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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8. 배터리와 카브레타

낙농콩단/Season 1-5 (2000-2005)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03. 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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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 배터리. 안녕, 카브레타. 너와 나, 배터리와 카브레타가 만나면서 우리 <배터리와 카브레터>는 역사적인 첫 발을 내딨었지. 그게 앙골모와 대왕이 재림하지 않은 서기 2000년. 우리는 5명의 미남으로 구성된 인기 절정의 댄스그룹. 댄스그룹이란 소녀들의 함성을 먹고 산다는 뜻이야. 우리가 무대에 올라서 손만 한 번 흔들어 주어도, 눈만 한 번 '찡긋' 감아주어도, 그 아이들은 지구가 떠내려갈듯 자지러지지.

 

  물론 어떤 사람들은 '댄스그룹'이라고 하면 나쁜 편견부터 떠올린다는 사실을 알아. 하라는 노래는 아니 부르고 덩실덩실 춤만 추는, 그러면서도 자기들이 노래를 직업으로 삼았다 착각하는, 그런 '금붕어'들이라고. 오 제발, 우리를 두고 그렇게 부르지는 말아줘. '금붕어'라기에 우리들은 너무 잘 생겼으니까.

 

  우리는 이전까지 나왔던 다른 댄스그룹들과는 달라. 춤은 '도구'이고 노래가 '목적'이지. 가끔 립싱크를 하기는 하지만 그건 고의가 아니야. 어떤 놈이 짰는진 몰라도 안무가 심각히도 격렬했거든. 마음만 먹으면 노래를 부를 수야 있었지만 제대로 부르기는 상당히 어려웠어. 좋은 노래를 들려주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춤만이라도 제대로 추는게 낫지. 그게 우리들이 생각하는 '프로페셔널'의 정의야.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가 다 놓치는건 그야말로 '아마추어'들이나 할 짓인거야. 하지만 우리의 노래실력은 결코 어디에 내어놓아도 떨어지지 않아. 당장 여기서 들려줄 수는 없겠지만, 이미 텔레비전 오락 프로그램 <노래방 1000곡에 도전합니다>에 출연하여 완전 제대로 뽐낸 바 있으니 정 믿지 못하겠거든 방송국의 '다시 보기' 서비스를 이용하도록 해. 싫음 말고.

 

*

 

  크리스 P. 베이컨 (Chris P. Bacon), 필렛 미뇽 (Filet Minyon), 해밀턴 버거 (Hamilton Burger), 바브 E. 큐 (Barb E. Cue), 매킨지 추 (Makenzie Zhou). 우리들은 각기 다른 이름을 가졌지만 텔레비전에 나가면 이렇게 자기소개를 하지. "우리들은 <배터리와 카브레타>입니다." 우리가 즐겨하는 농담이 있어. 3년 이상 되었으니 배터리를 교환해야겠군. 2만 킬로미터쯤 뛰었으니 이젠 카브레터를 청소 좀 해야할까?

 

  <배터리와 카브레터>라는 팀명은 참 특이하지? 맞아. 우리도 그렇게 생각해. 언더그라운드 록 밴드라면 모를까, 아이돌 댄스그룹의 이름으로는 조금 유별나게 들리는 것이 사실이야. 거기에 어떤 의미가 있냐고? 모르겠어. 팀명은 사장님이 지어주신거야. 사장님의 아버지가 옛날에 아주 큰 카센터를 했다나봐. 그래서 자동차에도 관심이 많고. 지금 회사도 사실은 카센터 물려받은 돈으로 차렸지. 이건 비밀인데 말이야. 원래는 아들을 둘 낳아 이름을, 큰 애를 '배터리', 둘째를 '카브레타'라고 짓고 싶었다는데 사모님이 결사 반대를 했다지 뭐야. 그래서 그럼 친아들이 아닌 '사업적 아들'들에게 이 이름을 붙여주겠다고 결심했고, 그게 누구냐하면 바로 우리야. 그리고 그렇게하여 만들어진 이름이 바로 <배터리와 카브레타>이고.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 반대겠지. 우리가 이 그룹의 멤버로 채 뽑혀오기 전에 이미 그런 괴상한 이름이 정해져 있었으니까. 우리는 이미 모든게 다 갖추어진 (심지어 첫 앨범의 그로테스틱한 자켓 디자인까지 인쇄가 끝난 상태였던) <배터리와 카브레터>의 이미지에 적합한 아이들로만 골라 선발된 셈이지.

 

  아무튼 말이야. 사장님은 학교에서 '실패자'이었던 우리를 거두어주신 고마운 분이야. 이 세계에 들어오기 전까지 우리 다섯은 열등생, 구제 불능, 불량품, 반품 요망, 내지는 낙오자 등등의 낙인을 꼬리처럼 달고 살았어. 정말 이상한 일인데, 생김새도 다르고 취향도 다르고 식성도 다른 우리가 그 점에 있어서만큼은 판에 박은 듯 똑같아. 또 한 가지가 있다면 공고를 나왔다는 (졸업해서 나왔다고는 하지 않았어) 사실 정도랄까. 그때는 정말 기억하기도 싫어. 학교에서도 혼나고, 집에서도 구박받고, 희망이라고는 정말 좁쌀 한 톨만큼도 없었지. 그저 술을 마시고, 오토바이를 타고, 뒷골목에서 춤추는 것으로 '희망없는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시절이었어. 춤, 그래 춤이 없었다면 아마 미쳐 버렸을지 몰라.

 

  그런 우리들을 거두어 주신 사장님은 분명 고마운 분이야. 자기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입버릇처럼 '너희들은 나한테 정말 고마워해야 하는거야'라고 꼭 찝어 말하시고는 하지. 입혀주지, 재워주지, 먹여주지, 용돈주지, 필요한거 사주지, 세계적인 댄스그룹 <백스트리트 보이즈>인들 너희만큼 대접을 받겠냐는거야. 맞아. 백번 지당하신 말씀이지.

 

*

 

  이번 앨범은 우리의 열두번째 앨범. 데뷔한지 벌써 3년째니 어느 정도 책임감이 느껴져. 이 바닥에도 선배보다는 후배가 더 많아졌고. 그래서 그런지 이번 앨범 ‘동절기 차량 관리 요령’은 참 힘들게 만들었어. 이렇게 고생스럽게 녹음한 앨범은 난생 처음이야. 사장님도 그러시더라. 이번만큼은 너무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었다고. 하긴 아홉 곡을 보름이나 걸려서 녹음했으니까. 그리고 엔지니어 아저씨들이 녹음한 걸 파트별로 짜맞추는데 또 보름이나 걸렸지. 짜맞춘다는게 뭐냐고? 쉽게 설명하자면 일단 한 노래를 부분 부분으로 쪼개서 따로 녹음을 하는데, 일단 많이 불러서 많이 받아 놓고 토익 점수처럼 제일 좋은 걸 골라 쓰는거야. 아무리 그래도 앨범 하나 만드는데 한 달이나 걸리다니. 이제까지는 그런 적이 없었는데 말이야.

 

  사실 그 사이에 우리 라이벌 그룹인 <코경유 위삽관>이 열 세번째 앨범으로 먼저 치고 나오지나 않을까 걱정을 많이 했어 (요즘 은근히 거슬리는 것들이야). 하지만 고생스럽게 녹음한만큼 결과는 좋은 것 같아. 공동 프로듀서로 참여한 닥터 마틴(Dr. Martin)은 그 유명한 팝계의 거장 프로듀서 퀸시 존스(Quincy Jones)의 옆집 사는 사람의 절친한 친구의 사돈의 질녀와 아주 각별한 사이인데, 방학을 틈타 한국의 시사영어사에 회화선생을 하러 들어왔다가 부업삼아 우리 앨범의 프로듀서를 맡아주었지. 역시 깜…… (참, 회사 자문 변호사가 이 표현을 쓰지 못하게 했는데!) 아무튼 그들은 삘이 남다르더라고. 역시 이 지구상에서 가수다운 가수를 하려면 아메리칸 워러를 좀 먹어줘야 하나봐 (거기다 마이클 잭슨, 레이 찰스의 프로듀서의  옆집 사는 사람의 절친한 친구의 사돈의 질녀와 아주 각별한 사이인데 오죽하겠어!)

 

  물론 메인 프로듀서는 우리 사장님이 맡았기는 해. 아무튼 우린 이번 앨범으로 아카펠라와 힙합과 네오소울을 한 장의 앨범에 담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그룹이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었어. 세상에 대한민국 재벌 대기업들을 제외하고 이만큼 잡다한 분야에 얇고 넓게 비빌 수 있는 존재는 우리밖에 없을거야.

 

*

 

  타이틀 곡인 '가끔은 시동을 걸어줘야'는 도입부에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스트링과 양념처럼 곁들여진 스카펑크 풍의 리듬이 인상적인 댄스곡인데, 빈티지스럽고 어쿠스틱한 사운드의 구성이 무척 탄탄해서 (교보 핫트랙스 제공) 우리가 부른걸 우리가 듣고도 감탄을 금치 못했지. 우리 멤버들이 워낙 바빠서 여덟 파트를 따로 녹음해서 이어 붙였기 때문에 처음엔 우리도 그렇게 잘 빠진 곡인지 잘 몰랐는데 말야, 정말 '열라' 끝내주더라고. 사장님도 무릎을 딱 치면서,

- 어 이건 완전 타이틀 감이야. 뭣들해? 당장 뮤직 비디오 제작하지 않고!

라더라. 

 

  그러더니 정말로 발표하자마자 케이블 텔레비전 음악 차트 1위에 올랐지. 꽃다발과 트로피를 한아름 안으며 (그것도 다섯 명이 나눠 받으니까 딱히 힘들건 없어) 우리는 마이크 앞에서 수상 소감을 말했어. 엄마 아부지, 하느님 아부지, 사장님 아부지, 그리고 모든 <배터리와 카브레터> 팬들께 감사드린다고. 싸랑 싸랑한다고. 좋아 좋아한다고. 눈물마저 좀 흘려주었으면 퍽이나 감동적이었을텐데 아쉬워. 다음부터는 미리 안약이라도 챙겨야겠어. 그리고 이번 우리 노래는 한류스타답게 베트남, 라오스, 미얀마 등지의 반응도 좋아서 연말쯤엔 동남아 순회 공연도 계획중이야. 요즘 들을만한 음반이 없다는 푸념이 자자한데 음반시장의 불황을 단번에 날려보낼 유일한 앨범이라고 자부해. 정가는 11,000원. 우리들의 멋진 화보가 실린 스페셜 에디션은 14,000원.

 

*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어. 팀의 안무를 맡고 있는 매킨지 추 (Makenzie Zhou)가 팀의 랩을 맡고 있는 크리스 P. 베이컨 (Chris P. Bacon)을 바라보는 눈길이 심상치가 않아. 그건 뭐랄까……. 한솥밥을 먹는 동료사이의 느낌이 아니란 말이지. 마치 사랑에 빠진 연인들처럼 그윽하고 더없이 감미로운…….

 

에이, 설마.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우리 <배터리와 카브레터>는 남성 5인조 그룹이야. 지난 삼년간 마치 친형제들처럼 지내왔는데, 아무리 세상이 바뀌었다한들 절대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되지. <카펜터스>나 <코어스>에서 (카펜터스나 코어스는 패밀리 레스토랑 이름이 아니야)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절대 안되는 것처럼 우리 <배터리와 카브레터>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돼.

 

  게다가 사장님, 우리는 입혀주고 먹여주고 재워주신 사장님의 제 1 훈시가 뭔 줄 알아? 다름 아닌 '사내 연애 금지'야. 우리 회사 1층 로비에 현판으로도 걸려 있다고. 같은 소속사 직원들끼리는 스캔들을 내면 안돼. 예전에 팀의 메인 보컬을 맞고 있는 해밀턴 버거 (Hamilton Burger)도 이런 이유에서 아픔을 겪었지. 우리와 같은 소속사의 걸그룹인 <담보 대출 이자 폭탄>의 멤버와 눈이 맞았던 게야. 그러나, 사내 연애 금지, 어쩔 도리가 없었지. 해밀턴은 매일 밤 한숨을 쉬며 술만 퍼 마셨어. 얼굴 잘 나왔고, 몸매 잘 빠졌고, 노래는 모르겠지만 춤도 좀 되고, 모든 남고생의 우상인 여자와 쌍방 과실로 필이 꽃혔는데, 어째서 더 이상 다가갈 수 없냐는거야. 오죽하면 팀을 나가서 그냥 민간인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겠어. (물론 공직에 있지도 군에 있지도 않은 그는 굳이 어디로 돌아가지 않아도 언제나 민간인이었어). 그 당시에는 정말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들마저 안타까워 어쩔 줄을 몰라했지. 로미오와 줄리엣이 따로 없다고.

 

  사내 연애 금지. 그럼에도 가끔 매킨지와 크리스을 보고 있자면 그 불길한 짐작이 무섭게 현실이 되어 나타날 것만 같은 예감에 몸서리가 쳐져. 이게 알려지면 스포츠신문 기자들은 어떤 가십 기사를 쓸까? (충격! 사내들의 사내 연애?) 팬들은 또 우리를 뭐라고 생각할까? (어쩜 변태들이라고 생각할 지도 몰라.) 아, 차라리 우리가 라이벌 그룹 <코경유 위삽관>처럼 멤버가 열두 명이었다면, 그래서 팀원들끼리도 누가 누군지 잘 기억을 못했다면 이런 일까지는 없었을텐데. 팬들도 멤버 이름 외우느라 청춘의 한 페이지를 홀랑 다 바쳐야 했을테고.

 

*

 

  이제와서 돌이켜보면 불길한 조짐은 지난 여름부터 보였어. 우리 소속사 청소 아주머니가 옷장 안에서 둘이 끌어 안고 있다는 것을 보았다는 거야. 에구머니나 망측해라. 남우세스럽게 사내들끼리. 아주머니는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얼굴을 재빨리 가렸지. 다만 고무장갑은 벙어리 장갑이 아닌 관계로 아주머니는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로 힐끔 그들을 볼 수 밖에 없었다는데, 그 광경이 너무 아름다워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는거야. ‘어째서 역사상 수많은 작가들은 단순히 이성간의 사랑에만 탐닉했을까?’ 하는 의문마저 들었노라고 아주머니는 고백했어. 섬세하게 흘러 내리는 금색 곱슬머리하며, 설악산 대청봉보다 오똑한 콧날, 앵두보다도 더 붉은 입술, 그 사이를 금빛 뱀처럼 일렁거리며 빠져 나오는…… (이 대목은 자체 검열 하는 것이 좋겠어) 아무튼 춤으로 단련된 탄탄한 몸매가 아주머니의 말라버린 중년의 가슴을 다시 뛰게 만들었으며, 기차보다 길고도 긴 팔과 매력적이고 탐스러운 다리로 서로를 부둥켜 안은 둘은 마치 하나인 것처럼 보였다고 해.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우리 <배터리와 카브레터>의 신조인 "우리는 하나다"에 부합하는 광경이었으리라 짐작해.

 

  소문은 일파만파 퍼져 나갔어. 청소 아주머니는 그래도 명색이 한류 스타인 우리들의 체면을 생각해서 아무한테도 그 일을 이야기하지 않았지. 그런데 너무 그걸 말하고 싶은 나머지 홧병이 난게야. 그리하여 어느 으슥한 밤, 우리 회사 건물 13층 청소도구함에서 대걸레와 쓰레기통에 대고 비밀을 이야기하지. (말이 나와서 그런데 <대걸레와 쓰레기통>도 댄스그룹 이름으로 괜찮다고 생각하지 않아?) 누구누구는 사실 얼레리꼴레리. 이로써 아주머니의 홧병은 차도를 보이게 되었지만 다음 날 온 회사에 소문이 퍼졌어. 도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대걸레와 쓰레기통에 귀라도 달렸던 것일까. 귀가 달렸다한들 입이 없는 그것들이 어떻게 소문을 퍼뜨리고 돌아다녔을까.

 

  당연히 사장님은 난리가 났어. 그 날 아침 퍼질러 자고 있는 크리스와 매킨지를 긴급 호출, '복날에 개를 패듯' 두들겨 팼지. 재떨이에 스핀을 걸어 던졌다는 소문도 있고, 구둣발로 삼단 콤보 옆차기를 했다는 소문도 있고, 철심이 알알이 박힌 가죽 장갑으로 녀석들의 턱을 날려버렸다는 소문도 있고, 그 일로 꽃처럼 화사했던 둘의 얼굴에 스크래치가 좀 나는 바람에 우리는 반 강제적으로 잠정적 휴식기간을 발표하게 되었지. 그런 얼굴로는 노래도 할 수 없고 춤도 출 수 없거든. 무론 대외적으로는 이렇게 말했어. '음악적 재충전'을 위한 시간을 가지겠다고. ‘영감의 교환’을 위해 네팔로 여행을 다녀오겠다고. 말은 되지. 우리는 <배터리와 카브레터>니까 당연히 '재충전'도 필요하고 '교환'도 필요하지. 둘은 붓기와 멍자국이 사라질 때까지 그 일에 대해서라면 일언반구 언급이 없었아. 사장님도 마찬가지였고 더 이상은 누구도 그 일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어. 그저 회사에서 청소 아주머니 하나가 사라졌을 뿐이야.

 

*

 

  그런데 왜 하필 크리스와 매킨지일까. 둘은 우리 <배터리와 카브레터>의 멤버들답게 모두 잘 생겼는데. 물론 크리스는 남자답게 잘생긴 것이고, 매킨지는 이름처럼 예쁘장하게 생기기는 했어. 크리스의 랩에 매킨지가 반한걸까? 아니면 매킨지의 춤에 크리스가 반한걸까?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남자들끼리 사랑에 빠질 수 있는 것일까. 이건 마치 우리에 열광하는 소녀 팬들이 무수히 만들어내곤 하는 인터넷 팬 픽션 소설의 한 장면 같아. 꽃처럼 아름답게 생긴 두 남자가 서로를 사랑하게 되다니! 정말 그런 걸 써서 서로 돌려보던 아이들은 아마 이 진실을 알면 '노스트라다무스'라도 된 기분이 들겠지? 

 

​  그런데 사실 그 아이들은 정말 노스트라다무스일지도 몰라. 가끔씩 우리도 읽어볼 때마다 깜짝 깜짝 놀라거든 (맞아. 우리는 상당한 시간을 우리에 대한 팬 픽션 찾아 읽는데 투자해). 우리가 공고를 다닌 것쯤이야 인터넷에서 검색하다 알 수도 있었겠지. 교복을 입은 채로 술 마시고 담배 피웠던 것 까지야 불량학생의 스트레오타입 같은 것이니 그리 어려운 짐작이 아닐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오토바이로 올림픽 대로를 폭주하고, 지나가다는 애들한테 급전을 무담보로 빌리고, 걸핏하면 큐대들고 당구장 패싸움을 벌이고, 옆 학교의 괜찮은 기집애 하나 놓고 서로 싸우고…… 소름끼치게 다 맞거든. 도대체 그런 걸 다 어떻게 알았을까. (엄한 아버지와 병든 어머니와 어려운 집안 형편까지 상세하게!) 정말 신기한 일 아니야?

 

*

 

  갑자기 생각났는데 말이야. 우리 사장님은 은근히 그런 팬 픽션 소설 읽는걸 좋아해. 묘한 만족감을 느낀다나봐. 심지어 둘째 아들내미 (자칫 이름이 ‘카브레타’가 될 뻔했던 그 아이) 주민등록번호를 도용하여 그런 팬 사이트에 회원가입을 하기도 해. 이유인즉슨 가입을 안하면 금지된 팬 픽션은 읽을 수가 없다는 거야. 금지된 까닭이란 19세 이상도 입을 쩍 벌릴만큼 남사스럽고, 마광수 교수조차 탄식하며 붓을 꺾을만큼 경이로운 변태적 묘사가 넘실대기 때문이라고 들었어. 조금 갸우뚱하기도 해. 분명 그런걸 쓰는 애들은 많아야 열 여덟, 열 아홉을 넘지 않았을텐데 말이야. 어디서 그렇게 현란하고 풍부한 묘사와 상세하고 다양한 기교를 습득했을까 (우리도 가끔 많이 배워). 정말 앙골모와 대왕이 재림해야할 때가 온 걸지도 몰라.

 

  사장님이 그런걸 읽으며 만족감을 느끼는 이유는 두 가지래. 첫째는 내가 키운 애들이 이 만큼 유명해 졌구나 하는 뿌듯한 만족감. 둘째는 잘 살피다가 꽤 괜찮은 (괜찮다는 기준은 인기도 많고 어느 정도 문학적 틀을 갖춘 것이라고 사장님은 설명하는데, 글쎄 책이라고는 <월간 오너 드라이버>밖에 읽지 않는 사장님이 문학에 대해 뭘 알겠어?), 아무튼 괜찮은 것이 있으면, 돈 주고 판권을 살거래. 그래서 영화를 만들고, 삽화를 곁들여 스토리북도 내고, 우리를 캐릭터 상품으로도 만들고, 그 밖의 기타 등등 다양한 문화 콘텐츠로 만들어서 전 아시아권이 <배터리와 카브레터>의 이름으로 뒤덮히도록 하고 싶다는 거야.

 

  그런데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는거 같아. 세번째 이유는 정말로 사장님이 그런걸 좋아하는게지. 현실에서는 사내 연애 금지를 제 1의 훈시로 내세우잖아. 우리는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사는 한 몸이며, 한솥밥을 먹는 너와 나는 숟가락과 젓가락으로 얽힌 혈연관계에 있으니, 고로 서로 연애적 감정을 품으면 근친상간이라는 것이 사장님의 주장이고 말이야. 그런데 밤만되면 사무실에 불을 끄고 혼자서 우리를 동성애자로 묘사하는 그런 잡문들을 읽으며 키득거린다니까. 그것도 비즈니스의 일환이라면서 말이야. 말이 앞뒤가 맞지 않지. 아무래도 그건 비즈니스가 아닌 것 같아. 그냥 자기도 좋아서 그런 걸 즐기는거지. 사장님은 우리에게 '나는 너희를 친아들처럼 생각한다'라고 늘상 말하지만, 글쎄……. 열대 우림의 야생 동물처럼 서로 엉겨 붙어있는 아들들의 모습을 즐기는 아버지가 세상 천지 어디에 있겠어. 안 그래?

 

*

 

  올해도 겨울이 돌아왔네. 겨울은 행복한 계절이야. 여름내내 격렬히도 몸을 흔들어 댄 우리들의 각종 관절이 아우성을 피우는 것만 빼면 말이야. 우선 우리는 댄스 그룹이기 때문에 여름철이 대목이고, 겨울에는 프로야구처럼 시즌을 접어. 12월에 잠깐 캐롤 앨범을 내기는 하는데,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야. 텔레비전에 나가 산타 옷을 입고 빨간 루돌프 코장식을 끼우고 촛불을 들고 정말 성스럽고 경건한 표정으로 캐롤 몇 곡 불러주면 끝이거든. 우리만 보면 지구가 떠내려가라 소리를 지르는 아이들은 프랭크 시나트라, 냇 킹 콜, 클리프 리차드, 엘비스 프레슬리, 엘라 피츠제럴드, 그리고 제임스 브라운의 캐롤을 던져 버리고 우리 <배터리와 카브레터>의 캐롤을 사서 들어줄거야. 우릴 사랑하는 아이들은 우리 이름이 적힌 것이라면 뭐든지 돈을 내고 사 모으니까. 카메라를 쳐다보면서 ‘판이 잘 안 나가서 슬픈 미소'를 지어준다면 같은 앨범을 두 장, 세 장씩도 사주는 정말 고마운 아이들이야. 다시 한번 말할께. 진심으로 사랑해 얘들아.

 

  또 12월에는 시상식이 있어. 우리 <배터리와 카브레타>는 올해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활약을 펼쳤으니까 아마 몇 주 동안 살 맛 나는 날들이 이어질거야. 우리의 라이벌 <코경유 위삽관>과 그 악질적인 팬들이 훼방만 놓지 않는다면. 팀의 야식을 맡고 있는 바브 E. 큐 (Barb E. Cue)가 조금 전에 인터넷에 접속하여 넌지시 알아봤는데 네티즌 인기투표도 현재 1위라고 하고 있더라고. 며칠 전에 쇼프로그램에서 <코경유 위삽관>의 멤버들이랑 닭싸움을 하다가 비참하게 졌던 것이 이만한 반사 이익을 몰고 올지는 몰랐어. 그 덕에 지지층이 개미떼처럼 무섭게 결집했거든. 순식간에 인터넷이 달아오르더니만 왁자지껄 뒤집어졌고 급기야 우릴 사랑하는 아이들이 광화문 이순신 동상 앞에서 그날로 모이더라구. 촛불을 들고선 말이야. '집회 및 시위의 자유'를 운운하며 전경과 대치하면서 아홉시 뉴스에도 나왔지. 몇몇 교복차림의 여학생들이 악에 받쳐 <코경유 위삽관> 녀석들을 죽이러간다 난리 법석을 떠는데 얼마나 행복했는지 몰라 (열두명을 다 죽이려면 시간이 좀 걸리기야 하겠지만 그쯤이야 얼마든지 기다려줄 수 있단다, 얘들아).

 

*

 

  12월 23일 바로 오늘. 우리는 우리와 남매간인 걸그룹 <담보 대출 이자 폭탄>과 함께 회사 소속의 밴을 타고 시상식장인 리틀 엔젤스 예술 회관으로 향했어. 항상 느끼지만 <담보 대출 이자 폭탄>의 멤버들은 정말 잘 뽑은 것 같아. 하나같이 반반하고 늘씬하게 잘 빠진 것이 무시무시한 그룹명과는 딴판이야. 폭탄은 하나도 없다니까. 회사 로비의 현판만 아니었더라면 한 번 어떻게 꼬셔볼텐데 아쉬운 일이지. 

 

​  <담보 대출 이자 폭탄>은 4인조 걸 그룹인데, 멤버 이름이 각각 담보, 대출, 이자, 폭탄이지. 그 중 우리 멤버인 선유와 사랑에 빠졌던 아이의 이름은 이자야. 해밀턴은 늘 입버릇처럼 쟤를 위해서라면 내 몸 속의 이자라도 떼어줄 수가 있어, 라고 말했지. 췌장말이야. 췌장. 또 이렇게도 말했지. 쟤를 꼭꼭 접어서 귓 속에 넣어가지고 다니고 싶어 (이자에는 귀이개라는 뜻도 있다나 뭐라나). 그런데 그럴수야 있나. 쟤 하나가 우리 회사에 벌어다주는 돈이 일년에 10억이 넘는데. 사장님이 이자라면 그저 침을 질질 흘리는데. 복덩이라고. 그냥 사내 연애도 금지인데, 특히나 그 상대가 복덩이 이자라면, 사장님은 분명 해밀턴을 지하실에 거꾸로 매달아 놓고 회를 뜰게 틀림없어. 어쩌면 고대 중국의 누구처럼 젓갈을 담가 회사 사람들 전체에게 맛을 보게할지도 모르지.'나의 뜻을 거역하면 이렇게 됨을 명심하고 또 명심하라는 뜻으로.

 

  그렇듯 이룰 수 없는 막힌 사랑의 절절함을 입버릇 삼아 내뱉더니만, 어느새 선유는 우리 <배터리와 카브레터>에서 가장 뛰어난 작사가가 되었어. 이번 앨범 ‘동절기 차량 관리 요령’에서도 무려 다섯 곡의 노랫말을 붙였지. 이런 식으로.

 

너를 위해서라면 내 몸 속의 간도 떼어줄 수 있어
너를 위해서라면 내 몸 속의 췌장도 빼어줄 수가 있어 (예이예이예)
췌장말이야 (오 베이비)
너를 꼭꼭 접어서 내 귓 속에 넣어다니고 싶어
너를 꼭꼭 접어서 내 눈 속에 넣어다니고 싶어 (예이예이예)
눈에말이야(오 베이베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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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은 종종 이런 말을 해. '살다보면 나를 위해 준비된 날이 있다.’ 

 

​  그렇다면 오늘은 우리 <배터리와 카브레터>를 위해 준비된 날이었어. 우리 다섯은 언제나 하나이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의 개체라고도 할 수 있겠지. 우리는 새앨범 ‘동절기 차량 관리 요령’으로 올해의 최우수 앨범상을 탔어. 그리고 첫 싱글로 커트된 타이틀 곡 '가끔은 시동을 걸어줘야'는 최우수 싱글상을 탔어. 그 밖에도 최우수 남성그룹상, 네티즌 인기투표상, 모바일 인기상을 휩쓸었지. 그때마다 방청석에는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과 따뜻한 잠자리를 주시는 소녀들의 성스러운 자지러짐이 울려퍼졌어. (10억 중국인들이 일제히 제자리뛰기를 한들 저만한 소리가 날까?) 우리의 아버지인 사장님은 최우수 프로듀서상을 탔고, 시사영어사 회화선생을 겸하고있는 투잡족 닥터 마틴은 최우수 작곡가상, 우리의 여동생들인 <담보 대출 이자 폭탄>들은 최우수 여성그룹상을 탔어. 그야말로 우리의 독무대였지. 회사에선 샴페인을 터뜨리고 난리가 났다는 쪽지 메모를 누군가 전해주더라. 대선에서 승리한 정당인들 이만큼 기뻐할까. 터지는 플래시와 휘날리는 꽃종이들 사이에서 '팀의 안무를 맡고 있는 크리스 P. 베이컨 (Chris P. Bacon)이 팀의 랩을 맡고 있는 매킨지 추 (Makenzie Zhou)의 손을 슬쩍 잡는걸 보기는 했는데, 에라 모르겠다. 오늘은 그냥 마음껏 즐기고 싶은 날이니까. 한 무리의 기자들이 다가와서, 사진을 찍을테니 포즈 좀 취해주실 수 있겠어요? 우리들은 옷 매무새를 가다듬고, 각자 가장 자신있는 각도로 나란히 포개서서 입을 모아 외쳤지.

 

  우리들은 <배터리와 카브레타>입니다.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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