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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닥터에게 진실을 요구합니다

낙농콩단/Season 6-10 (2006-2010)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09. 12. 6.

본문

  그러니까 설라무네, 모년 모월 모일의 일입니다.

​ 
사건은 남자가 저를 찾아오며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자기 이름을 '닥터'라고 밝혔습니다. 저는 진짜 이름이 닥터냐고 물었으나 그는 다시금닥터라고만 답했습니다. 저는 다시 무슨 닥터냐고 되물었고 그는그냥 닥터라는 답을 반복함으로써 저로 하여금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었습니다. 아니, 도대체 닥터 필이든 닥터 마틴이든 무슨 이름이 있어야 아닙니까? 그런데 남자는 그냥 닥터라는 겁니다. 간만에 열이 뻗친 저는 의사든 박사든 뭔가 이유가 있으니까 닥터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냐며 따졌습니다. 당신이 의사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답했습니다. 그럼 당신이 박사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답했습니다. 어쩐지 사기꾼 같은 냄새가 솔솔 났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나를닥터라고 부른다고. 저는 물었습니다.
-
우리 동네 척척박사 같은 개념이군요?


 
그는 크툴루와 데모고르곤을 합친 듯한 괴팍하고 찌푸린 표정을 하더니만 가만히 좌우로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건 뭐랄까요. 자신의 대단함을 몰라주는 제가 답답해 죽겠다는 듯한 표정이라고 해야할까요? 그러다 갑자기 깨진 전구에 불이 들어오는 환해진 얼굴을 하고는,
 -
! 블랙 ! 블랙 티가 좋아.
라며 주방으로 달려갔습니다. ‘이거야 퍽이나 무례한 아저씨로군.’ 저는 혀를 끌끌 찼습니다. 물론 황당했고요. 당연히 약간은 화도 났습니다. 남의 집에 무작정 들어와, 자기 이름도 밝히지 않은 채로, 티까지 우려 마신다니요. (블랙 티가 있단 무슨 수로 알았을까요?) 그를 따라 주방으로 향했습니다. 빗자루를 휘둘러서라도 밖으로 쫓아내는 것이 집주인의 의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뛰다시피 주방으로 들어서던 눈에 보인 것은 놀랍게도 파란색 폴리스 박스였습니다. 저게? 어떻게? 안에? 들어와 있지? 뒷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라 도무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랐습니다. 자기 주방에서 폴리스 박스를 발견하는 아무래도 일상적인 일은 아니니까요. 그러는 사이에 남자는 블랙 티를 홀짝거리며 뒤로 다가왔습니다. 제가 무척 아끼는 포트메리온 보타닉블루 커피잔을 찬장에서 손수 꺼내 쓰셨더군요.
 -
파란 색이 좋아! 정말 예쁜 파란색이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저는 물었습니다. 뚱한 표정으로요.
 -
당신 껀가요? 폴리스 박스?
  
남자가 답했습니다.
 -
꺼냐고? 물론 내꺼지. 내꺼가 아니면 누구꺼겠어.
 -
안에 경찰이 있나요?
  
남자의 표정은살다보니 한심한 소리 듣겠군이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
지금 2010 아닌가? 요즘에 길에서 저런 폴리스 박스 있어? 그것도 경찰관이 들어가 있는? 만약 그렇다면 하난데. 내가 운전을 잘못했거나 아가씨가 생각보다 훨씬 나이가 많거나, 중의 하난데 말이야. .
 -
저게 어떻게 우리 주방에 들어온 거죠? 말은…… 여긴 2층인데.
 -
궁금해? 보여줄까?
  
저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남자는 살짝 뭔가를 생각하는 척하더니만 폴리스 박스로 다가갔고 주머니를 뒤져 키를 찾아내 문을 땄습니다. 남자의 몸이 안으로 들어갔고 정확히 3.5 남자의 머리가 나왔습니다.
 -
뭐해? 퍼뜩  들어오고.

 

*


  
폴리스 박스의 안쪽으로 말할 같으면…… 상당히 놀라웠습니다. 밖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넓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다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폴리스 박스의 사방을 면밀하게 살펴보고 그것이 '눈에 보이는만큼의' 크기인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이상의 공간이 없었습니다. 다시 문을 열었습니다. 분명히 밖에서 보는 것보다 족히 수천 배는 넓은 공간이 안에 있었습니다. 말도 안돼! 이럴 수는 없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기를 반복했습니다. 저의 그런 모습을 남자는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고요.
 -
뭔가요? 이게. 말은……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거죠?
 -
! 때가 좋더라. 밖에서 보는 것보다 안이 훨씬 넓다는 얘기지?
  
그건 뭐랄까, ‘실평수에 비해 나왔죠?’ 라는 부동산 아줌마의 같았습니다.
 -
맞아요. 이게 도대체……
 -
멋지지? ?


  
저는 천천히 안으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하나의 커다란 홀이었습니다. 항아리 모양의 메인 프레임 컴퓨터가 정가운데 떡하니 자리잡고 있는데 위로는 기화기와 유량계가 보였으며 크고 작은 밸브들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펌프 위로 거대한 유리관 사이로 피스톤이 쌔액 쌔액 소리를 내며 아래로 오르내리는 중이었습니다. 천장을 올려다보니 이름모를 기계며 전선이며 파이프며 케이블이며 하는 것들이, 다이오드며 트랜지스터며 콘덴서며 디퓨져며 하는 것들 사이로 다닥 다닥 쉼표 없이 붙어 있었고요. 바닥은 무슨 환기구 그릴 같았습니다. 꿀꿀거리는 진공펌프에 발이 걸리지 않게 조심조심하여 계단을 올라가보았습니다. 맞아요.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뭐랄까…….
 -
말하자면 일종의 우주선 같은 건가요?
 -
우주선? ! 우주선보다 백배, 천배, 아니 만배는 멋지지. 시간 여행을 있으니!
 -
시간 여행이라고요? 정말로요?
 -
그래, 정말로.
 -
웜홀을 통과하나요?
 -
그래, 웜홀.
 -
어떻게요?
 -
뭐라고?
 -
어떻게 웜홀을 통과하는건데요? 그러니까 무슨 힘으로 웜홀을 지탱하느냐고요
 -
잠깐!
  
남자는 말을 돌렸습니다. 그러더니만 심각한 표정으로 중앙 컴퓨터를 들여다보았습니다. 마려운 사람처럼 촐랑대며 이리 저리 왔다갔다 하면서 이런 저런 레버를 밀고 당기며 '!' '!' 같은 과장된 반응을 보였습니다. 또한 기벽 있는 예술가처럼 이런 저런 스위치를 두들겨 누르며 '이런!'이나 '저런!'같은 감탄사를 내뱉었고요. 나중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그게 남자 장기이자 특기입니다 (어쩌면 특허까지 냈을지도 몰라요). 자기가 모르는 물어보면 그런 식으로 교묘하게 피해가는 것입니다.

 

*


  
하여간에 남자는 - 닥터는 제게 동행을 권유했습니다. 물론 임시적으로요. 그때 제가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받아들였던 같습니다. 폴리스 박스 - 일명 '타디스(TARDIS: Time and Relative Dimension in Space)'라는 것의 정체가 궁금하기도 했고요. 닥터는 제게 시간여행을 시켜주겠다고 했습니다. 자기가 900살쯤 먹은 시간 여행자라는 겁니다. 약간은 의심도 들었습니다. 어쩌면 신종 사기 수법은 아닐까? 이를테면 다단계일수도 있지 않을까? 납치해서 수면제를 먹인다음 신장이라도 떼어가는 아니겠지? 하지만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바보같이 들리는 소리지만) 분명 뭔가 설명하기 어려운 매력 같은 것이 남자에게 있기도 하였거든요. 무엇보다 당시 저에게 있어 현실이란 시궁창이나 다름없는 것이었거든요. 등록금을 못내서 대학은 휴학중이고 <서브웨이> 아르바이트를 3개월만에 잘렸거든요. 더구나 남자친구랑은 말도 안되는 일로 싸우다가 홧김에 헤어졌고 집주인은 이달 말까지 밀린 월세를 갚으면 방을 빼라거든요그러다보니 '아무리 나빠봐야 이보다 나빠지겠어?' 이런 식으로 생각했던 것도 같습니다.

 
의심해 적이 없냐고요? 천만에요. 하지만 의심은 타디스가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를 내며 어딘가에 착륙한 순간 깨끗하게 사라졌습니다. 문을 열고 나가보니 공룡시대였거든요. 공룡시대요. <쥬라기 공원>에나 나오는 그런 세계가 라이브로 앞에 펼쳐졌단 말입니다. 입이 벌어졌습니다. 오염되지 않은 원시의 상쾌한 공기가 깊숙히 밀려들어왔고 아드레날린이 폭발하듯 쏟아져 나왔습니다. 저도 모르게 신이 나서 저만치 들판 끝까지 전력으로 달려보았습니다. 뒤를 돌아보니 여전히 자리에 있는 닥터와 타디스가 보이더군요. 닥터를 향해 손을 흔들었습니다. 닥터도 흐뭇한 표정으로 제게 손을 흔들어주었습니다. 너무 너무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굉장히 높이 높이 올라간 했습니다. 타디스로 돌아가며 저도 모르게 닥터의 손을 잡아보았습니다.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정말이지 하나도 위험하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마치 아주 친한 사촌 오빠나 아주 친한 막내 삼촌을 대하는 느낌일 뿐이었습니다.
 -
어떻게 이럴 있죠?
  
닥터는 싱긋 웃어보이며 손을 다시 타디스 앞으로 잡아 끌었습니다 (부끄럽지만 고백해야 같습니다. 손을 정말 부드럽고 따뜻했다고 말입니다).

 

*


  
메인 컴퓨터 앞에 그가 다시금 기묘한 팬토 마임을 마치고 나니 기화기가 돌아갔습니다. 유량계 바늘이 불안정하게 흔들렸습니다. 유리관 안에서는 뿍적뿍적 피스톤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매캐한 연기가 슬그머니 피어올랐던 것도 같습니다. 또다시 타디스가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를 내며 어딘가에 멈춰섰을 문을 여는 손이 떨렸던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니었을 겁니다. 처음 번이 어렵지 보통 번째는 조금 나아진다던데…… 그래도 숨이 막혔습니다. 타디스의 밖으로 광대무변한 우주가 펼쳐져 있었으니까요. 닥터가 다가와서 어깨에 은근슬쩍 손을 얹었습니다. 어깨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습니다. 보석처럼 반짝이는 별들을 보라지요. 그리고 지구가 보였습니다. 파란 구슬처럼 아주 동그랗고 예뻤습니다.
 -
봐둬, 자기야. 이게 바로 지구가 멈추는 날이야.
 -
그럼 지금이…….
 -
미래지. ! 아주 미래야. 겁나 멀다고. 너희 시대로부터.
 -
그렇군요. 지구가 멈추는 . 원인이 뭔가요? 핵전쟁? 바이러스? 운석충돌? 환경오염?
 -
안돼. 말해줄 없어. 스포일러야. 스포일러가 싫어. 그러니 말해줄 없어.
 -
하나만 힌트를 줘요.
 -
하나만? , 영화 '지구가 멈추는 '보다는 볼만할꺼야.
 -
리메이크 버전 말이죠? 오리지날 말고.
 -
당연하지. ! 당연한 얘기야. 오리지날이 훌륭해. 항상 클래식이 훌륭한 법이지.

  
아니, 잠깐만. 그런데 어떻게 우주에서도 걷고 숨을 수가 있지? 의문이 들어 바닥을 내려다보니 단단한 합금판이었습니다. ! 그렇구나! 우리는 그냥 우주 가운데서 문을 열고 지구를 구경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거대한 반구형의 스크린을 가진 일종의 전망대 같은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3차원 360 에어돔 극장처럼 말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정밀하게 계산된 프로젝터의 영상이 아니라 우주 그대로의 신비를 있는 그대로 만끽하고 있다는 점일 것입니다. 황홀해 숨이 막혀올 지경이었습니다.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습니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숨이 차올라 금방이라도 질식할 것만 같았습니다. 바탕 감정의 파도가 휘몰아치고 지나가니 (이상한 일이지만) 문득 배가 고파졌습니다.
 -
닥터, 아래에 뭐가 있나요? 식당이나 매점 같은 .
 -
? 배고파?
 -
.
 -
따라와. 손님을 굶기는 도리가 아니지.
  
닥터는 오너 드라이버처럼 스마트 키를 눌러 삐빅, 타디스를 잠궜습니다. 반구형 공간의 정중앙에 서자, 감정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딱딱하고 정나미 떨어지는 기계음이 들려왔습니다.


 - [
............. .......]

 - 매점있나요? 매점? 식당? 푸드코트? 편의점? 맥도날드?

 - [............. .................]


  
서서히 바닥이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조금 위태로워 보여 겁이 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닥터는 전혀 겁나지 않아하는 표정이었습니다. 오히려 신이 보였습니다.
-
쇼트브래드나 먹는 어때? ! 쇼트브래드가 좋더라. 쇼트브레드에 블랙 티를 마시고 싶어.

- [............. ........ .......]

  사람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여기는 지구가 아니니 사람이 아닌 다른 외계 어쩌구들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역시 보이지 않았습니다.하지만 식당은 보였습니다. 가장자리를 따라 원형으로 빽빽하게 배열되어 있었습니다. 몇몇은 아주 맛있는 음식을 것만 같은 얘감이 들었습니다. 사람은 보여도 간판에 불이 들어와 있으니 장사를 한다는 뜻일 겁니다. <토니 로마스> 보였습니다. 아는 간판을 보니 반가웠습니다.
 -
닥터! 우리 <토니 로마스>가요.
 -
스테이크는 취향이 아니긴 한데. 초콜렛 플레이크도 있나? ! 정말 초콜렛 플레이크가 좋아. 초콜릿 플레이크에 쇼트브레드를 곁들여 블랙 티를 먹고 싶어.
  
닥터의 손을 잡아 끌어 <토니 로마스> 들어갔습니다. 닥터도 이기는 하며 따라 들어왔습니다. 손님이 없어 창가 자리 하나를 대충 골라 앉았습니다. 다리가 여덟 달린 문어 모양의 외계인이 다가와 주문을 받겠다고 하였습니다. 어쩐지 해산물을 시키면 안될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닥터를 쳐다보았습니다. 이상하게도 닥터는 말이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얼굴 색이 창백했습니다. 조금 전까지도 쾌활하게 쇼트 브래드 타령을 하고 쵸콜렛 플레이크 타령을 하던 사람이 말입니다. 조금 있다가 주문하겠다고 하고 직원을 돌려보냈습니다.
 -
닥터? 무슨 있어요? <토니 로마스> 그렇게 싫어요?
 -
…… …….
 -
뭐요?
 -
…… 저거 …… .
 
닥터가 가리키는 곳에는 작은 메뉴판, 양념통, 소스병, 휴지 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느 레스토랑 어느 테이블 위에나 있는 평범한 것들 말입니다.
 -
저거 뭐요. 타바스코 핫소스 드려요?
 -
아니…… 옆에…….
 -
휴지 드려요?
-
아니…… 아니…….
-
후추통이요?


  
말을 듣자 닥터는 거품을 물었습니다. 눈을 하얗게 까뒤집었습니다. 흰자위 위로 새빨간 실핏줄이 아마존 강보다 길게 늘어지더군요. 저는 겁이 덜컥 났습니다. 급한 마음에 테이블을 넘다시피 하여 (물론 정숙한 숙녀의 행동으로는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닥터 옆으로 갔습니다. 의식 없이 흐느적 거리기에 바닥에 눕혔습니다. 강약중강약으로 뺨을 쳐봐도 반응이 없었습니다. 오징어인지 문어인지 모를 웨이트리스에게 냉수를 조금 가져다 달라며 고래고래 소리질렀습니다. 급한대로 인공호흡도 해보았습니다. 사실 인공호흡을 몰랐습니다. 숨을 불어넣어야 하는데 오히려 숨이 막힐 지경이더군요. 옛날에 학교에서 보건 교육 시간에 어떻게 배웠더라? 혀를 쓰라고 했던가? 쓰지 말라고 했던가. 직원이 물을 가져왔습니다. 먹이려는데 목을 넘어가지 못하고 밖으로 흘러나오자 정신이 혼미하더군요. 그대로 닥터가 깨어나지 못한다면 저는 문자 그대로 우주 미아가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겁나고 서러운 나머지 급한 마음에 냉수를 컵채로 닥터의 얼굴에 뿌렸습니다. 놀랍게도 닥터는 벌떡 일어났습니다. 제가 제대로 대처하기는 했던 겁니다. 닥터는 바지춤을 추스리더니만 레이저 포인터처럼 생긴 것을 꺼냈습니다. 처음엔 아주 작고 조그마한 것이었는데 그가 무슨 버튼 같은 것을 누르자 약간 커졌고 약간 단단해졌고 약간 두꺼워졌습니다. 그리고 끄트머리에서 빛이 물컹거리며 나왔습니다.
 -
여긴 위험해. 당장 여기를 나가자고.
 -
식당에 들어와서 자리까지 잡아놓고 나가는 매너가 아니잖아요.
 -
매너고 자시고. ! 설명할 시간이 없어. ! 늦었어!


  
테이블 위의 후추통이 공중으로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테이블에서 모든 후추통이 떠올랐습니다. 소금통이 아닙니다. 후추통이었습니다. 그러더니만 서서히 커지더니만 1미터 남짓한 크기가 되었습니다. 맙소사! 싼맛나는 CG 보라죠. 닥터는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동공이 서서히 벌어졌고 입가에 장난기가 사라졌습니다.
 -
내가 말을 하게 몰랐는데…… 뛰어!
  
닥터가 뛰었습니다. 저도 그를 따라 뛰었습니다. 후추통들이 우리를 따라왔습니다. 긴장감이 만점이었습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후추통들의 속도는 어림잡아 500~600 m/h 되는 같았습니다. 저는 이래뵈도 학교 다닐때 100 m 달리기 일등을 하던 몸입니다. 최고 기록이 13.4 초로 학급에서 여학생 늘상 일등을 먹었다는 말입니다. 닥터도 체력장을 해본 경험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명색이 남자 아닙니까. 저보다 빨리 뛰는 당연한 일일 겁니다. 저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1분에 겨우 8~10 m 간신히 움직이는 거대한 후추통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부산을 떨어야 한다니요. 그러나 닥터의 표정은 심각했습니다. 우리는 뛰었습니다. 죽어라고 뛰었습니다. 엘레베이터까지. 후추통들은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숨이 턱까지 차도록 빨리 뛰었으니 당연한 일입니다. 딱딱한 안내 멘트가 다시금 흘러나왔습니다.

- [............. .......]

- 가줘요. 아무데나. 아니 옥상. 아니 전망대. 아니 아무튼 우리가 처음 온데로 갑시다. 타디스 있는대로.

- [............. ..........] 

- ? 어째서? 무슨 이유로?

- [............. ..........]  

  닥터는 마치 미친 사람 같았습니다. 벽면의 이쪽을 치고 저쪽을 치고 안절부절을 못하고 제자리를 맴돌았습니다. 그러더니만 어느 순간에 ! 뒤통수 세게 얻어맞은 표정으로 이런 말을 했습니다.
 -
안돼! 안돼! ! 설마! 믿을 없어!
 -
닥터? 그래요? 무슨 일인데요?
 -
이런 바보! 멍청이! 이걸 몰랐을까.
 -
뭔데요? 닥터, 무슨 얘기를 하는 거예요?
 -
케라드! 그래 케라드(Kelad). 거꾸로 읽으면 그래 그거였어.
 -
그게 뭔데요?
 -
달렉(Dalek).
  
닥터의 표정은 비장했습니다. 달렉이 뭐냐고 묻자 후추통 모양으로 생긴 외계인이랍디다. 그때 저는 처음으로 깨달았습니다. 남자가 정말 미친 사람이라는 사실을요. 닥터는 바지춤을 다시 추스리더니만 소닉 스크류 드라이버라는 것을 꺼내었습니다. 그리고 엘레베이터 바닥에 대고 지잉지잉 음파를 쏘아 보냈습니다. 부자연스럽기는 하지만 서서히 엘레베이터가 움직이기 시작하더군요. '아니 그럼 처음부터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라고 묻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느라 혼났습니다.

 

*


  
,

 
너무 이야기니 이제부터는 조금 속도를 내서 요약을 하겠습니다. 우리는 전망대에 도착했고 닥터는 타디스에게 위성 전체를 스캔해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아니, 그럼 처음부터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라고 말하려다가 말았고요. 스캔 결과 위성 자체가 후추통 모양으로 생겼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사실을 알게된 닥터가 다시 패닉에 빠졌음은 물론입니다. 닥터의 말에 따르자면 후추통이 자신의 숙적이랍니다. 때문에 지금의 상황이 흡사 자신을 숙적 안에 갇힌 존재처럼 느끼게 만든다는 설명이었습니다. 우리는 급히 탈출하려고 했습니다만 타디스에 시동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닥터의 말에 따르면 우주에는 일년에  반중력 스페이스 허리케인이 지나가는 때가 있는데 지금이 바로 그때라는 겁니다. 태풍이 오면 비행기가 뜨는 것처럼 타디스도 지금은 수가 없다는 겁니다. '아니, 양반아 그걸 알면서도 애초에 이리로 왔어요?'하는 말이 목을 간지럽혔습니다. 30분쯤 기다리자 후추통들이 (달렉인가 슈렉인가 하는 것들이) 드디어 전망대까지 올라왔습니다. 아따, 정말 위협적일 정도로 빠릅디다. 참을성 있게 10분쯤 기다리니 얼추 우리를 포위할만큼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아주 대단한 서스펜스에 몸이 덜덜덜 떨렸씁니다. 후추통 놈들이 'Exterminate! (말살하라!)' 외치며 우리를 향해 작은 작대기 같은 내밀었습니다. 커지기 전의 닥터 것보다는 조금 길었는데 마치 그것은 빨대 아니면 살충제 스프레이 노즐처럼 보였습니다. 저는 속으로 외쳤지요. 아니 저것들이 장난을 하나. 닥터한테는 있잖아!

-
닥터 바지 속의 그거 말이야. 소닉 스크류 뭐시기. 그걸로 후추통들 어떻게 수는 없는거야?
 -
안돼. 달렉한테는 통해.
  
나중에 알게 사실이지만 닥터의 설명이란 이런 식입니다. 그의 설명은 어떤 경우에는 이치에 맞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이치에 맞지 않았습니다. 소닉 스크류 드라이버도 마찬가지로 어떤 장애물 앞에서는 강력한 힘을 발휘했지만 어떤 장애물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습니다. 돌벽도 뚫는데 나무문은 뚫지 못합니다. 미래형 다용도 기능성 연장인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에는 레이져 라이플로 돌변하여 적들을 공격하기도 합니다. 하여간에 대중이 없습니다. 그게 말이 된다는 것은 로켓 과학자가 아니어도 있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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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듯 닥터는 없는 남자였습니다. 그를 둘러싼 일련의 일들 또한 없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때 달렉에게 포위되었다가 어떻게 살아났느냐고요? 절체절명의 순간 갑자기 타디스가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를 내며 불빛을 깜박거리더군요. 닥터는 환해진 표정으로 무릎을 쳤고요. 떠밀다시피 저를 타디스 안으로 끌고 들어와 이륙 준비를 하면서 장난꾸러기처럼 혀를 내밀었습니다.
 -
천재적이야. 태풍의 ! 모든 열대 저기압에는 맑게 무풍지대가 있기 마련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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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는 알았어요? 이렇게 될지?
 
물론 닥터는 질문에 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묻자 말을 돌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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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라차아나팔락티카 말로 '토니 로마스' '태풍의 '이라는 뜻이야
   
그러더니만 , 마려운 사람처럼 촐랑대며 이리 저리 왔다갔다 돌아다니면서 열심히 밀고 당기고 누르더군요. 닥터와의 여행이라는 것이 이런 식입니다. 후추통이 깡통로보트로, 코뿔소 괴물로, 돼지 괴물로, 도마뱀 괴물로, 그림자 괴물로 대체될 뿐이지 기본 얼개는 항상 같습니다. 매번 저는 논리적 결함을 찾아내었습니다. 하지만 항상 닥터와 함께 타디스에 오르면 잊어버리게 되더군요. 그도 그럴 것이 귀여운 남자의 사랑스러운 미소하며, 혀짧은 소리가 섞여 들어간 귀여운 악센트하며, 세탁기 돌아가는 것처럼 들리는 타디스 시동걸리는 소리하며, 위태롭게 출렁이는 유량계의 바늘 끝하며, 유리관 안을 젠틀하게 왕복 운동하는 피스톤하며, 마치 꿈을 꾸듯 높이 높이 날아오르는 호르몬의 역류하며,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 '논리' 논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 식으로 닥터와 저는 여행을 다녔습니다. <존재 불가능한 행성> <존재 불가능한 우주>, <존재 불가능한 우주인>, <존재불가능한 우주선>, <존재 불가능한 남자> 등의 사건 사고를 거치는 사이 저는 저도 모르게 존재 불가능한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 그건 분명히 사랑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름이 오고 지구 종말의 위기를 넘기고 나자 닥터의 태도가 돌변하더군요. 이야기를 짧게 요약하자면, 마디를 남기고 무정한 닥터가 떠나버렸다는 것입니다.
-
! 자기야. 나는 그저 파란 상자를 타고 다니는 미친 놈일 뿐이야. 자기는 현실을 살아야지.

 

*


   
도망간 남잘 쫓아가는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겁니다. 하지만 남자가 시간 여행자인 경우에는 조금 상황이 다릅니다. 무한한 시간과 무변한 공간 어느 구석을 찢고 들어가 도망가 있는지 수가 없으니까요. 닥터가 떠난 저는 꼬박 달을 앓아누웠습니다.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였습니다.

​ 
그때 언니를 만났습니다. 언니는 저보다 먼저 닥터를 만나 여행을 다녔다고 털어놓았습니다. 똑같이 시대를 닥터와 함께 했고 똑같이 순간에 버려졌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닥터를 잡아 족치겠다는 일념으로 살아가고 있다고도 했습니다

  
물론 언니가 언니인 처음부터 알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언니가 다짜고짜,
 -
, 얼마 전까지 닥터랑 같이 다니던 애지? 언니라고 불러라.
 
라고 하기에 이게 무슨 '비겐크림폼' 옆구리 터지는 소린가 싶어 얼결에 언니라고 부르게 되었을 뿐입니다. 저는 언니의 얼굴을 꼼꼼히 뜯어보았지요. 저란 비슷한 또래이거나 잘해야 저보다 두세 많겠더군요. 물론 저랑은 아주 다른 스타일이었지만 말이에요. 그래서인지 저는 닥터가 언니같은 스타일의 사람을 컴패니언으로 삼았더라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았습니다. 뭐랄까. 저와 언니 사이에서는 이렇다 공통점을 발견할 수가 없었거든요.
 -
왜요?
 -
내가 선임이니까.
 -
선임이 뭔데요?
  
그러자 언니는 콧방귀를 뀌었습니다.
 -
, 닥터랑 놀았던 애가 너만인줄 아니? 이전에 내가 있었고. 이전에도 많은 언니들이 계셨어. 너가 마지막이지도 않을꺼야. 다음에도 계속 어린 컴패니언들이 있을 거라고.
​ 
언니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닥터가 데리고 다니는 여자애들을 컴패니언이라고 부른답니다.
 -
그걸 그쪽이 어떻게 아는데요?
 -
글쎄……. 나한테 있어서는 니가 바로 확실한 증거지.
  
듣고보니 반박할 수가 없겠습디다.
 -
여하튼 그래서요?
 -
내가 선임 컴패니언이니 알아서 기라는 말이지.
 -
말하자면 우리가…… 일종의 동서지간이다. 말인가요?
 -
그렇게 말하면 조금…… 많이 징그럽고.
 
언니는 함께 닥터를 추적하자고 말했습니다. 조금 망설인 끝에 저는 언니의 제안을 승낙했습니다. 언니처럼 닥터를 잡아다가 런던탑 앞에서 찢어 죽여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말입니다. 첫째로 달리 일도 없었고 (시간 여행에서 돌아왔어도 여전히 현실은 시궁창이더군요), 둘째로 닥터를 한번만이라도 다시 보고 싶은 마음도 강했습니다. 어쩌면 그때까지도 제게는 미워하는 마음보다는 사랑하는 마음이 컸는가 봅니다.

 

*


  
가까운 까페에 자리를 잡고 언니와 말을 맞춰보았습니다. 대강 아귀가 맞아 들어갔습니다. 확실히 언니가 만났더라던 남자는 닥터가 맞는 같았습니다. 우리는 어렵지 않게 비슷한 패턴의 경험들을 찾아낼 있었습니다. 어쩜 그렇게 같은 수법을 여러번 사용할 있었을까요? 화가 나면서도 한편으로는 서운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다만 닥터의 용모파기에 관해서는 의견이 다소 엇갈렸습니다. 저는 쌍거풀이 없는 눈에 뭉뚝한 코를 가진 장난기 가득한 남자라고 설명한 반면, 언니는 쌍꺼풀이 있는 눈에 뾰족한 코를 가진 호탕한 남자라고 설명했습니다. 기억에 따르면 닥터는 170 센티미터 정도 키의 통통하고 아담한 남자였는데 언니 기억 속의 닥터는 180 센티미터가 넘는 장신에 마르고 날카로운 남자였다고 합니다. 저는 닥터가 호탕하기보다는 섬세한 남자라고 반박했고요. 언니는 섬세하기보다는 불처럼 화끈하고 강렬하고 저돌적인 남자라고 다시 반박했습니다. 제가 아는 닥터는 물처럼 넓고 깊고 온화한 남자였기에 적잖이 머리가 어지러웠습니다. 그제야 언니는 싱긋 웃으며 이유를 설명해주었습니다.
 -
니가 아직 재생성을 모르는구나.
  
언니는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
이삼년에 번씩 자식이 죽을 위기를 넘기면서 자기 얼굴과 몸을 바꿔. 때리게도 과정에서 성격도 조금씩 바뀌고.
 -
그럴리가요.
 -
그렇다니까. 900년동안 계속 얼굴이겠어.
 -
정말요?
 -
그래. 웃기는 것은 과정에서 점점 어려진다니까.
 -
점점 어려지니까…….
 -
거기에 맞춰서 점점 어린 여자애들을 찾아다니는 거지.
 -
그럼 어떻게 찾아내지요? 만약에 다시 얼굴을 바꾸었다면. 설령 운좋게 닥터가 지금 우리 시간대로 숨어들어왔다고 하더라도 닥터가 맞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잖아요.
 -
그게 바로 문제야. , 생각은 이래. 뭔가를 잡아내는 데는 가지 방법이 있어. 하나는 목표물을 쫓아가서 직접 잡아내는 거야. 다른 하나는 목표물이 자기 발로 우리에게 오게 만드는 거지.

 

*


 
언니는 쉐보레 아베오를 몰았습니다. 아이스 블루 색상이고요. 마치 타디스처럼 말입니다. 귀여운 차이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언니와 어울리지는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우리 어디로 가는 거예요?
 -
런던 외곽에 창고가 하나 있어. 며칠 전에 임대한 거야.
 -
좋아요. 언니. 작전을 말씀해주세요.
 -
간단해. 우리는 개의 질문 목록을 만들거야. 닥터에게 공개 질의하고 싶은 것들이겠지. 그걸 바탕으로 간단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꺼야. 뒷자리의 비디오 카메라로 녹화를 할꺼고 인터넷 방송국에 보낼 꺼야. 유튜브에도 올릴꺼고. 반복해서 세계에 퍼지고 퍼지게 하는 것이 목표야.
 -
닥터가 볼까요? 말은 그건 지금 시간대에만 유효한 것이잖아요.
 -
첫째, 닥터가 보라고 만드는 아니야. 범죄자 보라고 하는 현상수배 봤니? 과거의 컴패니언, 혹은 예비 컴패니언들이 보기를 바라는 것이지. 둘째, 닥터는 컴패니언을 우리와 동일한 타임 라인 위에서 고를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사실이야. 나는 평생을 바쳐서라도 두고 두고 영상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게 만들꺼야. 후에도, 이십 후에도, 내가 죽은 다음에도. 아무리 닥터라도 언제까지나 모른 하기는 어려울껄?
  
듣고 보니 그럴듯 했습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고민하고 계획했던 일인 같았습니다. 닥터는 이상하게도 여기 지구와 여기 지구인들에게 애착이 강합니다. 다른 별이 폭발하든 다른 종족이 절멸하든 크게 신경쓰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오래된 우주의 관조자가 하필 지구 역사의 결정적 분기점 앞에서는 안절부절 못하는 이유가 뭘까요? 모든 시공간의 주인이 컴패니언을 시대의 지구에 와서 고르는 걸까요? 만약에 그런 영상이 퍼진다면…… 글쎄요. 닥터가 정말로 우릴 찾아오지 않으리란 법도 없어보였습니다. 저를 떠날 닥터는 "아마도 다시 만나기 어려울 운명이 아닌가 싶다" 확언했었지만 아시다시피 그의 말은 필요에 따라 (그러니까 자기 편한대로) 번복되기 마련입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요.

 

*


  6
고속도로에서 빠져 국도를 달렸습니다. 우리는 아마도 번째 질문이 가능성이 높은 주제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닥터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시나?> 말입니다.
 -
, 닥터가 알기는 안다고 생각하니?
 -
저보다는 많이 알지 않겠어요?
  
언니는 쿡쿡거리며 웃었습니다.
 -
그래서 우리가 당한거야. 등신처럼.
-
설마, 그래도 명색이 닥턴데.
 
언니는 코웃음을 쳤습니다.
-
새끼 학위 확인해봤어?

 
뭐라 말이 없었습니다. 그러고보니 학위 확인해볼 생각을 못했었네요. 아무리 석박통합이다 학석박통합이다 학위를 남발하여 '백만박사양병설'까지 제기되고 있는 시대라지만, 당연히 학위가 있을 거라고 여겼던 것이 잘못이었습니다. 생각해보니 확실히 그렇습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설명의 절반이 자연법칙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나머지 절반은 자기도 무슨 얘긴지 모르는 것입니다. 까놓고 말해 그의 입은 작죄구나 다름 없습니다.
 -
그러니까 쥐뿔도 모른다는 뜻이지. 실제 아는 없고 실제 하는 것도 없지. 단지 빨리 말하고, 많이 말하고, 광대처럼 과장된 몸짓으로 사람들을 홀리는 거야.
 -
확실히 부정할 수가 없네요. 하지만 언니, 하지만 정말 닥터를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단언할 있을까 하는 생각은 들어요. 일단 그는 타디스와 같은 굉장히 복잡한 타임 머신의 주인이잖아요. 그리고 그걸 다룰만한 능력과 지식을 분명 갖춘 남자이기는 하잖아요
-
오너 드라이버라고 자동차를 기술적으로 이해할까?
-
물론 그렇게 생각하면 그렇지만…….

-
이렇게 생각을 해봐. 네가 휴대전화로 통화하는 모습을 1960년대 사람들이 보았다고 말이야. 사람들은 생각하겠지. ' 사람 굉장한데? 외계인인가?' 하지만 진실은 너도 알다시피 우리는 휴대전화에 대해 몰라. 무선통신기술에 대해, 디스플레이기술에 대해 아무런 지식이 없어. 우리가 아는 그저 '자라'이나 '유니클로' 'H&M' 같은 것들이지. 하지만 휴대전화가 맛탱이가 갔을 말이야. 다시 껐다 켜면 정상으로 돌아올 수도 있단 사실은 알거든. 대강 사용할 있고 어느 선까지는 트러블 슈팅도 되지. 그것만으로도 1960년대 사람들 눈에는 신기할 꺼야. 어쩌면 우리가 '시스템'이라는 단어를 말하기만 해도 놀라워 할꺼야. 단지 주말에 사러 가자는 얘길 하고 있을 뿐인데도 말이야.

-
닥터는 우리보다 앞선 시간대의 기술로 만들어진 물건을 가지고 있을 뿐이지 앞선 시간대의 기술을 이해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단 말이러군요.
 -
그렇지. 닥터가 '타임로드 테크놀로지' 대해 뭔가 알고 있는 것처럼 이리 저리 뜯고 만지고 있지만 그게 시대 문명 놈들에게는 정기 부동액 교체만큼 간단한 일일 수도 있지 않겠니.
 -
하지만 어쨌든 그것이 앞선 시간대의 기술이 맞기는 하다면 어쨌거나 상관없는 아닌가요? '닥터가 무엇을 안다' 혹은 '알지 못한다' 규정하는데 있어서 기술적 이해도를 중요한 근거로 삼을 수는 없다고 보는데요.
 -
문제는 이거야. 닥터, 시공의 주인, 권위가 어디에서 나오느냐 하면 '타임로드 테크놀로지'에서 나오는 것이거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말에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고 설사 전혀 그의 판단이 필요하지 않은 지극히 상식적인 문제들 앞에서도 그의 주둥이만 바라보게 되는 거야. 바로 그게 문제라는 거야.

 

*


  
자연스럽게 이야기는 번째 질문으로 넘어갔습니다. <닥터란 남자는 도대체 뭐하는 자식인가?> 말입니다.
 -
그게 문제죠?
 -
그가 맞는지 확신할 없으니까.
 -
당연하죠. 우리는 다른 유니버스를 경험해보지 못했으니까. 닥터처럼 방대한 차원에서 그림을 수는 없는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
다시 말하면 오직 닥터만이 겪어 보았다는 뜻도 되지 않겠니? 무엇으로 증명할 있겠냐는 말이야.
 -
결과요. 닥터의 선택은 항상, 아니 대개는 옳았어요. 그거 하나면 충분히 증명되는 것이 아닌가요?
 -
결과론이지. 닥터가 개입하지 않았다고 결과가 많이 달라졌을까? 아닐 수도 있다고 . 아까도 말했지만 닥터는 상황에 근거해서 판단을 내리지 않아. 순전히 선험적으로 재단하고 있을 뿐이지. 문제는 과정에서 스스로의 진술조차도 일관되지 못하고 서로 충돌하여 모순을 양산한다는 사실이야. 이를테면 이런 식이지.

 

1-1) 시간여행자도 평행우주만은 없다.
1-2)
시간여행자도 불의의 사고에 의해서는 평행우주에 있다.
1-3)
시간여행자도 어떤 평행우주는 있다.
1-4)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여행자가 절대로 없는 평행우주가 (이를테면 싫증난 ex-컴패니언을 가둬놓은) 있다.
1-5)
어떤 특정 사건을 분기로 갈라진 타임라인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우리와 똑같은 세상을 만들어낸다 (그게 바로 평행우주잖아!)
결론이제 누구도 난장판을 수습할 없ㅅ엉ㅋ
2-1) 시간여행자는 과거의 사건에 개입하면 안된다.
2-2)
시간여행자가 개입하지 않을 없는 과거의 사건이라는 있다.
2-3)
시간여행자는 과거의 사건에 개입하기 마련이다.
2-4)
시간여행자는 과거의 사건에 개입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2-5)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여행자가 절대로 개입할 없는 과거의 사건이 (이를테면 싫증난 ex-컴패니언과 관련된) 있다
2-6)
설사 완전히 고정되어 명명백백하게 일어나도록 예정된 사건이라고 하더라도 시간은 다시 쓰여질 있다.
결론이제 누구도 난장판을 수습할 없ㅅ엉ㅋ  


  
부정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저조차도 저런 목록을 수십개는 작성할 있을 같았으니까요.
 -
결론은 이거야. 닥터 자체가 패러독스고 동시에 패러사이트야. 비유가 아니라 이게 진실이지.
 -
그렇긴 하지만 언니 말씀이 지나치신 같아요.
 -
지나치다니 , 너는 결과적으로 닥터의 결정이 항상, 아니 대개 옳았다고 하지만 나는 아직도 모르겠어. 어떤 문제가 벌어졌을 닥터가 정확히 하고 있는지. 풀고 있는지. 제대로 알고 하는 건지 말이야. 항상 보면 문제를 해결하는 닥터가 아니야. 우연 혹은 기계를 타고 내려온 다른 남자지.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라고 아니?
 -
굿을 하는 것만 능사는 아니죠. 굿판을 짜는 능력도 능력은 능력이죠.
  
언니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지어보였습니다.
 -
, 진정해. 닥터가 아주 제대로 세뇌시켰구나.

 

*


  
목이 말랐습니다. 우리는 휴게소에 잠시 차를 세우고 목을 축이기로 하였습니다. 저는 코카콜라를 마셨고 언니는 다이어트 중이라며 글라소 비타민워터를 마셨습니다. 언니가 물었습니다.
 -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데, 남자가 횡설수설하는데 상자를 타고 다니더니? 횡설수설하는데 상자를 안타고 다니면 다른 놈일 수도 있어.
 -
다른 누구요?
 -
몰라? 이를테면 셜록이라던가.
 -
. 상자를 타고 다녀요.
 -
그럼 닥터가 맞아.

  
간단한 맨손체조를 하고 나서 언니는 다시 파란색 아베오에 올라타서 안전벨트를 채웠습니다. 아직도 창고까지는 삼십여분 달려야 한다고 하더군요. 오랜만의 여행이라 피곤했습니다. 조금만 쉬며 이야기를 나누기로 하였습니다. 시트를 뒤로 편하기 밀었습니다. 우리의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번째 질문 - <댁에게 있어 우리 컴패니언들은 어떤 존재인가?> 이어졌습니다. 언니는 무겁게 한숨을 쉬었습니다.
-
타디스의 무서운 점은 말이야. 집과 차를 겸하고 있다는 부분이야.
-
그렇죠. 닥터는 있는 남자인 동시에 있는 남자인 셈이니.
-
인정할께. 나도 부분에 넘어갔어. 스무살때였나 스물한살때였나 첫번째 남자친구는 외딴 섬에 데려갔다가 배가 끊겼다고 좀스러운 뻥을 쳤었거든. 그런데 닥터는, 글쎄, 우리가 존재 블가능한 위성 <깊은 밤의 서정곡> 위에 있는데 이게 블랙홀 안에서 빨려 들어간 상태에서 타디스가 뜰래야 수가 없다고 뻥을 치더라고. 이건 스케일이 다르잖아
​ 
저는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반중력 스페이스 허리케인을 생각하면서요.
 -
지금은 누가 기쁨을 누리고 있을까요?
 -
모르지…… 사라 코너?
 -
지금이야 행복할지 모르겠지만…… 과연 후에도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죠.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밖으로 비쩍 말라 비틀어진 나무들이 열을 지어 지나갔습니다
-
닥터는 말이에요. 무슨 기준으로 우리를, 그러니까 컴패니언들을 선택하는 걸까요?
-
생각엔 우리 안의 약한 부분을 공략하는 같아. 만약 놈의 관심사가 모험과 액션이라면 캠틴 하크니스와 같은 유능한 용사들과 다니는 편했겠지. 만약 놈의 관심사가 지식과 학문이라면 모건 프리먼과 같은 세계적인 석학들을 모시고 다니면서 이야기를 나누었겠지. 하지만 그의 선택은 대개 어린 아가씨들. 대개 만족스럽지 못한 현실을 살고 있고, 아직 커리어를 제대로 쌓지도 못했거나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는 하잘 없는 일을 하고 있는 아이들이란 말이야. 그러다 닥터를 만나고, 쏘고 뛰고 쏘고 뛰고, 휘몰아치는 아드레날린 속에 비로소 뭔가 바쁘고 중요하고 제대로 일을 하고있다고 느끼게 되면 감정적으로 약해진 상태에서 쉽게 넘어가는 거지.

-
마치 얘기 같아서 얼굴이 화끈거려요.
-
, 마음 독하게 먹어야 . 나쁜 네가 아니야. 자식이지.
-
나쁜 것은 컴패니언을 버리는 방법이야. 너도 알겠지만. 한번도 솔직한 적이 없었어. 불가항력적인 사건처럼 포장을 했단 말이야.
-
저한테는 타임-볼텍스 네비게이터가 망가졌는데 필요한 부품이 단종되었다고…… 그래서 영원히 저의 시간대로 찾아올 없게 되었다고.
-
나한테는 어땠는줄 아니? 기억을 죄다 지워버리고. 우리 가족들을 찾아가 자기와 있었던 일을 기억하게 되면 머리가 감당하지 못하고 폭발해 버릴테니 조심들 해달라고 말했대. 기가 막히지 않니?
-
기억을 지워버렸는데 어떻게 용케 기억해내셨네요.
-
그러게 말이야. 기억이 돌아왔는데도 ! 폭발은 개뿔. 그런데 우리 앞의 컴패니언들한테는 심했대. 다른 평행 우주에 가둬놓은 언니도 계시고, 죽은 걸로 위장하여 상까지 치루게 해서 아직도 닥터가 죽은 줄로만 아는 언니도 계셔.
-
! 사실이라면 정말 너무하네요.

 

*


  
바람을 쐬어야 같았습니다. 차에서 내려 걸었습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하나씩 들고 쌀쌀한 강바람을 맞으며 걸었습니다불현듯 언니가 말을 꺼냈습니다.
-
, 혹시 소닉 스크류 드라이버 기억나니?
-
소닉 스크류 드라이버요? 그럼요. 그걸 어떻게 잊어버리겠어요.
-
닥터가, …… 그것을 어떻게 쓰는지 알려줬니?
-
어떻게 만지니까 약간 커지고 약간 단단해지고 약간 두꺼워지던데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말을 뱉고 보니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
닥터가 너한테 그걸 맡긴 적도 있니?
 
역시 이유는 모르겠지만 언니 얼굴도 홍당무처럼 빨갛게 변하더군요.
-
이따금이요.
  
잠시동안 어색하고 무거운 침묵이 흐른 언니는 제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
, 지금 우리 같은 얘기 하고 있는 맞지?

 
그러던 파란색 폴리스 박스를 발견한 정말 우연한 일이었습니다. 공중전화부스들이 늘어서 있는 사이에 혼자만 파란색인 박스가 있었던 것입니다. 언니는 눈을 비벼가며 의심하더군요. 역시 눈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발견했습니다. 얼굴은 다르지만 어쩐지 익숙한 느낌을 주는 남자 하나가 어린 여자애 하나와 프렌치 프라이를 입에 물고 박스 안으로 들어가는 광경을 말입니다. 허무했고, 허탈했고, 화가 났습니다. 이렇게 쉽게 어처구니 없는 곳에서 만나질 수도 있다니 힘이 빠졌습니다. 타임-볼텍스 네비게이터가 망가졌다면서요. 그래서 다시는, 다시는 저의 세계를 들어올 없게 되었다면서요. 설령 돌아올 있어도 저를 다시 마주하게 되면 아인슈타인과 스티븐 호킹, 그리고 모건 프리먼도 설명하기 어려운 패러독스가 발생한다면서요. 순간 그리움과 안타까움에 젖어있던 그의 목소리를 기억합니다. 저를 본래 그대로의 현실 - 정확한 시간과 정확한 공간에 데려다주기 위해서 치루었던 그의 희생을 기억합니다. 그런데 달도 지나지 않고서 그게 뻥이었음이 밝혀지다니요. 타임-볼텍스 네비게이터라는게 실제 있기나 겁니까? 뻔뻔스럽게 다른 어디도 아닌 바로 앞에서 저러고 다닌다니요.
-
쳐들어가서, 때려 잡아야겠지?
  
언니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습니다.
-
남자가 2~3년에 번씩 죽을 고비를 넘겼는지 이제 알겠네요.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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