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1. 너 그거 아니?
낙농콩단

031. 너 그거 아니?

by 김영준 (James Kim)

  너 그거 아니? 가위말이야. 가위. 날이 있는 두 개의 쇠를 교차시켜 사북으로 중앙을 고정시키고, 지레의 원리를 이용하여 다리를 벌렸다 오므렸다 하여 뭔가를 자르는 그 가위가 아니라, 그……

무서운 가위 말이야.  꿈에 나타나는. 말하는 나나 듣는 너나 뭘 말하고 있는지는 피차 잘 알고 있겠지만 그래도 설명하기가 참 애매하네. 고작 '무서운 가위'라고 밖에 표현을 못하다니 내 국어 실력도 참 젬병이야. 그냥 가위를 설명하듯이 한 문장에 딱 끊어서 알차게 풀어내지 못하다니. 아무튼 너도 알겠지. 내가 지금 하려는 얘기가 무슨 '가위'에 대한 이야기인지. 가위, 얘기만 꺼냈는데도 오싹한 게 꺼낸 얘기를 다시 집어넣고 싶어진다. 하지만 어떡하니? 한 번 꺼낸 얘기는 무슨 일이 있어도 마무리를 해야지. 안 그래? 대한 남아의 자존심과 패기가 있지. 여기서 판을 접고 구석 가서 벽 보고 쭈그려 앉아 벌벌벌 떨고 있을 수는 없잖아. 그게 꿈에 나타나는 '무서운 것'이지 현실에 진짜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잖아. 그래도,


 

무섭다. 괜히 얘기를 꺼냈나봐. 국으로 가만히 있을 것을. 국에다 밥이나 말아먹고 가만히 배 두드리면서 텔레비젼이나 볼 것을. 어쩌자고 그런 얘기를 꺼냈을까. 참 후회가 막심이로다. 너는 어떠니? 너도 무섭니? 이제 막 얘기를 시작했는데도 양 손바닥으로 귓구멍을 틀어막고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라며 발악하고 싶을 만큼 무섭니? 왼편 상단에 '뒤로' 버튼을 눌러버리고 싶을 만큼 무섭니? 아니면 오른편 상단의 'X표'를 눌러버려 창을 닫아버리고 싶을 만큼 무섭니? 뒤에 뭐가 있을까 돌아보기가 겁나지는 않니? 목덜미에서 소름이 와글와글 돋지는 않니? 그렇다고 너무 무서워하진 말아. 울지 말고 뚝. 미안. 미안 내가 잘못했어. 시작부터 이렇게 겁을 주다니. 사실 나도 무서워. 아마 너만큼은 무서울 거야. 모르긴 몰라도 너보다 더 무서워하고 있을런지도 몰라. 그래도, 



 

'가위'에 대한 얘기를 하기는 해야될 것 같아. 벌써 운을 띠었으니까. 사실은 말이지. 나한테는 몹쓸 병이 하나 있거든. 그 병이 어떤 병인고 하니, 한번 시작한 얘기는 절대 중간에서 끊지 못하는 병이야. 참 희한형 병도 다 있지? 그러니까 한번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에'로 시작을 했으면 '아주 아주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을 봐야 직성이 풀린다는 거야. 물론 그때까지 순순히 들어주는 사람이 없지. 얼마나 바쁜 세상인데 한가롭게 남의 이야기나 들어주고 앉아 있겠어. 안 그래? 모두들 중간에 말을 끊거나 슬그머니 사라지거나 하지. 그래도 난 이해해. 나도 괴롭겠지만 아마 그들도 꽤나 괴로울 거야. 그래도 어쩌니. 그건 나의 몹쓸 병인데. 사람들이 그렇게 도망치는 것을 보면 난 별로 '이야기'에 재주가 없나봐. 남들이 귀를 쫑긋 세우고 눈을 반짝이며 '그다음'을 따라 걸음을 옮기게 할 만큼 재주가 있지는 않은가 봐. 이런 병을 주려거든 그런 재능을 주던가, 그런 재능을 주지 않으려던 이런 병을 주질 말던가, 뭔가 아귀가 맞아 떨어지는 부분이 있어야 하는데, 그놈의 야속한 신이 하는 짓이란 언제나 이 따위지. 아무튼 나는 그래서 가능하면 '운'을 떼지 않으려고 노력을 해. 이를 꽉 다물고 항문을 꽉 조이고 정신을 퍼뜩 처리고 노력을 하지. 그런데도 그게 또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벌써 얘기를 시작하고 있더란 말이야. 꼭 지금처럼. 



 

  난 원래 가위에 잘 눌리는 체질은 아니었어. 가위를 두고 체질을 운운하니 조금 이상하기는 하지만 아무튼 그랬어. 거 왜 있잖아. 비가 구질구질하고 축축하게 내리는 여름날. 천둥 번개로 온 세상이 번쩍 번쩍하고 야간 자율 학습이 정말 미친놈 더 미치게 하듯 하기 싫은 날. 그런 날이면 애들은 어김없이 무서운 얘기를 속닥거리곤 했지. 그때 꼭 빠지지 않고 어김없이 등장하는 것이 또 가위에 눌린 경험담이었어. 그럼에도 나는 한 번도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했지. '눌린다는'라는 개념 자체가 전혀 와닿지 않았던 게야. 설마 그런 일이 일어날까, 우리 동네에 지하철이 들어오고, 삐삐라는 것이 세상에 등장하기 시작하고, 반도체와 자동차가 전 세계로 수출되는 세상에서? 그렇게 생각했지. 하긴 그렇잖아. 자는 도중에 시커먼 게 갑자기 나타나서 몸을 눌러대고,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으며, 소리를 지르려 해도 목소리가 전혀 나오지 않게 된다는 것이 말이야.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쉽게 납득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 천성적으로 명랑했던 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가위눌림에 대해 얘기하는 애들을 향해 그 '시커먼' 것이 혹시 '시커먼스'가 아닐까 하는 제법 재치 있는 농담을 날렸지. 그리고는 배를 잡고 웃어댔지. 물론 나를 빼고는 아무도 웃지 않았어. 겪어보지 않은 자만이 부릴 수 있는 호기였다고 생각해. 


 

  처음으로 가위에 눌렸던 것은 고등학교 3학년때였어. 수학능력시험이 끝나고 일주일쯤 지났을 때였나, 이주일쯤 지났을 때였나. 난 그때 한창 의욕도 없고 동기도 없는 '마지막 기말고사'를 치던 중이었지. 그건 마치 '매직 넘버'를 채워 우승을 확정 짓고 난 다음 정규 시즌 1위 팀의 잔여 경기와도 같아서, 이긴대도 그만이고 진대도 그만인 것이었어. 물론 우리 모두가 대입에 있어 승자였던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마지막 기말고사'가 승부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만큼은 너무도 확실하지 않았겠니. 굳이 '올 수(秀)'로 대미를 장식하고 포옴나게 고등학교를 떠나겠다, 따위의 헛된 욕심만 없다면 그냥 대충 봐도 되는 시험이었어. 그래서… 대충 봤지. 너도 알겠지만 세상에는 모름지기 '시험'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얼마든지 있지 않겠니. 괜히 엄한데 에너지 낭비하다가 더 큰 일을 그르친다면 그것만큼 서러운 것도 없지. 안 그래? 그리하여 대충 흩어보고 대충 시험 보고 또 대충 흩어보는 날들이 이어졌어. 집중력이라고는 약에 쓰려고 해도 없는 내가 '대충'하기까지 하니 공부가 될 리가 없었지. 자꾸만 생각이 자꾸 다른 곳으로 흐르더란 말이야. 아무래도 생각은 물이랑 닮아있는가 봐. 그러니까 이리저리 흘러내리지. 그래서 나는 책상을 정리했지. 구석구석 깨끗하게 닦았어. 건강한 환경에서 건강한 공부가 가능할 테니까. 그런데 또 막상 깨끗이 치워놓고 보니 책상을 어지르기가 싫어지더라. 어쩔 수 없이 '국어'책을 들고 침대에 엎드렸지. 자고로 지지리 공부 못하는 애들이 자리 탓을 하지. 책상에서 하다가 침대에서 하다가, 서서 하다가 앉아서 하다가. 여기서 하다가 저기서 하다가. 그러다가, 

그만 잠이 들었지. 사실 침대에 누워 공부를 하겠다는 생각부터가 글러먹은 게 아닌가 싶어. 난 공부가 안 될 때마다 책을 들고 침대로 갔는데 그때마다 어김없이 잠이 들었으니 말이야. 눈이 글자를 따라가는 속도가 몰라보게 더디어지고, 저 멀리 아련하게 들려오는 산새들의 지저귐이 씹힌 테이프를 듣는 것처럼, 슬로우 슬로우 퀵 퀵, 여름날 개 혓바닥처럼 축축 놀어지더니만 기어코 잠이 들었지. 나도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그렇게 되었던 거야. 사실 '국어' 책이 좀 졸리니?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 멀위랑 다래라랑 먹고 청산에 살어리랏다. 얄리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 졸려졸려 졸리셈. 졸려요 졸려. 그렇게 나는 아주 깊고도 그윽한 낮잠에 빠지게 되었던 거야. 



 

  다시 정신이 들었을때 나는 누웠던 자세 그대로 그 자리에 고스란히 있었어.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지. 내 방의 어디쯤이라는 것을.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어. 항상 왼쪽으로 돌아 누워서 자는 내가 천장 쪽으로 바로 누워 있었다는 것이지. 습관이란 호환마마보다 무서운 법이어서 나는 다시 평소처럼 왼쪽으로 돌아 누우려고 했어. 그러려면 왼쪽 어깨를 축으로 삼아 등과 엉덩이를 살짝 띄우고 허리에 약간 스핀을 걸어야지. 그런데 아뿔싸. 꼼짝달싹할 수가 없었던 거야. 손끝부터 발끝까지 움직일 수 있는 부분이 하나도 없었던게지. 나는 당황했어. 그렇게 묘한 기분은 느껴본 적이 없었거든. 귓가에는 우웅거리는 소리만 자꾸 맴돌았어. 이리저리 움직이려고 해봤지. 왼어깨를 써봤다가, 오른 어깨를 써봤다가, 양쪽 어깨를 모두 써봤다가, 왼발을 구르기도 해보고, 오른발을 구르기도 해보고. 그러나 소용없는 일이었어. 몸이 내 말을 듣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어. 분명히 끝에서부터 끝가지 신경은 모두 살아있고 내 의지대로 동작하고 있었거든. 문제는 내가 통제권을 잃은 게 아니라 뭔가가 통제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이었지. 아주 그악스러운 힘으로. 그건, 

시커먼스, 시커먼스가 아니었던 것만은 확실한 듯해. 

  

 

  식은 땀이 버쩍버쩍 났지. 입 안이 마르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는데 아무 소리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어. 그런데 그때 나는 집에 혼자 있었잖아. 어차피 누가 들어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그럼에도 소리부터 지르려고 하다니. 이상한 일이기는 해. 텅 빈 집 안에서 혼자 소리를 지른다고 누군가 가위로부터 나를 구해주러 달려올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아무래도 '공포'와 '비명'은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 소리 내어 두려움을 표현함으로써 공포심의 일부가 덜어지는 것이지. 섬머 시즌의 공포영화들을 보렴. 가냘픈 여주인공이 '무서운 것'에 쫓기매 다짜고짜 소리부터 지르잖니. 꺄악. 꺄악. 꺄아악. 정말로 소리를 지르면 두려움의 어느 정도가 희석되어 버리는가 봐. 아마도 그런 거겠지? 아무튼, 하여간, 그래서, 그러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커먼스, 시커먼스가 아닌 그것은… 너무 무서웠어.  나는 한참 동안을 정말 꼼짝도 할 수 없었지. 손 끝에서부터 발 끝까지 하나도 움직일 수 없었어. 그냥 그대로, 그렇게 그대로 가만히 있었지. 모든 근육이 굳어버린 상황이었지만 신기하게도 눈꺼풀만은 움직일 수 있었는데, 슬그머니 눈을 떠보니 시커먼스가 아닌 시커먼 어떤 것이 눈앞에서 아른아른거렸어. 아른아른. 어른어른. 얼마나 걸렸을까.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데. 까딱하면 돌아오지 못할 줄 알았는데 그래도 돌아올 수 있어 다행이었어. 얼마나 얼이 빠졌는지 한동안 그 자세 그대로 누워 있을 수밖에 없었지. 



 

  그 후로 한동안은 가위에 눌리지 않았어. 4년이 지나도록 그런 일이 없었지. 나는 서서히 가위눌림에 대한 두려움을 잊어갔어. 그냥 그때 당시 내가 너무 피곤했던 나머지 아주 이상하고도 기묘한 꿈을 꾸었던 것이라고만 생각했어. 논리적으로 생각할 때 그런 일이 현실에 넘쳐날리가 없는 거야. 우리 동네에 들어온 지하철이 새벽까지 연장 운행을 시작했고, 한창 유행했던 삐삐가 휴대전화로 대체되기 시작했고, 반도체와 자동차가 세계 시장으로 수출되고, 심지어 프로야구에 용병까지 들어오는 시점에서 그런 일 따위가 일어나다니 어디 말이나 되니. 밖에 나가서 길을 걸어봐. 누구도 '어젯밤에 가위 눌렸어'라는 표정으로 길을 다니지는 않아. 텔레비젼을 켜봐. 아홉 시 뉴스 앵커는 가위눌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듯 언제나 엄숙한 표정이야. 드라마 속 주인공들도 가위 따위에 자기 삶의 일정 부분을 할애하지는 않잖아. 가위눌림이 정말 그렇게 실제적인 일이라면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줘야 하는 게 아니겠니? 나는 어느 정도 자신감을 되찾았어. 그때의 공포감이 많이 희석되었던 탓이겠지. 그러나, 

끝이 아니었어. 두 달쯤 전부터 갑자기, 다시 가위에 눌리게 되었던 것이야. 심할 때는 일주일에 세 번가량 가위에 눌렸지. 일주일이 더도 덜도 아닌 칠일이니까 한 주의 절반을 가위눌리는 밤으로 보냈다는 뜻이 되지. 시커먼스가 아닌 시커먼 그것은 다양한 위치에서 나를 공격했어. 하루는 위에서 가슴을 눌렀고 하루는 묵직하고 차가운 두 손으로 목을 졸랐어. 그리고 또 하루는 옆에서 기어 들어와 허리를 - 지금 와 생각해도 참으로 창의적인 전략이었어 - 감았지. 정말 아팠어. 꼼짝할 수가 없었는데 아파서 꼼짝할 수가 없었던 건지, 꼼짝할 수가 없어서 꼼짝할 수가 없었던 건지 모르겠어.

 

  그렇게 한 달이 지나니 몸이 절로 말라갔지. 당연하지 않겠니? 언제나 잠은 부족하지, 간신히 잠이 들면 가위가 눌려 발버둥치다가 간신히 깨지. 새벽 네시던 다섯 시던 한 번 깨면 무서워서 당최 다시 잠들 수가 없지. 그렇게 한 달을 지내봐. 절로 입맛이 떨어지고 절로 살맛이 없어진다니까. 마른 모래를 씹는 기분이었지. 보다 못한 어머니가 평소 다니던 절에 찾아가 스님께 '어떡하면 좋겠습니까?'라고 여쭈었는데, 스님은 아무 말도 없이 '불경'을 하나 내어 주셨대. 그리고 오십 페이지에 있는 '관세음보살몽수경'을 잠들기 전에 세 번씩 외우라고 덧붙이셨다지. 아무래도 스님도 이유를 잘 몰랐던 게 아닌가 싶어. 

관세음보살몽수경 

나무 관세음보살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여불유인 여불유연 
불법상인 상락아정 
조념관세음 모념관세음 
념념종심기 염불불리심 
천라신 지라신 인리난 난리신 
일체재앙 화위진 
나무마하반야라밀 

  믿거나 말거나. 그래도 믿어봐야지 어쩌겠어. 나는 '관세음보살몽수경'을 읽어보기로 했어. 조금 어색하기도 하고, 발음이 어렵기도 하고, 당최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웅얼웅얼거리기만 하니 스스로가 참 한심스럽게 느껴지기도 하고. 헷갈리기도 했지. 잠들기 전에 '관세음보살몽수경'을 외우는 것과 잠들기 전에 팝송 가사를 외우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 그래도 달리 방법이 없었어. 일단은 스님이 말씀하신 대로 해보는 수밖에. 정말로 효과가 있었는지 없었는지에 대해 지금 당장 설명해 주기는 어려울 것 같아. 어떤 날은 효과가 있었고 어떤 날은 없었거든. 나도 잘 모르겠어. 시간이 흘러 조금 더 많은 경험을 쌓아 완전히 가위눌림을 극복하고 나면 그때 가서 명쾌한 결말을 보여줄게. 응? 시시하다고? 이렇게 흐지부지 이야기를 끝내버리면 어떡하냐고? 그래서 아까 그랬잖아. 나는 별로 '이야기'에 재주가 없나 보다고.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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