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7. 편지에 실어보내는 고백
by 김영준 (James Kim)편지에 실어 보내는 고백은 분명 낭만적이다. 단단한 봉인을 해제하고 반듯하게 반으로 접힌 빳빳한 종이를 펼치는 순간의 그 두근거림. 깨알처럼 하얀 바탕을 메우고 있는 한 글자 한 글자에 담긴 일희일비. 그리고 숱한 문자들의 해독과 조합을 거쳐 마침내 전체적인 맥락을 이해했을 때, 발신인이 마음이 수신인인 나의 그것과 결코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되었을 바로 그때, 밀려오는 환희의 코마상태, 채 두 뼘이 되지 않는 종이 쪽지 한 장이 얼마나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 밤을 새워라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은 그 벅찬 기분을, 직접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알 수가 없다. 예전에는 미처 몰랐는데, 이것은 작은 기적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모든 행복에는 그만큼의 대가가 요구되지만 이번만큼은 그렇지 않다. 이 설레도록 아름다운 종이에는 동전 하나 필요하지 않으니...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둘 중의 하나이다. 타고난 매력으로 이제까지 로맨스가 기본적으로 장착된 삶을 살아왔거나, 아니면 그런 종류의 편지를 단 한번도, 기어코 단 한 번도, 써보지 않은 사람이다. 오직 그런 사람들만이 러브레터의 낭만적 환상성을 맹신하며, 러브레터가 담고 있는 지독하도록 뼈저린 해악성을 모른다. 그런 사람들은 부리에 월계수 잎을 물고 있는 하이얀 비둘기가, 자신들의 편지를 실크처럼 보드라운 깃털 속에 고이 숨겨 날아가, 깊이 잠든 그녀의 머리맡에 놓고 와줄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아침 햇살을 42.5도로 맞으면서 일어난 그녀가 어여쁘게 기지개를 켜고, 뜬금없이 머리맡에 놓여진 이유 없는 편지를 살그머니 예쁘게도 뜯어볼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그리고는 2차원의 종이에 적혀진 발신인의 3차원적 복잡다단한 심사를 조곤조곤 소리 내어 읽어보다가 얼굴이 발그레해져 차마 더 읽지 못할 것으로도 착각하고 있다. 많은 경우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그건 아주 희귀한 케이스로 확률상 러브레터가 엉뚱한 곳으로 배달되거나 배달 도중에 풍화되어 사라질 가능성, 혹은 비둘기나 참새가 먹어치울 가능성을 모두 합친 것보다 발생 빈도가 낮은 일이다. 아울러 편지에 실어 보내는 고백이 좋은 결과를 낳는 경우도 충분히 있을 수 있지만, 그 가능성은 무급의 볼보이가 무관의 연습생을 거쳐서 다시 무적의 홈런왕이 될 확률보다 아주 약간 높을 뿐이다.
사실 편지를 통한 고백은 그렇게 현명한 방법이 못된다. 무릇 러브레터란 생선초밥과도 같아서 빨리 의미가 변하고, 쉬이 상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정성들여 한 글자, 한 글자를 고쳐도 아침이 오면 작은 치수의 옷을 억지로 입은 것처럼 어색하게 보이기 일쑤인 것이 바로 러브레터임은 비단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고, 너와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래도 미처 보내기 전에 고칠 수 있다면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다. 냉장고 안의 '스시'는 수시로 살피면 되지만, 이 죽일 놈의 편지 쪼가리는 일단 보내놓고 나면, 도저히 건드릴 수가 없다. 그래서 편지를 통한 고백은 그냥 현명하지 못한 방법이 아니라 가장 좋지 못한 방법이다. 전화상의 고백도 나쁘고, 메신져상의 고백도 나쁘다고들 하지만, 경험에 따르면 그 어느 것도 편지 고백에 비할 바는 못된다. 그 위력이나 파장이 끔찍한 수준이고 휴유증도 오래 간다.
물론 어쩌면 편지는 세가지 방법 가운데 가장 아날로그적 진실성에 근접해 있는지도 모른다. 전화나 메신져처럼 이해 당사자인 갑(甲)과 을(乙)이 반드시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신속하게 인풋을 넣고 신속하게 아웃풋을 받는 상황이 아니다. 일단은 어느 정도의 기다림을 전제하고 있기에 인풋도 느리고 아웃풋도 느릴 수밖에 없다. 발신인이 내용과 다듬을 시간도 충분하고 수신인이 내용을 소화할 시간도 충분하다. 게다가 정성스러운 손글씨라는 점에서 단어의 총합 이상의 전달력을 가진다. 그럼에도 편지 고백이 좋지 않은 결정적인 이유는 그것이 알루미늄 호일이나 컵라면 용기와 같이 좀처럼 소멸되지 않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루소와는 무관한 이야기지만, 어쨌든 자연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은 이래저래 골치 아프다. 아무리 이러쿵 저러쿵 해 보아야 전화기를 통해 내뱉은 말은 공기 속으로 스며들어가 이내 사라져 버리고, 또 아무리 저러쿵 이러쿵 해 보아야 메신저를 통해 주고 받은 자음과 모음들도 창을 닫으면 어디론가 날아가 버린다. 창피한 기억 때문에 한동안 괴로워할 수는 있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기억 또한 희미해진다. 그런데 유독 이 편지라는 것만이 끈덕지다. 가제트 형사나 이단 헌트에게 하달되는 지령문(指令文)처럼 전달 즉시 사라지는 것도 아니거니와, 박물관의 고문서처럼 고스란히 세월의 무게감이 묻어가며 묵혀지듯 잊혀지는 것도 아니다. 온전히 그때의 그 모습으로 남는다. 그야말로 단 한 글자도 변치 않은 채, 그 날의 미숙한 감정과 그보다 더욱 더 미숙한 표현능력과 그 보다 더욱 더욱 더 미숙한 작자의 존재를 고스란히 기록해 놓고 있는 것이다. 정말이지 끔찍한 낙인이다. 과연 이를 두고 영원히 남아 있을 수 있어 아름답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바로 그것이 언뜻 낭만적으로 보이는 편지 고백이 안고 있는 치명적 문제점이다.
내가 처음으로 나를 위해 러브레터를 썼던 것은 열여덟살때였다. 나를 위해 러브레터를 썼다는 것은 '아아, 정말 사랑해 마지않는 나에게'하는 식으로 북 치고 장구 치며 나에게 나를 보냈다는 나르시즘으로 충만한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뜻하는 목적에 따라서 러브레터를 썼다는 뜻이다. 내가 뜻하는 목적이란 또 무엇이냐, 편지에 고백을 실어서 보내어 본 적이 있다는 뜻이다. 그럼 그 이전에는 써 본 일이 없었느냐, 그렇지는 않다. 여러 차례 써보았다. 다만 나의 비즈니스가 아니라, 남의 비즈니스였을 뿐이지. 정말이지 은근히 그런 의뢰를 많이 받았었다. 자기들 연애 사업에 관련된 제반 서류를 작성해 달라고. 사람들이 나에게 그러한 중책을 선뜻 맡겼던 이유는, ① 증거는 없을지언정 성격상 왠지 잘 쓸 것 같은 근거 없는 느낌이 들고, ② 남자치고는 글씨가 꽤 또박또박하며, ③ 동서고금의 유행가 가사를 두루 섭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정작 한 번도 연애를 해보지 못한 녀석에게 연애편지에 관한 작업을 맡긴다는 것은, 마치 무면허 의사에게 시술을 받고 무면허 변호사에게 법적 자문을 구하는 것과도 같아서, 사안의 중요성을 감안할 때 상당히 무모한 일이라는 지적도 있었음은 사실이다.
아무래도 러브레터의 중요성이란 열몇 살의 지점에서 피크를 찍고 스물몇 살을 기점으로 급속히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십 대에게 있어서 러브레터란 일생일대의 사업이자, 혼수상태에서의 산소호흡기이며, 인생과 운명의 절대적 동의어였다. 게다가 날밤을 새워 몸과 마음을 바쳐 피와 눈물로 적어내어도 아침이 오면 쉽사리 변성되어 버리고야 마는 것이 러브레터인 법, 하나의 글자와 그에 담긴 억겁의 의미를 탐구하느라 밤과 낮을 세트로 까먹기 일쑤였다. 하지만 이십 대로 접어들고 나니, 편지는 그냥 편지일 뿐으로 나을 것도 없고 다를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편지에 고백을 실어 보내는 방법이 영화에서처럼 그렇게 성공률이 좋은 것도 아니고, 영화에서처럼 마냥 아름다운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처음으로 내가 나를 위해서 러브레터를 써보고 나니까 확실히 그렇게 느껴졌다. 그 편지가 제 본분을 다하지 못한 것이야 이미 끝나버린 일이고 하늘의 뜻이니 어찌할 수 없지만, 그 부끄러운 증거물을 없애버릴 방도가 묘연하다는 것은 참 답답한 일이다. 도덕적으로도, 법적으로도, 과학적으로도, 여하튼 무엇으로든 그 편지를 회수하거나 소각시켜 버릴 만한 권리가 나에게는 없는 상황이다.
때로는 그 문제의 편지에 담긴 한 문장, 한 문장이 불현듯 떠오르는데, 그런 밤에는 어김없이 잠을 설치고야 만다. 이를테면 이런 상상은 참으로 불길하다. 과거 그 편지의 수신인이 '아, 오늘은 기분이 우울한데.' 하고는 서랍을 뒤적뒤적거려서 '그 편지'를 찾아낸다. 약간의 수줍음과 상당한 유치찬란함으로 점철된 그것을 읽고, 그녀는 집이 떠내려가도록 웃는다. 침대에서 데굴데굴 구른다. 그 결과 엔도르핀도 데굴데굴 분비된다. 한참을 시원하게 웃어제끼고 나서는 곳곳에 붙어있는 우울의 덩어리들을 훌훌 털어내고 쾌활하게 일상에 복귀하는 것이다. 이는 줄줄이 비엔나 소세지처럼 릴레이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가령 그녀의 주변에 우울해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집으로 몰래 데려와 방문을 잠그고, '그 편지'를 보여줄 수도 있는 일이다. 유치함으로 점철된 그것을 읽고, 그들은 집이 떠내려가도록 웃는다. 침대에서 데굴데굴 구른다. 그 결과 엔도르핀도 데굴데굴 분비된다. 또 누군가 보게 되고, 또 누군가 웃게 되고, 또 누군가 침대에서 데굴데굴 구르게 되고… 어째 더 이상은 상상하고 싶지가 않다.
(2003년 0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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