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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 형수님 달린다

낙농콩단/Season 6-10 (2006-2010)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07.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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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님에게 큰 흉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여자를 좀 좋아할 뿐이다. 남자가 여자를 좋아하는 게 문젠가? 아니다. 당연하고 당연한 자연의 섭리다. 다만 형수님 말고 다른 여자도 두루두루 좋아하니, 그게 좀 문제란 거다.

  형님은 한국의 많고 많은 도시 중에서 대전을 가장 좋아하는데, 거기엔 다 이유가 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이고 북쪽 절반이 분단된 대한민국의 비극적 현실에서 대전은 교통의 요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대전에서라면 부산의 영이를 만나 광안대교를 바라보며 소주 한 잔 하고자 두시간이면 족히 달려갈 수 있다. 이때의 소주는 '좋은데이' 아니면 '봄봄'이다. 대전에서라면 광주의 영이를 만나 무등산 기슭에서 소주 한 잔 하고자 두시간이면 족히 달려갈 수 있다. 이때의 소주는 '보해 잎새주' 아니면 '천년의 아침'이다. 대전에서라면 대구의 영이를 만나 땀 뻘뻘 흘리면서 소주 한 잔 하고자 한시간이면 족히 달려갈 수 있다. 이때의 소주는 '참소주' 아니면 '더블루'다. 대전에서라면 서울의 영이를 만나 한강 고수부지를 거닐며 소주 한 잔 하고자 한시간이면 족히 달려갈 수 있다. 이때의 소주는 '참이슬' 아니면 '처음처럼'이다. 물론 수도 서울에 있으면 서울의 영이는 단박에 만날 수도 있을 것이나, 부산의 영이나 광주의 영이를 만나기는 훨씬 더 어려워진다. 나아가 대전/충청 지역에도 분명 있을 영이를 만나기 위해선 어차피 추가로 한시간을 지불하여야 한다. 결국 이 모든 조건을 고려해 보았을 때, 중부권 중에서도 대전이야 말로 최고의 전략적 요충지요 다중 연애를 위한 최적의 베이스 캠프가 아니겠느냐는 것이 형님의 말이다. 아마, 그 말이 맞을 것이다. 다익스트라 알고리즘(Dijkstra: 네덜란드 컴퓨터 과학자 다익스트라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진 알고리즘으로 단일 출발점에서 최단 경로를 구하는 방법을 다룬다)을 전공하고 '외판원 문제 (TSP: Traveling Salesperson Problem)'에 꽃같은 청춘을 모두 바친 형님의 말이니 (물론 술과 여자에 바친 시간을 열외로 하였을 때의 얘기다) 아마도 최단 경로에 관한 한 틀릴 리가 만무할 것이다.  


  어디든 자신의 발길이 닿은 곳에는 애인을 만들어 두어야 한다는 것이 형님의 지론이자 주장이자 목표다. 그래야 다시 그 도시에 들렀을 때 만나서 같이 술 한잔 할 사람도 있어 쓸쓸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그렇게 정이 오가며 '계기'가 생겨야만 그 도시의 낯섬 또한 비로소 사랑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신기한 것은 형님에게 그렇게 마음 먹은대로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부분이다. 형님이 호남형이라는데 (나는 절대 동의할 수 없지만) 본인과 뭇 여성들은 어느 정도의 확신과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아가 형님은 스스로의 능력(소위 세간에서 말하는 작업 기술)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형님의 주둥이에 소주 두 병을 넣어주면 그 대신에 튀어나오는 단골 레파토리만 봐도 그렇다. 


  이야기 속의 형님은 버스를 타고 어딘가를 가던 중이었단다. 버스가 어느 정거장엔가 멈췄는데 바로 앞좌석에 기가 막히게 아름답고 눈물 나도록 훈훈한 아가씨가 앉았단다. 비록 나는 그 이야기 속의 여자분을 한번도 본 일이 없지만 형님이 한 눈에 반할만한 스타일이라면 대충 짐작은 간다. 그러니까 대학 때 아마도 영이라는 아이가 있었다면, 그 아이를 닮은 아가씨였을 것이다. 형님은 그 아가씨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저기요?" 벙 뜬 토끼 눈을 한 그 아가씨에게 형님은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네?" "혹시 방죽여고 나오지 않았어요?" (방죽여고라는 학교가 정말 있기나 할까?) 문제의 아가씨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던 것은 당연한 일. "아닌데요. 무슨 일이신데요?" 머쓱해진 형님은 무안함을 감추지 못하고 이렇게 얼버무렸다고 한다. "죄송합니다. 동창인 줄 알았어요." 나로선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 어처구니 없이 뻔뻔한 말 한마디에 그 아가씨가 웃음을 터뜨렸다는 것이다. 그렇게 시작되어 같이 밥도 먹고 술도 마시고 결국 한동안 연애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말도 안돼! 아니 그런 쌍팔년도 방식이 정말로 먹혔단 말입니까? 1988년도 아니고 단기로 따졌던 원조 쌍팔년도인 1955년도에도 먹히지 않았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역시나 남녀관계란 오묘하고도 아리송한 것이어서 서른 넘도록 연애 한 번 해보지 못한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 많다.


  형님은 호남 출신이 아니다. 하지만 호남형이라는 게 뭇 여성들의 중론이다. 나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것 중의 하나가 '호남형'의 기준이다. 어디서부터 호남이고 어디서부터 비호남인가. 같은 남자들은 알 수 없는, 그러나 여자들은 알 수 있는 뭔가 신비하고도 오묘한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형님은 호남 출신이 아닌 호남형이지만 형님의 활동 영역은 전국구다. 인지도 역시 전국구다. 농담이 아니라 1개의 특별시, 6개의 광역시, 8개의 도, 1개의 특별 자치도에 걸쳐 애인이 분포하여 있으니 하는 말이다. 앞서 언급한 최단거리론으로 짐작할 수 있듯이 영이는 어디에든 있다. 서울에도, 부산에도, 광주에도, 대구에도, 인천에도, 울산에도, 대전에도. 그녀들이 모두 영이인 이유는 두가지다. 첫째는 사생활 보호상 차마 실명을 밝힐 수 없기 때문이다. 서울의 김OO (29세), 부산의 박OO (30세), 제주의 최OO (33세) - 이런 식으로 다 밝혀버리면 난 형님한테 맞아 죽을 수도 있다. 물론 그 전에 형님이 형수님에게 맞아 죽을 것이다 (그럼 형수님 덕에 내가 살게 되었으니 내게는 형수님이 생명의 은인이 되는 셈인가?) 아무튼 그런 애로사항이 있어 서울의 영이, 부산의 영이, 이렇게 칭하는 것이다. 둘째는 형님이 가진 '영이'라는 이름에 대한 격렬한 판타지다. 영이는 초등학교 1학년 교과서에도 철수, 바둑이와 등교길에 쪼인하는 아이의 이름으로 간택될만큼, 평범함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이름이지만, 누군가에겐 오히려 그래서 더욱 특별한 애착이 담긴 이름일 수도 있는 것이다. 어쩌면 형님의 첫사랑 이름이 영이였던가? 아마도 대학 때 일이었던가? 나는 모든 진실을 기억하고 있지만 그 이상은 밝힐 수 없기에 얼버무리기로 한다. 그 이상을 입에 올린다면 난 형님한테 맞아 죽을 수도 있다. 물론 그 전에 형님이 형수님에게 맞아 죽을 것이다. (그럼 또 형수님이 내게는 생명의 은인이 되는 셈인가? 한번도 아니고 두번씩이나?). 


  그런 아슬아슬한 상황이지만 형님에게는 애인이 있다. 형님에게는 애인이 많다. 형수님이 있음에도 애인이 많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깜찍한 공주님이 셋이나 있음에도 (다섯살 쌍둥이 사랑이와 우정이, 그리고 세 살 희망이) 애인이 많다. 도대체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좋단 말인가. 이런 스토리를 전해 들은 사람들 백에 아흔아홉은 형님에게 욕을 퍼붓는다. 그것도 아주 시원하게 퍼붓는다. 몇 가지 짐승도 등장하고 신체 일부가 등장하기도 하는 그런 버라이어티한 욕이다. 뭐, 물론 친 형님도 아닌데 욕을 먹든 짐승이 되든 신체 특정부처럼 살든, 내 알 바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남들처럼 경멸하기에 조금 망설여지는 것은 아마도 형님과 함께 지내온 시간이 그만큼 길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친하다고 감싸고 도는 것이 아니다. 급수와 강도를 떠나 바람은 어쨌든 바람이며 도의적으로는 나 역시 당연히 형수님 편이다. 다만 그렇다고 지금 이 시점에 나까지 나서 형님을 비난하고 싶지는 않을 뿐이다. 종종 이런 스토리를 전해들은 사람들 중 백에 하나 꼴로는 혹시 형수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지레 짐작하는 경우도 있다. 좀 불쾌한 말이다. 내가 보기에 형수님에게 전혀 문제가 없다. 문제가 있다면 역시 형님쪽이요, 하자가 있대도 두말할 것 없이 형님쪽이다. 오히려 형수님은 정상적이다 못해 모범적인 한 가정의 어머니다. 애기가 둘인데도 아직 길가다 처녀 소리를 들을만큼 겉모습도 훌륭하지만, 안으로도 너그러운 마음 씀씀이와 단단한 인내력을 지닌 분이다. 남자된 입장에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면 당연히 오케이다. 그런 분을 모시고 산다는 것은 영광된 일이리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


  형수님이 과연 형님의 '영이들'을 파악하고 있느냐. 그게 우리로서는 참 궁금한 부분이었다. 형님의 활동 반경은 정확하지 않지만 형님의 자동차는 1년에 6만키로 이상을 뛴다. 보통 자동차 회사에서 가정하는 1년치 주행거리의 세배 정도 굴러다니는 셈이다. 어제 내가 확인한 바로는 계기판에 201,938 (km)라고 적혀있었다. 형님이 차를 바꾼 것이 고작 3년여 전이니, 출퇴근 하기에 벅찬 평범한 셀러리맨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화려한 주행이력이 아닐 수 없다. 형님의 자동차가 그렇게 주행할 수 밖에 없는 것은 1개의 특별시, 6개의 광역시, 8개의 도 및 1개의 특별 자치도에 산재되어 있는 영이들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형수님이 계기판의 그 숫자를 한번이라도 확인했다면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혹은 더 간단하게는 주유비 내역에서라도 범상치 않은 구석을 발견하는 것은 가능했을 것이다. 가령 어떤 날은 경상도에서 기름을 넣고 어떤 날은 전라도에서 기름을 넣었다는, 화개장터적 기개가 넘치는 결제 내역을 단순히 잦은 지방 출장 때문이리라 곧이 믿었겠냐는 말이다. (게다가 정말 출장이라면 관련 제반 업무로 발생하는 비용은 모두 회사 비용으로 처리가 되었어야 마땅한 것이 아닌가!) 형님은 그래서 가능한 모든 결제를 카드 아닌 현찰로 처리하고 있지만, 아무튼 그래서야 평범한 셀러리맨 통장의 대차대조에 각이 잡힐리가 없다. 분명 상식적으로도 수상한 점이 분명 한두가지가 아니어야 맞을 것이다. 그럼에도 형수님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계시다. 적어도 그 시점 까진 분명히 그랬다. 형님이 나를 찾아와 "불안해 죽겠다” 라고 털어놓았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원래 약간 의심의 기색도 보이고 그래야 바짝 긴장하여 치밀한 방어 전략을 수립할 수 있는데, 전혀 리액션이 없으니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조심해야할지 견적이 안나온다는 것이다. 나는 소주병을 번쩍 들어 "야, 이 병신 삼돌아” 라며 형님의 머리를 찍어주려다 말았다. 세상은 넓고 사람은 다양하다보니, 이렇게 찌질하고 한심하고 불쌍한 쪼다도 존재하는 것이다.


  형님의 차에는 몇가지 아이템이 널려있다. 도저히 한 사람의 취향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난해한 조합이다. 일단 뒷자석에 책이 몇 권 굴러다니고 있는데, 그 목록을 열거하자면 다음과 같다. 수전 손택의 <해석에 반대한다>, 에리카 퍼지의 <동물에 반대한다>, 하워드 진의 <전쟁에 반대한다>, 페터 아이겐의 <부패에 반대한다>, 피터 크레이머의 <우울증에 반대한다>, 성석제의 <갑하고 담배하고 같다는 논리에 반대한다>, 기타 등등. 글로브 박스에는 상당한 양의 CD 음반이 쌓여있는데 그 목록도 열거하자면 다음과 같다. 리히터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캘리 클락슨의 ‘Breakaway,’ 막시밀리언 해커의 ‘Rose,' 유키 구라모토의 ‘Piano Nostalgia,’ 마이 케미칼 로맨스의 ‘The Black Parade,’ 밥 딜런의 ‘Modern Times,’ 프로디지의 ‘Voodoo People’, 데스 캡 포 큐티의 제목을 읽을 수 없는 앨범, 사라 브라이트만의 ‘Classics,’ 송골매 2집 '모두 다 사랑하리,’ 등등. 아무리 봐도 취향을 종잡기가 힘들다. 또한 형님의 글로브 박스를 뒤지면 어지간한 점빵도 울고 갈만큼의 다양한 담배가 나온다. 말보로 레드, 던힐 프로스트, 디스 플러스, 레종 블랙, 더 원 0.5, 로 클럭스 엠, 허밍 타임, 에세 라이트, 클라우드 나인, 엔츠, 아리랑, 장미, 하나로, 한라산, 라일락 멘솔, 88라이트, 심지어 8인치급 쿠바산 시가까지 나온다. 형님은 고딩 때 저렴한 버릇을 못 버려서 여전히 디스 플러스 예찬자이고, 형수님은 담배 냄새라면 기겁 질색을 하는 분임을 감안하면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다 (다른 건 몰라도 입에 물기도 어렵다는 8인치급 시가는 도대체 누구의 것인지 정말 궁금하다). 담배 냄새를 빼기 위해 글로브 박스에는 페브리즈 외에도 차량용 방향제가 한가득인데, 그게 또 가관이다. 라벤다향, 쟈스민향, 레몬향, 복숭아향, 오렌지향, 로즈마리향, 헤이즐넛향, 아쿠아마린향이 모두 포장이 뜯어진 상태로 굴러 다닌다. 변태가 아닌 이상 그처럼 다양한 향기를 한 사람이 좋아하는 일은 있을 수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슨 말인고 하니, 형님 차가 지닌 놀라운 버라이어티는 형님이 얼마나 많은 동승자들을 위해 신경을 쓰는지, 혹은 얼마나 많은 동승자들이 형님의 차를 거쳐갔는지를 반증하는 부분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형님차의 안주인인 형수님은 아무렇지도 않게 조수석에 오르고 내린다. <나는 다중 소속자와 결혼했다> 따위의 내용으로 원고를 집필 중이 아닌 이상 그럴 수야 없을텐데 말이다. 


*


  '문제의 일주일'이 닥치기 전, 형수님과 형님이 바람에 가장 근접한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은 딱 한번뿐이라고 한다. 어쩌다보니 화제가 그리로 옮겨갔는데 형수님이 반 농담 반 진담으로, 
- 혹시? 사랑이 아빠, 나 몰래 다른 여자 만나기도 해요?" 
라고 물었다는 거다. 형님은 화들짝 놀라, 
-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야!
라고 강하게 부인을 했단다. 그렇게 눈에 띄게 놀라니 형수님의 장난기가 발동한 것은 당연한 일. 
- 만약 뒤져서 나오면 애인 한 명에 한 대에요. 
(후일 이 이야기를 전해듣고 나는 형수님의 혜안과 스케일에 감복했다. 이미 이때부터 형수님은 형님이 일을 벌이면 한두명 선에서 그치지 않을 사람임을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때 대인배 형수님과 참 비교되는 쪼다같은 형님은 정색을 하고 이렇게 말했다는 거다. 
- 대신 뒤져서 안나오면 너도 십 분당 한 대씩이다.
  그런 인간이 형님이다. 형수님 같은 대인배 미인을 두고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여운 공주님 셋을 두고도 어쩜 그렇게 고집스럽게 총각 때의 자유를 찾아 누리려는 사람이다. 가정에 충실하기도 벅찰텐데 1개의 특별시, 6개의 광역시, 8개의 도, 1개의 특별 자치도를 돌아다니며 여복을 시험하는 것은 도대체 뭐하는 짓인 걸까. 나로서는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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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형님에게 큰 흉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여자를 좀 좋아할 뿐이다. 남자가 여자를 좋아하는 게 문젠가? 아니다. 당연하고 당연한 자연의 섭리다. 다만 형수님 말고 다른 여자도 두루두루 좋아하니, 그게 좀 문제란 거다. 


  찰리에겐 엔젤들이 있는 것처럼, 형님에게는 영이들이 있다. '문제의 일주일'은 전국구 난봉꾼 형님이 형수님에게 된통 걸려서 탈탈 털리고 각서를까지 바친, 바로 그 일주일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8월 25일을 기해 시작되어 9월 1일까지 계속된, 형님에겐 악몽보다 더 악몽같았고 우리에겐 영화보다 더 영화같았던 시간에 대한 이야기다. 카라멜 버터팝콘과 얼음 넣은 코카콜라라도 준비했으면 좋았겠지만 그럴 여유마저 없었다. 그야말로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시작되어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나버린 사건이기 때문이다.


  8월 25일 화요일 자정. 형님은 대전 꿈돌이랜드에 있었다. 집에는 8월 25일과 8월 26일, 양일간 대전 출장을 가야하는 것으로 알렸다는 사람이 왜 꿈돌이랜드에 있었을까? 아니, 그걸 떠나서 나이 서른 다섯에 꿈돌이랜드는 뭔 놈의 꿈돌이랜드? 게다가 당연히 문도 닫았을 그 야심한 시간에 무슨 수로 들어간거지? 하여간 주책도 이쯤되면 '윙가르디움 레비오우사'다. 형님은 아마도 그 시각 대전의 영이와 함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치밀한 형님은 결제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언제나 그렇듯 현금을 인출했는데, 18시 36분에 일찌감치 신난은행 대전은하수점에서 9만원을 찾은 것으로 기록이 되었다. 해당 통장은 월급에서 생활비를 제한 나머지, 즉 형님이 형수님에게 받아가는 용돈이 입급되는 계좌의 것으로 입출금시 득달같이 바로 형수님에게 문자 메세지가 전달되도록 설정되어 있다 (내가 아는 한 이 부분은 두 분이 상호 합의를 한 사항이다). 따라서 형수님께서도 시간 차 없이 바로 신난은행 은하수지점에서의 9만원 인출 건을 알게 되셨을 것이다. 형수님이 미아리 고개 선녀보살이 아니고서야 그것만으로 그 9만원의 사용처를 짐작할 재간은 없었겠지만, 고이 지갑에 모셔두려고 그 시간에 굳이 수수료 물어가며 9만원씩 찾지는 않았으리란 정도는 쉽게 짐작하실 수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9만원은 사실 좀 애매한 액수다. 통장에 반복하여 기장되는 '출금 9만원'이란 '출금 10만원'과는 느낌부터 다르지 않은가.


  바로 그 8월 25일 저녁 나는 형님네 집에 있었다. 형님이 없는 형님네에 가서 도대체 뭘 했는고 하니, 다름 아닌 형님과 형수님 대신에 조카들을 돌보는 일이다. 형님과 내가 친형제가 아니듯 형님의 아이들 또한 나의 친조카는 아니겠지만, 정말 할 수만 있다면 친조카라도 삼고 싶을만큼 귀여운 아이들이다. 그래서 형수님의 제안을 흔쾌히 승낙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또한 솔직한 심사라면 형님과 있는 것보다는 사랑이, 우정이, 희망이와 있는 것이 더 좋았다. 그 아이들과 함께 있으면 어쩐지 사랑, 우정, 희망이 넘실거리는 것 같아. 아이들을 안아다가 쇼파에 일렬로 앉히고 월트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을 틀어주었다. 칩과 데일이라는 다람쥐 콤비가 요절복통의 난장을 피우는 내용의 만화영화다. 나 역시 어렸을 적 미키마우스와 친구들에 빠져 살았던 기억이 있으니 이 아이들과 나의 사이엔 생각하는 것만큼 크고 넓은 세대 차이는 존재하지 않을지도 몰랐다. 세 자매가 나란히 앉아서 웃고 재잘대는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다만 너희들 성이 허씨가 아니었으면 얼마나 좋았겠니. 아무리 생각해봐도 허사랑, 허우정, 허희망은 여자아이 이름으로 NG가 아니겠습니까? 사랑도, 우정도, 희망도 모두 헛이라는 느낌마저 들잖아. 물론 형님이 허씨(초콜렛 아님)니 별 도리가 없는 일이지만. 문득 모계성을 따르면 그나마 싹수가 보일까 싶어 따져보니, 형수님은 창원 구씨다. 구사랑, 구우정, 구희망. 이 또한 썩 아름답고 매끄러운 느낌이 아닌 것은 마찬가지다. 옛날의 사랑, 우정, 희망이라는 걸까. 혹시 이 아이들이 나중에 자라서 ‘부모성 함께 쓰기 운동’ 따위에 심취한다고 해도 달리 나아질 것으로 생각되지는 않았다. 허구사랑, 허구우정, 허구희망. 바야흐로, 찬란한 허구의 세계다. 


  형수님은 급히 친구 병문안에 가야할 일이 있다고 하셨다. 친구 분이 폐렴이어서 차마 아이들을 데려갈 수는 없고 친정은 멀고 먼 마산에 있으니 도리없이 나를 부를 수 밖에 없었다고 하셨다. 이 또한 사실 일찍이 내가 검증된 바 있으니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어울리지 않게 나의 베이비 시터로의 능력은 꽤 좋은 편이다. 어지간하면 아이들도 나를 잘 따르는 편이다. 간난 아기라면 문제겠지만 (혹은 미운 일곱살, 그것도 남자아이라면 절대 사양이겠지만) 세살짜리 다섯살짜리 여자아이 셋 돌보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더구나 사랑이, 우정이, 희망이라면 거절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 또래의 천사들이야, 맛있는 간식 먹이고 애니메이션 틀어주고 놀아주다가 슬쩍 재워버리면 끝이 아닌가 (애들 때문에 밤잠을 설치는 전국의 어머니들이시여! 이 무지한 미혼 남성의 나이브한 육아관을 부디 너그러이 용서하시라). 


  사실 나는 이 깜찍한 공주님들을 속히 재우고 형님네 닌텐도 게임기와 접선할 계획을 품고 있었다. 아! 닌텐도 위 게임기, 그거 참 신기하더만. 리모컨을 들고 휘두르는대로 텔레비젼 안의 내 캐릭터가 움직이는 것이다. 그래서 리모컨으로 테니스도 치고, 야구도 하고, 볼링도 치고, 필드도 나가고, 복싱도 뜨고. 아아! 오래 살다보니 이런 세상이 오기도 하는구나. 너무도 감격스러워 꺼이꺼이 울었더랬다. 마음 같아서는 집에 하나 들여놓고 싶었지만 월세도 근근이 내는 처지에 그럴 수는 없지 않은가. 인생 각 잡힐 때까진 이렇게 형님네 놀러와서나 슬금슬금 해야지. 솔직히, 형수님이 애들 좀 봐달라고 부르셨을 때 이 생각이 가장 먼저 머리를 스치기는 했다. 그러니까 나에게 있어 이 집안 존재들의 중요도란 대강 이런 순서다. 닌텐도, 사랑이, 우정이, 희망이, 형수님, 그리고 마지막으로 형님. 


*


  아이들이 잠들기가 무섭게 작업에 착수했다. 불륨을 낮추고 게임기를 켰다. 그런데 리모컨이 보이지 않았다. 텔레비젼 리모컨이 아니라 닌텐도 위 게임기용 리모컨 말이다. 아니, 이 양반들이 나 못하게 하려고 숨기기라도 했나? 거실을 샅샅이 뒤졌다. 없었다. 형님방을 살폈다. 없었다. 화장실을 살폈다. 없었다. 다용도실을 살폈다. 없었다. 베란다를 살폈다. 없었다. 개집을 살폈다. 없었다. 신발장에도 없었다. 죄송스런 일이지만 안방도 찾아보았다. 그래도 없었다. 이제 남은 곳은 단 한 군데 뿐이었다. 형수님의 서재. 형님도 함부로 못 들어간다는 바로 그 미지의 공간 말이다. 꿀꺽, 침을 한번 삼키고 문 손잡이를 돌렸다. 순간 우아하면서도 고혹적인 향이 코를 찔렀다. 형수님의 향수는 튀에리 뮈글러의 '엔젤 이노센트’다 (형님처럼 무심한 남자는 그게 뭔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래뵈도 여성 향수에 깊은 조예를 가진 사람이다). 문득 더욱 조심스러워졌다. 아아! 다행히 리모컨은 창가쪽 탁자 위에 있었다. 아니 이걸 가지고 여기서 도대체 뭘 하신 거람? 툴툴거리며 금지된 공간을 빠져나가려는 순간, 형수님의 듀얼 모니터가 눈에 들어왔다. 와! 25인치 LCD 모니터가 무려 두 대잖아! 눈이 번쩍 띄였다. 역시 돈 잘 버는 집은 다르구나. 나는 모니터 하나 사기도 부담스러워 여지껏 CRT 모니터를 쓰는데 말이야. 연애는 몰라도 나중에 결혼만큼은 꼭 돈 잘 버는 여자와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무심결에 마우스를 만지작거렸다. 그런데, 어머머! 


  번쩍하고 화면이 켜지는 것이다. 이런 '튀에리 뮈글러 엔젤 이노센트' 같은 일이! 자동으로 로그오프가 된 상태의 화면은 비밀번호 입력창을 내밀었다. 형님도 못 열어본다는 형수님의 퍼스널한 퍼스널 컴퓨터라. 구미가 당겼다. 공주님들은 모두 깊이 잠들었다, 형수님이 돌아오려면 두어시간은 더 걸릴 것이었다, 형님은 출장 중이다. 만약 내가 평생에 한번은 이런 짓을 해야한다면 바로 지금일 것이었다. 비밀번호가 도대체 뭘까?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형님 생일? (땡!) 형수님 생일? (땡!) 사랑이 생일? (땡!) 우정이 생일? (땡!) 희망이 생일? (땡!) 닌텐도 게임기 패스워드? (땡!) 이 집안에서 가장 중요한 숫자 조합 여섯개를 모두 시도했음에도 ‘비밀번호가 틀렸습니다’라는 메시지만 반복해서 출력되었다. 역시 만만한 일은 아닌 것이다. 형님도 비밀번호를 못 찾아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는 형수님의 퍼스널 퍼스널 컴퓨터답다. 집 전화번호 뒷자리? (땡!) 휴대 전화번호 뒷자리? (땡!) 형님 군번? (땡!) 내 장모는 아니지만 장모님 생신? (땡!) 내 시아버지는 아니지만 시아버지 생신? (땡!) 그럼 설마… 내 생일? (땡!) 몸도 마음도 지쳐 그냥 그만 둘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마지막으로 설마, 형님하고 형수님 결혼기념일은 아니겠지. 거짓말처럼 바탕 화면이 열렸다. 드디어 해낸 걸 축하한다는 듯 이병헌의 웃는 얼굴이 화면을 메웠다. 형수님이 좋아한다는 영화배우 이병헌이다. 정말로 비밀번호가 결혼기념일이야? 형님이 죽어라 시도하다가 결국 포기했다는 비밀번호가? 자기 결혼기념일까지도 생각이 미치지 않았다고? 심하게 허탈했다. 한숨이랄까, 탄식이랄까, 절로 튀어나왔다. “아흐, 이 병신 삼돌이 같은 인간.”


  그러나 비밀번호를 맞췄다는 기쁨도 잠시. 작업표시줄에 내려와 있는 다섯 개 창의 정체를 확인한 나는 아연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첫번째 창은 위치 추적기. 두번째 창도 위치 추적기. 세번째 창도 위치 추적기. 서로 다른 세 프로그램의 작업창에서 점멸하는 세 개의 붉은 점들은 얼추 비슷한 지역의 미묘하게 다른 지점을 가리키고 있었다. 타겟은 하나일 가능성이 커보였다. 오차 범위와 성능 한계를 감안할 때, 아주 추적 제대로 하고 있다는 얘기다. 형수님이 영화 ‘미스터 앤 미세스 스미스’의 주인공이 아닌 이상 누구의 위치를 그렇게 추적하겠나. 형수님이 좋아한다는 바로 그 한류스타 이병헌? 이병헌이 지금 하필 대전 북서부에 있다고? 말도 안되는 일이다. 네번째 창을 열자 더욱 불안해졌다. 형님의 입금, 출금, 이체, 결제 내역이 상세하게 기록된 엑셀 파일이다. 형님에게 용돈이 지급된 날짜는 물론, 명확한 사용처 없이 증발한 돈이 얼마이며 주기와 빈도가 어떻게 되는지를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는 엑셀 스프레드 시트였다. 다섯번째 창은 지도다. 서울, 부산, 인천, 대전, 대구, 광주, 울산 등의 주요 도시별로 탭이 만들어져 있었고 1센티미터당 260미터 축척의 꽤나 상세한 지도 위에는 무수한 곡선과 핑크색 압정이 꽃혀 있었다. 핑크색 압정만 아니라면 마치 연쇄살인마를 쫓는 집요한 수사관의 사무실 한쪽 벽에나 붙어 있어야할 지도인 줄 알았을 것이다. 추적의 '추'자도 모르는 내 눈에도 뭔가 주기, 반복, 패턴, 박자가 읽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제 대충 알 것도 같았지만, 이거야 원, 온 몸이 바들바들 떨려서. 


  앞서도 말했지만 전국 각지에 크고 작은 애인을 두는 형님의 파렴치한 행태를 옹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이 문제에 관한 한 나는 전적으로 형수님 편이다. 다만 진실이 밝혀지고 모든 것이 제 자리로 돌아가기까지 내가 개입할 생각은 없을 뿐이다. 문제는 내가 짐작했던 것보다 형님의 꼬리가 길다는 사실이다. 또한 문제는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형수님이 꼬리를 많이 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대로라면 잡아 당기는 즉시 질질 딸려오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분명 형님은 죄값을 치루고 가정에 충실한 가장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야 하겠지만 이렇게는 아니다. 지금 이렇게 엎어지면 형수님 손에 형님은 육시처참를 당하고 어쩌면 귀여운 사랑이, 우정이, 희망이는 편모 슬하에서 자라게 될런지도 모른다. 형수님만큼 강하고 아름답고 고혹적인, '튀에리 뮈글러 엔젤 이노센트' 같은 분이라면 그래도 아이들을 훌륭하게 키우시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게 내가 참견할 일이 아니라고? 천만의 말씀이다. 그렇게 되면 내가 이 집에 드나들 명분이 사라진다. 더이상은 닌텐도 게임기를 갖고 놀 수가 없단 뜻이다. 지금은 안된다. 절대 안된다. 

 

*


  나는 거의 본능에 가까운 동작으로 휴대전화를 집어 형님의 번호를 눌렀다. “어디쇼?” “출장중이다.” “출장 어디쇼?” “대전이라고 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맞다. 형님, 분명 바로 형님이 쫓기고 있는 것이다. "지금이 22시 17분입니다. 일하는 중은 아닐테고 솔직히 어디쇼?" "짜식, 형님한테 너무 관심이 지대하구나. 영이랑 같이 있다." 영이라면 대전의 영이일 것이었다. 본명은 나도 모른다. "그 분이랑 뭐하기는 중입니까?" "그걸 니가 알아 뭐하게?" "중요한 일입니다. 형님의 목숨이 걸린 일입니다." 형님은 너털 웃음을 터뜨렸다. "방금 전까지 꿈돌이랜드에 있었고 지금 배가 출출해서 요기나 할까 나가는 중이다. 영이는 그냥 ‘삼할매집’에 가서 올갱이 해장국이나 먹자고 하는데 나는 다금바리를 사 줄 생각이다." 내륙 복판의 도시에서 굳이 다금바리라니! 형님의 센스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혹시 지금 한밭수목원 근처에 계십니까?" "어떻게 알았냐. 5분쯤 전에 지났다." 나는 첫번째, 두번째, 세번째 위치 추적 창을 한 화면에 모두 띄웠다. 한 눈에 모든 상황이 간명하게 들어왔다. 이래서 사람들이 듀얼 모니터를 쓰는구나! "지금은 어디십니까?" "예술의 전당이다." 세 가지 추적 프로그램은 각각 한밭 수목원과 대덕대교와 시청을 가리키고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약간의 시차와 거리 오차는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이게 어딘가. 이렇게 길 단위에서 누군가의 위치를 잡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랍느냐는 얘기다. 하긴 리모컨으로 테니스도 치고, 야구도 하고, 볼링도 치고, 필드도 나가고, 복싱도 뜨고, 요가까지 배우는 신기한 시대에 안 되는 것이 뭐 있겠느냐만은. 


  형님은 짜증을 냈다. "왜 전화했는지 아직 말해주지 않았다." 나도 짜증을 냈다. "지 목숨이 간단간당하는 줄도 모르고 왜 자꾸 보챕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 침을 꿀떡 삼켰다. 형수님 방의 향기('튀에리 뮈글러 엔젤 이노센트'다)가 문득 더욱 강하게 느껴졌다. "추적당하고 있습니다." "뭐가?" "형님 말입니다." "내가 왜?" "그거야 그래 마땅할 일을 하고 싸돌아다니니까 그런게 아니겠습니까?" "누구한테?" 나는 역정을 냈다. "정말 모르겠습니까?" 형님의 목소리는 그제서야 꼬리를 내렸다. "혹시 사랑이 엄마?" "아는 분이 그러시면 안되죠." "그걸 니가 어떻게 알았는데?"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습니까?" "하긴 그렇다." 다섯번째 창을 오른쪽 모니터에 띄웠다. 형님은 그 근처에서 ‘삼할매집’을 열두번, ‘가루된비어’을 일곱번, ‘당고모가 차려주신 밥상’을 세번, ‘바비랑 수리랑’을 두번 가셨군요. 그리고 ‘엘 그레코’와 ‘라 트라비아타'를 비롯한 인근 여섯 개 호프집에도 각 2회 이상 방문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형님은 할 말을 잃은 것 같았다. “니가 그걸 다 어떻게 알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저도 그게 궁금합니다만 누굴 탓하겠습니까? 날로 진일보하는 기술을 탓할 수 밖에요."


  바로 그때였다. 세 창의 위치추적기에 일제히 [초록색 점]이 나타났다. 그것은 강렬한 빛을 발산하며 강하게 시청쪽을 향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세 프로그램 중 어느 쪽에나 정확하게 같은 위치로 잡히고 있었다. 가까이, 조금 더 가까이. 문득 형수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무슨 소리를! 형수님은 지금 친구 병문안을 갔는데. 게다가 형수님이라면 왜 굳이 자기 컴퓨터로 자기 위치를 확인할 수 있도록 해 놓았겠는가. 하지만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다. "형님! 도망쳐요!" 


  이유는 모르겠다. 남자만의 직감이랄까. "뭐라고?" "도망치라고요?" "무엇으로부터?" "시청에서 예술의 전당 쪽으로 뭔가가 움직이고 있어요." 서울과 달리 대전의 시청과 예술의 전당은 자빠지면 코 닿을 거리다. "그게 뭔데?" "몰라요." "그런데 왜 도망쳐." "형수님 같으니까요." “뭐가?” “누군가 형님을 따라잡고 있거든요.” 형님은 혼비백산했다. 손발이 어지러워져 운전이 제대로 되지 않는지 통화감이 가까워졌다 멀어졌다를 반복했다. 언뜻 "자기, 왜 그래?" 란 여자 목소리가 저 멀리서 들린 것도 같았다. [빨간색 점]은 완전히 방향을 틀어서 대전 KBS쪽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시청을 통과한 [초록색 점] 또한 맹렬한 속도로 그 뒤를 쫓았다. 형님이 소리를 질렀다. "사랑 엄만 지금 어디야?" "정부청사를 통과한 것 같아요." [빨간색 점]은 다시 엑스포 과학공원으로 움직였다. "사랑 엄만?" 형님은 거의 울부짖고 있었다. "KBS를 지났어요."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형님은 울먹거렸다. 간간이 히스테릭한 여자의 비명도 들렸다 (아마 대전의 영이였으리라). "엄만?" 형님은 이제 사랑이의 엄마와 자기 엄마를 구분하지도 못하는 것도 같았다. 형님의 어머니는 당연히 충북 괴산의 고향집에 계시겠지만 난 형님의 처지를 십분 이해해 그 말을 유도리 있게 이해했다. "실은…… 바로 뒤에 계십니다." 


*


  [초록색 점]은 진정 형수님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폐렴 걸렸단 형수님 친구가 실재하는 인물인지 가공의 인물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빨간색 점]이었던 형님은 이후 일주일간 회사 근처의 찜질방에서 기식하는 처지가 되었다. 1개의 특별시, 6개의 광역시, 8개의 도, 1개의 특별 자치도를 아우르는 자칭 전국구짜리 호남형 얼굴은 눈탱이 밤탱이가 되었지만, 사안의 중요도를 감안할 때 그쯤으로 그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해야 할 터였다. 형수님은 내게 "그 인간, 인생이 불쌍해서 목숨만 살려준 거예요" 라고 그 날의 일을 짧고 우아하게 논평했다. 하지만 형님이 정신을 차렸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아직도 여전히 이런 소리를 하며 실실거리고 다니기 때문이다. "어떻게 사람이 '참이슬'만 마시고 살아. '처음처럼'도 마셔보고, '좋은데이'도 마셔보고, '봄봄'도 마셔보고, '보해 잎새주', '천년의 아침'도 마셔보고, '참소주', '더블루'도 마셔보고, 그렇게 버라이어티하게 살아야지. 또 그래야 '참이슬' 좋은 줄도 아는 법이야." 


  그 소리를 형수님이 듣지 못하신 것은 정말 다행한 일이 아닌가 한다. 그랬다면 각서까지 쓰고서야 일주일만에 간신히 다시 들어갈 수 있었던 집에서 영구 추방되었을테니까. 각서의 내용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는데 형님의 명치, 인중, 염천, 대횡, 기해, 고환 등을 영구적으로 저당잡히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단 것으로 알고 있다. 가정은 물론 본인의 생명을 위해서라도 이젠 좀 마음 고쳐 먹었으면 하는 부분이다. 사랑이, 우정이, 희망이를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한편 형님과 그 [빨간색 점]에 함께 있었다던 '대전의 영이'는 며칠동안 병원 신세를 졌다고 들었다. 하지만 전국 각지에 산재한 나머지 형님의 영이들이 어떻게 되었는지까진 모르겠다. 


  그 후로 ‘우리’는 잘 지내고 있다. 뭐, 아직까지는 말이다. 아이들은 잘 자라고 있다. 그 아이들이 나를 삼촌이라고 불러주는 게 너무 좋다. 형수님은 여전히 우아하고 고혹적이다. 내 사랑, 닌텐도 위 게임기도 잘 있다. 그 사이 신규 발매 타이틀이 몇 장 늘어나줘서 기쁘다. 크게 변한 건 없지만 모든 게 잘 돌아가고 있다. 해피엔딩, 과연 해피엔딩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형님, 형수님, 사랑이, 우정이, 희망이, 닌텐도, 그리고 그 사이에 깍두기처럼 끼어 들어간 나. 아주 화목한 가정이 아닌가. 이는 내가 나중에 이루고 싶은 가족의 정경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전국구 난봉 경력이 있는 철없는 가장, 형님의 자리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2007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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