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152. 기넥트 디즈니랜드

낙농콩단/Season 11-15 (2011-2015)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12. 2. 26.

본문

  일곱 살 아키코에게는 친구가 필요했다.
 
  아키코는 다리를 살짝 절었다. 많이도 아니라 ‘살짝’이다. 어떤 의사는 소아 하지부동이라고 했다. 어떤 의사는 고관절 탈구라는 표현을 썼다. 구체적으로 두 가지가 어떻게 다른지 모르겠다. 핵심은 발견이 늦어 치료 타이밍을 놓쳤다는 사실이었다. 의사들의 공통적인 지적은 두 가지였다. 첫째, 보조구 착용이나 석고 고정으로 바로 잡기에는 늦었다는 것. 둘째, 막상 지금은 수술을 하려해도 이득보다는 해약이 많다는 것. 처음에 그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크게 걱정할만한 수준이었다면 조금 더 일찍 발견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정말 ‘살짝’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은 신경 쓰고 보지 않는다면 티도 나지 않는다. 아무 생각 없이 보면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보통의 다른 어린 아이들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주의 깊게 보면 보인다. 볼 사람은 다 보고, 알 사람은 다 안다. 필요한 사람은 다 본다. 이를테면, 어린이 집 친구들의 눈에는 보인다.

  또래 친구들에게, 결점이 있는 급우란 좋은 먹잇감이다. 그리고 그 결점이 눈에 보인다면 더할 나위 없이 일은 쉬워진다. 정도가 지나치면 더러는 가책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살짝’이다. 항상 그게 중요하다. ‘살짝’이다. 의족을 단 급우를 밀어 넘어 뜨릴 수야 없지만 (물론 세상에는 상식을 뒤엎는 악마들이 존재함을 부정하진 않겠다) 살짝 절뚝거릴 뿐 다른 이상이 없어보이는 친구들 밀어 넘어 뜨리는 것은 충분히 용인할만한 일이다. 스스로도, 또래 집단에게도, 어쩌면 사회적으로도. 그리고 재밌다. 안전하기도 하다. 동물의 왕국에서는  공격보다 좋은 방어가 없는 법이다. 약육강식의 세계에는 ’살짝'이라는 개념으로 익스큐즈될 수 있는 일이 없다. 난 살짝 약한데요? 난 살짝 작은데요? 난 살짝 느린데요? 난 살짝 졸리운데요? 난 살짝 음식을 가리는데요? 난 살짝 다리를 저는데요? (그래서 어쩌라고!) 

  처음에 그는 일이 이렇게까지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어떤 사람은 인대를 다쳤어도 리오넬 메시처럼 뛰어다닌다. 어떤 사람은 인대가 나갔어도 마이클 조던처럼 날아오른다. 의사도 충분히 고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고칠 수가 없었다. 세상엔 고칠 수 있을 것 같은데 고칠 수 없는 것이 너무 많다. 그리고 고칠 수 없어 문제인 것은 몸의 병만이 아니다. 마음의 병도 있다. 놀림과 따돌림을 경험한 아키코는 쉽사리 마음을 열지 못했다. 곰돌이반에서 사자반으로, 사자반에서 다시 호랑이반으로 옮겼지만 달라질 것은 없었다. 어느 반을 가거나 그 애는 다른 아이들의 먹잇감일 뿐이었다. 부모된 입장에서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결국 어린이 집을 그만두게 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아직 일곱살이니 아직까지 공부야 뭐 크게 문제될 일은 아니다. 홈 스쿨링이어도 상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친구와 놀이가 문제였다. 그 아이에게는 친구가 필요했고, 그것만은 마술을 부리지 않는 한 집에서 제공해 줄 방법이 없었다. 동네 아이들이 집에 놀러오게끔 하여도 별 소용이 없었다. 마찬가지의 곰돌이-사자-호랑이 일만 끊임없이 반복될 뿐이었다. 마치 도돌임표가 달려있다는 듯이.

*


  아키코의 일곱 살 생일. 그는 딸의 생일 선물로 마이크로소프트의 비디오 게임기 '엑스박스 360'을 사주었다. 아내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뭐야? 당신 정신이 있는 사람이야?)

  그나마 그녀가 사진 속에만 있어서 다행이었다. 현실에서는 그녀를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장장 9년에 걸친 결혼 생활 동안에 그는 단 한 번도 그녀를 이기지 못했다. 

  (내가 없으니 이제 죄다 당신 마음대로 하지?)

  아내의 잔소리는 끝이 없었다. 멈출 줄을 몰랐다. 비디오 게임의 악영향에 대한 익숙하고 진부한 근거들이 제시되었다. 

  그라고 모를리 없었다. 그는 비디오 게임회사에서 일했다. 강점과 기회를 추구하고 약점과 위협요소를 분석하는 것은 사업의 기본이자 그의 맡은 직무의 근간이었다. 아내의 지적은 모두 그에게 너무도 익숙한 논리들이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그 말은 진짜 아내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의 머릿 속 일부를 점유한 아내의 기억으로부터 나온 것이니까. 혹은 그 자신의 무의식으로부터 나온 것이니까.

  그의 회사는 닌텐도 ‘위(Wii)’의 서드-파티로 몇 가지 게임을 개발 중에 있었다. 그리고 그는 2013년 출시를 목표로 하는 대전 격투 게임의 수석 엔지니어였다. 혹시 여러분들 중에 비디오 게임 산업의 문외한들이 계실지도 모르겠다. 노파심에 설명을 덧붙이자면 가정용 비디오 게임용 콘솔의 역사는 1972년 마그나복스의 ‘오디세이’로부터 출발한다. 텔레비젼 화면으로 게임을 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처음 실행에 옮긴 랄프 베어의 업적이다. 이후 여러 세대에 걸쳐 콘솔은 진화를 해왔고 현재는 2005년부터 시작된 7세대로 분류된다. 여기에는 미국 마이크로소프트의 ‘엑스박스’와 일본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 그리고 일본 닌텐도의 ‘위’가 있다. 굳이 따지자면 그는 자신이 개발하는 게임과 별 상관이 없는 경쟁사의 제품을 사 준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아이에게 마이크로 소프트의 '엑스박스 360'을 사준 이유는 '키넥트'라는 기기 때문이었다. 

  ‘키넥트’는 사용자의 동작을 인식하는 센서다. 몸을 컨트롤러로 사용하여 비디오 게임을 플레이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쯤되면 여러분들도 그가 왜 위험을 무릅쓰고 이 콘솔을 구매하였는지 짐작하실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딸, 아키코는 몸을 움직여 놀이하는데 어려움을 느끼고 있었고 동시에 마음을 터놓을 친구 또한 필요로 했다. 두 가지 요건 모두 키넥트를 이용해 충족할 수 있을 거라고 그는 기대했다.

  (그래서 바보같은 게임기를 우리 딸 친구 삼으려고 데려왔단 말이야?)

  아내가 있었다면 필경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도 안다. 이런 주장이 얼마나 멍청하게 들릴지. 하지만 그는 확신했다. 일곱살 아키코가 이 새롭고 혁신적인 놀이를 좋아할 것임을. 그리고 이를 통해 걷고 달리는데 자신감을 회복할 것임을. 그래서 공포와 두려움을 버리고 다른 이와 교감하는 즐거움을 되찾을 것임을.

*


  아내는 아이들에게 가능한 오래 감출 수록 좋은 것들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산타 할아버지의 진실이라던가, 긴자에 있다는 히쿠힌칸 장난감 백화점이라던가, 아니면 비디오 게임이라던가……. 그래서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을 숨길 수 밖에 없었다. 아키코가 "아빠 직업은 뭐야?"라고 물으면 '완구'라는 말은 쏙 빼고 "전자 회사에 다니지"라고만 답했다. 구체적으로 회사 이름을 따져 물을만큼 아직은 머리가 크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키넥트의 원리는 다음과 같다. 키넥트 센서는 세 개의 렌즈로 구성되어 있다. 자외선 프로젝터에서 픽셀 단위의 점을 쏘아주면 피사체에 반사되어 돌아오는 것을 오른쪽의 적외선 카메라가 인식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깊이 정보가 얻어진다. 중앙의 렌즈는 RGB 카메라이다. 일반 카메라처럼 피사체를 받아들인다. 이를 조합하여 신체 주요 부위를 트래킹하면 사용자의 동작을 인식하는 효과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를 응용하여 이미 많은 동작 인식 게임이 개발되었다. 스포츠 게임, 댄스 게임, 요가나 명상 게임, 심지어 액션 게임까지. 

  그 중에서도 <키넥트 디즈니랜드>라는 게임은 그가 이적 행위를 감수하면서 마이크로소프트의 엑스박스를 구입하게 만든 이유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었다. 제목 그대로다. 플레이어가 온 몸으로 디즈니랜드를 탐험하는 것이다. 얼마나 멋진가! 특히 자타공인 '디즈니 매니아'인 아키코에게 더없이 알맞는 선물 아니겠는가!

  <키넥트 디즈니랜드>의 게임 구성은 다음과 같다. 플레이어에게는 아바타가 있다. 플레이어는 (즉, 플레이어의 아바타는) 디즈니랜드를 돌아다니면서 다양한 디즈니 캐릭터들을 만난다. 캐릭터들은 플레이어에게 과제를 내준다. 주로 캐릭터의 배경과 연관된 과제다. 가령 플루토는 뼈다귀를 찾아 달라고 부탁한다. 피터팬은 그림자를 찾아 달라고 사정한다. 영리한 소녀 벨은 책을 찾아 달라고 요구한다. 재투성이 소녀 신데렐라는 바늘과 실을 찾아 달라고 한다. 미션이 성공하면 보상이 주어지고 경험치와 레벨이 올라간다. 그러면 숨겨진 기념품이나 이벤트에 가까워질 확률도 높아진다. 게임 개발자의 한 사람으로 그는 예상을 뛰어넘는 방대한 맵의 구현에 감탄했다.  서부 개척 시대 모험의 공간 ‘프런티어랜드’, 미래와 약속의 땅 ‘투머로우랜드’, 경이로운 자연 공간 ‘어드벤쳐랜드’, 환상적 설화와 행복 전설의 왕국 ‘판타지랜드’ 등 실제 미국 애너하임에 있는 디즈니랜드처럼 일곱 개의 '랜드'를 그대로 옮겨왔음에도 비교적 안정감 있게 장면 전환이 이루어지는 부분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 아빠, 아빠, 미키다!
  아키코가 소리를 질렀다.
- 그래, 아키코. 미키로구나.
  그는 그렇게 대꾸했다. 당장은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미키 마우스를 보고 달려갔다. 아키코가. 아니 정확히는 아키코의 아바타가 말이다. 아이는 신기하다는 표정이었다. 좌우로 움직여보았다. 손을 들어보기도 했고 다리를 벌려보기도 했다. 아키코의 아바타는 화면 안에서 거의 똑같이 움직였다. 어린 아이답게 의아해하면서도 또 이내 적응도 잘 했다. 많아야 두세 번의 시행 착오만 필요할 뿐이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금방 자신이 뭘 해야하는지를 알았고, 또 뭘 할 필요가 없는지를 알았다. 말 그대로 본능적이었다. 예컨대 씩씩하게 팔을 흔들어야 함을 알았다. 정말로 앞으로 뛰어갈 필요는 없음도 알았다. 그저 제자리에서 걷는 시늉만해도 화면 안의 아키코의 아바타는 무난하고 충분하게 앞으로 걸어갔다. 미키 마우스가 보였다. 점점 더 가까워졌다. 그 뒤로 성이 보였다. 그 유명한 잠자는 숲속의 공주의 성(Sleeping Beauty Castle)이다.

  미키 마우스가 손을 흔들며 어린 방문객을 맞아주었다.
- 디즈니랜드에 온 것을 환영해!
  아키코가 발을 구르며 소리를 지르자 작고 오래된 집이 흔들렸다. 그 애는 (화면 속 그 애의 아바타는) 미키 마우스와 포옹했고, 춤을 추었으며, 헤어질 때 사인까지 받았다. 마법 같은 모험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총 35명의 디즈니 캐릭터들이 그 애를 기다리고 있었다. 힘차게 팔을 흔들었다. 걸음을 내딛었다. 아키코는 화면 속의 자신을 주시하였고 그는 화면 밖의 아키코를 지켜보았다. 키넥트 센서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 아무리 신경쓰지 않으려고 해도 그는 딸의 미묘하게 부자연스러운 걸음이 거슬렸다. 여전히 마음이 아팠다. 아키코의 게임 속 아바타는 절뚝거리지 않았다. 아바타는 아키코와 비슷한 또래의 귀여운 소녀였다. 아키코는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가졌다. 아바타는 금발 머리와 바다색 눈동자를 가졌다. 아키코는 검은색 나이키 운동복을 입었고 맨발이었다. 아바타는 얼룩말 무늬 줄무니 티셔츠와 카고 바지를 입었고 밤색 컨버스를 신었다.

  그는 길고 딱딱한 의자에 엉덩이만 걸치고 앉아 아키코와 아바타와 주의 깊게 지켜보았다. 아키코가 절뚝거리며 걸어도 아바타는 절뚝거리지 않았다. 아키코는 자기 행동을 보지 못했다. 자기 행동을 따라하는 텔레비젼 화면 속 아바타의 모습만 볼 수 있었다.

  아바타는 다리를 절지 않았다.
  아키코는 곧 아바타였다. 절뚝거렸으나 절뚝거리지 않았다.
  아바타는 '정상적'으로 디즈니랜드를 활보했다. 뛰어다녔다.
  아바타는 곧 아키코였다. 아키코가 곧 아바타이기도 했다.

  디즈니랜드는 쥐와 오리와 개로 구성된 '동물의 왕국'이지만 이 곳만큼은 그 애에게 안전했다. 누구도 그 아이의 다름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오래간만에 보는 딸애의 생기 넘치는 모습에 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냉장고에서 캔 맥주를 꺼내오다가 말고 그는 벽에 걸린 가족 사진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키코가 두 살 때 아내와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그는 아내의 사진을 향해 의기 양양하게 캔 뚜껑을 들어올렸다. '차악'하는 소리와 함께 맥주 거품이 올라왔다. 아내의 사진은 이번에도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


(미키 마우스 등장)

미키: 정답고 사랑스러운 우리 친구야. 
다시 만나니 더할 나위 없이 반갑구나. 하-하-.

(마치 드레스를 입은 것처럼, 아키코는 양손으로 끝자락을 살포시 들어올리며 인사를 건넨다)

미키: 어려운 부탁을 하나 있는데 혹시 들어줄 수 있을까? 하-하-.

(고개를 갸웃거리는 아키코)

미키: 내 여자친구가 미니 마우스인 건 알지? 하-하-.

(고개를 끄덕이는 아키코)

미키: 이 꽃다발을 전해줘. 오늘이 우리의 90주년 기념일이거든. 하-하-.

(작은 손가락으로 미키를 가리키는 아키코)

미키: 물론 이 몸이 직접 간다면 가장 좋겠지. 그런데 여기서 우리 친구들을 맞아야 하는 것이 내가 맡은 일이라 자리를 비울 수 없어서 그래. 하-하-.

(고개를 끄덕이는 아키코)

오른쪽 화면 상단에 작은 알림창이 나타난다.


[새로운 미션: 내 사랑에게 전해주오]

 

*

 

   아키코는 ‘판타지랜드’로 향했다. ‘심성이 고운 아이라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을 거야’ 라고 그는 생각했다. 꽃다발에서 잘게 바스라져 떨어져 나온 잎사귀가 별처럼 흩날렸다. 포니 테일로 묶은 금발 머리도 찰랑거렸다. 아니, 그 금발 머리는 아키코의 것이 아니다. 에밀리의 것이다. 

  에밀리는 아키코의 아바타에게 그가 붙여준 이름이었다. 화면 속의 에밀리는 이제 얼룩말 무늬 티셔츠에 베이지색 반바지, 그리고 무릎까지 올라오는 하얗고 긴 양말과 검은색 나이키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한결 활동적으로 보였다. 에밀리의 금발은 매일 빗겨주고 싶을 정도로 탐스러웠고 생기 넘쳤다. 그는 만족스러웠다. 보란 듯이 아내에게 자랑을 하고 싶어졌다. 우리 딸에게도 친구가 생겼다고. 그것도 아주 예쁘고 사랑스러운 친구가.

  사실 그는 매일 아침 딸의 머리를 빗겨주어야 했는데 결과는 대개 신통치 않았다. 알맞게 익은 작은 메론만한 아이의 머리를 안고 나름 최선을 다하여 이리로 저리로 빗을 놀려 보았으나 아직까지도 이 숭고한 작업이 어색하다. 한번은 아키코가 머리를 땋아달라고 했는데, 그는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유투브에서 동영상을 찾아 몇 번을 돌려 보았지만 도저히 그 과정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기울기 센서를 연구하고 모션 트래킹에 관련된 논문을 읽는 것보다 딸의 머리를 땋아주는 것이 그에게는 더 힘든 일이었다.

  딸에게 머리 손질을 가르치는 건 대개는 엄마의 몫이기 마련이다. 그의 아내도 이 일을 아주 잘했다. 사실 그녀는 뭐든지 잘했다. 적어도 그가 생각하기에는 그랬다. 아내는 영국인 어머니와 일본인 아버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물론 그는 항상 궁금해했다. 어째서 장모가 1970년대에 장인과 같은 전근대적 사고방식을 가진 동양남자와 결혼하려고 했는지 말이다. 몇 번인가 아내의 가족 앨범을 들여다 볼 기회가 있었다. 키도 작고 나뭇가지처럼 초라한 검은 머리 청년과 하얀 피부 파란 눈의 금발 아가씨가 다정히 팔짱을 끼고 있는 낡은 흑백 사진을 보았다. 촌스러운 감색 정장과 세련된 파티 드레스의 극적인 차이가 사진을 보다 우스꽝스럽게 만들었다. 솔직히 장인은 성마르고 신경질적이고 볼품이 없게 생겼다. 언젠가 아내가 들려 준 설명에 따르면 장모의 집안은 귀족 가문이었는데, 부모가 큰 반대를 했음에도 모든 걸 다 버리고 건너왔다고 했다. 무슨 고약한 일본식 판타지나 삼류 성인용 만화에나 나올만한 스토리라고 그는 생각했다. 한 술 더 떠서 장인은 도피의 낭만을 만끽하기 위해 연인에게 성을 지어줌으로써 화답했다고 들었다. 조금 낡기는 했지만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처가에 대대로 내려온다는 작은 섬에 가면 주위 경관과 하나도 어울리지 않는 빅토리아 시대 스타일의 고성을 하나 발견할 수 있다.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지 섬에 도착하는 즉시 어색함에 몸서리가 쳐질 정도이다. 성은 그에게 부조리극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었고 그의 아내에게는 안전가옥과 같은 공간이었다. 결혼 생활이 위기에 봉착할 때마다 아내는 샘소나이트 가방을 끌고 빅토리아풍 고성 깊숙한 곳으로 몸을 숨겼다. 비단 이번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제까지 항상 그래왔다. 

  그는 아내와 오사카 대학 캠퍼스에서 만났다. 그는 공학부 3학년이었고 아내는 문학부 2학년으로 고전 영문학 전공을 희망했다 (장모 역시 고전 영문학을 전공했음을 고려하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아내의 이국적인 외모에 반했다. 그녀의 눈동자는 일본의 유전자들로는 조합될 수 없는 바다색 빛깔을 띠고 있었다. 머리칼도 완전히 까맣지 않았다. 봄이나 가을의 강한 햇살을 반사할 때면 묘한 갈색빛이 돌았는데 그건 염색으로 만들어 낼 수 없는 색깔이었다. 연탄색 머리칼의 아가씨들 사이에서 그녀는 도드라지게 눈에 띄였다. 그는 그 만남이 운명적인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고 보니, 에밀리……. 그러니까 아키코의 아바타인 게임 속 저 아이도 아내와 같은 색의 바다색 눈동자를 가졌다. 아차,

  이제야 그는 아키코가 완전히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니 마우스는 ‘판타지랜드’에 살지 않았다. 힌트 화살표를 보면 알 수 있었다. 물론 굳이 그런 것이 없어도 어른들이라면 대강 눈치 챌 수 있다. 미니 마우스는 미키의 사람이다. 미키와 같은 랜드 안에 그것도 상당히 가까운 곳에 있을 것이다. 핑크색 땡땡이 리본을 묶고 크고 둥그런 구두 위에 올라 미키의 선물을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마찬가지로 구피와 플루토 그리고 도날드 덕도 미키의 사람들이니 모두 ‘미키타운’에 모여 있을 것이다. 반면 ‘판타지랜드’는 동화 속 공주님들의 영역이다. 백설공주, 신데렐라, 인어공주 아리엘, 미녀 벨 등 20세기를 풍미하였던 장편 애니메이션  주인공들의 공간이다. 한편 ‘투모로우랜드’는 우디와 버즈 같은 3D 픽사 캐릭터들의 자리다. 어쩌면 이 안에도 그룹이 있는 것이다. 우리 팀과 너희 팀. 내 사람과 남의 사람. 어른들은 이런 종류의 직관에 강하다. 아이들은 모른다. 아키코는 미키 타운이 아닌 성의 안쪽으로 ‘판타지랜드’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성을 둘러싼 빛나고 신기한 것들이 그 애를 유혹했다. 그는 고민했다. 개입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결국 개입하지 않기로 마음 먹은 까닭은 아내 때문이었다. 아키코 혼자 해낼 수 있단 사실을, 이 비디오 게임이 그 애에게 도움이 될 거란 자신의 판단이 보란듯이 증명해보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애초에 아키코에게 ‘키넥트’를 선물한 이유도 잊고 기도했다. 그 방향이 아니라고. 반짝이는 힌트 화살표를 따라가라고. 제발 미키 마우스가 부탁한 일부터 먼저 마무리하라고.

 

*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 닌텐도의 ‘위’를 위해 게임을 개발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지난 3년 동안 그는 마이크로소프트의 ‘키넥트’를 백 번은 분해해보았던 것 같다.  물론 닌텐도라고 동작 인식 아이디어를 구현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상품화에는 먼저 성공했다. 상업적으로도 크게 성공했다. 가정용 콘솔의 역사를 바꾸었을 뿐만이 아니라 ‘닌텐도 64’와 ‘게임큐브’를 시원하게 말아먹으며 한때 쇠락기로 접어드는 듯 하였던 닌텐도 또한 극적으로 부활시켰다.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위'의 대표작인 <위 스포츠>는 역사를 바꾼 게임 중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의 돌풍은 설명 못할 찜찜함을 남기기도 했다. 결국에는 동작 인식이 아닌 리모콘 모양의 센서(이름하여 '위모콘')를 쥐고 노는 것일 뿐이라는 한계. 결국은 기울기 센서와 가속 센서의 가볍고 의미없는 장난이었을 뿐이었다. 게임 개발자이나 엔지니어로서 그는 그 이상을 원했다. 사용자의 동작을 정교하게 트래킹하고 싶어했다. 비디오 게임의 도구이나 비디오 게임기 이상의 활용 가능성을 품고 있기를 바랐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런 부분에서 닌텐도 고위층의 의견은 그와 다른 듯 했다. 아마도 그들은 '위모콘'만 실컷 팔아먹은 다음에 (그 조악한 장난감의 가격이 얼만지 아는가? 자그마치 개당 3,500엔이다) 거짓말처럼 다시 보수적으로 변하지 않았을까 싶다. 쇼파에서 일어서기 위해 '위'를 구입했던 사람들이 다시금 쇼파에 몸을 파묻고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나 하길 바랐다는 우습지 않은가? 그들로서는 손해 볼 것이 없는 장사기는 했다. 이미 금세기들어 가장 많이 팔린 게임기가 되었기 때문이었으니까. 그는 닌텐도의 적당주의를 혐오했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태도에는 서양의 유전자를 동경하는 기질이 깔려 있었다. 좀 지나치다는 주위의 시선도 있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과학이나 공학을 하는 이라면 누구라도 서양식 합리성을 동경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생각하며.

 

*

 

   아키코는 ‘판타지 랜드’에서 미니 마우스를 찾아내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다. 거기 없으니!). 부자연스러운 동작으로 걷고 또 뛰었지만 없는 미니 마우스를 찾을 재간은 없었다. 그리고 이내 새로운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동화 속 공주님들과 어울려 춤추고 노는 동안 미키 마우스의 부탁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아키코의 (아니, 화면 속 에밀리의) 오른손에 들려있는 꽃다발에 자꾸 눈길이 갔다. 마음이 불안해져 왔다.

  물론 그 애를 탓할 일만은 아니었다. 공주님들의 요청은 바로 눈 앞에 있었고 미션은 그물처럼 엮여 있었다. 처음엔 급한 부탁만 들어주려고 했을테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재투성이 신데렐라는 바늘을 찾아 달라고 했다. 계모가 시킨 바느질을 시간 안에 다 마쳐야 했기 때문이다. 재투성이지만 아름다운 그녀를 돕기 위해 아키코는 팔을 앞뒤로 힘차게 흔들고 제자리에서 발을 굴렀다. 에밀리는 달렸다. 그러다 벨을 만났다. '미녀와 야수'의 그 총명한 아가씨 말이다. 그녀는 책을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아키코는 금방 또 신데렐라의 부탁을 잊어버린 채 벨의 부탁에만 집중했다. 아이라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조금 기억력이 떨어지는 것인지 모르겠다. 책을 찾아다니는 그 애의 앞에 잠자는 숲속의 공주가 나타났다. 파티 케이크를 만드려는 공주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밀가루였다. 아키코는 또 밀가루를 찾아 나섰다. 밀가루보다 인어공주 아리엘이 먼저 눈에 띄였다. 바다 냄새를 품은 비늘꼬리를 살랑 거리며 아리엘은 조개 목걸이를 잃어버렸다고 말했다. 아키코는 만사 제쳐두고 조개 목걸이를 찾으러 오던 길을 되돌아갔다. 목구멍이 간지러웠다. 아내의 비웃음이 들리는 것 같았다.

  '아가야, 욕심 내지 말고! 한 번에 하나씩!'

  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딸의 놀이였고 이미 그가 끼어들 자리는 없었다. 작고 불편한 다리로 아키코는 이리로 뛰었고 저리로 뛰었다. 화면 속 금발의 애밀리도 그 애와 동작을 같이 했다 (훨씬 더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맵은 너무 넓었고 아이들은 점점 더 목적지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때 말렸어야 하지 않았을까? ‘어드벤쳐랜드’로 돌아간 아키코가 순서없고 계획없이 ‘판타지랜드’를 뛰어다니다가 결국 다시 ‘미키타운’으로 돌아왔을 때. 어른의 직감으로 그는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파랗게 맑은 하늘은 사라지고 짙은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날카로운 바람의 연주에서 불길한 기운이 느껴졌다. 이미 디즈니랜드의 방문객들은 앞서거니 뒷서거니 정문을 찾아 내달리는 중이었다. 도망치는 것처럼 보였다. 아키코도 뛰었다. 에밀리도 뛰었다. 바닥이 울리는 소리를 들으며 그는 박자가 참 묘하다는 생각을 했다. 여전히 아이는 부자연스럽게 뛰고 있었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이는 금방 젖었다. 머리에서 어깨로, 어깨에서 다시 팔을 타고 흘러 내려간 물은 꽃다발을 흥건하게 적시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크고 축축한 낙엽이 날아와 에밀리의 뺨에 붙었다. 낙엽을 떼어주었다.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닦아주었다. 이러다 감기 걸리겠어. 흠뻑 젖어 늘어 붙은 머리칼을 쓸어 넘겨주고 노란색 비옷을 입혔다. 

  그때 누군가 터벅터벅 걸어왔다. 커다란 발이 물웅덩이를 밟을 때마다 철퍽철퍽 물 튀기는 소리가 났다. 크고 통통한 귀가 멀리서도 보였다. 미키 마우스였다. 미키는 나뭇가지 같은 팔과 이상하리만치 큰 손을 움직여가며 뭔가 열심히 설명을 했다. 아마도 꽃다발을 미니 마우스에게 전해주었냐는 이야기일 것이다. 아키코가, 그러니까 에밀리가, 아니 에밀리가 힘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화면 밖 아키코는 빈 오른손을 들어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화면 안 에밀리는 오른손을 들어 꽃다발을 쳐다보았다. 화면 밖 아키코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화면 안 에밀리도 함께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아빠, 나 어떻게 하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


  쏟아지는 비가 아이들과 미키 마우스를 적신다. 얼음처럼 차갑고 유난하게 무거운 느낌이 드는 비다. 저 멀리 카드 병정처럼 정렬한 가로등들이 불안하게 깜빡거린다. 더러는 초록에 가까워진 빛이며 더러는 보라에 가까워진 빛이다. 어느 쪽이라고 하더라도 안도의 느낌과는 거리가 멀다. 하늘 가득 몰려온 짙은 먹구름은 그 불길함을 거울처럼 반사한다.

미키:  꽃다발은? 미니에게 전해줬어? 하-하-.
(특유의 ‘하-하-‘는 힘이 하나도 없어 마치 하품소리처럼 들린다.)

(대답을 망설이는 아키코/에밀리. 미키는 짐작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구피 등장)

구피: 대장? 여기 계셔유, 으흐-흑.

미키: 내 꼴을 보라지. 마치 물에 빠진 새앙쥐와 같구나. 저 꽃다발을 보라. 닿아야 할 곳에 닿지 못한 초라한 난파선과도 같이 볼품 없구나. 이제 어쩌면 좋단 말인가! 하-하-.

구피: 방법이 있을 거유. 너무 걱정하지 마슈, 으흐-흑.

미키: 애초에 남의 손에 맡긴 내가 잘못이다. 누굴 탓하겠느냐. 내 탓이다. 나도 미처 알지 못하는 잘못을 저지른 내 손의 탓이다. 구피, 칼을 뽑아라. 내 크고 통통한 손을 당근 썰듯 싹뚝 베어버려라. 도무지 용서가 안되는 구나. 하-하.

(명령에 따라 칼을 뽑는 구피. 이때 도날드 덕 등장)

도날드 덕: 구피, 칼을 치워라. 도대체 무슨 짓을, 꽥-꽥-.

구피: 대장이 시켰슈. 난 시킨대로 하려 했을 뿐이유, 으흐-흑.

도날드 덕: 대장, 제발 그러지 마시오. 지금 이럴 때가 아니오, 꽥-꽥-.

미키: 무슨 소리냐. 이 참담한 배달 사고보다 내 마음을 더 후벼팔 일이 또 남았단 말이냐. 오! 신이시여! 이럴 바에야 제 마음을 모두 거두어 가주옵소서. 차라리 남지 않으면 다칠 마음도 없으리니, 하-하-.

도날드 덕: 대장이 선물했던 증기선 모양의 브로치를 기억하시오? 꽥-꽥-.

미키: 잊을리가. 서약의 증표로 미니에게 주었던 마우스 가문 대대로 내려 온 브로치 아니냐. 하-하-.

(고개를 끄덕이는 도날드 덕)

도날드 덕: 그 브로치를 버즈 라이트이어가 갖고 있는 것을 보았소, 꽥-꽥-.

미키: 그게 사실이냐? 

도날드 덕: 이런 말을 해서 유감이오. 대장. 하지만 맹세코 진실이오, 꽥-꽥-.

(입술을 깨무는 미키)

미키: 달콤한 적의가 내 피를 타고 들끓는구나. 피! 피! 피! 피를 보고 말리라! 하-하.


  화살 같은 비는 점점 더 거세어진다. 미키와 친구들이 인쇄되어 있는 미키타운의 낡은 테이블은 이미 물로 흥건하다. 커다란 머리가 천천히 위 아래로 움직였다. 커다란 귀에서 물방울이 스며나와 복스러운 뺨을 타고 흘렀다. 아키코가 그를 돌아본다. 화면 속 에밀리도 그를 돌아본다. 

아키코/에밀리” 아빠, 이게 무슨 뜻이야?
  
  알아도 말해줄 수 없는 게 있다. 산타클로스의 진실처럼. 히쿠힌칸 장난감 백화점처럼.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셔츠가 축축하다. 비 때문인지 땀 때문인지 알 수가 없다. 그는 아키코의 큰 눈과 에밀리의 더 큰 눈과 미키 마우스의 훨씬 더 큰 눈을 번갈아 바라본다.  끈질기게 그들 모두를 주시하는 키넥트 센서의 눈에서도 해답을 찾으려고 해본다. 해답. 그래, 맞아. 아내는 언제나 답을 알고 있었다. 벽에 걸린 가족 사진 쪽으로 그의 시선이 흘러간다. 액자 속 아내의 눈이 반짝 빛난다. 마치 귀에 대고 속삭이는 듯한 아내의 목소리는 분명 조롱에 가깝다.

 

*



  오! 앨리스. 그녀는  정말 사랑스러운 미소를 가졌었지.

  2004년 여름. 닌텐도와 그의 회사의 산지 부사장이 새로운 계약을 위해 논의하던 그 해였다. 이 회사에 합류하기 전 부사장은 일본 코카콜라에서 일했고 캔커피 브랜드 '조지아'의 성공에 혁혁한 공을 세웠던 것으로 알려졌다. 워낙에 전투적인 남자라 '캔커피를 팔다가 비디오 게임?'라는 세간의 우려를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는 혁신을 거부하는 오래 묵은 임원들을 몰아내고 참신하고 아이디어 넘치는 사람들을 외부에서 수혈해왔다. 마이크로소프트 산하의 블루유니콘 스튜디오에서 스카우트해 온 앨리스 로먼도 그 중의 하나였다. 영국 출신의 그녀는 서른 일곱 살이었고 게임 개발자가 아닌 로봇 공학자였다. 사람처럼 움직이는 기계를 만드는 일보다는 사람의 동작을 기계가 인식하게 하는 일에 더 관심을 보였던 그녀는 당시 비디오 게임 업계의 화두와 잘 맞아 떨어져 자연스럽게 그녀가 게임 산업에 발을 들여 놓게 되는 계기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 산지 부사장은 결점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이런 부분에서 정확한 판단을 내릴 줄 알았다. 유저의 동작을 센싱하는 것이 비디오 게임 업계의 화두라면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사람들도 하드웨어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고. 그것이 앨리스가 합류하게 된 배경이었다.

  앨리스는 똑똑하고 재치있었다. 또한 자기 일을 할 줄 알았다. 앨리스의 스카웃을 위해서 상당한 공을 들였다는 소문이 있었다. 앨리스는 그의 직속 상관이었다. 어린 서양 여성을 윗사람으로 대접해야 하는 상황에 많은 팀원들이 거부감을 가졌지만 그만큼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팀을 이탈했다. 점점 새로운 얼굴로 채워져 일 년이 지난 후에는 심지어 완전히 다른 팀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 와중에도 그와 앨리스는 꾸준히 좋은 팀이었다. 일에 대한 철학 뿐만이 아니라 여러 모로 잘 맞았다.

  변화는 항상 반발을 부르기 마련이다. 산지 부사장도 그랬다. 시간이 흐르며 회사 내에는 은밀하게 파벌이 생겼다. 안정과 전통을 중시하는 히토 부사장을 중심으로 반개혁적 인사들이 결집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원하는 것은  더 좋은 동작 인식 게임을 닌텐도에 공급하는 것이 아니라 적당히 팔릴만한 파티 게임으로 빨리 찍어내어 닌텐도의 환심을 사는 것이었다. 동작 인식 프로젝트의 성과가 빨리 나오지 않으면서 갈등이 하루 하루 소리없이 치열해졌다. 회사의 방향도 그에 따라 휘청거렸다. 하루는 산지 부사장에게 무게가 실렸다가 다음 날에는 또 바로 히토 부사장에게 칼 자루가 넘어가는 식이었다. 그러다 보니 산지 부사장이 끌어온 외국인 직원들의 존재는 아주 좋은 분쟁의 재료였다. 특히 '쓸떼없이 돈만 잡아먹는' 동작 인식 개발팀를 지휘하는 앨리스는 적들의 프라이머리 타겟으로 수시로 도마 위에 올랐다. 앨리스에게는 정말 힘겨운 나날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에게 일본에 온 걸 후회하고 있다는 속내를 털어 놓았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는 앨리스를 측은하게 여겼다. 앨리스 또한 그에게 의지했다. 말도 통하지 않고 아는 이 없는 외딴 섬나라에서 그녀는 자신이 믿어야 할 사람으로 그를 택했다. 사실 그 밖에 없었다. 오직 그만이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의 옆자리를 지켜주었기 때문이었다. 처음 앨리스가 어깨에 기대었을 때 그는 가만히 그녀의 탐스러운 금발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모든 일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래서는 안 될 일이지만, 그는 그것이 불륜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주 어렸을 적부터, 그러니까 성인으로의 관념이나 의식이 올곧이 자리 잡기 전부터 숭배해왔던 초월적인 대상과 정신적인 교감을 나누고 있는 것이라고 느꼈을 뿐이다.

  브로치. 브로치만 실수로 선물하지 않았어도.

  그와 아내의 사이는 아주 좋지도 아주 나쁘지도 않았다. 서로 맞는 부분이 있었고 서로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세상 모든 부부들과 마찬가지로 그냥 인정한 채 함께 살았을 뿐이다. 다만 막연하게나마 해피엔딩이 없으리라는 생각을 처음부터 갖고 있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설명할 수는 없었다. 단지 아내와 나란히 같이 서서히 늙어가는 그림을 그려볼 수 없을 뿐이었다. 그는 그의 인생을 5막으로 이루어진 연극에 비유하길 좋아했는데, 그 비유를 적용하자면 아내는 2막이나 3막에 등장할 수는 있어도 절대로 4막 이후에 등장할 것 같지 않은 인물이었다. 처음 운명적으로 그녀의 눈동자 빛깔에 반하던 순간부터 그런 희미한 예감은 있었다.

 

*



  점점 더 세차게 비가 쏟아진다. 세상의 모든 빛을 덮어버리기라도 할 듯 먹구름은 점점 더 짙게 모여든다. 이제 우산은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그들은 ‘투모로우랜드’로 향하는 길이다. 화가 단단히 난 미키 마우스는 크고 우스꽝스러운 발을 철퍽거리며 걷는다. 좌우에는 결연한 표정의 도널드 덕과 구피가 따른다. 데이지 덕도 합류했다.  ‘센세이셔널 식스’ 중에 미니 마우스와 플루토만 빠졌는데 플루토는 앞서 정찰을 하고 돌아오는 길이다. 아키코는 앞뒤로 팔을 흔든다. 무릎을 들었다 내린다. 키넥트의 눈이 반짝거린다. 아키코도 걷고, 에밀리도 걷고, 그도 걷는다. 그의 걸음은 자연스러웠고 아키코의 걸음도 자연스러웠지만 에밀리는 한 쪽 다리를 살짝 절고 있다. 아주 살짝이지만 그의 눈에는 보인다. 키넥트의 눈에도 보인다. 안타까우면서도 한편으로는 화가 난다. 아키코의 아바타 에밀리가 그 사실을 알게 될까봐 조마조마하다. 마지막 하나 남은 친구마저도 딸아이를 '절름발이'라고 놀리는 것을 그는 원하지 않는다. 

(이를 부드득 갈아대는 미키)

미키 마우스: 오! 그 놈의 목숨이 수만개였으면 좋겠구나. 내 복수를 하기에는 하나로는 너무 부족하구나. 그 자의 머리카락 하나 하나가 다 목숨을 지녔다고 하더라도 내 복수심을 채워지지가 않아. 하-하.

도날드 덕: 염려 마십시오, 대장. 놈은 그 하나의 목숨을 잃은 다음에야 뼈 저리게 깨달을 것입니다. 차라리 개로 태어나길 바랄만큼 후회가 막심할 것입니다. 꽥-꽥-.

(도날드 덕을 흘겨보는 구피)

구피: 도대체 개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애꿎은 개를 들먹이고 그러유, 으흐-흑.

(플루토가 나타나 혀를 내밀며 컹컹 짖고 깡총깡총 뛰어다닌다. 마치 그 말에 동의하는 듯이.)

구피: 대장, 플루토가 정찰하고 왔다고 해유. 투머로우에서 우리가 간다는 소식을 듣고 애들을 끌어 모아 싸움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해유, 으흐-흑.

(미키 마우스가 길게 탄식한다)

미키 마우스: 그들은 부끄러움도 모른단 말이냐? 고결하고 명예로운 한 사내의 이마에 뿔이 나게 한 것으로도 모자라 부정한 것들을 감싸고 돈단 말인가? 만약 구피와 보안관 우디의 애인 제시가 서로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탐한다면 저들은 순순히 용납할 수 있단 말인가? 다들 미쳤구나. 하-하.

데이지 덕: 대장, 그간 굳이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만 투머로우 애들의 안하무인격 태도가 최근 말도 못할 정도였어용, 꽥-꽥-.

미키 마우스: 그건 또 무슨 말이냐. 이미 내 마음은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 불바다의 심연 속에 있거늘 내게 얼마나 더 큰 고통을 안기려는 것이냐……. 아니다. 계속 말해라. 달콤한 거짓보다는 쓰디쓴 진실이 나으니. 하-하.

데이지 덕: 거의 디즈니랜드의 주인 행세를 하고 있어용. ‘투머로우랜드’의 방문자 수가 ‘미키타운’보다 3배쯤 많다는 말을 공공연히 하고 다녀용. 영화도 잘되고 주요 어트랙션도 자기들에게 있으니 기고만장하는 거지용. 문제는 그러면서 은근히 대장과 우리들을 한물 간 것처럼 깎아내리는데 있어용, 꽥-꽥-.

미키 마우스: 아! 단지 내 사랑의 정조와 순결만 걸린 문제가 아니라 우리 ‘미키타운'과 ‘미키 유니버스’ 그리고 ‘센세이셔널 식스’의 명예가 걸렸구나. 어서 가자! 마음이 급하구나! 오늘 밤은 내가 아주 일어서든가 아주 파멸하든가 하는 밤이다. 하-하.

  미키와 친구들이 속도를 낸다. 에밀리의 걸음에 뒤쳐지지 않도록 아키코는 힘차게 팔을 흔든다. 행여라도 두 아이를 놓치는 일이 없도록 그도 열심히 팔을 흔든다. 그러나 그는 이미 충분히 지쳐 있다. 젖은 몸은 천근 만근 무거워진다. 결국 발이 엉켜 넘어지고 만다. 혀를 끌끌 차며 다시 일어선다. 에밀리가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다. 아키코도 보이지 않는다. 미키와 친구들도 마찬가지다. 그 순간 저 멀리 폐허나 다름없는 모습의 ‘투모로우랜드’가 보인다. 

 

*


  나는 이미 충분히 지쳐 있어요,

라고 앨리스는 털어놓았다. 가을이었고 그들은 프린스 호텔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석 중이었다. 행사는 수요일에 시작해서 금요일 오후에 끝났다. 회사로 돌아갈 이유는 없었다. 그 다음 주 월요일까지는 말이었다. 그는 이미 집에다가 일요일까지 출장이라고 말해둔 참이었다. 싱글인데다 홀로 이국에서 생활 중인 앨리스는 그런 계획을 알려야 할 곳조차 없었다.  다른 직원들은 교토행 기차를 탔다. 그는 동료들에게 도쿄의 친척을 만나러 간다는 거짓말을 했다. 앨리스는 외국인이었다. 그런 거짓말조차 필요하지 않았다. 그와 앨리스는 프린스 호텔의 로비에서 다시 만났다. 그는 앨리스가 안타까웠다. 그간 시달려 온 적지 않은 압박과 스트레스가 그대로 얼굴에 묻어났다. 일 년 사이에 5 킬로그램을 빠졌을 것이다. 겉으로 보았을 때보다 품에 안아보았을 때 그 수척함은 보다 분명하게 다가왔다. 옅은 장미향이 스며왔다. 그는 그 향기의 분자를 조금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앨리스는 더욱 더 세게 끌어안았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그리고 그래서는 안되는 일이지만, 그는 그 관계가 사람들이 말하는 '불륜'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조금도 인식하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 나란히 침대 위의 아침식사를 즐긴 그와 앨리스는 도쿄 인근의 디즈니랜드로 향했다. 앨리스는 영국에서 태어났지만 네 살 때부터 캐나다에서 자랐다. 그녀는 애너하임의 디즈니랜드는 물론 올랜도의 매직 킹덤, 심지어 파리와 홍콩의 디즈니랜드까지 모두 섭렵해온 몸이었다. 도쿄 디즈니랜드만이 전 세계에서 그녀가 가보지 못한 유일한 디즈니 테마파크였다.  일요일에는 교토로 돌아가야 하는 그들은 6,200엔짜리 성인용 원 데이 패스포트를 끊었다.
- 세계에서 월트 디즈니가 소유하고 있지 않은 디즈니랜드가 여기 뿐인 걸 알아요?
  그녀는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 그럼 여기는 어떻게 운영되는 건가요?
- 일본 회사가 라이센스를 취득해서 운영하는 거죠.
  그녀는 웃을듯 말듯한 표정으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 뭐랄까…… 참 이상해요. 분명 애너하임이나 올랜도에서 봤던 것들이 옮겨져 있는데 같은 디즈니랜드 같단 생각이 안 들어요.
  그건 그렇죠. 그는 그렇게 이야기하려다 말았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런 부분이 있었다. 그가 생각하는 그의 조국은 흉내내는데는 일가견이 있지만 정작 그 동경의 원천이 되는 것은 영원히 갖지 못하는 저주에 걸린 나라였으니까. 
 
  처음 앨리스가 닌텐도로 출근하던 날을 그는 기억한다. 막 책상 위에 짐을 풀기 시작한 젊은데다가 서양인인데다가 여성이기까지 한 상관의 책상 위에는 <토이 스토리>의 버즈 라이트이어 피규어가 놓여 있었다. 일본식 직장문화에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그는 상사의 빈 방에 들어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것을 집어 멀뚱히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그의 뒤로 조용히 다가와 이런 말을 했었다.
- 기왕에 우리가 동작 인식이 가능한 게임을 만든다면 말이에요. 난 그 안에 애너하임의 디즈니랜드를 통째로 집어넣고 싶어요. 그 정도 스케일이 구현 가능해야 이 새로운 프로젝트가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그로부터 8년이 지난 지금. 그녀의 꿈을 구현할 수 있는 콘솔은 시장에 나와 있다. 그녀의 꿈 그 자체를 이루어낸 소프트웨어도 나와 있다. 다만 그녀가 일하던 회사가 아닌 다른 회사의 것들이라는 사실이 문제일 뿐이었다.

 

*


  ‘투모로우랜드’는 디즈니랜드에서 가장 미래적인 곳으로 스페이스 마운틴과 스타투어 등이 유명하다. 미키와 친구들은 ‘버즈 라이트이어 아스트로 블라스트’라는 이름의 어트랙션 앞에 모여있다. 아키코와 에밀리는 보이지 않는다. 미스터 포테이토 헤드, 슬링키, 햄, 렉스와 같은 장난감들이 어지럽게 난도질 당한 광장은 눈을 뜨고 보기 어려울 정도이다. 녹색의 장난감 병사들 중 하나도 살아남지 못했다. 미키와 친구들은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악마처럼 피칠갑을 하고 있다. 구피는 무릎을 굽히고 앉아 플루토의 부상을 살핀다.

미키 마우스: 나와라! 이 죽여서 지옥에 떨어뜨릴 것들아! 하-하-. 

(문이 열리고 버즈 라이트이어가 모습을 드러낸다. 조명이 모두 내려가 있는 광장은 어두워 윤곽만 간신히 보인다.)

미키 마우스: 미니는 어디있느냐! 정숙하지 못한 족제비 같은 것. 수치스러움을 안다면, 내게 속삭였던 사탕처럼 달콤한 말 가운데 단 하나라도 진심이었다면 당장 모습을 드러내어라. 하-하-. 

(미니 마우스는 나타나지 않는다. 버즈 라이트이어는 여전히 말이 없다.)

미키 마우스: 오! 보이느냐! 햇병아리보다 겁이 많은 저 우주비행사의 가슴에 반짝이는 브로치가 달려 있구나. 마우스 가문 대대로 내려오던 보물을 저리 쉽게 외간 남자에게 내어주는 그 행실이 소름 끼친다. 기아나 전쟁이나 사나운 파도가 무섭다 한들 이 보다 더 무서우랴.

(미키 마우스가 걸어 나가자 도날드 덕, 데이지 덕, 구피, 플루토가 따라 나선다.)

도날드 덕: 놈은 뒤를 돌아보고 있습니다, 대장. 우리에게 등을 지고 있어요. 꽥-꽥-.

미키 마우스: 우리를 우습게 보는 것이냐? 우리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겠다는 것이냐? 망설이지 말아라. 다들 찔러라. 놈의 뜨거운 피가 미니를 홀렸다면 그 피를 모두 빼내어 땅으로 쏟아내게 하자. 하-하-. 

  미키 마우스가 먼저 버즈의 우주복을 단도로 찌른다. 도날드 덕과 데이지 덕이 차례로 따라 찌른다. 구피가 합세하고 컹컹 짖는 플루토는 주위를 깡총거리며 뛰어다닌다. 하늘은 불길한 자주빚이다. 그는 쓰러지는 버즈 라이트이어의 모습을 본다. 그리고 플루토가 헬멧을 물어 벗겨내는 모습도 지켜본다. 이어지는 광경은 충격적이다. 미키 마우스는 절규한다. 나머지 친구들도 바닥에 주저앉는다. 문틈으로 야속하게 모습을 드러낸 달빛은 우주복 안에 있었던 미니 마우스의 얼굴을 비춘다. 바닥을 흥건하게 채운 것은 우주인이 아닌 미니의 뜨거운 피다. 

미키 마우스: 오!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인가! 오! 내 손으로! 오! 이 무슨 신들의 고약한 장난이란 말인가! 이는 달의 궤도 일탈 때문이다. 평소보다 달이 지구에 더 가까이 다가와서 인간들이 돌아버린 거야. 하-하-. 구피, 네 사촌 호레이쇼를 불러라. 이런 대참극의 목격자로는 그런 이름을 가진 자가 어울리겠구나. 하-하-. 

(미키의 친구들은 흐느낀다.)

  그는 마음이 급하다. 여전히 아키코와 아키코의 아바타 에밀리가 보이지 않았다. 거짓말처럼 아이들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


  도쿄 디즈니랜드라고 ‘판타지랜드’가 없을 리 없다. 그리고 그 안에도 어김없이 유명한 회전 목마가 있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 성 안쪽으로 피노키오의 고래 연못 바로 앞에 위치한 회전 목마다. 회전목마를 지나 연못을 돌아 길을 따라가다보면 아담한 집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 곳에 작은 거리가 있다. 앨리스의 골목이다. 여기서 앨리스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말하는 것이다. 운이 좋다면 이 근방에서 앨리스와 흰 토끼(화이트 래빗), 그리고 하트 여왕까지 모두 만나볼 수가 있다. 에밀리메이션 속 캐릭터들과 똑같은 차림을 하고 있지만 배우들은 당연히 일본인이었다. 머리색을 바꾸고 분장을 한다고 하더라도 근본적인 아시아인의 얼굴의 구조를 어찌할 수는 없었다. 그 어색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앨리스를 연기하는 배우는 어린 아이들에게 사탕을 나누어 주며 "흰 토끼가 어디있지?" 따위의 연기를 하는 중이었다. 그는 바로 그 앞에서 슬며시 자신의 상사이자 비밀스러운 연인인 앨리스의 손을 잡았다. 그녀를 웃게 만들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발한 농담이 생각났다.
- 앨리스, 지금 앨리스를 보고 있네요. 기분이 어때요?
  미소가 그녀의 얼굴로 떠오르려고 하는 순간에 그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아내였다. 좋은 분위기를 망가뜨린 벨 소리가 야속하기만 했다. 전화는 집에서 온 것이었다. 그의 아내였다.
- 아키코가, 아키코가, 아키코가…….
  아내는 울먹거렸다.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딸의 이름부터 나왔다는 사실이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 울지만 말고. 정확히 말을 해봐.

  그러나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하나도 없었다. 어린이 집, 친구들, 햄버거, 중앙병원과 같은 단어의 파편들이 어지럽게 휴대전화기에서 튀어나와 그의 귓바퀴를 타고 떠돌다가 사라졌다. 아키코에게 정확히 무슨 일이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좋은 일은 아닐 거라는 사실만 알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 다음부터는 그 스스로도 잘 기억하지 못하는 부분이다. 어찌되었든 주말의 일탈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중앙병원에 도착한 상태였다. 앨리스가 그를 부축하다시피 끌고 가던 것으로 볼 때 그녀의 차로 병원까지 달려왔던 게 아닌가 싶었다. 간호사에게 환자의 이름을 묻고 어떤 상태인지 물었으며 병동 혹은 수술실의 위치를 물었던 사람도 그녀였다. 
- 유감이에요. 하세가와 상. 아이가 어린이집 친구들과 놀다가 다쳤다고 하네요.
- 어쩌다가요? 괜찮다고 하나요?
- 수술을 해야 할 것 같다고 해요. 정말 유감이에요.
- 어디, 어디라고 하나요? 어디로 가야하나요?
- 3층이에요. 3층 7번 수술실. 부인 분도 거기 계실 거예요.
  그는 딸을 걱정하는 이외의 다른 구체적인 생각을 하지 못했다. 3층을 올라가 7번 수술실로 향하며, 마침내 저 멀리에서 아내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던 순간까지도 딸이 아닌 다른 문제의 발생 가능성을 조금도 예측하지 못했다. 아내는 지평선 저 너머에서 다가오는 배처럼 느리고 완만하게 그를 향해 다가오다가 갑자기 멈추었다. 퉁퉁 부은 눈으로 눈물 흘리기를 멈추었고 눈동자의 색이 사라졌다. 입술을 깨무는 것이 보였다. 그는 어리둥절했다. 멋도 모르고 아내에게 다가갔다. 아내는 뒷걸음질을 쳤다. 그제서야 그는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았고 옆의 앨리스도 돌아보게 되었다.

  분명했다. 그들은 업무 출장 중에 행사장에서 달려온 차림새가 아니었다. 그는 정장이 아닌 하얀색 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앨리스 역시 정장이 아닌 하늘색 원피스에 하얀색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무엇보다 목에는 도쿄디즈니랜드의 원 데이 패스포트가 불안하게 걸려있었다. 아뿔싸. 그러고보니 손등의 도장을 지울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는 문신처럼 새겨진 왼손 위의 미키 모양의 도장 자국을 오른손 뒤로 감추었다. 결정타는 브로치였다. 아내에게 선물했던 것과 똑같은 브랜드의 똑같은 모델 브로치. 매처럼 날카로운 아내의 눈은 그걸 놓치지 않았던 듯 했다.

  아내의 뒤로 회사 동료 몇몇이 따라 나왔다. 고맙게도 소식을 듣고 달려와 준 모양이었다. 사실 출장은 어제까지였노라고 그들이 말해주었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원망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 모든 게 오해일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고 싶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해명의 여지 또한 없어 보였다. 또 그리고 그 오해가 그냥 오해만은 아니기도 했다. 아내는 그에게 천천히 다가와 뺨을 때렸다. 그리고 그림처럼 방향을 틀어 앨리스의 뺨을 때렸다. 그 소리는 마치 이렇게 모든 것이 끝나게 되었음을 알리는 계시처럼 느껴졌다.

 

*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오렌지빛 석양이 거실로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아키코는 화면을 보고 걸었다. 화면 안에서 아키코의 아바타 에밀리도 걸었다. 앞으로 나아갔다. 혹은 배경이 뒤로 밀려 지나갔다. 그는 키넥트 센서의 렌즈를 보았다. 렌즈도 그를 보았다. 그건 뭐랄까, 눈이 마주치는 느낌이었다. 아키코가 말했다. 
- 아빠 힘들어.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에밀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혼란스러웠다. 동시에 졸리웁기도 했다. 딸애가 괜찮은 것인지 괜찮지 않은 것인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생각은 제자리를 맴돌았다. 아키코는 다리를 절지 않았다. 그런 것 같았다. 그래서 기뻤다. 미키 마우스가 아키코를 (혹은 아키코의 아바타 에밀리를) 꼬옥 안아주었다. 크고 탐스러운 귀가 팔랑거렸다. 
- 오! 얘야. 내 부탁 하나만 더 들어줄래?
  아키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생각했다. '참, 그 놈의 부탁. 많기도 많다.' 순간 아이가 동작을 멈추었다. 뒤를 돌아보았다. 쇼파에 누워있던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첫째는 그가 키넥트 센서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둘째는 그를 돌아 본 아키코가 아키코였으나 아키코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금발 머리에 바다색 눈동자를 가진 서양 여자아이. 에밀리. 어쩌면 앨리스? 그는 어지러움을 느꼈다. 아키코 혹은 에밀리가 말했다.
- 아빠, 나 기 빨려요.
  그렇지. 기가 빨리니까 기넥트인거지.


  어지러움은 더욱 심해졌다. 기넥트인가 키넥트인가? 아키코인가 에밀리인가? 그는 혼란스러웠다. 어린이집 사고가 있던 해에 아키코는 일곱 살이었다. 2005년이었으니 8년 전의 일이다. 그럼 지금 1998년생인 아키코는 열다섯 살이어야 계산이 맞았다. 그러나 그는 딸의 나이를 모를 정도로 무심한 사람이 아니었다. 지금, 아키코는 분명 일곱 살이다. 아이의 몸집이나 얼굴을 봐도 열 살을 넘었다기에는 너무 작고 어리다. 기억이 뒤죽박죽이었음을 느낀다. 그럼 그 일이 8년 전이 아니란 말인가? 그렇다면 몇 년 전인가? 화가 난 아내가 얼음보다 차가운 표정으로 빨간색 샘소나이트 가방에다가 짐을 챙겨 떠난 것은 또 몇 년 전의 일인가? 제발 딸을 보게 해달라고 처가 소유의 빅토리아풍 고성 앞에서 엎드려 빌다가 쫓겨난 것은 또 몇 년전의 일인가? 회사에 소문이 퍼져 더는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게 된 앨리스가 버즈 라이트이어의 피규어를 포함한 짐을 모두 챙겨 말 한 마디 없이 캐나다로 떠나버린 것은 또 몇 년 전의 일인가? 그가 마이크로소프트의 게임기 엑스박스를 구매하고 키넥트 센서를 설치한 것은 또 몇 년 전의 일인가? 명확한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는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내가 올해 몇 살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올해가 몇 년도지?' 역시 기억이 나지 않았다.

  가족사진. 그는 벽에 걸린 가족 사진을 생각해냈다. 거실 오른쪽 벽에는 액자가 없었다. 걸려있는 것은 액자가 아니라 거울이었다. 그는 마침내 그동안 자신이 보던 것이 (혹은 자신을 보던 것이) 거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의 가족은 그의 옆에 함께 있었다. 혹은 어디에도 없었다. 왼쪽으로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오른쪽으로 돌아보았다. 역시 아무도 없었다. 정면을 바라 보았다. 키넥트 센서와 눈이 마주쳤다. 그 눈은 진실을 갈구하는 등대처럼 붉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이윽고 어떤 기척을 느끼게 되었는데, 바로 그의 팔이 움직이는 소리였다. 왼팔이었고 오른팔이었다. 그는 군인처럼 팔을 높이 올려 걷고 있는 중이었다. 제자리 걸음에 맞추어 텔레비젼 안의 그의 아바타는 디즈니랜드를 내달리고 있었다. 많은 것을 잃어버린 만큼 찾아야 할 것이 많았다. 그럴수록 그는 더욱 힘차게 팔을 흔들었고 무릎을 높이 올려 걸었다.

  디즈니 캐릭터와의 만남은 끊임없이 그를 웃게 만들었다. 그는 캐릭터들과 인사를 나누었으며 하이 파이브를 했고 정겹고 포근하게 껴안았다. 함께 춤을 추고 패스포트에 사인을 받은 다음에 손을 흔들며 헤어졌다. 내내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함께 사진도 찍었다. 사진 속에는 그가 아니라 금발의 에밀리가 들어가 있었다. 그는 그 아바타 소녀를 아키코라고 불렀다가, 에밀리라고 불렀다가, 앨리스라고 불렀다가, 주저 앉아 엉엉 울기 시작했다.

(2012년 06월)

반응형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