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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5. 이천구백구십사년 어느 늦은 밤

낙농콩단/Season 1-5 (2000-2005)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03. 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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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이러스가 48개 발견되었습니다. 대상 파일의 수에 따라 짧게는 몇 분에서 길게는 수십 분 이상 소요될 수 있다는 검사는 기어코 28분의 '소요' 끝에 6만 7천 4백 2십여개의 파일을 '검사'하여 위와 같은 메세지를 뱉어 놓았다. 세 개의 버튼이 새로 생겨나서 선택을 강요하였다. 전체 치료, 선택 치료, 그리고 닫기.

 

*

 

  그녀가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은 2994년도 겨울 어느 날이었다. 정확한 날짜는 기억하지 못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이런 류의 일이라는게 '오늘부로 감염되었습니다'라고 미리 선언하고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암에 걸렸습니다'라고 선고하는 의사에게 '아니, 그게 도대체 몇년도 몇월의 몇번째 날부터 시작되었답니까?'라고 되물을 수는 없듯이. 게다가 인터넷에 그 바이러스의 이름을 검색해보니 악성 바이러스라고 했다. 악성이라니. 아무 이유도 없이 저런 흉칙한 말을 함부로 갖다 붙였을까. 악성이라면 정말 악성인 것이다. 독하기도 독하거니와, 한번 시작되면 막을 도리가 없는, 어떤 방법으로도 손 댈 수 없는, 지워도 지워도 끈덕지게 다시 살아나는. 마치 한번 범람하기 시작한 장마철 하천처럼.

 

  솔직히 프랭크 N. 스테인(Frank N. Stein)은 단 한 번도 이런 상황이 닥쳐올 것을 조금도 예견하지 못했다. 바이러스라니! 그녀는 현재 출시된 모델 중에서 가장 최신형이었다. 물론 '최신형'이라는 표현은 프랭키 자신이 아니라 그녀를 생산하고 조립한 제작사에 의해 정의되었지만, 그래도 이전 모델보다 적어도 몇 가지는 나은 점이 있으니까 다름아닌 ‘최신형'이라 선언하며 팔아 먹을 수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과연 그 '나은 점'이 무엇이었냐. 몇 가지가 있었다. 

 

첫째, 개인 비서처럼 일정 관리를 해주는 기능이 생겼다. 기억해야 할만한 일을 그녀에게 말해 놓으면 정확히 떠올려야 할 순간에 복기시켜 주었다.

 

둘째, 공중파 라디오의 수신이 가능해졌다. 다만 요즘은 라디오를 듣는 사람이 거의 없으므로, 어느 누구도 그다지 이 놀라운 기능에 대해 신경쓰지는 않는 것 같다. 

 

셋째, '좋아요 6.0 beta'가 인스톨되었다. '최신형'의 그녀를 홈쇼핑으로 주문하면서 프랭키이 가장 마음에 들어했던 부분이다. '좋아요'란 언제 어떠한 제의를 하더라도 그녀가 '좋아요'라고 답하게 만드는 프로그램이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액션 영화를 보러갈까? (좋아요) 

미식축구장에 갈까? (좋아요) 

차가 막혀서 내가 세 시간쯤 늦을 것 같은데 좀 기다려줘. (좋아요) 

사실은 차가 막혀서가 아니야. (그래도 좋아요) 

오늘 내가 바빠서 그러는데 다음에 만나자. (좋아요) 

다음 토요일에는 스무살짜리 대학 신입생들이랑 밤을 새워 술을 마셔볼 생각이야. (좋아요) 

오늘따라 사뭇 무료한데 우리 손이나 잡을까? (좋아요) 

일찍 배가 끊길 가능성을 결단코 무시할 수 없는 외딴 섬으로 단 둘이 여행갈까? (좋아요) 

 

  그 외의 수많은 제의들은 여기서 묘사하기에 적절치 않으므로, 또 지면이 그리 넉넉치 않은 관계로 생략하기로 한다. 생각해보면 별로 어렵지도 않은 단순한 기능이다. 질문과 무관하게 무조건 '좋아요'라고만 출력하도록 설정하면 되는 것 아닌가. 그런데도 버전 업에 버전 업을 거듭하여 6.0하고도 beta까지 오게 된 까닭은 무엇이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물론 더 놀라운 사실은 이 별 것 아닌 기능으로 대박을 쳤다는 부분이다).

 

  마지막으로 달라진 점은 최신형의 그녀가 바이러스에 스스로 대항하여 싸울수 있는 기능을 갖추었다는 것이다. 제작사와 개발자들은 이 새로운 기능을 '면역'이라고 이름 붙였다. 말 그대로 인간 신체의 '면역'처럼 처음 침입한 외부인자를 기억하였다가, 재 침입시 효과적으로 방어하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이전 모델들은 바이러스에 처참할 정도로 무력했다. 한번 무너지면 시스템이 걷잡을 수 없이 파괴되었다. 사용자들은 주기적으로 그녀들의 전원을 분리하고 수동으로 악질 프로그램들을 하나씩 지워야 했다. 마치 20세기 사람들이 벼룩이나 이를 잡듯이. 심지어 어떤 사용자들은 그런 이유때문에 그녀들의 네트워크 연결을 꺼렸다. 차라리 업데이트를 하지 않고 그냥 쓰겠다는 요량이었다. 주기적 업데이트를 하지 않으면 그녀들은 여전히 '구형의 그녀'로 남겠지만, 설사 그렇다 할지라도. 

  최신형 그녀는 스스로 자신의 시스템을 '치유'했다. 은밀하게 잠입해오는 바이러스를 매일매일 체크했고, 그에 대항할 백신 프로그램을 스스로 만들어 내었다. 악랄한 침입자들의 '악성'을 중화시키거나 제거시키는 코드가 그렇게 만들어졌다. 물론 바이러스에는 그 종류가 일일이 셀 수도 없을만큼 많고도 다양하다는 문제가 있다. 조금이라도 더 지독한 바이러스를 만들어내지 못해 안달하는 이들 또한 끊임없이 등장하고는 했다.이런 경우 으레 칼자루는 공격하는 측이 쥐고 있는 법이다. 프로그램된 기계적 방어전략만으로는 매일 새로워지는 적들을 다 막아내기 어렵다. 때문에 그녀의 개발사는 ‘따로 또 같이’ 전략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개별 개체에서 바이러스에 대항하여 싸우는 한편으로 그 정보를 실시간 전송하여 개체 간 정보 공유가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이렇게 축적된 정보를 바탕으로 그녀의 개발자들은 지속적인 기술지원을 수행하고 면역 시스템을 업그레이드하였다. 유저가 일일이 손으로 병균을 잡아내던 시대에 비하자면 얼마나 혁명적인 일인가. 이제는 시스템이 고장날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데. 저장된 그녀의 기억이 날아갈까 조바심을 내지 않아도 되는데. 더 이상 '네트워크 연결'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데. 프랭키 역시 더 이상은 그녀가 바이러스에 걸릴까봐 걱정하지 않아도 될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가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 그것도 제대로 악질적인 녀석에게 걸려들었다. 그녀는 '최신형'인데 말이다. 하지만 프랭키은 아직 '녀석'의 정체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개발자들도 바이러스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중국집마냥 '신속과 정확'을 모토로 한다는 서비스 센터와의 상담 역시 크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24시간 뒤 ‘상담에 만족하셨습니까?’라는 제목의 이메일은 어김없이 전달되어 왔다). 이 ‘최신형’의 악질 바이러스는 보통의 바이러스와 다른 전염 기작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일단 숙주세포를 감염시키면 변이를 일으켰다. 변이의 신속성과 무작위성이 문제의 핵심이었다. 처음 만들어진 백신 프로그램은 변이를 거친 바이러스에 대응하지 못했다. 시스템이 첫번째 변이에 대응하는 사이 바이러스는 두번째 변이를 일으키는 식이었기에 결과적으로 항상 백신 프로그램은 한 박자가 늦을 수 밖에 없었다. 2의 64승개 만큼의 독립 사건의 반복. 무작위 선택. 그녀의 개발자들은 틀을 벗어난 확률 게임 앞에서 놀라울만큼 무력했다. 그들은 변이의 방향을 전혀 예측하지 못하고 있었다. 같은 바이러스가 개별 개체에 따라 다르게 변이를 일으킬 수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 전제가 무너지자 네트워크를 통한 정보의 실시간 공유 및 축적 역시 무용해졌다. 프랭키의 그녀와 똑같은 바이러스에 걸린 모델이 세상 어딘가에 적어도 몇 개는 있을 것이나 그녀들의 병력과 그녀들이 만들어 낸 백신 프로그램은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

 

  문제의 2994년도 겨울 어느 늦은 밤, 그녀는 갑자기 다섯 개의 바이러스를 감당하지 못하고 토해내었다. 여느 때라면 프랭키가 채 눈치를 채기도 이전에 '제거'가 이루어지고 간단한 '치료 기록'만 남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기록은 제작사로 전송되어 곧 발표될 다음 버전의 개발에 참고자료로 활용되었을 것이다. 본사의 개발자들은 바이러스의 유형을 분류하고 대책을 세워 세상의 모든 그녀들에게 업데이트를 뿌렸을 것이다. 프랭키는 참 이상하다라고 생각했으나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최신형이었고, 그녀는 스스로 '면역' 기능을 갖추고 있었으니까. 다만 몇 가지 마음에 걸리는 점은 있었다. 우선 전면의 디스플레이가 심각하게 불안정해졌다. 회로 이상으로 전력 공급이 불안해졌는지 어쨌는지 일정 간격으로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아무 신호 없이 하얀색 화면만을 출력하는 시간이 점점 많아졌다. 프랭키는 모든 유저들의 만병통치약인 재부팅을 시행하였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이러다가 나아지겠거니, 바라는 외에 다른 방법은 없었다.

 

  그런데 다음 날에도 그녀는 열 개의 바이러스를 토해내었다. 그 중에는 어제 확인되었던 것도 있었고, 어제 확인되지 않았던 것도 있었다. 펄펄 끓는 이마를 짚어보고 나서야 프랭키는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알았다. 어떻게든 해야만 했다. 날이 밝는대로 서비스 센터에 데리고 가서 서비스를 받아야지, 생각하는 찰나에 그녀가 다시 스무 개의 바이러스를 토해내었다. 프랭키는 욕실로 달려가 젖은 걸레를 가져왔다. 토사물로 흥건해진 바닥을 닦으며 그는 생각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걸까. 그는 서랍을 뒤져 그녀의 매뉴얼을 찾는다. ‘최신형’의 그녀는 좋은 모델이었다. 26만 칼라의 2인치 TFT LCD와 130만 화소 카메라, 64화음 벨소리, 그리고 512 메가 바이트의 저장 용량을 자랑하여 노래도 120곡이나 저장 가능했다. 150 시간 연속 사용 및 40분 연속 촬영이 가능한 리튬 이온 배터리 역시 준수한 수준이었다. 외관 디자인으로 보아도 꿀릴 게 없었다. 블랙 슬림 슬라이드와 레드 점등 패드의 조화 역시 간결하면서도 세련된 매력을 자랑했다. 어떻게보면 기계라기보다는 하나의 예쁜 악세사리의 개념으로 접근한 첫번째 모델이었다고도 평가할 수 있겠다. (디자인을 위해 실용성을 희생했다는 지적도 있었지만) 세간의 평가 역시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했다.

 

  그 사이 그녀는 다시 삼십개의 바이러스를 토해냈다. 낡이 밝기를 기다릴 수는 없었다. 그는 그녀를 붙잡아 침대에 눕혔다. 돌아 눕게 한 다음에 십자 드라이버로 등짝을 열었다. 복잡한 계기판 사이의 작은 모니터는 현재 그녀에게 6만 7천 4백 2십여개의 파일이 저장되어 있음을 보여주었다. 6만 7천 4백개의 파일은 6만 7천 4백개의 기억을 의미한다. 그녀의 기억은 사람의 기억과 다른 점은 수치화시킬 수가 있다는 점이다. 프랭키는  잠시 자기 안에도 있을 6만 7천 4백개의 기억을 더듬어 본다. 안개 속의 골든 게이트, 요세미티 국립공원에서의 하이킹, 록펠러 센터 앞에서의 아이스 스케이팅, 스태튼 아일렌드 페리, 샹젤리제 거리에서의 산책, 런던 아이에서 내려다 본 테임즈 강, 버킹엄 궁전 근위병 교대식, 트레비 분수에서의 동전 던지기, 하늘이 구멍난 것처럼 시간당 100밀리의 집중 호우가 쏟아지던 날의 첫 입맞춤. 

 

  어쩔 수가 없다. 직접 백신 프로그램을 연결시켜 하나하나 바이러스를 제거하자. 오랜만에 다시 20세기로 돌아가는 거다. 손으로 직접 벼룩을 잡고, 손톱으로 이를 눌러 찌부러뜨리는거다. 프랭키는 그녀의 '무선 네트워크 연결'을 해지했다. 그리고 손톱만한 크기의 외장형 디스크를 그녀의 등 속으로 쑥 집어 넣어 포트에 꽃았다. 디스크는 손바닥만한 다른 단말기로 연결되어 검은 바탕 초록 글씨의 단색 LCD로 화면을 출력하였다. ‘백신프로그램을 실행할까요?’ 마치 외과의사라도 된 심정으로 그는 실행버튼을 눌렀다. 

 

삐리릭. 바이러스가 48개 발견되었습니다.

 

  대상 파일의 개수에 따라 몇 십분 이상 소요될 수 있다는 검사는 20여분의 '소요' 끝에 6만 7천 4백 2십여개의 파일을 '검사'하여 위와 같은 메세지를 뱉어 놓았다. 세 개의 버튼이 새로 생겨나서 선택을 강요하였다. 전체 치료, 선택 치료, 그리고 닫기. 

 

  기계로 만들어진 것은 사용자에게 언제나 선택을 강요한다. 둘 중의 하나, 혹은 셋 중의 하나. 그 중의 하나를 따라가면 또 다른 선택이 기다린다. 역시 둘 중의 하나, 혹은 셋 중의 하나. '좋아요 6.0 beta’의 논리가 간단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선택의 가능성을 제거시켰기 때문이다. 무조건 '좋아요', 언제나 '좋아요', 어디서나 '좋아요' 사용자들은 이처럼 자신의 의지에 결코 반하지 않는 기계로부터 만족감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내심 한편으로는 불안해한다. '좋아요', '좋아요', '좋아요' 분명 그녀는 매 순간마다 한가지 선택밖에 할 수가 없다. 하지만 그 한가지 선택의 중첩은 사용자로 하여금 상황 통제력을 상실케 한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만들어져 있는 특정한 길을 따라가고 있다는 묘한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원리상 그 길은 오로지 하나뿐인것이어야 맞다 하겠으나, 기계의 속성에 익숙해진 사용자들은 마치 그 길이 머리카락처럼 수만가닥으로 나누어진 것의 하나여서, 마치 도리어 자기가 기계에게 조종당하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품는다. 프랭키은 '전체 치료'를 선택했다. 진행 과정을 보여주는 작은 막대가 나타나 왼쪽에서 오른쪽을 향해 서서히 달려 갔다. '치료가 완료되었습니다.' 정말로? 프랭키은 아직 마음을 놓지 못했다. 그는 다시 한번 백신 프로그램을 실행시킨다. 삐리리리릭. 

 

- 바이러스가 298개 발견되었습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람. 치료되기는 커녕 오히려 늘어나다니. 그는 다시 한번 '전체 치료' 버튼을 눌렀다. '치료가 완료되었습니다'라는 메세지가 화면을 가득 메운다. 설마 또 그러지는 않겠지. 이번이 세 번째다. 그는 다시 백신 프로그램을 실행시킨다. 삐빅. 

 

- 바이러스가 1896개 발견되었습니다. 

 

  이제 그녀는 확연히 느려지고 있었다. 백개도 넘는 바이러스를 입으로 토해내었다. 프랭키은 그 중에서 바이러스가 아닌 것을 발견한다. 2992년도 6월 8일 작성, 그건 샹젤리제 거리를 비롯한 파리 여행에 대한 기억이 저장된 파일이다. 비로소 그는 그녀 안에서 수많은 프로그램이 동시에 돌아가고 있음을 짐작한다. 그녀는 최신형이었다. 최신형의 그녀에게는 최신형의 '면역' 기능이 있었다. 그녀는 스스로 자신의 몸에 침입한 외부인자를 제거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외부인자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외부인자가 아닌 것을 외부인자로 인식하여 공격하고 있다. 프랭키 또한 그녀의 등 속 깊은 곳의 포트에 백신이 들어 있는 디스크를 꽂고 단말기를 연결하여 그녀의 몸에 침입한 외부인자들을 잡아내고 있다. 나와 너와 우리 편과 너희 편을 구분할 수 없는 어지러운 전쟁으로 메모리는 완전히 점유되었다. 시스템은 점점 느려지고 있다. 그는 손을 써보고 싶다. 내일 아침까지 기다릴 수는 없다. 하지만 점점 더 많은 부분에서 그녀의 기능이 쇠퇴하고 있음을 그는 깨닫는다.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외부 터치패드의 문제다. 한때 새색시처럼 살짝 스치기만 해도 수줍게 움찔거리던 녀석들이 어느 순간 더 이상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게 새롭고 팬시한 기술이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다. 죄다 아날로그 똑딱이 스위치식이었던 모델들은 일단 고장도 잘 나지 않았을 뿐더러 설사 한 가지 기능이 먹통이 되었더라도 다른 기능으로 얼마든지 보완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지만 요즘의 이 감각적인 첨단 입력 시스템은 달랑 터치 패드 하나만 고장나더라도 통째로 빛좋은 개살구 꼴이 난다.) 두번째로 발견한 것은 배터리다. 암, 그렇고 말고. ‘최신형’과 ‘신형’과 ‘구형’을 막론하고 모든 고장 퍼레이드의 최종 단계는 어김 없이 배터리다. 충전 케이블을 연결해 놓았음에도 전지 잔량이 눈에 띄게 내려가는 것은 줄어드는 생명력에 대한 암시처럼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그때 그녀가 소리를 지른다. 낮으면서도 높고 높으면서도 낮은 소름끼치는 소리가 그의 귓가를 때린다. 동시에 셀 수도 없을만큼 많은 바이러스가 토해져 나온다. 이백개? 오백개? 어쩌면 천개? 백신 단말기도 비명을 지른다. 검은 바탕에 초록 글씨. ‘치명적인오류 OE(이)가 015F:BFF9DE97 에서 발생하였읍(습)니다. 사용중인 응용프로그램이 종료됩니다.’ 프로그램을 종료하라면 아무 키나 누르나지만 아무 키나 눌러봐야 먹통일 것을 그는 알고 있다. Ctrl + Alt + Del 의 조합도 먹히지 않을 것이다. 그는 천천히 수동으로 연결했던 디스크를 뽑고 단말기를 연결했던 케이블을 분리한다. 서두르지 않는 것은 어떻게 해야할지 판단이 서지 않아서다. 괴성을 동반한 구토가 잦아들자 그간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던 공중파 라디오 수신 기능이 거짓말처럼 오동작을 시작한다. 흘러나오는 노래는 더 잉크 스팟(The Ink Spots)의 ‘It's a Sin to Tell a Lie’.

 

Be sure it's true when you say "I love you"

It's a sin to tell a lie

Millions of heart have been broken

Just because these words were spoken

 

I love you, yes I do, I love you

If you break my heart I'll die

So be sure it's true when you say "I love you"

It's a sin to tell a lie

 

  바닥을 흥건하게 메운 토사물을 보며 그는 생각한다. 이쯤되면 바이러스만이 아니라 6만 7천 4백 개의 기억까지 함께 튀어나왔다고 봐도 무방하겠다고. 그는 6만 7천 4백 개의 기억이 제거된 텅 빈 상태의 그녀를 아주 잠시 동안 상상한다. 그리고 함께 튀어 나온 기억의 파일들을 살펴보던 중 이상한 점을 발견한다. 그는 그녀와 독일에 간 적이 없었다. 퀼른 대성당, 유로파 파크, 브란덴부르크 문……. 그는 그녀와 호주에 간 적도 없었다. 하버 브리지, 오페라 하우스, 화이트헤이븐 해변……. 그는 그녀와 일본에 간 적이 없었다. 쓰키지 시장, 도쿄 스카이트리, 후시미이나리타이 신사……. 아닌가? 같이 간 적이 있었나? 이제는 프랭키 스스로도 혼란스럽다. 등판 속의 크고 작은 회로기판을 흉물스럽게 드러낸 채 그녀가 묻는다.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느릿한 발음과 발음 사이가 찐득찐득하게 뭉그러지며 불안정하게 벌어졌다. 영락없는 기계의 소리다. 아마 과잉 상태의 프로세스에 메모리가 가득 차버린 탓일 것이다. 

- 아니. 아무 문제 없어

라고 프랭키는 대꾸한다.

 

- 그런데 말이야, 베이비. 손 잡아봐도 돼?

  마치 마사지라도 받는 사람처럼 얼굴을 아래로 하고 바닥에 엎어져 있는 그녀가 답한다. 

- 좋아요. 

  프랭키는 그녀의 손을 잡는다.

- 그럼 안아봐도 돼? 

  바닥에 엎어진 채로 그녀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로 답한다. 

- 좋아요. 

- 그럼 베이비, 자기랑 입 맞추는 것도 괜찮아? 

  그녀는 모든 Yes-No Question에 '좋아요'라고 답한다. 원래 그렇도록 프로그램 되어 있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게 ‘최신형’의 그녀가 대박을 친 이유인 것이다. 어김없이, 

 

- 좋아요. 

  당연한 대답. 하지만 프랭키은 갑자기 화가 치민다. 그렇게 흉한 꼴을 하고서도 태연스레 '좋아요'라고 말한다니. 생각이라는 걸 하고 말하는 건가? 아니면 그냥 성의없이 내뱉는 걸까? 

 

- 베이비, 우리 독일에 언제 갔었지? 

  깜빡거리는 26만 칼라 2인치 TFT LCD 위로 날짜가 출력되어 왼쪽으로 서서히 움직인다. 2992년도 7월 18일부터 7월 31일. 거의 10초의 간격을 두고 그녀가 출력된 답을 읽기 시작했다.

- 이이천구우십이이년 치일월 십파아일부우터  이이천구우십이이년 치일월 사암십이일일.

 

  그 해 유월에 그녀와 유럽에 갔던 것은 사실이었다. 다만 영국과 프랑스만 거쳐서 돌아왔을 뿐. 그는 서랍을 열고 2년 전 수첩을 뒤져 메모를 확인한다. 7월 18일에 그는 삼일짜리 마이애미 출장 중이었다. 그녀를 데려가지는 못했다. 회사에서 비행기 표 등의 경비처리를 순순히 해 줄 리가 없으니.

 

- 그럼 우리 호주는 언제 갔었는지 기억해?

  깜빡거리는 화면 위로 떠오르는 날짜는 2993년도 8월 21일부터 8월 29일. 10초 후 그녀의 대답.

- 이이천구우십사암년 파알월 이이십이이일부터 이이천구우십사암년 파알월 이이십구우일.

 

  작년 수첩을 뒤져 메모를 확인할 필요도 없다. 8월 24일이 영감님 생일 날이어서 보나마나 그는 매년 그러하듯이 미시시피주 클리블랜드에 있었을 것이다. 그녀를 데려가지는 않았다. 보수적인 영감님은 그녀의 존재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 뻔했으므로.

 

- 그럼 우리 일본은 언제 갔었는지 기억해?

  화면 위로 떠오르는 날짜는 2994년도 3월 24일부터 3월 25일. 10초 후 그녀의 대답.

- 이이천구우십사아년 사암월 이이십사아일부우터 이이천구우십사아년 사아월 이이십오오일.

 

  올해고 아니고를 떠나서 그는 단 한 번도 일본에 가 본 일이 없었다. 일본만이 아니라 평생 동양을 가본 적이 없었다. 삼월이면 휴가철도 아니었다. 신제품 출시 마감일에 쫓길 시즌이었다. 며칠동안은 집에 들어오지 못했을 것이다. 평소 그녀를 데리고 출근하냐고? 천만에! 그러니 그가 출근한 다음에 그녀가 뭘 하고 있었을지 누가 안단 말인가?

 

- 베이비, 방금 내가 물어봤던 여행들 말이야. 누구랑 갔었지?

  잠시의 딜레이 이후 깜빡거리는 화면 위로 떠오르는 글자는 YOU. 10초 후 늘어지는 기계음으로 대답이 읽혀졌다. 

- 다앙시인이요.

 

  더 잉크 스팟이 그랬지. 사랑한다는 말을 거짓으로 하는 건 죄라고.

- 베이비, 거기서 우리 좋았잖아. 올해도 멋진 곳으로 한 번 여행을 갈까?

- 조오아아요.

-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으로 가자고, 베이비. 동양쪽은 어때?

- 조오아아요.

 

  그녀는 괴성과 함께 다시 한 번 셀 수도 없을만큼 많은 바이러스를 토해낸다. 바닥은 이미 토사물로 흥건하고 축축해진 걸레는 거실 구석에 던져 놓은지 오래다. 방금 ‘좋아요’라고 답했지만 그녀도 알 것이다. 그런 일은 없을 거라는 사실을. 그렇다면 왜 ‘좋아요’라고 답하는가?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프랭키의 입꼬리가 짖궂게 올라간다. 

- 그리고 말이야 베이비, 그 전에 만약 내가 자기를 …… 죽이면 어떨까? 

 

  그러나 이번만큼은 그녀의 대답이 쉽게 돌아오지 않는다. 어느새 라디오도 멈추고 ‘더 잉크 스팟’의 노래도 멈추었다. 적막한 가운데 시계소리만 째각거린다. 프랭키이 아는한 그녀가 Yes-No Question에 3초안에 '좋아요'라고 답하지 않는 경우는 없었다. 이렇게 뜸을 들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 ……좋아요. 

 

  어찌된 일인지 이 대답만큼은 늘어지지도 뭉개지지도 않는다. 생기없는 기계음이 아닌 감염되기 전 그녀의 목소리 그대로이다.

 

  프랭키는 손에 들려있던 십자 드라이버를 고쳐잡았다. 뭉뚝한 손잡이 부분이 손바닥안으로 바싹 감겨왔다. 그는 자신이 그녀를 정확히 몇 번 찔렀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라디오가 찌그러지는 소리와 부서진 기판이 타들어가는 냄새만을 기억할 뿐이다. 붉은 핏방울 몇 개가 회로기판 위에 맺혔으나 그건 프랭키의 팔뚝이 긁히는 탓에 흘러내린 것이다. 이제 그녀는 완전히 고철덩어리로 변했다. 날이 밝는대로 서비스 센터에 찾아갈 필요는 없을 것이다. 깊어가는 밤을 되돌릴 방법은 없었다. 물론 그럴 필요도 없었고.

 

  2994년 어느 늦은 밤, 그녀는 1896개의 바이러스와 6만 7천 4백 개의 기억이 저장된 파일을 품고 이 세상에서 제거되었다. 이제 더 이상은 무슨 질문을 해도 '좋아요'라고 답하지 않는다.

 

(2003년 0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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