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 세상에서 가장 통쾌한 복수극
낙농콩단

126. 세상에서 가장 통쾌한 복수극

by 김영준 (James Kim)

  우웩. 고개를 숙이고 속에 든 내용물을 모두 토해냈다. 반쯤 소화된 상추와 잘게 엉켜진 고깃점이 묽은 수프처럼 쏟아졌다. 건더기가 꿈틀 거리는 것 같기도 하다. 우우웨엑. 다시 한 번 크게 토악질을 하고 나서야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래도 일단 밖으로 빼내고 나니 살 것 같았다. 술의 독한 기운은 물론이고 그때의 악몽까지도 함께 몸을 빠져나간 느낌이었다. 그제야 나는 비로소 자신이 어떤 꼴인지 돌아볼 수 있었는데 땀으로 흠뻑 젖어 전봇대에 반쯤 기대다시피한 몰골은 영락없는 취객의 그것이었다. 침과 뒤섞여 입가에 흘러내리는 끈적끈적한 구토의 잔여물은 반박할 수 없는 확실한 증거였다. 참 힘든 밤이었어, 라고 나는 중얼거린다. 사실 소리내어 말한 것은 아니었으나 내게는 그 차이를 명확하게 구분해낼 정신의 여유 공간이 부족했다. 허나 정말 그렇게 말하거나 그렇게 말한 것처럼 생각이 되거나, 어느 쪽이든 '참 힘든 밤'이었던 것은 분명한 진실이므로 그것이 실제 음성화된 언어로 표출되었는지의 여부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하겠다.

 

  그렇다. 나는 방금 술자리에서 빠져나왔다. 3차에서 4차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죽을 힘을 다해 탈주했다. 1차에서 2차로 넘어가는 길목을 놓친 것은 그때까지만 해도 동료들과 상사들 모두 정신이 멀쩡했기 때문이다. 2차에서 3차로 넘어가는 찬스를 놓친 것은 그때 내빼면 잡히진 않아도 '내뺐던 사실'이 그 악마같은 자식들 뇌의 잔주름에 여전히 각인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런 경우 내일의 출근은 곧 악몽이 될 것이었다. 주말에 은근하게 쏟아지는 잔업이 일종의 보복적 성격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바보가 아닐 바에야 알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 때면 나는 나를 제외한 조직의 모두가 회사의 반짝이는 로고 아래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가 된 듯한 두려움을 느낀다. 즉 3차에서 4차로 넘어가는 즈음이 되어야 반쯤은 맛이 간 상태고 내가 내빼는 걸 눈치를 채도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는 지경이기에 비로소 향후의 안전을 조금이나마 기대할 수가 있는 것이다. 밤거리의 네온사인이 회전목마처럼 휘돌고 밤하늘의 별이 모두 내게로 쏟아지는 퓨즈가 나간 상태에서도 지금이다, 라는 판단이 드는 순간 죽을 힘을 다해 뛰었다. 온 몸이 상처투성이인 까닭은 물오징어처럼 출렁거리는 몸으로 오백미터를 전력질주했기 때문이다. 상처 하나하나가 당시 주위의 어떤 지형지물과 몇 번이나 조우했는지를 말해주는듯 또렷하다. 정신이 몽롱하여 아픈 줄도 모른다. 구토물로 범벅이 된 것으로도 모자라 피까지 흘린다. 정신이 온전한 사람의 눈에는 마치 '괴물'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괴물이 아니다. 만약 내가 괴물이었으면 소주 반 병에 (사실 엄밀히 따지자면 반 병도 안되는 양이었다) 이처럼 세상 모든 알코올이란 알코올은 다 흡수한 것처럼 유난을 떠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혹은 3차까지 숨죽이고 기다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집에 간다는 데 누가 막을 것인가! 자그마치 괴물인데!) 혹은 아예 술자리에 끼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누구도 괴물에게 술을 먹이지는 않을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이거 차라리 사람보다 괴물로 사는 게 더 편하지 않을까?'하는 생각마저 해본다. 괴물로 살면 매주 금요일마다 이런 고난을 겪지 않아도 될 것이 아닌가.

 

*

 

  비음주자인 내게 직장생활은 고역이나 다름없었다. 업무의 특성상 야근이 밥 먹듯 잦았는데다가 우리 회사의 경우 하늘이 무너져도 금요일 밤에는 회식을 한다는 신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빌어먹을 놈의 '업무의 특성'은 주초에는 그저 미미하게 발현되다가 주말을 즈음하여 쓰나미마냥 몰아닥치는게 보통인데 그래도 금요일 밤은 회식을 해야했으므로 남은 업무가 애꿎은 토요일로 밀려가는 것이 예사였다. 여기서 의문. 매일 야근을 해야할 정도로 일이 많다면 회식할 시간도 아까운 게 아닐까? 그런데 그게 또 그렇지는 않다. 사실 이해하기가 힘든 일이다. 야근을 야기하는 '업무의 특성'이란 상부의 노력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상쇄가 가능한 것인데 말이다. 그럼에도 전혀 그런 노력을 안 하고 있단 말이지. 골프를 배울 시간에, 인터넷 고스톱을 칠 시간에, 홈쇼핑 사이트를 기웃거릴 시간에, 노트북으로 오락 프로그램을 다운로드 받아 볼 시간에 조금만 더 신경을 써 준다면 우리 아랫 사람들의 귀중한 시간이 낭비되지 않을 수가 있을텐데 말이다. 에휴. 소 귀에 경 읽기지. 일요일이 되면 나는 쇼파에 모로 누워 세일즈맨들의 직장 생활을 다룬 미국 드라마를 보았다. 그들은 행여 잘리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하면서도 무조건 다섯 시만 되면 (자그마치 다섯 시다) 해브 어 나이스 데이! 줄줄이 사라진다. 또 어쩌다 일이 밀려 야근을 하게 되면 불만이 하늘을 뚫고 올라가 저 멀리 말머리 성운에 닿을 기세다. 우린 찍소리도 못내는데 말이다. 이런 대사도 나온다. "오후 다섯 시부터 다음 날 아침 아홉 시까지 내가 무얼하든 그건 회사가 상관할 바가 아니잖습니까?" 우리는 그런 말을 함부로 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말했다가는 이런 반응이 돌아오겠지.

- 음 좋아. 그런데 오후 다섯 시부터 다음 날 아침 아홉 시까지 그렇게 오랫동안 비워둘 자리라면 너무 아깝잖아. 그냥 영원히 치워버리면 어떻겠나?

 

  이쯤되면 자연 법칙을 초월해 공간의 효율성을 강요하는 셈이다. 우리는 뭐 토요일에 자리를 비우는 것도 송구해야할 판인데 말이다. 에휴 우리의 토요일, 말을 말자. 하루 통으로 쉬는 것 까진 바라지도 않는다. 오전 근무가 끝나면 제발 좀 집에 갔으면 한다. 꼭 여덟시간 일할 필요가 없는 날이니 달력에도 검은색이 아닌 파란색으로 표시된 것이 아닌가. 색채 전문가들은 파란색이 사람에게 안도감을 주는 색이라고 정의했다. 안도. 휴우우. 과연 내일은 쉬어도 되겠습니까? 에휴 토요일,

 

말을 말자. 그 잘난 '주 5일 근무'의 전혀 균일하지 못한 확산은 나와 같은 불의의 피해자를 양산했다. 여전히 '주 5일'이 아니라 '주 6일' 근무하는 사람들에게 '주 5일'이 사회적으로 일반화되었다는 ‘인식’이란 거의 빈 지갑을 쓰리맞는 기분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빈 지갑도 억울한데 그것까지 긁어가냐? 차라리 벼룩의 간을 내어먹어라. "주 5일제가 일반화되면서 휴일이 늘었으니 '식목일'은 공휴일에서 제외하도록 하겠습니다" 나 "마찬가지의 이유로 '제헌절'도 공휴일에서 제외하도록 하겠습니다"와 같은 말을 들을 때면 그 어처구니 없는 ‘인식’이라는 것이 정말. 국민학생들의 산수같은 더하기 빼기의 논리와, 공휴일이 하루 늘어남으로써 끼쳐질 막대한 국가 경제적인 손실과, 아주 작지만 벼룩에게는 꼭 필요할 '간'이라는 장기와, 눈 깜짝할 순간에 빨간색에서 검정색 숫자로 변한 국군의날, 한글날의 애뜻했던 기억이란. '주 5일 근무'가 늘어나면 늘어날 수록 더 많은 시간을 일하고 있는 것만 같은 이 요상한 기분의 정체란 무엇일까? 뒤척이며 일어나 앉았다. 머리가 짓누르던 쇼파의 팔걸이엔 깊숙한 보조개가 파여있다. 고유가 시대라고 미국 어느 동네에선 '주 4일 근무'를 하는 회사들도 많다던데. 그런 대담한 ‘인식’이란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아니, 그런 대담함 씩이나 바라는 건 아니었다. "놀아도 각자의 자리에서 자리를 지키고 놀아." 모두에게 일과 생활의 동일시, 일과 여가의 짬짜면을 바라는 새우잡이 어선 방식을 벗어나 일터 바깥의 인생을 존중해줄 수 없느냐는 것이었다. 한 번 뿐인 인생 평생 상사 눈치만 보며 자리 지키고 살 수는 없지 않으냐는 말이다. 예의 그 드라마에서 회식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가끔 다같이 가볍게 식사나 하러 가는 경우가 있을 뿐이다. 그나마도 철저하게 선택을 존중한다. 바빠서 안돼요. 약속이 있어요. 난 집에 가서 쉴래요. 보스에게도 당당하게 말한다. 합리적이다. 드라마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정말 양놈들 나라에선 그럴 수 있는 걸까? 그럴 수 있는 ‘인식’과 그럴 수 없는 우리의 ‘인식’은 도대체 어느 말머리 성운에서 내려온 차이라는 말인가? 

 

*

 

  조대리는 술 못 먹는 후배직원들을 집중공략하는 것으로 유명한 인간이다. 없으니 하는 말이지만 대리여서 다행이다. 그런 나쁜 놈이 과장이 되고 차장이 되는 건 말해 입아픈 비극일테니까. 더 많은 직원들이 그의 발 아래서 표적이 될테니까. 부디 그의 커리어가 만년 대리에서 부디 멈춰주길 바랄 뿐이다. 이미 그의 술 실력은 "조대리와 대작했다가는 뭐된다" 라는 비속 지칭어를 포함한 수준 낮고 저속하고 표현으로 사내에 명성이 자자했는데 비공식 통신에 따르면 6차까지 흔들림없이 마셔대고도 동이 터오는 새벽 공오시 삼십분에 물오징어처럼 늘어진 동료들을 모두 챙겨 택시에 태워 집에 보낼만큼 음주에 능하다는 전설같은 이야기가 있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아직까지 조대리가 취하거나 취함에 준하는 상태가 되거나 취함에 준함에 준하는 상태가 본 사람이 아무도 없으므로 어떤 면에선 끄덕끄덕.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심심하면 한 자리에서 소주 열 병을 혼자서 깐다는 소문도 어쩌면 맞을지도. 도대체 취미로 소주 3.6리터를 처마시는 인간의 ‘인식’이란 지구상 어드메에 위치한 것인지 지구본을 열심히 돌려봐도 그 좌표를 이해할 수가 없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라고 과거 사기대출 및 횡령 및 국외 재산도피로 구속된 한 대기업 회장은 말했다. 지구본을 돌려본다. 할 일도 많은지는 모르겠으나 과연 세상은 넓다. 이 넓은 세상에 싸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이 조직 폭력배들처럼 서열에 맞춰 앉아 두 손으로 술 받아 마시는 것 뿐이냐는 의문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째듯 세상은 넓긴 넓은가보다. 그리고 지구는 돌고 돌고 돈다.

 

  정말 돌겠다. "마셔." 또 조대리 개자식이다. 천성적으로 알코올과 친숙하지 못한 나의 몸과 마음은 조대리와 같은 거친 맹수들에게는 아주 좋은 먹잇감이었다. 그는 술을 마시지 못하는 나를 재미있어 했고 일부러 술자리에서는 고의적으로 나를 표적으로 삼아 공격했다. 멀리 떨어져 앉아도 집요하게 쫓아와서 괴롭했다. 학창시절 일진들에게 괴롭힘을 당한 이후 이런 일은 처음인데 회사 생활을 하면서 이런 경험을 해야한다는 사실이 말도 못하게 비참했다. 그는 파충류처럼 비열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하곤 한다. "난 멀쩡한데 넌 왜 그러냐?" 정말 몰라서 묻는 걸까? 사람마다 알코올 대사 능력이 다르다는 걸 모르는 아주 무식한 소리다. 성대가 울렁거린다. 그는 내 뒷통수를 때리고 귀에다 이렇게 속삭인다. "난 한 새끼만 찍어죽여.” 화가 나지만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놈의 멱살을 잡고 이렇게 소리치고 싶은 충동이 아주 먼 과거에서부터 아주 먼 미래에 이르기까지 내달린다. '에프와이엔 유전자가 뭔지나 알아? 모르지? 이래서 고등학교 과학교육이 문제야. 너처럼 무식한 애가 어떻게 대리씩이나 되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어쩌지. 그게 니 한계야. 종착역이라고. 넌 평생 대리에서 벗어나지 못할거야. 조대리가 말 그대로 뭐되는거지.' 꿀꺽. 차마 말하지 못한다. 조대리의 정신은 여전히 멀쩡했다. 섣불리 뱉은 말을 두고두고 기억할 것이다. 되려 '말할까' 겁이 난다. 이렇게 정신이 몽롱해지다가 무의식중에 내뱉는 것은 아닐까? 그런 경우 되돌아올 그 상상을 초월할만큼 엄청나고 끈덕질 가시적이고 비가시적 보복을 어떻게 견뎌내어야 할까? 겁이 난다. 정신 줄을 놓으면 안된다. 어릴 적 시장에서 엄마 치마자락을 붙들듯 꼭 잡고 놓지 말아야 한다. 버텨야한다. 하지만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눈이 스르르 감긴다. 졸음이 쏟아진다. "뭐야? 고작 반 컵에 뻗은거야?" 나쁜 새끼. 정말 나쁜 새끼. 소주잔이 아니라 물컵에다가 줬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되지. 언뜻 욕설이 들린 것 같기도 하다. 뺨까지 때린다. "어이, 김유석 씨! 일어나봐. 아직 초저녁이야. 이 긴 밤을 나 혼자 어쩌라고? 니가 같이 마셔줘야지" 만화경처럼 오색으로 퍼지는 찬란한 무늬들 속에서 새삼 느꼈다. 정말, 천하에 나쁜 놈이다.

 

*

 

  나는 여전히 그 전봇대 앞에 고개 숙여 물끄러미 내 토사물을 응시하고 있다. 뭐 대단한 영역표시라고 자랑스레 확인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온 몸에 기운이 빠져 옴짝달싹할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편안한 자세는 아니다. 두 팔은 전봇대를 갸냐른 연인을 껴안듯 휘감았으며 두 다리는 다리찢기를 연습하는 신입 무용수처럼 좌우로 넓게 뻗은 상태다. 이마로 전봇대의 까슬까슬한 곡면을 비벼댔다. 누가 봤다면 필경 미친놈, 이라고 했을테다. 그럼에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여전히 속이 개운하지 못하다는 것이 문제였다. 섣불리 상체를 일으켰다가는 오장육부가 폭죽처럼 밖으로 펑펑 쏟아져 나올 것만 같은 착각이 든다. 오! 신이시여! 제게 어쩜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누구보다도 착하게 살았는데!

 

  바로 그때였다. 거짓말처럼 마법같은 손길이 나타나, 거짓말이 아닌 바로 내 지친 등짝을, 거짓말보다 따스하게 두드려주기 시작했다. 갓 오븐에서 꺼낸 식빵을 양 뺨에 비빈들 그렇게 온기로 가득할 수 있을까.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괜찮아요?"라는 낯선 물음에 나는 "고맙습니다" 라고 답했다. 비로소 냉면 사발에 폭탄주를 만드는 비정상의 세계에서 벗어나, '괜찮아요?' 와 '고맙습니다'가 짝을 이루는 다분히 상식적인 세계로 귀환했다는 ‘인식’이 들었다. 뒤를 돌아보니 아주 인자한 노인이 아주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었으니, 오오! 반쯤 혼이 빠진 내 눈에 노인은 석가처럼 보이기도 했고 예수처럼 보이기도 했으나... 어쨌든 오오! 우우웩! 나는 다시 한 번 수도꼭지처럼 뭔가를 콸콸 쏟아내었다. 웩! 웩! 하지만 저수조가 거의 다 비어가던 탓에 이전만큼 높은 수압을 자랑하진 않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거의 끝물임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목구멍을 간지럽히던 잔존감이 서서히 사라지며 내게 정말로 강 같은 평화가 찾아왔다. 노인은 말했다. "젊은 양반이 어쩌다 그렇게 술이 떡이 되었는가?" 내 말이 그 말이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어르신, 죄송합니다.” 흉측한 몰골을 하고 나는 노인을 향해 애써 미소를 지어보였다. 꽤나 불쌍한 표정이었을 것이다. "이거 하나……" 라며 노인이 내민것은 타우린 일천밀리그램의 '박카스 에프'였고, 당초 모 제약회사가 그것을 숙취제거용 음료로 개발했었더라는 기사를 읽은 기억에 "고맙습니다. 어르신" 이라는 말과 함께 부끄러움도 잊고 꿀떡꿀떡 받아마셨다. 여전히 속은 황폐하고, 퍽이나 황폐하고, 장엄하게 황폐하였지만, 그래도 혈관을 타고 용솟음치는 타우린 일천밀리그램에 절로 힘이 솟았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눈물이 쏟아졌다. 아프고 힘들어서. 또 서럽고 분해서.

 

  그러자 노인은 태평양만큼 넓은 가슴으로 나를 안아주었는데 예상치 못한 일이라 조금 당황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노화에 따른 신진대사의 저하로 생겨나는 노인 특유의 내음이 내 코를 자극했지만 방금 걸판지게 오바이트를 하고 난 다음이라 누굴 탓할 처지는 아니지 않은가. 방금 입으로 태평양을 쏟아낸 계란 썩은 냄새가 나는 낯선 사람을 포근히 않아줄 수 있는 ‘인식’이란 또 어느 동네의 것이란 말인가. 오오! 내게 강 같은 평화. 그 놈의 조직생활만 아니었어도, 그 놈의 회식만 아니었어도, 그 놈의 조대리 개자식만 아니었어도. "힘들지." 노인의 주글주글한 손이 어깨를 쓰다듬었다. "회식이란게 그래 힘든거라네." 나는 말머리 성운보다 무거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조대리란 놈의 자식이 아주 못되어 쳐먹었지." 제 말이요. 정말 그렇다니까요, 고개를 끄덕이다가 보니, 응? 조대리? 가만 뭔가 이상하다. 이 할아버지가 조대리를 어떻게 알지? "다 아는 수가 있다네." 라며 노인은 씨익 웃어보였다. 소름이 돋았다. 어머머, 나 지금 무서워 해야하는 거야? "무서워할 필요 없어." 어쩜 나 술기운을 이기지못해 전봇대에 머리 틀어박고 뒤져서 저승에 떨어진 거 아냐? “아따, 젊은이가 죽긴 왜 죽어? 그 창창한 나이에! 여긴 이승이니 걱정을 붙들어 매고." 내가 말을 하지 않아도 노인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두 알고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논리적으로 생각하기에 알코올에 절여진 나의 뇌는 너무도 질퍽거렸다. "고민할 필요 없어. 그냥 그런 가보다 하고 넘어가게." 그냥 그런 가보다, 하며 내게 강 같은 평화, 를 되찾으려는 내게 노인은 태양의 입김도 닿지 않을 태평양 아주 깊은 곳에서 유영하는 실러캔스와 같은 칠천만년전에 사라졌다가 갑자기 나타난 말을 나즈막히 던졌다. "혹시 조대리린지 모시긴지에게 복수하고 싶지는 않은가? 내 아주 좋은 수가 있기는 한데.".

 

*

 

  술은 유사이래 인류의 벗이었다. 물론 술과 친하지 않은 인류도 있었는데 그들 또한 인류는 인류였다. 하지만 술과 친한 인류는 술과 친하지 않은 인류를 인류라고 여기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어 항상 문제가 되었다. "같이 마시고, 같이 죽자. 같이 죽지 않으려는 너는 배신자." 이 <경향>은 요절복통의 산업화를 거치며 근면한 집합체들에 의해 보다 거칠어졌고 쑥쑥 자라나는 자본주의의 뿌리에 빌붙어 기생했다. 그 ‘경향'이 말이다. 이윽고 후기산업사회가 도래했다. 말인 즉, '서비스'와 '노하우'의 시대라는 말이다. "같이 마시고, 같이 죽자!" 라는 구호는 그 어느때보다도 드높게 울려퍼졌다. 마셔! 안 죽어! 그것도 서비스야! 나에 대한 서비스, 조직에 대한 서비스, 사회에 대한 서비스, 그렇게 서비스 정신이 투철하지 못해서 어떻게 사회생활을 할 수 있겠나? 빨간 얼굴을 하고 넥타이를 머리에 묶은 ‘경향’이 앞에 나서 폭탄주를 돌렸다. 술과 친하지 않은 인류들은 이에 살아남고자 후기산업사회의 일원답게 각종 '노하우'를 개발하여 술자리에 대응하기 시작했다. 일부러 술자리에 지각을 하고, 마시지 않되 마신 척을 하고, 물을 몰래 따라놓고, 곰을 만나지도 않았는데 죽은 척을 하고, 고의로 적당한 (너무 높지도 않고 너무 낮지도 않은) 상사 앞에서 구토를 하고, 소변이 급하다며 화장실을 갔다가 바람과 함께 사라지고, 기타 등등.

 

*

 

  "어떤가?" 한 번 해볼만한 일이 아닌가? 노인이 들려준 이야기는 놀랍고 놀라웠다. 내가 평생 꿈꿔왔던 술 잘하는 인류에 대한 복수. 노인은 내게 그 꿈을 이룰 기회를 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가능하다면. 그래 가능하다면. "어르신, 그게 가능하기는 한건가요?" 노인은 말없이 히죽. 그게 '당근 빠따'란 의미임을 난 알고 있었다. 정말 가능하다니. "위험하진 않을까요?" 이번에도 노인은 말없이 히죽. 역시 '당근 빠따'라는 얘기다. 당연히 위험하겠지. 왜, 아니 그렇겠어? 그렇지만, "할께요. 하겠습니다." 노인은 다시 히죽. 당근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다. 

 

  노인은 나를 도보로 십여분가량 떨어진 자신의 아지트로 안내했다. 먼지가 켜켜이 쌓여 피어오르는 방의 한 가운데에는 치과용 의자가 하나 달랑 놓여있다. 음, 아무래도 저기에 누워야 한다는 말인 것 같아. 내 예상과는 조금 달라 마음 한구석으로는 조금 실망하기도 했다. (어떻게 생각했느냐고? 나는 노인이 전설 속의 쉐이프 시프터(Shape Shifter)이고 나로 변신하여 내 대신 회식 자리에 들어가서 술을 마셔줄 줄로 알았다. 정말이다.) 하지만 알고 보니 개조 시술… 음,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주사도 없이 주사위는 던져졌는 걸. 거부할 수 없는 숙명처럼 치과의자에 누웠다. 그 다음은, 아무래도, 자세히 말하지 않는 것이 좋겠지. 한시간 후 나 김유석(Kim, You Suck)는 인간처럼 보이고 인간처럼 말하고 인간처럼 생각하고 인간처럼 행동하나 인간이 아닌, 인조인간이 되었다. 더 이상 ‘인류’의 한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에 눈물이 핑 돌기도 했지만 그간 ‘인류’로 살면서 참 힘들었잖니. 하염없이 길기만 한 ‘인류’의 역사를 생각하니 티타늄으로 만들어진 심장이 벌렁거렸다. "어르신…" 온 몸이 기름 투성이가 된 노인은 아까보다 더 늙어보였다. 노인은 몽키스패너를 뒷춤에 넣고 땀을 닦았다. “뭐가…” "그런데 말이에요." "응. 그런데." "왜 일까요? 왜 인류는 술 못하는 인류를 괴롭히고 핍박하는 걸까요? 그러니까 제 말은…… 술을 마시는게 인류의 충분조건은 아니잖아요?" 마음 속 깊은 곳을 실러캔스처럼 유영하던 아주 오래된 칠천만년 전의 질문이 터져나왔다. 아무라도 붙잡고 묻고 싶었던 말이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네. 아무튼 마크 트웨인이란 양반이 이렇게 말했다네. 같은 생명체를 고문해고 죽이며 즐거움을 얻는 동물은 오직 인간뿐이라고 말이야." 노인의 말은 논리적으로 만족스런 해답이라 할 수 없었음에도 어떤 부분에서 나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렇다면 이 또한 일종의 전쟁입니까?" "그래. 전쟁이네."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갔다. 술자리는 전쟁이다. 술 잘하는 인류와 술 못하는 인류의 싸움. 폐르시아 대군처럼 몰려드는 술 잘하는 다수 인류에 맞서 생존을 위해 투쟁해야 하는 술 못하는 소수 인류의 안타까운 전설. 오오! 후일 세계를 방랑하는 음유시인들은 우리의 결코 비굴하지 않았던 슬픈 이야기를 노래로 만들지니!

 

  순간 파편화된 술자리의 기억들이 결합하고 분해되고 용해되고 분리되면서 나의 티타늄 심장을 아프게 했다. 김부장의 주사, 최과장과 박마담, 유차장과 처음처럼, 조대리와 참이슬, 마셔와 먹어, 마이크와 탬버린, 삼겹살과 오겹살, 항정과 목전지, 상추와 고추, 깻잎과 배춧잎, 노래를 못하면 장가를 못가요 아 미운사람, 숟가락과 젓가락, 권주와 벌주, 첫 잔은 원 샷, 게임과 위하여, 흑기사와 흑장미, 폭탄주와 충성주, 파도타기와 잔돌리기, 오바이트와 컨디션, 타우린 일천밀리그램과 에프와이엔 유전자, 우리 구마그룹의 무한한 영광을 위해 다같이, 아줌마 여기 소주 두 병 더 주세요, 넥타이와 립스틱, 고기를 드시면 냉면은 공짜, 신참은 신고식 고참은 고고씽, 우리도 언제 돼지 말고 소고기로 회식 한 번 해야하는데, 소주잔과 양주잔과 맥주잔과 밥공기와 국그릇과 부장구두와 하이힐과 냉면사발과 뚝배기그릇과 바케스와 그 밖에 술이 들어갈 수 있는 모든 용기, 그나마 군화가 없어서 참말로 다행이야, 상사의 침은 보약이고 상사의 담뱃재는 녹용이야, 저 새끼 또 토할려고 그런다 빨리 데리고 나가, 당기 순이익과 주당 순이익, 어떤 새끼가 사이다를 시켰어?, 영업이익과 경상이익, 결제는 카드로 하시겠습니까?, 여사원들은 이제 늦었으니까 보내지, 3차와 4차, 가라가라 가라오케, 단란한 단란주점, 하이롱 룸사롱, 삼만원에 아가씨와 안주 풀 옵션, 다시 한 번 - 노래를 못하면 장가를 못가요 아 미운사람, 다시 한 번 - 마셔와 먹어, 우리 회사 이름이 구마니까 우리 구마 의식 한 번 하시죠? 젊은 친구가 그렇게 수줍어서 쓰나, 여기 술 좀 더 내와, 안주도 푸짐하게, 우리도 언제 나이트 한 번 땡기죠, 그나저나 김유석 씨는 그렇게 술이 약해서 어떡해, 군대를 안 다녀와서 그래. 제가 잘 가르치겠습니다, 술은 먹을 수록 느는거야, 이것도 일이랑 똑같아, 체계적인 훈련이 중요하지, 몸이 기억하거든. 제가 잘 가르치겠습니다, 다시 - 폭탄주와 충성주, 나 오늘 집에 안 들어가, 내 아래로는 전부 다들 나랑 같이 달리는 거다, 예 써, 다시- 파도타기와 잔돌리기, 다시 - 오바이트와 컨디션, 위액과 쓸개즙, 우리 구마그룹의 무한한 영광을 위해 다같이, 김유석씨 땜에 나만 욕 먹고 이게 뭐냐?, 이것도 사회생활의 일종이야, 술을 못먹으면 노력을 하라고, 그것도 안되면 분위기 맞추는 노력이라도 하라고, 당신 몫은 당신이 마셔야지 어쩌겠어?, 내가 대신 마셔주리?, 세상일이 당신 생각처럼 간단하진 않아, 어쩌다 내가 당신 사수가 되서 이 짬빰에 이 개고생을 하냔말야, 참아, 안죽어, 먹어, 먹기 싫어도 꾹 참고 견뎌, 당신만 회식이 싫은 건 아냐, 다들 그렇게 참고 있는거야, 정신력이야, 왜냐고?, 고유가와 환율 상승 그리고 원자재값 폭등의 이 어려운 시기를 견뎌내어야 하니까, 우리 구마그룹의 무한한 영광을 위해, 다같이 건배! 그래. 맞다. 이건 분명 ‘전쟁’이다.

 

*

 

  인류 최초의 전쟁은 기원전 2700년전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기록’되어 있다는 말은 그 이전에도 물론 ‘기록’되지 않은 전쟁이 있었으리란 뜻이다. 어쨌거나 ‘기록’에 따르면 인류는 5000만년 이상 죽고 죽이며 살아온 셈이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높은 자가 낮은 자를, 많은 자가 적은 자를 찍어 누르는 것이 결코 변하지 않는 전쟁의 방식이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말이다. 산업의 발달로 사회가 복잡하고 다단하게 변화하면서 전쟁은 꼭 물리적으로 상대의 생명을 훼손하는 것만을 가리키지 않게 되었다. 모든 게 전쟁에 비견되었다. 가령 스포츠. 고대 그리스의 올림픽은 제우스 주신(主神)에게 바치는 일종의 종교행사였다. 모든 도시국가의 이해 관계를 넘어 펼쳐지는. 이를 즐기고자 각종 운동 경기가 함께 열렸는데 올림픽이 열리는 동안에는 모든 전쟁이 중단되었고 사형과 고문이 금지되었다. 우리는 물론 그 신성한 평화적 협정과 정정당당한 신체와 신체의 대결에 감탄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에 전쟁을 대체하는 효과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볼 수도 있다. 사업도 전쟁이다. 경쟁사보다 강하게 빠르게 움직여 더 많은 이윤을 획득해야 하는 것이 바로 사업이다. 정치도 전쟁이다. 경쟁후보보다 많은 표를 긁어오면 이기는 것이 민주주의의 투표다. 입시가 전쟁인 건 말할 것도 없다. 이후 육십년 인생의 향방이 고작 열아홉살에 얻은 세자리 숫자로 결정된다. 메달, 이윤, 득표, 점수, 모두가 ‘기록’될 수 있는 형태다. 너와 나도 전쟁 중이다. 아파트와 자동차와 직장과 연봉과 학벌과 연줄과 저축과 주식과 와이프와 처가와 자식과 사교육비와, 그 모든 것에서 '너'를 이길 수 있는 '나'가 되는 것이 이 사회 모든 '나'들이 공유한 바람이다. 일종의 전쟁이다. 그래서 ‘전략’이 필요하다. 승자에게는 내게 강 같은 평화를 패자에게는 ‘기록’으로 표현하기 어려울 침통함을, 모름지기 전쟁에는 ‘전략’이라는 게 필요한 것이다. 모든 게 전쟁인 이 사회에서 '술자리'가 전쟁이 아닐리 만무하다. 술 잘하는 인류들에겐 오히려 메달, 이윤, 득표, 점수가 없는 그런 자리가 살이 찢어지고 피가 튀는 전투의 고단함을 위로하는 자리일런지도 모르겠으나 술 못하는 인류들에겐 그마저도 전쟁이다. 처참한 전쟁이다. 술 잘하는 인류는 언제나 술 못하는 인류를 거침없이 몰아붙였다. 때문에 술 못하는 인류는 이에 대처하고자 여러 가지 ‘전략’을 암암리에 개발하였으나 아무래도 역부족이었다. 부처님 손바닥 위에서 꽁지 빠져라 내빼는 손오공처럼, 제갈공명의 신출귀몰한 눈썰미 앞에서 스러져가는 적군의 병사들처럼, 아무리 이를 악다물고 대적한들 유리할 수가 없는 싸움에 불과했다. 정신차려. 여기서 쓰러지면 끝이야. 어서가서 부축해. 우리 모두 살아서 이 지옥을 빠져나가야 해. 그러거나 말거나, 술 잘하는 인류는 여전히 기세등등했다. 왼손에서 비비고, 오른손으로 비비고, 두 손으로 비벼도 되나요? 에휴.

 

말을 말자. 술자리는 전쟁이고 술 못마시는 인류는 언제나 슬프다. 교과서에 나오진 않아도 변함없는 진리다. 넘쳐나는 그런 ‘인식'과 거부할 수 없는 그런 ‘경향’과 그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전략’과…… 에휴, 그래, 말을 말자.

 

*

 

  "마셔." 다음 주 금요일에도 어김없이 회식이 찾아왔다. 이번에도 잔무의 쓰나미가 밀려오려는 찰나다. 또다시 내일이 토요일이라는 사실을 잊고 출근해야 할런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건 내일 아침에나 걱정할 문제고……. 더 이상은 술자리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음에도 나는 적잖은 긴장을 했다. '파블로프 개'와 같은 조건반사적 두려움과 기필코 조대리에게 복수하고 말겠다는 가벼운 흥분이 짬짜면마냥 뒤섞인 상태였다. "자, 주목! 오늘도 신나게 파도 한 번 달려봅시다. 번호 붙여 갓! 하낫!" 훈련소 교관 출신이었다는 최과장은 파도타기 때 꼭 번호붙여 구령을 하게하는 습성이 있었다. 모두가 따르기 싫어했지만 별 도리가 있으랴. 매인 인생인데. 둘! 셋! 넷! 다섯! "끊어지면 처음부터 다시 갑니다."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 "이거 단단히 빠졌는데. 왜 이렇게 느려?" 열하나! 열둘! 열셋! 열넷! 열다섯! 드디어 나의 차례가 왔다.

 

열여섯?

 

  몇몇이 의외라는 듯 표정을 지었고 어딘가에선 탄성마저 터져나왔지만 마냥 넋을 놓기엔 파도타기의 규칙이 너무 지엄했다. 파도는 빠르게 돌아 제 자리로 돌아왔다. "박수!" 최과장이 좌중을 방청객 다루듯 독려했다. 다들 와와, 마음에도 없는 함성을 질렀다. "저 친구, 몰래 물을 따라놓은 것 아니야?" 내가 페이크 모션을 시도했다는 혐의가 어디에선가 제기되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누구도 큰 관심을 가지진 않아 왁자지껄한 분위기속에 조용히 묻혔다.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미리 소주잔에 물을 채워두지 않았다. 완벽한 개조로 다시 태어난 인조인간인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냐는 말이다. 알렉스 머피 경관이 로보캅이 되었을 때 소주잔에 물을 채우… 아니 방탄조끼를 챙겨입느라 부산을 떨었겠는가. 그냥 물을 마시는 기분으로, 물이라고 생각하고, 물이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잔 속에 찰랑찰랑대는 그 몹쓸 들이부었을 뿐이다. 과연 노인의 말대로 아무 느낌이 없었다. 당연하다. 식도를 넘어 위로 들어간 것이 아니니까. 스테인레스 파이프를 타고 들어가서 알루미늄 들통에 채워지고 있을 뿐이니까. 싱크대에 물을 버린 것과 차이가 없었다. 고로 내가 알코올과 접선하는 순간 으레 보였던 징후들 - 얼굴이 잘 익은 사과보다 빨갛게 달아오른다거나, 팔다리가 바나나처럼 푸석거리는 느낌이 든다거나, 맥박이 기차와 비행기를 합체시킨 것보다 빨라진다던가, 속이 폭발 직전의 베수비오 화산처럼 부글부글 끓어오른다던가, 그리하여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 빨가면 사과 - 사과는 맛있어 - 맛있으면 바나나 - 바나나는 길어 - 길으면 기차 - 기차는 빨라 - 빠르면 비행기 - 비행기는 높아 - 높으면 베수비오 화산, 식의 불안감이 없었다. 그저 고요했다. 아무 감각이 없었다. 아무 맛도 느끼지 못했다. 소주는 단지 잔에서 나의 몸통 안에 장착된 오리터 용량의 알루미늄 들통으로 '옮겨졌을' 뿐이다. 그것은, 단지 물리 법칙이었다. 액체를 따르면 아래로 내려가는. 모든 생화학 작용이 제거된 몸에 들이붓는 알코올은 내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여전히 내게 강 같은 평화 - 하늘을 날듯이 기뻤다. 무한한 기쁨으로 티타늄 심장이 벌렁거렸다. 더 이상은 언제 또 파도타기가 터질까 벌벌 떨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언제 또 누가 내 옆으로 스르르 다가와 악독한 권주 습성을 드러낼까 긴장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조대리가 내게로 다가왔다. "조대리와 대작하면 뭐된다"던 바로 그 조대리다. 나만 찍어놓고 괴롭히던 바로 그 조대리다. 오케이 목장의 외나무 다리에서 아기다리고기다리던 원수를 만난 것처럼 비장한 심정으로 나는 그가 따라주는 술을 받았다.

 

*

 

  "마셔." 마시라니까 마셨다. "털어." 털라니까 털었다. 조대리가 맹공을 퍼부었지만 인조인간이 되어버린 나를 막을 수는 없었다. "대리님도 드시죠." 그에게 잔을 돌려주었다. 잠시 의외라는 표정을 짓더니, "어쭈, 많이 늘었는데? 김유석 씨" 술의 역사에 길이 남을 처참한 복수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조대리가 따르고 내가 받아마시고 (정확히는 알루미늄 들통에 따라버리고) 다시 그 잔을 건네고 다시 그 잔에 술을 따르는 기계적인 반복이 이어졌다. 그러는 사이에 1차가 2차되고 2차가 3차 되었으며, 더러는 쓰러지고 더러는 뻗었다. 더러는 내뺐고 더러는 집으로 보내졌다. 얼마 남지 않은 생존자들은 자기들끼리 혈투를 벌이느라 정신이 없어 평소 쓰러지거나 내빼던 내가 조대리와 대작을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아줌마 여기 술 좀 더 주세요. 아니, 한꺼번에 세 병씩 주세요." 아줌마가 초록색 소주병을 냉장고에서 꺼내어 나란히 늘어놓았다. "김유석씨, 술 먹는 연습했어?" 같이 열 병을 비우고도 여전히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조대리가 빙긋 웃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그런데 대리님은 정말 대단하십니다. 소문대로 끄떡없으신대요?" 이만한 여유는 이제 내게도 있는 것이다. "어떤 새끼가 사이달 시켰어?" 최과장이 주사를 부리더니만 아직 멀정하게 살아있는 우리의 전장으로 휘청휘청 기어왔다. "왜 자네들끼리만 마셔! 나 늙었다고 무시하는거야? 나 최과장이야, 최과장!" 조대리가 약간 귀찮다는 표정을 지었고 나도 그에 동의했다. 우리는 지금 신성한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죽이되든 밥이되든 끝을 봐야할. 최과장 따위에 방해를 받아선 곤란했다. 조대리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냉면사발을 집어다가 공손히 내밀었고 최과장이 하사한 맑은 액체를 한 방울도 남김없이 받아 마시고 다음에 다시 내밀었다. 같은 양을 마시고도 이미 반쯤 맛이 간 최과장은 똑바로 앉질 못했다. 다음은 내 차례였다. 나 역시 조대리와 마찬가지의 방법으로 냉면사발로 죽음의 공수교대를 했다. 결국 최과장이 픽하고 쓰러졌다. 술 못하는 인류로 무수히 그런 설움을 겪어온 내가 이렇게 말해선 곤란하겠지만 승리의 맛은 얼얼할 정도로 짜릿했고 그렇게,

 

싸움은 다시 시작되었다. 조대리와 나는 싸움의 진행 상황을 수시로 파악할 수 있도록 비워진 소주병을 일렬로 늘어놓았다. 조금 전까지 열 병이었던 그것은 잠시 후 열다섯 병이 되었고 이윽고 스무 병을 넘어섰다. "대단하십니다." 전설이 왜 괜히 전설이 아닌지를 눈으로 확인한 내가 감탄을 표했다. "자네도 대단한데. 사람이라고는 믿기가 어려울 정도야." 당연한 일이다. 나는 사람이나 사람이 아닌 인조인간이니까. 그 사이 우리는 타임을 부르고 각각 다섯 번씩 화장실을 다녀오기도 했다. 나의 경우 소변을 본다기보단 가득 들어찬 알루미늄 들통을 비운다고 하는 편이 더 적합할 것이었는데 들통을 뒤집어 변기에 쏟아내다보니 이제는 위장과 방광이 하나인 몸으로 살아야한단 사실이 돌연 서글프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싸움은 스물다섯 병을 넘어 서른 병을 향해 달려갔다. 모든 생존자들이 바닥에 쓰러졌음에도 나와 조대리의 몸가짐에는 하나 흐트러짐이 없었다.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 즈음이었다. 나야 인조인간이니까 열다섯 병을 들이부어도 당연히 멀쩡한 것이겠으나 조대리 저 인간은 도대체 어떻게 되어 먹은 놈이길래 열다섯 병을 먹고도 저렇게 멀쩡히 웃고 있느냐는 말이다. 도대체가 말이 안된다. 고생대에 멸종했다는 실러캔스를 찾아 배를 가르다 녀석의 위장과 방광이 하나라는 놀라운 사실을 막 발견한 미치광이 과학자의 심정으로 나는 외쳤다. "아줌마, 여기 다섯 병 더 주세요!" 


*

 

  여러분, 이후의 길고 지루하고 기계적인 싸움을 모두 기술할 필요까진 없다고 생각한다. 가뜩이나 길고 긴 이야기를 읽느라 지겨웠을텐데 한 잔의 공격과 한 잔의 수비, 그리고 그때마다 조대리와 내가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주고받았는지를 모두 이야기한다면 아마 이 밤이 다가도록 끝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당신들은 그저 내가 조대리를 이겼는지, 그래서 자신한대로 세상에서 가장 통쾌한 복수극을 연출해냈는지가 궁금할 것이다. 고로 뜸들이지 않겠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다. 내가, 바로 이 김유석이가 조대리를 이겼다 (물론 이제 이 티타늄 버전의 김유석이 그 여전히 예전의 그 김유석인지 모르겠다). 허무한가? 복수라는게 원래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조대리가 쓰러진 것은 아침 06시 57분의 일이다. 예순 세 개의 빈 병 앞에서 나는 목놓아 만세를 불렀다. '조대리와 대작하다간 뭐된다'라는 말이 항상 참은 아님을 드디어 입증한 것이다. 술 못하는 인류를 박해하던 술 잘 하는 인류의 상징을 드디어 쓰러뜨린 것이다. 감격이 밀려왔다. 티타늄 합금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다. 해냈다, 복수를. 이겼다, 전쟁에서. 비로소 후기산업사회의 당당한 일원이 된 것 같아 가슴이 벅찼다. 이제 다시는 그가 강권하는 술을 마시지 않아도 될 것이다. 아울러 그는, 다시는 누구에게도 술을 권하지 못할 것이다. 아울러 나는, 다시는 강제로 술을 마시지 않아도 될 것이다. 눈물이 흘렀다. 스무명 남짓의 시커먼 남자들이 바닥에 쓰러진, 땀냄새와 술냄새와 토냄새가 어지럽게 뒤섞인, 마치 위장과 방광이 하나가 된 것과도 같은 느낌이 드는, 한 때 세상에 있는 ‘전략’과 없는 ‘전략’을 모두 시도하고도 피눈물을 흘리며 도망치던 그 악몽의 공간에서 나는 천천히 일어섰다. 넥타이를 고쳐매고 상의를 입었다. 다시, 출근할 시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2010년 0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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