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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3. 채식주의자

낙농콩단/Season 1-5 (2000-2005)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03. 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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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로인 유한책임회사 고객지원팀에 새로 들어온 바브 E. 큐 (Barb E. Cue)를 두고서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 것은 늦은 겨울 무렵이었다. 요는 그가 채식주의자라는 것이었다. 이 대목에서 여러분이 아셔야 할 사실이 있다면 케레혼(Kerehwon)이 육식 문화가 대단히 발달한 나라라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발달했다’라는 말은 비단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차원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육식이 사회 구성원간의 약속으로 그 사회의 질서와 규범을 유지하는데 긴밀하게 기능하고 있다는 뜻이다. 때문에 식문화에 있어 다양한 담론과 관용이 대두하게 된 21세기로 접어든 시점에서조차 케레혼 사람들은 고기를 먹지 않는 삶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그들은 고기가 삶과 사랑과 일을 추동할 힘을 준다는 사실을 결코 의심치 않았고, 따라서 조직 문화와 인사 관리의 관점에서도 고기를 잘 먹는 사람이 일도 잘한다는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여기에 양념처럼 화제성을 더한 것은 그들의 사명이 ‘서로인’이라는 점과 당사자의 이름이 ‘바브 E. 큐’라는 점이었지만, (아니, 서로인에 다니는 미스터 바비큐씨가 채식주의자라고? 예끼, 이 사람아. 농담도 정도껏이지!)

 

  바브 E. 큐를 둘러싼 사내 구성원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고객지원팀 팀장 휴 잭스 (Hugh Jax)가 있었다. 그는 처음부터 한결같이 바비가 채식주의자라는 주장을 믿지 않았다. 그런 주장은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그렇게 주장만 한다고 고스란히 믿어줄 것인가? 말도 안되는 소리다. 잭스 씨에게는 축이라는 게 있었다. 소싯적부터 촉이 참 좋다는 이야기를 늘 들어왔던, 그 촉 하나로 팀장까지 승승장구 올라온 그였다.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뭔가 석연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바비라는 녀석이 사내 동료 및 상사들 앞에서는 자신이 채식주의자라고 포장하면서 뒤에서는 고기를 뜯고 있다면, 그 새끼가 자신을 포함한 서로인의 다른 직원들을 진실로 핫바지 취급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뿐만 아니라 여기에는 조직 관리자의 한 사람으로 조직 구성원들을 관리해야 하는 의무도 있다. 상사의 입장에서는 채식을 고집하는 부하 직원을 경계할 이유가 충분하다. 그들은 귀찮고, 까다롭고, 성가시고, 비용도 많이 잡아 먹으며, 손이 많이 간다. 다른 구성원과의 융화에 있어서도 좋은 점수를 받기 어려운 것은 물론이고 말이다. 

 

*

 

  처음 그 소문을 들은 것은 구내 식당에서 해밀턴 버거 (Hamilton Burger) 대리와 같이 식사를 하던 때였다. 그 날 저녁에 고객지원팀 정기 회식이 예정되어 있어 그냥 점심으로는 돼지 목살에 상추쌈을 싸서 간단히 때우려는 차에 햄 대리가 문제의 바브 E. 큐라는 녀석에 대한 이야기를 거낸 거였다. 

 

 - 바비라는 친구 있잖습니까? 이번에 새로 들어온.

 

 - 응, 자기야. 그 친구가 뭐?

 

 - 아, 글쎄. 채식주의자라네요. 

 

 - 뭔 주의자? 요즘이 어떤 시댄데 자기는 아직도 사상 타령이야? 

 

 - 아니요. 팀장님. 사상이 아니라 풀만 뜯어먹고 산다구요. 나물 채. 밥 식. 

 

 - 아, 채식주의자. 이젠 이해가 가네. 근데 뭐? 채식주의자? 어머! 그 친구가? 정말로 풀만 먹어? 

 

 - 전들 압니까. 직접 보질 않았는데. 그렇지만 같이 점심을 먹어 본 휠렛 미뇽 (Filet Minyon) 대리가 하는 말이 글쎄 메추리알이 있는데 흰자만 골라 먹었대요. 

 

 - 흰자만? 예, 흰자만. 하, 고것 참 골때리네. 자기야, 원래 채식하는 사람들이 메추리알 노른자는 안 먹어? 

 

 -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듣기로는 채식주의자로 여러가지 종류가 있다는데. 메추리알 노른자을 못 먹는 종류인가 봅니다.

 

 - 별 종류가 다 있네? 그럼 그런 종류를 뭐라고 부르는데?

 

 - 모르겠습니다. 매간? 매추테리안? 매추리알 캔디데이트? 

 

 - 참, 자기야. 그 친구 술도 못하잖아? 

 

 - 예, 맞습니다. 

 

 - 술도 못하는데 고기도 못 먹는거야? 

 

 - 못 먹는게 아니라 안 먹는단 겁니다. 

 

 - 어머, 자기야, 나랑 장난하니? 둘러치나 메어치나 그게 그거지. 

 

 - 예예, 그럼요. 맞습니다, 팀장님. 

 

  휴 팀장은 햄 대리에게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여전히 고기 먹기를 거부하는 인간이 있다는 사실이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건 뭐랄까 고기를 먹어야 하는 다름 사람들을 모욕하는 처사가 아닌가?  

 

 - 근데 자기야, 그 친구 스님이야? 

 

 - 스님은 아닐 겁니다. 

 

 - 하긴 스님이 회사에 들어올리가 없지. 그럼 우리 몸보리(몸보신 보장 이사회) 에는 안들어오겠네?

 

 - 아마도요. 

 

    휴 팀장은 양손을 깍지 끼워 턱에 가져다 대었다. 자라다 만 수염들이 제대로 깎이지 않아서 까칠까칠했다.

 

 - 음, 조금 그렇네. 자기야, 지금부터 '데프콘' 발령하자. 당장 오늘 회식자리에서부터 우리 몸보리의 명예를 걸고 놈에게 고기를 먹일 수 있었으면 좋겠어. 가능할까? 내 사비를 털어넣는 한이 있더라도 해보고 싶은데 도와줄 수 있겠어?

 

 - 예, 팀장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자기야, 내가 항상 말하잖아. 남자는 무조건 술과 고기라고. 

 

 - 맞습니다, 팀장님.

 

 - 어디 한 번 채식주의자 바비큐에게 술과 고기를 먹여보자. 화이팅!

 

  휴 팀장은 음흉하게 웃으면서 깍지 낀 손에 힘을 주었다. 우두두두둑. 바비큐, 얼마나 버티나 두고보자. 우두두두둑.

 

 

*

 

  우리 서로인 고객지원팀은 또다시 경쟁사를 물리치고 JD 파워 1위를 차지했다. 경영진의 높은 사람들이 내 공적을 인정해주지 않는 것은 하등의 상관이 없다. 하지만 함께 고생한 부하들에게 정당한 대우가 돌아가지 않는 상황에는 문제가 있다. 오늘날 비즈니스는 전쟁이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군사들의 사기다. 사기가 떨어진 군사들을 데리고 어찌 회사를 구하겠는가. 내 사비를 털어서라도 이들에게 술과 고기를 먹이겠노라.

 

  그 날 저녁 정기 회식 자리를 시작하면서 휴 잭스 팀장은 대충 이런 내용의 연설을 했다. 팀원 중에는 진심을 다해 그 말에 깊이 공감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반대로 뭔 개소리냐며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찐하게 소고기 회식을 해야한다는 목표만큼은 공유했으므로 모두가 환호하며 박수를 쳤다. 

 

  이윽고 술과 고기가 나왔다. 양념에 알맞게 지워진 소갈비 덩어리가 은빛 쟁반에 담겨서 서빙되자 곳곳에서 고기 굽는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와 동시에 맛있는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서로인 고객지원팀에서 그 냄새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술잔이 돌기 시작했다. 케레혼 사람들이 즐기는 술은 사실 술이라기 보다는 공업용 알콜에 근접한 것이었는데 평생을 케레혼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그게 최고의 술이라고 생각했다. 저렴하고 부담없는 서민과 직장인의 친구라고. 팀원을 하나로 끈끈하게 묶어주는 마법의 묘약이라고. 

 

  사실 이 회식 자리를 잡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는가. 특히 여직원들. 케레혼이 어떤 성스러운 약속 위에 만들어진 나라인지 모르는 어린 계집애들이 "팀장님, 저 오늘 안돼요." (어머, 자기들, 안돼긴 뭐가 안돼.) 혹은 "오늘 할머니 제사인데." (아, 글쎄. 할머니 제사는 보내줄테니까 잠깐 들러서 맛이나 보고 가라고.) 따위의 핑계를 대며 칭얼칭얼 콧소리를 냈더란 말이다. 그 골치 아픈 저항세력을 당근과 채찍으로 어루만져가며 만든 회식 자리다. (‘어머, 사실 자기들 안 와도 돼. 바비큐만 오면 되는데. 아니지, 와야 돼. 그 놈의 잘나 빠진 채식주의가 산산히 무너지는 꼴을 모든 직원 앞에서 보여주고 싶으니까. 얼마나 재미지겠어.’)

 

 

 

  그 재미에 대한 기대를 한껏 담아 휴 팀장은 푹신한 방석 위에서 크게 몸을 틀었다. 내 위로는 하나도 없고 내 아래로는 스무 명이나 되고, 이 얼마나 이상적인 회식의 광경인가. 내 밑으로는 다 달리는기라. 기쁨을 만끽하고자 그는 다시 한 번 일어나 숟가락을 들고 두 번째로 일장연설을 시작했다. 

 

 - 자기들, 주목! 이…… 예로부터 우리 조상님들은 말이야. 이…… 아랫사람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서 술과 고기를 먹였다고들 하잖아. 그렇지?

 

  말의 중요한 부분에서 뜸을 들이는 것은 그의 오랜 버릇이었다. 자신이 평생을 전도해 온 학설인 주지육림론을 오랜만에 펼치니 기분이 좋았다. 주지육림론은 원래 깊고도 깊은 학문이어서 뒷쪽에 보다 깊고 무척 은밀한 파트를 가지고 있는데, 그 중 술과 고기에 관한 부분만을 일단 언급한 연유는 동석한 여직원들을 배려한 조치였다. (‘뭐, 여직원들을 새하얗게 질리게 만들고 그 반응을 구경하는 것도 나름대로 재미있는 일이기는 하지만 오늘의 타겟은 여직원들이 아니라 '풀때기의 화신' 바비큐니까 일단은 참지 뭐. 뭇 남성들이 궁금해할 그 다음 부분은 곧이어 여직원들을 보내고 이어질 2차 단란주점에서 단란하게 마이크를 붙잡고 강의하면 되니까.’)    

 

 

 

  드디어 '아기다리고기다리던 때'가 왔다. 휴 팀장은 좌측 끝에서 우측 끝까지 손수 술을 한 잔씩 내렸다. 위하여. 건배! 한 바퀴 파도타기가 지나가자 팀원들이 살짝 헤롱거리며 느슨해지는 것이 보였다. 휴 팀장은 햄 대리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바비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려는 신호였다. 술과 고기를 입에 넣느라 정신 없는 팀원들의 틈바구니로 파고들어 햄 대리는 바비의 옆 자리로 비집고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 이봐! 새로 온 친구!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 바브  E. 큐입니다. 

 

  사실 몰라서 물어본 것은 아니었다. 채식주의자 이름이 바비큐라니. 햄 대리는 다시 한 번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고 애써 진지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 그래. 미스터 큐.

 

 - 바비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햄 대리는 씨익 웃어보였다. 물론 속으로만. (‘이 친구야, 안 그래도 당연히 바비라고 부를거였어.’)

 

 - 뭐 좀 먹었나? 내가 술 한 잔 주고 싶어서 왔지.

 

 - 예, 먹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술을 못 합니다.

 

 - 술을 못 해? 허, 참! 술을 잘 해야 한다는 건 우리 서로인 고객지원팀 직무 요강에도 들어가 있는 내용인데 도대체 어떻게 들어온 거지? 팀장님이 아시면 큰 일 나겠네.

 

  바비큐는 대꾸를 하지 않았다.

 

 - 그러면 고기라도 내가 한 점 구워 먹여줄께. 이 야들야들한 소갈비 살을 한 점 집어서 뽀송뽀송한 상추에 올린 다음에 쌈장을 덜어서 올리고 파무침을 살짝 올리면!

 

 - 죄송합니다만 햄 대리님. 제가 채식주의자여서요.

 

 - 채식주의? 고기도 안 먹어? 고기도 안 먹는다고? 진짜야? 우리 서로인 고객지원팀 직무 요강을 완전히 무시하고 들어온 친구네. 솔직히 이야기해봐. 높은 분 중에 누구랑 아는 사이야? 낙하산이 아니고서는 이럴 수가 없어!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일이야!

 

    햄 대리의 과장된 연기 때문에 순간 주위의 시선이 그들에게로 몰렸다. 

 

 - 그럼 뭘 먹나? 지금까지 먹을 게 있었나?

 

 - 파절임도 많이 먹었고요. 깻잎도 집어 먹었고요. 동치미도 떠 먹었습니다. 

 

 - 그걸로 되나? 따로 뭐 시켜줄까?

 

 - 괜찮습니다. 배 부릅니다.

 

 - 저기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스팸이 있는데 저거라도 먹으면 어때?

 

 - 죄송합니다만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채식을 하고 있어서요.

 

 - 채식주의자는 스팸을 안 먹는 거야? 난 처음 알았네. 그럼 저거는 어때?

 

 - 소시지 볶음 말씀입니까?

 

 - 소시지도 아니야? 거 참 음식을 더럽게 가리네. 그럼 이 일을 어쩐다. 어이, 친구들. 여기 자네 동료가 배를 곪고 있어요. 이 더럽게 무심한 새끼들아. 나들만 처먹지 말고 좀 동료를 챙기는 따뜻한 마음을 가져보란 말씀이야. 그리고 어이, 그거 이리 전달해.

 

 - 된장찌개가 아닙니까?

 

 - 된장은 고기가 아니잖아. 그럼 괜찮지 않은가?

 

 - 말씀드리기 조금 그렇습니다만 두부랑 송이버섯 사이에 떠 있는 게 뭔지 아시잖습니까? 

 

 - 아, 채식주의자는 된장도 안 먹는구나. 이런 된장. 이 일을 어쩐다. 따로 뭘 시켜줄까? 그렇지? 그 외에는 방법이 없지?

 

 - 괜찮습니다. 

 

 - 아니야, 아니야. 첫 회식에서 신입사원을 굶길 수는 없지.

 

  햄 대리는 벌떡 일어나서 큰 소리로 휴 팀장에게 허락을 구했다. 팀원 모두 다 들으라는 듯이.

 

 - 팀장님, 우리 새로 온 친구를 위해서 몇 가지만 더 주문해도 괜찮겠습니까? 

 

  휴 잭스 팀장은 인자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리고 양 팔을 높이 들어 동그라미를 그려보았다. 그러자 햄 대리가 신명나게 주방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 이모! 여기 삼겹살 8인분하고 항정살 8인분 갖다 주세요. 나눠 주시지 말고 16인분 다 이 테이블에 놓아주세요. 이 친구 먹일 거니까! 

 

  황당한 표정을 짓는 바비큐 앞에서 햄 대리는 심지어 한 술 더 떠서 팀원들을 향해 이런 엄포를 놓았다.

 

- 이거 니들 먹으라고 시킨 거 아니니까 탐내지들 마! 다 우리 바비큐씨 먹일꺼야!   

 

 

*

 

 

  어찌하여 사람이 고기를 먹지 않을 수가 있는가. 인간은 본디가 잡식 동물인 것을. 잡식. 육식도 하고 채식도 하니까 잡식 동물인 것이다. 휴 잭스 팀장이 채식주의자 바브 E. 큐를 이상하게 생각한 것도 그의 상식에 있어서는 결코 무리가 아니었다. 그는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늘 고기를 먹어왔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매일 고기를 씹어왔고, 행여 구워먹기가 어려운 날에는 끓여먹기라도 했다. 아주 어려서부터 그는 육식이 케레혼 사회를 지탱하는 근간이라고 배워왔다. 때문에 그는 고기를 먹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조직 문화를 저해하면서까지 육식을 거부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좀처럼 이해하지 못했다. 술과 고기를 꺼려한다는 자체가 원래 그 사람의 습관이나 기호라기보단 어쩐지 팀장인 자신에 대한 반항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드디어 휴 팀장이 나설 때가 되었다. 예상대로 바비큐는 햄 대리가 주는 고기를 단 한 점도 (말그대로 한 점도!) 받아먹지 않았다. 햄 대리는 고집스럽고 집요하게 삼겹살과 항정살을 번갈아 권했는데 그렇게 하라고 시킨 휴 팀장 본인이 보기에도 눈쌀이 찌푸려질 정도로 재수가 없었다. (“이건 어때? 이건 먹을 수 있나? 아니야? 그럼 저건? 저것도 안돼?”) 바비큐의 얼굴에 미세한 경련이 일어나려고 하는 찰나에 그는 가만히 잔을 들고 일어섰다. 그의 등장을 위해 준비된 시그날 음악이 있다면 바로 이 순간에 흘러나와야 하는 것일테다. 아주 고전적인 ‘굿 캅, 배드 캅’ 전략. 그는 햄 대리의 목덜미를 잡아 뒤로 끌어내고 (상황극에 지나치게 몰입한 햄 대리는 “아이고! 팀장님! 너무 아파요!”라고 소리를 지르며 나자빠졌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그윽한 눈길로 신입사원 바비큐를 바라보았다.

 

 - 자기야, 햄 대리의 행동은 내가 사과를 할께. 미안하게 생각해.

 

 - 괜찮습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바비큐는 고개를 끄덕거렸지만 여전히 뚱한 표정이었다.

 

 - 그런데 자기야, 햄 대리는 좋은 뜻으로 그런 거야. 우리 서로인 고객지원팀이 항상 이렇게 화기애애하고 팀워크가 쫀득쫀득한 이유는 이렇게 늘상 둘러 앉아서 맛있는 술과 맛있는 고기를 먹기 때문이거든. 그렇지 않나요? 여러분?

 

  먹고 살기 힘든, 그러나 고기는 좋아하는 중생들이 “예, 맞습니다” 라고 합창을 했다.

 

 - 그러니까 너그러이 이해를 해주시고……. 어디보자, 바비큐씨, 이게 '모서리 고기'라는 것인데. 

 

  바비큐의 얼굴이 살짝 굳는 것이 느껴졌다.

 

 - 자기도 한 번 먹어봐. 맛이 정말 기가 막히다니까. 

 

 - 저, 팀장님. 죄송하지만 제가 채식…….

 

 - 채식주의자라고? 알지! 나도 알아! 그런데 한 번 먹어봐. 응? 내가 아는 채식주의자가 있는데 ‘모서리 고기’를 먹고 나서야 진정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았다며 커밍 아웃을 했어. 아, 글쎄. 자기도 먹어보기 전까진 미처 몰랐다는거야.

 

  바비큐는 당황한 듯이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고 어떤 대꾸도 하지 못했다.

 

 - 지금은 어떤지 알아? 소 한 마리를 다 먹어. 한 자리에서.

 

  팀원들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햄 대리를 비롯한 팀장의 특급 딸랑이들은 심지어 배를 잡고 굴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휴 팀장은 나긋하고 정다웁게 말을 이어가며 문제의 ‘모서리 고기’를 상추 위에 얹고 쌈장을 찍어서 바비큐의 입에 넣어주려고 시도했다. 

 

  좌중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화기애애, 직원들은 너도 나도 한 마디씩을 했더랬다. “바비큐씨는 좋겠네.” 혹은 “어머, 팀장님은 바비큐씨만 이뻐하시고.” 혹은 “너무 하십니다. 팀장님. 제가 처음에 왔을때는 저렇게 안해주시고.” 뭐 이런 식으로. 

 

  그러나 오늘의 주인공인 바비큐는 그 모든 영광을 숙연히 물리치며 고개를 돌렸다. 

 

 - 죄송합니다. 팀장님.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전 고기를 안 먹습니다. 

 

  순간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 얼어붙는 분위기. “못 먹습니다”도 아니고 “안 먹습니다”라고? 휴 팀장도 살짝 움찔하기는 했지만 처음부터 순순히 먹어줄거라 생각했던건 아니기에 좋은 말로 재차 권했다. 

 

 - 자기야, 그러지 말고 한번 먹어보면 안될까? 응? 

 

 - 죄송합니다. 

 

  삼차 권한다. 집념 하나로 팀장까지 올라온 그였다.

 

 - 에이, 튕기지 말고 한 번 먹어보지. 자기야, 딱 한 번만. 두 번도 안 말해. 딱 한 번!

 

 - 죄송합니다. 

 

  사차 권한다. 이제 슬슬 임계점에 가까워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 아, 글쎄 좀 먹어보래도? 

 

 - 죄송합니다. 

 

  머릿속에서 불꽃놀이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팀원들 다 보는 앞에서 참을 정도의 능력은 있었다.

 

 - 그래? 알았어. 서운하네. 그럼 술이나 한 잔 받지? 

 

 - 술도 안 먹습니다. 

 

 - 그럼 도대체 자기 먹는게 뭐야? 술도 안 받겠다, 고기도 안 먹는다.

 

 - 채식합니다. 

 

 - 야, 이 미친 새끼야! 그 놈의 채식, 채식, 그 채식 소리 좀 집어 치울 수 없어? 

 

  휴 팀장은 화를 이기지 못해 앞에 있던 술을 자기 입에 마구 털어넣었다. 털어넣는 김에 혼자 취하면 억울한지라 보이는대로 이 놈 저 놈 먹였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얼마나 나를 우습게 봤으면?’ 바비큐의 양팔을 묶어놓고 입에 삼겹살이든 항정살이든 밀어넣겠다고 다짐했다. 꼭꼭 씹어서 넘길 때까지 억지로 턱을 벌렸다 닫았다 하는 한이 있더라도. 하지만 취기 앞에 어느새 무력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다음은, 암전이었다. 

 

*

 

  휴 잭스 팀장이 정신을 차려보니 집이다. 뒤집어지는 속을 부여잡으며 아침에 일어나 필름을 리와인드시켜보니 딱 거기까지만 기록되어 있었다. 괜히 창피하고 괜히 화가 치밀어올랐다. 빌어먹을. 건방진 놈, 네가 나를 거역해? 그러고도 고객지원팀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여기서 잔뼈가 굵은게 벌써 십 수해인데. 내가 마음만 먹으면 너 같은 피라미는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 버릴 수 있어. 녀석도 그걸 모르지는 않을텐데. 혹시…… 내가 만년 팀장이라고 무시하는거 아닐까? 그러지 않고서 어떻게 내가 주는 쌈을 거절할 수 있지? 생각을 해봐. 옛날 전쟁터에서 장군이 사비를 털어 부하들에게 술과 고기를 내렸는데, “저 술 못합니다. 그리고 전 채식주의자에요”라며 거절한 병사가 있었겠냐고. 맞아. 나를 무시하는게 틀림이 없어. 만년 팀장이라 이거지. 십 년안에 나는 명예퇴직해서 슈퍼마켓이나 차릴거고 지는 높이 높이 올라갈 거라는 얘기지. 망할 놈, 죽일 놈, 개 같은 놈. 개 만도 못한 놈.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을 놈, 저기 어디 관재과로 보내서 사다리나 타게 만들어 버릴까. 1층 로비에서 경비나 보고 서 있게 해버릴까보다. 오냐. 두고보자. 조직의 쓴 맛을 보여주마. 내 기어코 너에게 고기를 먹이고 말리라. 그는 이를 드르륵 갈았다.

 

  휴 팀장은 회사에 출근하기가 무섭게 은밀히 햄 대리를 불렀다.

 

 - 자기야, 어제 회식 끝날 때까지 바비큐씨가 고기 한 점이라도 먹었어? 혹시 기억해?

 

 - 아닙니다. 팀장님. 정확히 기억하는데 고집스러울 정도로 거부하더라고요.

 

 - 어머, 정말? 그럼 술은? 한 방울 쯤은 마셨겠지? 

 

 - 그것도 아닙니다. 단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습니다. 

 

 - 그래? 아쉽네. 알았어. 자기 그만 가봐. 

 

  밖으로 나가려던 햄 대리는 다시 살짝 눈치를 살피며 휴 팀장에게 다가왔다. 본능적으로 딸랑이를 흔들어야 하는 순간임을 느꼈던 것이다.

 

 - 사실은 팀장님. 오늘부터 미행을 할까 합니다. 그 친구를요. 

 

 - 응? 미행? 무슨 미행?

 

 - 지도 사람인데 정말 고기를 한 점도 안 먹고 살려고요. 혹시 또 아나요? 퇴근하고 맥도날드나 버거킹, 아니면 KFC에 갈 수도 있는 일 아닙니까? 마트에서 장을 보다가 육포나 닭가슴살을 장바구니에 넣을 수도 있는 거고요.지가 아무리 조심해도 한 번은 걸리겠죠.

 

  아주 이상한 소리는 아니란 생각에 휴 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 알았어. 한 번 해봐. 자기 혼자 너무 무리하지 말고. 혹시 지원이 필요하면 나한테 이야기를 해줘.

 

 

*

 

 

 - 팀장님, 오늘까지 올리기로 한 결제 서류입니다. 

 

  휴 잭스 팀장이 얼굴을 들어보니 바비큐가 서 있다. 때마침이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인 듯 했다. 결제 서류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당장은 속에 있던 화부터 풀어야 했다.

 

 - 어머, 자기 어느 학교 나왔어? 

 

 - 예 학교요? 

 

 - 그래 학교말이야. 

 

 - 노스사우던 나왔습니다. 

 

 - 노스사우던? 거기선 이 따위로 가르치니? 

 

 - 예? 

 

 - 이 따위로 가르치냐고. 

 

 - 죄송합니다. 

 

 - 당최 기본이 안 되어 있네. 이런 서류라는건 자기가 혼자 보려고 만드는게 아냐. 위에 있는 사람들이 보려고 만드는거지. 그런데 이렇게 자기 마음대로 해도 돼? 이거 완전히…… 엉망이야. 웬일이니? 처음부터 다시 해야겠어. 어이구. 자기야, 여기에 색은 왜 넣었어? 응? 궁금해서 그래? 초딩이야 중딩이야? 서류는 예쁘게 만드는게 아니야. 잘 만드는거지. 그런 꽃단장은 자기 여자친구한테 연애편지 쓸 때나 써먹었으면 해. 봐, 여기 또 색깔. 혹시 색맹이야? 자기가 최종 결제할 사람이야? 왜 자기 마음대로 해? 이거 올리면 위에서 뭐라고 하겠어? 자기가 불려가는게 아니라 내가 불려간단 말야. 자기 왜 멀쩡한 사람을 욕 먹일려고 그래. 내가 자기 대신 욕 먹어주는 사람이야? 자기 좀 너무한다. 어디 한번 얘기 좀 해봐. 내가 이렇게 시켰어? 

 

 - 아닙니다. 

 

 - 내가 시킨게 있잖아. 시켰으면 제발 시킨대로만 해. 자기가 뭘 안다고 그래? 이거 장난하자는거 아니야. 아직도 학교에서 레포트 쓰는 걸로 착각하나본데 여긴 회사잖아, 안 그래? 자기야? 우리 다들 비싼 밥 (술과 고기라고 하려다 참았다) 먹고 헛 짓거리하는거 아니잖아. 회사가 자기 월급 괜히 줘? 심심해서? 자기가 뭐 케레혼이 낳은 대단한 천재라도 되는거야? 처음부터 대리가 뭐라건, 팀장이 뭐라건, 부장이 뭐라건, 자기 하고 싶은대로 하면 되는거야? 정말 그래? 그래도 돼? 천재야? 정말 천재면 우리가 따라가줄께. 어디 한번 해보고 싶은대로 해보라고. 이거 부장한테 올리잖아. 걔가 나보고 뭐라고 할 것 같아? 지금 내가 자기한테 한 얘기 똑같이 할거야. 나한테. 알아? 그럼 이거 어떻게 해야겠어? 다시 해와야지. 

 

    휴 팀장의 속사포에 바비큐은 고개를 푹 숙였다. 

 

 - 죄송합니다. 

 

 - 가 봐. 

 

 - 예, 알겠습니다. 

 

 - 가 보라고. 

 

  십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갑자기 말을 너무 많이 해서 그런지 턱이 얼얼했다. 휴 팀장은 물을 입 안에 들이 부었다. 우르르르르. 물 마실때 입을 헹구는 그의 오래된 버릇에 여직원들은 기겁을 했다. 

 

 

*

 

 

  일단 속이 후련해지기는 했으나 이대로 물러 날 수는 없었다. 조직의 쓴 맛을 보여줘야 하는데. 

 

  바로 그 순간에 뇌리를 번개처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아하! 휴 팀장은 서둘러 상의를 챙겼다. “나 일이 있어서 잠깐 나갔다올께.”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혼자 말을 던져 놓고 밖으로 나온 그는 다짜고짜 차를 몰아 정육점으로 달려갔다. 

 

 - 아주머니, 계세요? 돼지고기 다진 것 좀 주세요.

 

 - 어서오세요. 돼지아빠. 그런데 돼지고긴 뭐 하실려고? 

 

  회사에서는 고객지원팀 팀장 동네에서는 돼지아빠로 통하는 남자가 정육점 아주머니에게 답했다. 

 

 - 오랜만에 만두나 좀 만들어 먹을려고요. 어머, 근데 좀 잘게 갈아주실 수 없어요? 

 

 - 만두 만들땐 이 정도면 충분할텐데. 너무 잘면 속을 만들 때 별로 좋지 않아요. 

 

 - 상관없으니까 팍팍 갈아주세요. 팍팍이요.

 

 - 그래요, 그럼. 

 

  알갱이가 보일듯 말듯 아주 미세하게 분쇄된 돼지고기 덩이를 한 봉지 받아들고 그는 집으로 달려갔다. 와이프가 몸에 좋다고 킬로그램 단위로 사들여 놓은 미숫가루부터 찾았다. 테팔 믹서기에 미숫가루 세 스푼에 돼지고기 다섯 스푼을 넣고 갈았다. 내친김에 소주도 몇 방울 넣었다. 위이이이잉. 시동이 걸렸다. 지지지지징. 갈린 돼지고기가 더 작은 어떤 것으로 변해가는 소리다. 알갱이가 안 보일때까지 갈았다. 완성품을 따라내어 살짝 맛보니 꽤 먹을 만 하다. 저 미세한 우주 어딘가 깊숙한 곳에서 술과 고기의 향기가 느껴졌다. 그래, 영양학적으로 이래야 균형이 맞는거라고. 그는 매우 뿌듯해하였다. 

 

 

*

 

 

  오후 5시. 생각해보면 시간이 별로 없었다. 휴 팀장은 급히 회사를 향해 다시 차를 몰았다. 어떻게든 바비큐가 퇴근하기전에 도착해야만 했다. 숨을 헉헉거리며 사무실로 들어간 그는 신입사원 바비큐씨 곁으로 다정스레 다가가 어깨를 쓰다듬었다. 

 

 - 바비큐씨? 자기야? 

 

 - 예, 팀장님, 다녀오셨습니까? 

 

 - 어, 그래. 자기 아깐 내가 미안했어. 요즘 집에 안 좋은 일이 좀 많아서 내가 예민했나봐. 

 

 -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

 

 - 아까 그 결제 서류 초안, 사실은 꽤 괜찮았어. 처음치고는 훌륭했어. 뭐, 다 그렇게 배워가는게 아니겠니? 

 

 - 감사합니다. 

 

 - 자 그래, 아 참. 그리고 이 미숫가루 한 잔 들게. 자기가 채식주의자라길래 커피보다는 이게 나을 것 같아서 준비했어. 기분도 풀겸 같이 한 잔씩 하자. 괜찮지? 

 

 - 감사합니다. 색깔이 특이하네요. 

 

 - 응, 몸에 좋은 곡물들을 좀 첨가했다나봐. 마누라가 집에 잔뜩 사다놨더라. 

 

  바비큐씨는 멋 모르고 그걸 받아마셨다 (어쩌면 그도 간밤 회식 자리에서의 일이 마음에 걸려 이번 호의는 적당히 받아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맛이야 당연히 영락없는 미숫가루다. 휴 팀장은 밀도 있는 액체가 그의 입으로 흘러들어가고 목젖을 건드리며 넘어가는 일련의 과정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리고 꿀꺽 소리를 내는 결정적 순간을 집요할 정도로 자세히도 바라보았다. 컵을 깨끗하게 비운 바비큐씨는 진심으로 고마운 표정이었다.  

 

 - 감사합니다, 팀장님. 정말 맛있네요. 

 

  휴 팀장은 애써 흥분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들뜬 목소리를 감추기는 어려웠다.

 

- 그렇지? 그래, 자기 수고했어요. 정말 수고많았어요. 하던거 마치면 어여 퇴근하고. 젊은 사람이 일찍 일찍 들어가서 여자친구도 만나야지. 그럼 자기 내일 봐.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휴 팀장의 두 다리가 덜덜 떨렸다. 더운 여름날 차가운 콜라를 마신 듯한 짜릿함이 온 몸으로 퍼져나갔다. 바비큐, 뭐? 니가 채식주의자라고? 웃기고 있네. 넌 이제 채식주의자가 아니야. 넌 돼지고기를 마셨어. 네 몸에는 돼지고기가 들어갔고 그게 너의 육식본능을 서서히 일깨울거야. 사람은 본래부터가 잡식동물이란다. 그게 자연의 이치에 맞는거지. 이제 두고보라고. 어느날 갑자기 고기가 먹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게 될거야. 그땐 오늘의 미숫가루 한 잔을 떠올리며 내게 고마워하게 될거야. 암, 그렇고말고. 오늘밤에는 정말 오래간만에 편히 잠들 수 있을 것 같아 흐뭇했다. 그는 정수기에서 물을 한 컵 받아 단숨에 들이켰다. 우르르르르. 물 마실때 입을 헹구는 그의 오래된 버릇에 주위 여직원들은 기겁을 했다.

 

 

(2003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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