵거렸다. 메세지가 왔다. 열어보기도 전에 앵앵거리며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아마 별관의 화재 경보기를 동작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경비 아저씨가 별관쪽으로 이동하려는 기색이 없었다. 복도쪽 창문을 흩어보니 감독 선생님들은 자기 자리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학주도 여전히 자리에서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그런데 돌연 감시탑의 불빛은 원을 그리지 않았고 앞뒤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밀 검색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화재 경보기를 이용한 소요가 먹히지 않았을 어떤 복안이 있는지 나는 모른다. 시나리오의 부분은 내게 오픈되지 않은 것이었다. 일단 나는 경비 아저씨가 지키고 있는 정문을 통과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거꾸로 건물에 다시 돌아갈 수도 없다. 운동장을 휘저으며 다가오는 불빛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점점 빠른 속도로. 역세권이가 목장갑을 던져주고는 재빨리 엎드리더니 말했다. 

- 어서 이걸 손에 끼우고 담을 넘어. 그러면 우리 잡히고 만다.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나는 그의 거듭된 독촉에 장감을 손에 끼웠다. 그리고 그의 등을 밟고 재빨리 담을 타고 올라갔다. 철조망에 손이 따끔거렸고 얇은 교복 바지의 일부가 찢어졌지만 다행히 반대편의 상쾌한 밤바람 속으로 뛰어 내릴 있었다. 뒤이어 어떻게 넘어왔는지 역세권도 뒤따리 담을 넘어왔다. 보기와는 다르게 운동신경이 제법인 건지, 매일 하다보니까 노하우 같은 것이 생긴 것인지, 백팩을 매고도 나보다 훨씬 수월하게 넘어온 것처럼 보여 신기한 일이기는 했다. 나는 장갑을 벗어 그에게 던져 주었다. 

- 도와준거지? 우리 조직 일원도 아니고 야식에도 관심없는데.

  그는 고개를 으쓱해 보인다. 

- 글쎄…….

- 아무튼 고마워.

- 그거야 . 아무튼 허준시작하기 전에 집에 가야해서 이만…….

  놈의허준타령. 그는 옷을 털더니만 아파트 단지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나는 반대쪽을 향해 걸음을 옳겻다. 걷다가, 빠른 걸음으로 걷다가, 서서히 뛰다가, 전력으로 달렸다. 소림시장의 욕쟁이 할머니에게, 먹고 떡볶이를 사러. 어쩌면 이번 거사가 성공할런지는 모르겠다는 희망적인 생각이 들었다. 다시 어떻게 들어올지가 관건이기는 하지만. 물론 마음 구석에 불안한 마음이 남아있기는 했다. 화재경보기가 그렇게 늦게 울렸는지. 감독 선생님들과 경비 아저씨가 예상대로 반응하지 않았는지. 나를 추적하는 듯하던 감시탑의 불빛도 마음에 걸렸다. 그러다 비로소 휴대전화에 생각이 미쳤다. 답장이 왔었는데 미처 확인해보지 못하지 않았나. 소림시장 입구에 도착해 잠시 멈추고 숨을 고르고 3학년 반이었나 아무튼 견강부에게 빌려온 휴대전화를 열었다. 초록색 액정 바탕 위에 문자가 하나 도착해있는데, 그것은

/ 손 안에 달빛은ㄱ자이 바게 이싸. ㄷ모쳐 /

  이게 소리야. 뭐라고 쓰려다가 거야? 

  잠시 고민하다가 포기하고 휴대전화를 덮는데 누군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 저기요, 학생. 지금 시간이 어떻게 되나요?

- 아, . 지금은 여덟시 삼십분 정도

  고개를 들어보니 익숙한 얼굴이 인자한 미소를 띠고 있다. ! 어디서 많이 보던 얼굴이교장 선생님이다. 방금 확인한 휴대전화의 문자메세지가 (아직은 말인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어쨌든 긍정적인 내용은 아니겠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ㄱ자이 바게 이싸 뭔지는 모르겠지만ㄷ모쳐 뭔지는 것도 같았다. 바로 순간 억센 힘이 뒤에서 양쪽 팔을 결박했고 순간 나는 아찔함을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았다.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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