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6. 빵가게 대습격
낙농콩단

036. 빵가게 대습격

by 김영준 (James Kim)

 

  '학문이란 하늘에 작열하는 태양과 같은 것이다. 아무리 눈을 찌푸려 보아도 깊이 볼 수가 없는 것이다. 꾸준히 해보았자 얻는 소득이란 보잘 것 없고 기껏해야 남의 책에서 얻는 알량한 지식 나부랭이밖엔 별 것 없는 게 학문이다.'

 

  내가 한 말이 아니다. 그 유명한 영국의 대문호 윌리엄 세익스피어의 말씀이다. 같은 말이라도 내 입에서 나왔다면 아무도 귀 기울여주지 않겠지만 세익스피어가 한 말이니 어느 정도는 설득력이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는 인도에 필적하는 인물이니 말이다. 그렇다. 인도와 필적하는 인물이 그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다시 한 번 되짚어보자. 세익스피어 가라사대, 꾸준히 해보아야 소득이란 보잘 것 없고 기껏해야 남의 책에서 얻는 알량한 지식 나부랭이 밖에 없는 것이 학문이라고. 그렇다면 왜 지금 이 순간 도서관에 앉아서 책을 들여다 보고 있어야 하는가. 진정으로 나는 공부 말고 뭔가가 필요했다. 하루하루가 지루하고 의욕이 없었다. 쳇바퀴 위 햄스터처럼 같은 자리를 맴도는 건 이제 지겨웠다. 뭔가 짜릿하고 모험적인 일을 필요했다. 아드레날린을 폭발하게 할 만한 일. 평소에 하지 않을 만한 일탈을 해보고 싶었다. 한숨을 푸욱 쉬고 있는데 옆에서 책을 읽던 헤이즐 너트 (Hazel Nutt; 정말 이름이 헤이즐이고 성이 너트다!) 고개를 번쩍 든다. 알은 커다랗고 테는 두꺼운 안경을 벗고 책을 탁 덮어버린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 우리도 털어보자. 빵가게. 
  나는 되묻는다. 
- 빵가게? 그걸 털어서 뭐하게. 
  그녀는 너무 당연하다는 듯 대꾸한다.
 - 뭐하긴. 빵 먹지. 
  내가 다시 묻는다. 
- 공짜로? 
  그녀가 다시 답한다. 
- 그래, 공짜로. 

 

  이 대목에서 나는 그녀의 라스트 네임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볼 수 밖에 없었다. (Nut?) 얘가 지금 제정신인가? 나는 가만히 손을 뻗어서 그녀가 읽던 책을 빼앗았다. 다만 무례하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그녀가 읽던 부분에 검지 손가락을 넣고 책을 덮은 다음에 표지의 책 제목을 확인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빵가게 재습격.’ 물론 나도 몇 년 전 읽은 적이 있는 책이다. 젊은 시절 배가 고파서 빵가게를 털었던 남자가 (결혼해서도 그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부부동반으로 맥도날드를 털었다는 요지의 이야기였다. 아하, 그래서 빵가게를 털자고 했구나. 참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그래도 나는 잠시 갈등을 했는데 공짜로 빵을 먹는다는 건 아무래도 마다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말도 안되는 일이지만 살짝 구미가 당겼다. 그래봐야 절도는 절도겠으나 그 대상이 부드러운 빵이라는 사실은 아무래도 현실적 죄책감을 어느 정도 희석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금을 훔치고, 은을 훔치고, 금은보화를 훔치면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범죄다. 하지만 빵을 훔치는 건 어쩐지 범죄까지는 아닐 것만 같았다. (물론 이 대목에서 장발장의 사례를 잠시 떠올리고 머쓱해지기는 했다) 게다가 배까지 고팠으니 더 설득력 있는 소리처럼 들렸다. 조금 전까지 배가 고팠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일단 빵가게를 습격하자는 말을 듣고 보니 갑자기 배가 고파졌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이건 하루키라는 일본 아저씨의 저주임이 틀리없다고 생각했다. 헤이즐의 결심은 태산만큼 아주 확고했다. 그녀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 그가 정확하게 그가 몇 살때 빵가게를 털었는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우리가 지금 빵가게를 습격한다면 종전 기록을 갈아치울 수도 있을 거야. 

 

  참말로 말이 안되는 소리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다. 그럼에도 (정말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말도 안되고 말 같지도 않아서 도리어 마음이 동했다. 이유가 차고 넘친다. 그렇지 않은가. 첫째로 배가 고팠고, 둘째로 세계 신기록을 세울 수가 있으며, 셋째로 이젠 정말 빵가게가 털고 싶어졌다. 그러면서 뭔가 부족한 느낌 혹은 뭔가 텅 비어버린 느낌 같은 것이 시작되었다. 하루키 소설에서 허구한 날 등장하는 괴상한 표현을 빌자면 ‘결락감’이 되겠다. (정말 이런 단어가 있는 거야?) 어쨌든 핵심은 한번 빵가게를 털어야겠다는 허전함이 시작된 이상 빵가게를 털어야만 끝을 낼 수가 있다는 사실이다. 아주 깊고 넓고 푸른 연못에 까만색 잉크 한 방울이 똑 떨어져 들어갔다. 한 방울의 잉크는 형형색색의 무늬를 그리며 위로 아래로 좌로 우로 퍼져 나간다. 그리고 나는 그걸 지금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다. 깊은 물 속, 저 편 어딘가에서 검은 잉크의 흔적이 서서히 번져간다. 이내 물에 섞여 들어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야 할 성 싶으나, 결코 사라지지가 않는다. 이런 기분을 도대체 뭐라고 표현해야 하나. 그래, 이건 틀림없이 빵가게를 털고 싶은 기분이다. 


  지금은 자정. 다시 말해 12시. 우리는 서둘러 연장을 챙겨 도서관 앞에 세워놓은 지프 체로키에 올라탔다. 체로키가 갑자기 어디서 났는지는 묻기 말기로 하자. 운전대를 잡은 나는 시동을 걸고 맥도날드를 찾아 나섰다. 왜 하필 맥도날드냐. 일단 책 속의 앞선 사례를 따르기 위함이다. 그리고 자정이 넘어 문을 닫지 않는 빵가게 - 혹은 빵가게와 비슷하거나 빵가게와 대체 가능한 것 - 는 오로지 맥도날드 뿐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시 내가 면허를 장롱에 처박아두고 5년째 운전에 냉담 중이었다는 사실은 잊기로 하자. 그건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아니다. 

 

*

 

  네비게이션에 미음, 이, 점, 이, 디귿, 점, 으, 니은, 이, 점, 리을, 디귿, 으, 를 차례로 쳐 넣는다. 산산이 흩어졌던 형상이 하나로 압축되고 모아지면서 맥도날드라는 단어가 완성되었다. 라디오를 켜니 냇 킹 콜의 '네버 세이 네버 어게인(Never Say Never Again)’이 흘러나왔다. 빵가게를 습격하러 달려가면서 듣기에 아주 적격인 음악이다. 내가 물었다. 
- 하루키 소설을 좋아해? 
  헤이즐은 어디에서 났는지 반자동 피스톨을 꺼내 닦으며 심드렁히 답한다. 
- 아주 일부만. 
  전적으로 나도 동감이다. 
- 나도 같은 생각이야. 그런데 너는 왜 일부만이야?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사뭇 심각하게 답한다. 
- 가끔씩 잘 포장된 변태 소설이 아닌가 싶어져. 
  절대 동감이다. 그녀는 한 마디 덧붙인다. 
- 무라카미 류 소설이 완전 변태라면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은 불완전 변태라고 생각해. 

 

  나는 그녀의 이런 면이 좋다. 혀 끝에서 신랄한 독침이 나간다. 더할 나위 없이 날카로운 독침이. 그녀는 정말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기현상 중의 하나가 한국 내 일본 문학의 위상이라고 덧붙인다. 하기야 대형서점마다 일본 문학 코너가 따로 마련되어 있을 정도이니까. 요즘은 '외국 문학' 코너 베스트셀러의 삼분의 일 쯤은 항상 일본 소설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솔직히 양적 비중에 비해서는 썩 마음에 드는 소설이 없다. 이 모든 신드롬의 시발점이 된 무라카미 하루키나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까지는 그런대로 괜찮았지만 나머지는 글쎄. 선봉장인 하루키 역시 ‘노르웨이의 숲’의 아우라가 워낙 강력해서 그렇지 그 외에는 크게 인상적이지도 않고. 그의 글은 장편보다는 단편이 확실히 낫고 단편보다는 수필이 분명히 낫다. 특히 '해변의 카프카'나 ‘어둠의 저편’을 위시한 최근 작품들은 '작가 이름만 믿고 책을 사는데서 야기되는 상실과 허무와 결핍이 무엇인지'를, '그렇게 산 책을 책꽂이 꽃아 두고 산다는 것에서 오는 공허함과 결락감이 (정말 이런 단어가 있다고?) 무엇이지’를, 뼈저리게 느껴주게 하는 것이 어쩐지 영 예전만 못한 느낌이다. 


  곰곰이 한일 양국의 국민정서 차이와 양(兩) 무라카미의 변태성을 저울질 해 보는데 그녀가 묻는다. 
⁃ 너는 왜 싫어하는데? 아니 왜 일부만 좋아하는데? 
⁃ 그건 말이야. 세 가지 이유가 있어. 첫째로 나는 일본 대중문화와 관련된 모든 것에 그렇게 호의적이지 않은 것 같아. 일본 영화도 싫어하고, 일본 드라마도 싫어하고, 특히 일본 노래는 듣고 나면 속이 메슥거려.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그래. 둘째로 가끔은 핵심이 뭔지 모르겠어. 그럴듯하지만 실상 뜬구름 잡는 이야기만 처음부터 끝까지 반복하는데 뭔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생각하면 아무것도 없는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아직 어려서 그런걸까? 물론 그게 매력이라면 모르겠지만. 셋째로 하루키 아저씨가 만들어 내는 여성 캐릭터의 구십 퍼센트가 흡연자야. ‘노르웨이의 숲’의 미도리, ‘어둠의 저편’의 마리, ‘태엽 감는 새’의 가사하라 메이, ‘태양의 남쪽 국경의 서쪽’에 나오는 시마모토, ‘코끼리의 소멸’에 나오는 난쟁이가 좋아하는 여자, 기타 등등. 마치 선문답(禪問答)이라도 하는 것처럼 모호한 이야기를 늘어놓다가 갑자기 담배를 피우고, 또 한참 그런 이야기를 늘어놓다가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고, 이런 패턴으로 도대체 몇 페이지를 채워 먹는지 모르겠어. 
내 대답이 재미있었는지 그녀는 깔깔거리면서 웃는다. 그리고 덧붙인다. 
⁃ ‘노르웨이의 숲’에 나오는 나오코만 빼고. 
⁃ 맞아. 나오코만 빼고. 나오코는 정말 뭐랄까. 그 아저씨한테도 불가침의 영역이 아니었을까. 

 

  배를 잡고 웃다말고 헤이즐은 피스톨을 꺼내 탄창이 채워져 있는지를 확인했다. 찰칵. 한 자루. 찰칵. 두 자루. 찰칵. 찰칵. 네 자루. 어디서 저런 걸 배웠는지 모르겠다. 언젠가 빵가게를 습격하려고 미리 준비라도 해두었단 말인가. 

 

*

 

  그러는 중에도 우리의 체로키는 맥도날드를 찾아 끝없이 달렸다. 다행히 아직까지 문을 열어놓은 맥도날드가 있었다. 원래 열두 시 넘어서도 영업을 한다는데 이 야심한 시각에 햄버거 먹으러 올 일이 있었어야 알지. 핸들을 꺾어 맥도날드 카 드라이브로 들어갔다. 라디오에서 딘 마틴은 ‘애인트 댓 어 킥 인 더 헤드 (Ain't That a Kick in the Head?)’를 부르기 시작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팝송 중의 하나인데다가 이 흥겨움은 지금 상황에도 너무 잘 어울리지 않는가? 휘몰아치는 아드레날린 속에서 명곡에 대한 경의로 우리는 차를 잠시 멈추어 놓고 노래가 끝날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는 검은색 복면을 나누어 썼다. 헐리우드 영화에서 보듯이 눈이 있을 부분에 달랑 구멍이 두 개 나 있는 복면이다. 어둠 속에서 우리는 우스꽝스러운 몰골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리고 계획의 세부일정을 검토했다. 그래도 명색이 4년제 대학을 4년 만에 - 우수하거나 혹은 우수하지 않은 성적으로 - 졸업한 사람들인데 불량 고교생들이 동네 슈퍼 털듯이 내키는 대로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가 물었다. 
⁃ 들어가서 말이야. 햄버거를 몇 개나 만들라고할까? 

 

  내 질문에 그녀는 검은색 뿔테 안경을 꺼내어 쓴다. 복면 위로. 그리고는 도서관에서 훔쳐 온 아까 그 책을 - 이제 그것은 우리의 교과서나 다름없다 - 펼친다. 친애하는 하루키상이 빅맥을 몇 개나 훔쳤는지 확인하려는 것이다. 
- 어디 보자, 서른 개. 그는 서른 개의 빅맥을 훔쳤어. 
  그녀는 책을 덮고 탄식하였다.
- 우라지게도 많이 훔쳤네.

 

*

 

  우리는 반자동 피스톨을 양손에 들고 맥도날드에 뛰어 들었다. 어서오세, 카운터를 보고 있던 여자아이는 차마 '요'자 까지는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점원은 모두 세 명이었는데, 모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내 짐작이 확실하다면 그들은 너무 놀라서 경보장치를 (설마 맥도날드에도 그런 게 있을까?) 누를 엄두도 내지 못했던 것 같다. 헤이즐은 피스톨 총구를 이리저리 냅다 휘저으며 (그때는 나도 무서웠다) 직원들이 두 손을 위로 들어주기를 강요했다. 여섯 개의 손이 공중으로 치솟았다. 감탄하며 나는 헤이즐을 바라보았는데 복면 사이로 보이는 까만 눈이 참 예쁘다는 생각을 했다. 그 사이 나는 셔터를 내리고 혹시 손님이 없나 여기저기를 살펴보았는데 다행히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이런 한밤중에 손님도 없는 햄버거 가게에서 일하는 기분이란, 글쎄 어떤 것일지 모르겠다. 어느새 새벽 한 시 반. 시간이 없었다. 혹은 아직 시간은 많았다. 총구를 점원의 머리에 가져다 대었다. 몇 개를 만들라고 해야 할까 고민했다. 하루키 아저씨는 맥도날드에서 빅 맥을 서른 개 훔쳤다. 그리고 콜라값은 지불했다. 한민족의 자존심이 있지. 최소한 그들보다는 더 뛰어난 기록을 남겨야 할 것이 아닌가. 벌벌 떨고 있는 아르바이트생에게 말했다. 
- 지금부터 햄버거를 만드는데. 빅 맥으로 백 개를 만들어주면 좋겠어. 빅 맥으로, 백 개를 말이야. 
  아르바이트생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기겁을 했다. 
- 빅 맥 백개를요? 

 

  내 속내를 짐작했는지 헤이즐는 입을 가린 채 웃는다. 그녀의 웃음소리는 한밤중 맥도날드의 기묘한 정적을 깨고 솔과 파의 음을 빌어 퍼져나갔다. 그녀는 아르바이트생들이 일할 위치를 지정해주고 조리대에 수갑을 채워 묶었다. (수갑? 이건 또 어디서 나온 거야?) 그리고 그들이 잘 보이도록 카운터를 등지고 섰다. 저들은 셋. 우리는 둘. 긴장을 풀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수갑 때문에 움직이지 못하면 내가 대신 가서 원하는 것을 가져다 주었다. 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빅 맥이 백 개 만들어지는데는 제법 많은 시간이 걸렸다. 우선 맥도날드는 밤사이에 빅 맥 주문이 백 개나 몰리는 순간이 있을 거라고 예상하지를 않았을 것이다. 급히 지지고 급히 볶고 급히 튀기는 급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하루 중 가장 허기질 시간에 우리는 그 향기에 매료되었다. 처음에는 배가 고파서 맥도날드를 습격한 게 아니었는데, 맥도날드를 습격하고 보니 견딜 수가 없을 만큼 배가 고파졌다. 정말 이상한 조화다. 아르바이트생 중의 하나가 이마의 땀을 손등으로 훔치며 말했다. 
- 저기요. 저기, 뭐. 재료가 모자란데요. 
- 빅 맥 재료가? 
- 예, 빅 맥 재료가. 

  아차차. 빅 맥 재료를 백 개쯤도 준비하지 않는단 말이야? 그럴 수도 있을까? 우연일까? 아니면 함정일까?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없다는데 뭘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잠시 고민했다. 과연 다른 재료를 넣는다고 빅 맥이 빅 맥이 아닌 다른 것이 될 것이냐. 빅 맥 백개의 상징성이 사그라들지는 않을 것인가. 베이컨 토마토나 새우버거의 속을 간직한 빅 맥으로 가장된 햄버거는 과연 우리의 허기와 상실된 감각을 온전히 채워줄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는 결론을 내렸다. 
- 알아서 만들어. 대신 부피만 꼭 빅 맥만큼 만들어야 돼. 포장지도 반드시 빅 맥 용 포장지를 써야 하고. 
영리한 아르바이트생은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물의 실체와 본질에 대한 어느 정도 감각이 있는 녀석임이 틀림 없다. 

 

  백개의 빅 맥이 차곡차곡 종이 봉투 안에 담겼다. 속은 모두 다를지언정 포장은 한결같았다. 빅 맥과 빅 맥은 아니지만 빅 맥처럼 보이는 빅 맥이 완성되자 우리는 콜라를 네 개 주문하고 값을 지불했다. 그것만큼은 하루키에 대한 '오마주'로 그대로 따르기로 했다. 두 개가 아닌 네 개를 주문한 이유는 콜라 한 잔씩으로는 모자를 성 싶은데, 그렇다고 리필을 하러 다시 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저기요. 아까 빅 맥 백 개 털어간 사람들인데 콜라 리필 좀…") 헤이즐은 그들 모두 꿇어 앉혀놓고 밧줄로 꽁꽁 묶었다. 그리고는 이사용 청색 테이프로 둘둘 감았다. 그 광경을 지켜보면서 나는 그녀가 진정한 여장부감이라는 사실과 청색 테이프야 말로 인간이 발명한 가장 위대한 발명품 중의 하나라는 생각을 했다. 짐짝처럼 꽁꽁 묶인 그들의 표정은 기묘했다. 피스톨을 두 자루씩 들고 있는 우리에 대한 두려움과 지루한 한 밤 중에 차라리 이런 일이라도 생겨 다행이라는 안도감, 그리고 아침이 오면 다가오게 될 고통스러운 정산의 시간에 대한 걱정이 어지러이 뒤섞여 있었다. 정산, 그걸 생각하고 나니 분명 조금 미안해지기는 했다.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하지만 우리는 맥도날드를 털었다. 기껏 습격해 놓고 그런 것까지 걱정해주는 사람은 없다. 매정하지만 우리는 이것도 인연인데, 앞으로 좋은 일만 있기를, 아무쪼록 댁 내에 평안이 가득하기를, 바란다는 말을 남겨두고 뒷문으로 빠져나왔다. 생각했던 것보다 만족감은 짜릿했다. 돌아가는 길에 라디오에서는 프랭크 시나트라가 부르는 ‘댓츠 라이프 (That’s Life)’가 흘러나왔다. 이 순간 이 보다 멋진 선곡이 또 있을까? 귀청이 떨어져 나가라 크게 틀어놓고 따라 부르며 강변북로를 달렸다. 새벽 바람이 창문 틈새로 얇게 저미어져 들어왔다. 


*


  새벽 두 시 반. 한강 고수부지에 체로키를 세워놓고 우리는 성공적인 빵가게 습격을 기념하는 의미로 전리품의 일부를 먹어치웠다. 정말 백 개다. 무게도 상당하다. 나중에는 재료가 많이 모자랐는지 맨 위에 놓여진 햄버거는 빵과 빵 사이에 감자튀김이 들어가 있었다. 차가 뒤집어져라 웃었다. 사상 유례없는 '감자튀김버거'의 이야기는 세월이 아주 많이 지난 다음에도 잊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기록은 기록이다. 우리는 세계 신기록을 세웠다. 봉투 아래쪽에서 정상적이고 온전한 빅맥을 골라 두 개씩 나누어 먹고 콜라를 마셨다. 아직 아흔여섯 개의 빅 맥 혹은 유사 빅 맥이 남아있다. 우습다면 우습고 끔찍하다면 끔찍한 일이다. 배가 터질 듯이 불러와서 우리는 아무 말 없이 밤이 내린 한강과 그 너머에 줄지어있는 빨갛고 노란 불빛들을 바라보았다. 나는 물었다. 
- 하루키 아저씨 말야. 그 다음에는 도대체 뭘 했대? 
  그녀는 다시 까만색 뿔테 안경을 끼고 책을 펼쳤다. 그리고는 이내 책을 덮어 뒷 좌석으로 던져 버렸다. 
- 에라 모르겠다. 그 다음이 어떻게 되었건, 우리는 우리 나름의 방식으로 승리를 만끽하면 되지 않겠어? 

 

  우리는 의자를 뒤로 젖히고 밤새 음악을 들었다. 레이 찰스와 엘라 피츠제럴드와 사라 본의 노래가 이어서 흘러나왔다. 아름다운 발라드들을 들으면서 나는 눈을 감고 아까 보았던 깊고도 푸른 연못에 대하여 생각했다. 흔들거리며 가늘고 길게 퍼져나가던 잉크 줄기는 이제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어느새 완전히 물 속으로 퍼져버린 듯했다. 물론 눈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빵가게를 털고 나서 공허함은 이제 멎었다. 물을 깊숙이 들여다보며 물의 향기를 맡다가 우리 모두 그대로 잠이 들었다. 아주 피곤한 하루였는가 보다.

 

(2003년 0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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