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154. 언더커버 보스 코리아

낙농콩단/Season 11-15 (2011-2015)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12. 4. 22.

본문

  9월 5일. 자정. ‘김떡순 인터내셔날’의 본사 건물 15층. 방 한 가운데 쇼파에 앉아 텔레비젼을 보는 남자가 있습니다. 이 남자가 바로 김덕순 사장님입니다. 국내 최대의 분식 프랜차이즈 ‘김떡순 인터내셔날’의 ‘창업주’이자 ‘경영주’이자 ‘대주주’이자 '한효주'이자 ‘내 곁에 계신 주’ 혹은 ‘내 곁에 있어 주’라고 감히 소개드릴 수 있겠습니다. 방금 그는 아주 좋은 생각을 떠올렸습니다. 정말 정말 좋은 생각을 떠올렸습니다. 한 텔레비젼 리얼리티 쇼를 보면서 말입니다. 말단 직원으로 위장 취업한 CEO들이 겪는 다양한 에피소드를 몰래 카메라로 보여주는 그런 쇼였습니다. 사장님들은 말단 직원이 되어봄으로써 그들은 새로운 시각에서 자신의 회사를 바라볼 기회를 얻었습니다. 물론 일주일 후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간 다음에는, 짜잔! 정체를 밝히며 나타나 암행의 추억을 정산했지요. 있는 자의 여유와 관용을 보이며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현실이 아니라 쇼라 이겁니다. 하지만 김덕순 사장님은 감동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마음도 먹었습니다. 자기도 자기 회사에 몰래 위장 취업을 하여 밑바닥 돌아가는 사정을 살피겠다고 말입니다. 일단 결정하고 보니 괜찮은 아이디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주 만족스러웠습니다.

- 아무래도 난 천재인가봐.

 

  물론 그건 그가 떠올린 아이디어가 아니었습니다. 텔레비젼에 나온 방법을 그대로 따라하는 것일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어쨌거나 그는 이 아이디어를 자기가 이뤄낸 성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보통 사장님들이 많은 경우에 그러하시듯 말입니다.) 그 날 오후, 김덕순 사장님은 주요 임원진을 한 자리에 불러모았습니다. 물론 그래봐야 모두 자기 가족이지만 말입니다. 요즘 미술품 수집에 정신을 홀랑 빼앗겨 얼굴 보기도 힘든 부인 유석미 (You, Suck Mee) 여사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참석했습니다. 아들 무침씨와 딸 마리씨까지 말입니다. 마리씨는 '김떡순 인터내셔널’의 김밥 이사로, 무침씨는 ‘김떡순 인터내셔널’의 순대 이사로 통했습니다. 둘 중의 하나가 미래 사장직을 물려 받을 것은 자명한 일이었습니다. 자연히 ‘김떡순 인터내셔널’에는 마리씨와 무침씨를 추종하는 각각의 파벌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김밥파와 순대파. 그들의 신경전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그 옛날 왕자 규와 왕자 소백을 두고 벌였다는 춘추시대 제나라의 이야기 정도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치열했으니 말입니다. 

- 내가 아주 큰 결심을 했다.

  사람들이 수군거렸습니다. 물론 그래봐야 모두 자기 가족이지만 말입니다. 

- 잠시 사장 자리에서 물러나 한 발 떨어져서 회사를 바라보고 싶구나.

 

  한 여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사람들 시선이 집중되자 그제야 조용히 자리에 앉았습니다. 김덕순 사장님의 따님이신 김마리입니다. 그녀가 태어날 때 사장님 부부는 사내 아이를 가진 줄로만 알았답니다. 그래서 캘리포니아 남부로 날아가 원정출산을 감행했습니다. 거 왜 있잖습니까. 꿩 먹고 알 먹고, 님도 보고 뽕도 따고, 시민권 따고 군대도 빼고. 그런데 어디 인생이 계산대로만 되나요. 돌팔이 의사의 예상과는 달리 태어난 아이는 여자 아이였습니다. 덕분에 마리씨는 Mary Kim이라는 예쁜 이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만, 마냥 좋은 일은 아니었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오자 그녀의 이름은 고전 개그의 소재 이상의 감흥을 주지 못하는 것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가령 학창 시절, 그녀의 대학 친구들은 학사분식에 갈 때마다 김마리씨를 앞에 두고 "아줌마, 여기 김말이 추가요" 라고 일부러 크게 말하곤 했습니다. 유치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아주 효과적인 놀림이었습니다. 덕분에 마리씨는 지나치게 예민하고 필요 이상으로 신경질적이며 소름 끼칠 정도로 공격적인 사람이 되어버렸으니까요.

- 자리를 내놓으신다고요? 왜요?

- 얘기했잖니! 한 발 물러서서 사업을 차분히 되돌아보고 싶다고.

- 언제부터요?

- 바로 내일부터, 아니 지금 이 순간부터.  

 

  김덕순 사장님은 이 모험이 아주 좋은 기회가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본연의 의도를 회사 임원들에게 매끄럽게 전달하지는 못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 자리의 누구도 김덕순 사장의 이야기를 '언더 커버 보스'를 따라해보겠다는 것으로 알아듣지 못했으니 말입니다. 다들 그냥 일선에서 물러나겠다는 뜻으로만 알아들었습니다. 동생 무침씨가 마리씨를 노려보았습니다. 그에게는 누나에게 많은 걸 빼앗기면서 살아왔다는 일종의 피해의식이 있었습니다. 누나는 평생 자기에게 쌀알 한 톨 양보한 적이 없는 여자였습니다. 그래서 차기 사장 자리만큼은 누나에게 빼앗기지 않아야겠단 강한 의지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마리씨와 무침씨의 눈이 마주치자 불꽃이 튀었습니다. 파벌전쟁에 다시 불이 붙을 것이란 의미였습니다. 그들은 아버지가 불과 일주일 후면 다시 사장실로 돌아올 거란 사실을 끝내 몰랐습니다.

 

 

*

 

 

  김덕순 사장님은 삼척 지점으로 향했습니다. 새로운 경험이 기다리고 있을 약속의 땅 삼척. 사장님은 ‘김떡순 인터내셔날’의 강원지부장에게 몰래 부탁하여 자신을 비밀리에 신입사원으로 채용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또한 그리고 자신을 삼척 지사로 발령내도록 만들었습니다. 물론 말이 좋아 부탁이지, 사실 일방적 지시였다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김덕순 사장의 올해 나이는 예순여덟.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년의 신입사원을 맞느라고 강원지부장은 밤새 한숨도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일주일 동안 사장님이 묵을 숙소, 사장님이 드실 음식, 사장님 수발을 들 인력 충원, 사장님에게 제공될 일련의 서비스를 갖추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강원지부장은 기본적으로 이 깜찍한 쇼가 반갑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일이 잘 풀리면 잘 풀리는대로, 안 풀리면 안 풀리는대로, 그의 인생은 피곤해질 것이 자명해보였기 때문입니다. 말이 좋아 ‘언더커버'입니다. 내일 모레 칠순을 앞둔 남자가 정말 말단 직원의 생활을 견딜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김덕순 사장님은 부모님이 이미 준 재벌이었기 때문에 젊은 시절에도 말단 직원으로 살아본 적도 없었습니다. 게다가 그가 아는 김덕순 사장은 '잘되면 내 덕, 안되면 니 탓' 기질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보스들이 그러하듯이 말입니다. 다행히 잘 지내고 서울로 올라 가신다면 자기 자랑만 늘어 놓을 것이고, 만에 하나 자기 관활 지역에서 혹시 탈이라도 난다면 분명 몇 곱절의 해꼬지가 돌아오고야 말 것이 분명했습니다.

 

  ‘김떡순 인터내셔날’은 포차 베이스의 김밥, 떡볶이, 순대 프랜차이즈입니다. 다시 말해 포장마차 단위로 지점이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삼척 지점은 15평 공간에 매니져를 제외하고도 총 여덟명의 직원이 빽빽하게 일하고 있습니다. 일단 그만큼 장사가 잘 된다는 점은 아주 긍정적입니다. 매니져가 직원들을 소개합니다.

- 이 친구는 승만, 여기 친구는 보선, 저 친구는 정희, 저어기 친구는 규하, 지금 들어오는 친구는 두환, 밖에 음식물 쓰레기 버리러 나간 친구는 태우, 주방에서 설겆이 하는 친구는 영삼, 둘는 지금 배달나갔는데 아무튼 그 친구는 대중…… 입니다.

  매니져는 말을 놓으려다가 놓지 못했습니다. 매니져는 자기 아버지보다 더 나이가 많은 노인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물론 강원지부장이 직접 이 신입사원의 배치발령과 관여했다는 점도 뭔가 꺼림칙하게 느껴졌습니다.)  한편 직원들은 서로 눈치를 봅니다. 자기 나이 2.5배쯤 되어보이는 중년 남자가 신입이라고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말을 높여야 할지 낮춰야 할지, 일을 시켜도 될지 안될지, 갈궈도 될지 갈구면 안될지, 고민을 조금했습니다. 그래도 그들 중 좌장 격인 승만이 용케 용기를 내었습니다.

- 어이, 노땅. 우리 이름부터 외워보자. 

 

  노땅이라 불린 김덕순 사장님은 발끈했습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자식이 어디 감히 제 아버지뻘에게! 하지만 곧 자신이 잠행중에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언더커버 보스’이니 ‘언더커버’를 하고 있는 내가 ‘보스’라는 뜻이지!) 여기서 화를 내면 미션이 실패로 끝나버리게 될 것이었습니다. 이 고비를 넘겨야 '큰 사람 큰 사발'이 될 수 있을 것이었습니다. 김덕순 사장님은 방긋 웃어보입니다. 시키는대로 합니다.

- 지금 말씀하신 분은 승만 선배님이고 저 분은 두환 선배님입니다. 그리고 저 분은…….

  생각보다 노땅이 재미있는 양반임을 알게 된 직원들은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평소 하던 방식으로 돌아갔습니다.

- 이 새끼가 아주 미쳐 돌았네. 하늘 같은 선배님들이 말씀하시는데 어딜 감히 쪼개?

  군기반장인 정희도 거들고 나섰습니다.

- 야! 너 앞으로 우리가 얘기할 때 쪼개지마. 한번만 더 실실거렸다간 이 김밥처럼 옆구리를 터뜨려버린다.

  김덕순 사장님의 얼굴이 빨개졌습니다. 매니져도 좀 안쓰럽다는 표정을 했습니다. (물론 매니져는 진실을 몰랐습니만 이 모든 과정은 완벽히 '언더 커버'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이드신 양반이 어린 놈의 자식들에게 농락당하는 광경은 썩 마음 편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강원지부장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그 사람은 좀 안절부절했을 것입니다만, 그는 현재 밤에 사장님 기침 드실 자리를 알아보러 호텔방 잡으러 시내에 나간 중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 자리에는 김덕순 사원이 진짜 사장님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없었고 딱히 도와줄 사람도 없었습니다. 

- 다시 외워봐.

  '큰 사람 큰 사발'이 되기 위해 김덕순 사장님은 이 모든 고난을 이겨내고자 이를 악뭅니다.

- 왼쪽부터 승만 선배님, 두환 선배님, 정희 선배님, 규하 선배님, 보선 선배님, 그 다음은…….

- 삐, 시간 초과. 다시. 마지막 기회다.

  김덕순 사장님은 회사에서도 기억력이 좋기로 유명했습니다. 사람 이름 몇 개 외우는 것쯤은 걱정할 일도 아니었습니다.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집중하고 다시 외우기를 시작합니다. 

- 승만 선배님, 보선 선배님, 정희 선배님, 두환 선배님, 보선 선배님, …

- 삐. 같은 이름 두 번 말했어. 벌주 마실 시간이다.

  승만 이하 직원들은 소주를 가져와 고추장을 섞었습니다. 어디서 본 건 있어가지고 식초, 우유, 참기름, 올리고당, 담배꽁초, 김치 국물, 자판기 커피까지 넣고 믹서기에 갈아냅니다. 결정적으로 정희의 군용 워커를 벗어서 그 안에 따릅니다. 악명 높기로 유명한 신발 사발식. 아주 고약한 속초 지점 스타일의 신참 길들이기 방법입니다. 

- 마셔.

 

  김덕순 사장님은 좌절했습니다. 자기가 바랐던 '언더 커버'와는 많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텔레비젼에서처럼 카메라맨이 따라오지 않는다는 사실도 의아했습니다.) '큰 사람 큰 사발'도 좋지만 이건 좀 아니지 않은가 싶었습니다. 김덕순 사장님이 망설이자 직원들은 일제히 달려들어 각각 팔과 다리를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억지로 입에 깔대기를 꽂고(그 깔대기는 영업시 말통에서 참기름을 따라낼 때 쓰는 것이었습니다) 문제의 소주 혼합물을 흘려 넣었습니다. 김덕순 사장님은 발버둥을 쳤습니다. 올해로 쉰 셋. 풀빵장사로 시작해 전국 규모의 프랜차이즈 ‘김떡순 인터내셔널’의 보스가 되기까지, 그 고난과 역경의 스토리가 한 편의 영화처럼 눈 앞을 스쳐갔습니다. 목이 따끔거렸습니다. 속이 울렁거렸습니다. 호된 신고식은 자리를 옮겨 김덕순 사장님이 여덟 명의 직원 이름을 모두 순서대로 외워낼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김덕순 사장님이 한 번 워커를 받을 때마다 다른 사람들은 박장대소를 하며 즐거워하였습니다. 마시고 토하고, 더러워 토하고, 기분이 더러워 다시 토하는 과정이 반복되었습니다. 간신히 김덕순 사장님이 여덟 '선배님'의 존함과 연차 순서를 분간해 내었을 때, 승만이 소주잔을 들고 다가와 어깨를 두들겨주었습니다. 흡사 어른이 아이에게 하듯이 말입니다.

- 그래, 고생했다. 그래도 이렇게 외우는 게 가장 빠르고 확실한 거야. 

  육두문자가 김덕순 사장님의 목구멍을 간지럽혔습니다. 정희도 거들었습니다.

- 빨리 친해지는 방법이기도 하고.

  두환은 이름 외우는 방법을 일러주기도 했습니다.

- 다 끝났으니 하는 말인데, 우리 이름 외우는데 정말 좋은 방법이 있다. 성 빼고 우리 이름만 뭔지 생각해봐. 승만, 보선, 정희, 규하, 두환, 태우, 영삼. 대중. 이 순서에서 뭔가 느껴지는 것 없나? 그렇지? 뭔가 살짝 목구멍을 간지럽히지? 감 잡았지? 바로 그렇게 외우는거다.

  김덕순 사장님은 진실로 감명을 받았습니다. 사장실로 다시 복귀하면 이 망할 놈들을 다 죽여버릴거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습니다.

 

*

 

  다음날 김덕순 사장님은 또다른 난관에 봉착하였습니다. 바로 누구도 일을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또다른 신고식의 일종인지 뭔지 직원들은 그를 투명인간으로 취급하였습니다. 니가 할 일은 니가 알아서 찾으라는 식이었습니다. 매니져가 이런 경우에 나서서 교통정리를 해야겠지만 그 역시 이 일에는 관여하지 않겠다는 표정이었습니다. 사실 매니져는 어제 사건 이후로 이 딱한 노인을 하루 빨리 내보내야겠다고 마음 먹은 상태였습니다. 데리고 있어봐야 빠릿빠릿하기도 어려워보이고, 일단 보기에도 적잖이 안쓰러우니, 좋게 얘기해서 그만두도록 유도하겠다는 것이 그의 계획이었습니다. 마침 왕따 신고식 모드가 진행되고 있으니, 옳다구나 싶었습니다. 매니져실로 김덕순 사장님을 불러 한 마디 합니다.

- 잘 할 수 있으시겠어…요? 아무래도 음, 자네 나이가 좀 많아서 말이야…요.

  물론 나이든 양반을 대놓고 모욕주는 일이 약간 마음에 걸리기는 했습니다. 그래서 '너'와 '김덕순씨' 중 어떻게 불러야하나 머뭇거리다가 골라낸 호칭이 바로 '자네'였습니다. 물론 이 편도 웃기기는 마찬가지지만 말입니다. 

- 어떡하나…? 아무도 저한테 일을 가르쳐주지 않는다네…요.

  김덕순 사장님 역시 남에게 존대말을 써본지 15년이 넘은 사람이라서 이런 대화가 약간 조심스럽니다.

- 그건 자네가 알아서 할 일이지요. 누구도 자네에게 자네의 갈 길을 알려주지 않아, 자네.

- 하지만… 일단 자리만 잡으면 해낼 수 있는… 자신이 있는데.

- 자네는 자네가 똑똑하다고 생각하는가 본데, 세상에는 자네보다 똑똑한 사람들이 많아.

 

  그래도 마음이 약해진 매니져는 여덟 직원들 중 다섯번째 연차에 해당하는 두환을 불러 김덕순 사원을 관리해보라고 지시합니다. 두환은 성의없이 알겠다고 대꾸한 후 매니져실을 물러 나옵니다. 그리고는 김덕순 사장님에게 가스통을 갈아오라고 시킵니다. 김덕순 사장님이 가스통이 어디에 있냐고 묻자 정희 선배에게 가서 물어보라고 하였습니다. 김덕순 사장님은 그게 함정일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를 못했습니다. 근처에 가서 쭈빗거리자 정희가 사납게 쏘아붙였습니다.

- 야! 왜?

- 그게……. 두환 선배께서 가스통을 갈아오라고 하셨네…아니, 습니다.

  정희는 피식 웃어보였습니다.

- 너 높임법 제대로 안 배웠구나. 내가 높냐 두환이가 높냐.

- 선배님이… 높으십니다.

- 두환이가 뭘 시켰다는 얘기를 두환이보다 높은 나한테 하려고 해. 어떻게 해야쓰겠어?

- 두환 선배가.. 가스통 갈아오라고 하셨습니다.

  정희는 배를 잡고 웃었습니다.

- 다 늙어서 너도 참 깝깝하다. 너 임마, 군대 안 갔다왔지?

- 예, 그렇습니다.

 

  사실은 사실입니다. 김덕순 사장은 양반 김씨 가문의 4대 독자였기 때문에 군 면제였거든요. 장난기가 동한 정희는 김덕순 사장님에게 여러가지 상황 예제를 던져주기 시작했습니다. 이를테면 이런 식입니다. 매니져가 시킨 일을 대중에게 가서 말하는 법, 승만이 시킨 일을 보선에게 가서 말하는 법, 태우가 시킨 일을 규하에게 가서 말하는 법, 정희가 시킨 일을 손님에게 가서 말하는 법, 기타 등등. 시련은 끝도 없이 계속되었습니다. 연차 서열에 맞게 높임법을 구사하지 못할 때마다 김덕순 사장님은 호된 모욕을 감내해야만 했습니다. 욕도 먹었고, 차라리 욕을 먹는 편이 낫겠다 싶은 소리도 들었습니다. 그러니 더더욱 손발이 굳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냥 겁이 났습니다. 김덕순 사장님은 마냥 답답했습니다. 김밥 스테이션으로 가도 자기 할 일이 없었습니다. 떡볶이 스테이션을 기웃거리다가 손을 데었습니다. 순대 스테이션을 기웃거리다가 간을 잃을 뻔 했습니다. 뭐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뭐에 홀리기라도 한 듯 정신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영혼이 빠져나갈 지경이었습니다.

 

  처음 위대한 ‘김떡순 인터내셔널’ 왕국을 세웠을 때, 김덕순 사장님은 직원 교육에 많은 예산을 할애하였습니다. 행복한 인재가 행복한 김밥, 행복한 떡볶이, 행복한 순대를 만든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습니다. 원래 ‘김떡순 인터내셔널’에 입사하게 되면 4주간의 잘 짜여진 트레이닝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새로 온 사원이 일을 배우고 익힐 수 있도록 시간과 기회와 배려를 제공하는 것은 기존 직원들의 의무였습니다. 그들 또한 신참 시절에는 그들의 선임 직원들에게 같은 방식으로 도움을 받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명목으로 연말에 보너스도 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건 뭐, 개판 오분 전 아닙니까. 제대로 돌아가는 시스템이 하나도 없었고 게으른 매니져는 이 상황을 방치만 하고 있었습니다. 김덕순 사장님은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았습니다. 진실로 감명을 받았습니다. 사장실로 다시 복귀하면 다 죽여버릴거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습니다.

 

*

 

  삼일째에 김덕순 사장님은 ‘김떡순 인터내셔날’ 속초 지점으로 출근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서울 본사로 출근하였습니다. 엄밀하게 쇼의 원칙에 맞추자면 이번 주는 다 채워 출근해야 했지만, 그럴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사장실을 차지하고 머리 끄댕이 붙잡고 싸우고 있던 마리씨와 무침씨 남매를 9번 아이언을 휘둘러 쫓아낸 김덕순 사장님은 비서실에 전화를 넣었습니다. 강원지부장, 속초 지점 매니져, 승만, 보선, 정희, 규하, 두환, 태우, 영삼, 대중을 모두 본사 회의실로 집합시키라는 지시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언더커버 보스’에서 우리가 보던 바로 그 장대한 피날레를 준비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두시간 후 그들이 모두 도착하자 김덕순 사장님은 보디가드 세 명을 대동하고 회의실에 들어섰습니다. 강원지부장을 제외한 나머지 직원들은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사실 자기네 회사 사장 얼굴을 진작에 못 알아봤던 것도 이상한 일은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훌륭한 변장이 아니었는데도 말입니다.) 침묵과 고요속에서 시간을 보내며 직원들에게 충분히 겁을 준 김덕순 사장님은 일장 연설을 시작했습니다.

 

- 내가 이 회사를 처음 세웠을 때가 기억이 난다. 행복한 김밥, 행복한 떡볶이, 행복한 순대, 분식업계에 새 바람을 일으키고자는 꿈이 있었더랬다. 정말 고생 무지하게 했었다. 라면만 먹으면서 일주일 동안 밤도 새봤고, 대출금을 갚지 못해 집도 잡혀봤다. 심지어 분식회계에 사카린 밀수까지 했다가 하마터면 인생 종칠뻔도 했었다. 그런데 니들은 뭐냐. 니들은 내 꿈에 빌붙어사는 버러지냐. 왜 내 꿈을 좀 먹냐.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 니들은 내 회사를 망치고 있다. 나는 이 사태를 방치할 수가 없다. 꺼져라. 다 꼴도 보기 싫다. 강원지부장은 중동지부장으로 자리를 옮겨라. 다만 니들도 알다시피 중동에는 아직 ‘김떡순 인터내셔날’이 진출하지 못했으니 니가 알아서 길을 뚫던지 말든지 마음대로 해라. 삼척지점 매니져는 강원지부장을 따라가라. 지금 이 순간부터 중동지점 1호 매니져로 발령이다.  아까 말한 것처럼 중동에는 아직 우리가 진출을 안했음을 참고해라.

 

  김덕순 사장님은 냉수를 한 잔 들이키고 말을 이어갔습니다.

- 어이, 마지막으로 찌끄레기들. 니들, 인간 쓰레기들은 니들 인생만이 아니라 내 꿈까지 쓰레기 냄새를 풍기도록 만들고 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너희 어린 놈의 자식들이 우리 근대화 세대를 무시하니까 나라가 이 모냥 이 꼴인거다. 얄짤없다. 모두 해고다. 뿐만 아니라 분식업계에서는 영원히 추방이다. 내가 아무리 힘이 없어도 니들 앞길 막을 정도는 된다. 두고보자. 니들은 대한민국 안에서 어느 분식집에도 발을 담그지 못하게 될 것이다. 두고봐라. 내 장담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니들을 철저하게 망가뜨릴 계획이다. 

 

  상황은 명쾌하게 정리되었습니다. 그들 중 누구도 진짜 사장으로 판명된 김덕순 사원의 감히 권위에 도전할 수는 없었지요. 진짜 어사로 판명된 이몽룡 거지의 권위에 도전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입니다. 강원지부장, 속초 지점 매니져, 승만, 보선, 정희, 규하, 두환, 태우, 영삼, 대중. 모두가 무릎을 꿇었습니다. 한번만 봐달라고 울고 불고 빌었습니다. 그러나 김덕순 사장은 보디가드들에 둘러싸여 차갑게 돌아섰습니다. 한 무리의 우락부락한 경비원들이 달려와 그들 모두를 개처럼 끌어내었습니다.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습니다.

 

  상황이 정리되자 김덕순 사장님은 R&D 1팀의 방유만 (Bang, You Man) 팀장을 불렀습니다.

- 부르셨습니까? 사장님.

- 다름이 아니라 방팀장, 내가 새로운 소스 레서피를 하나 가져왔는데 말이야. 자네들이 한번 테스트해줬으면 좋겠어.

- 알겠습니다. 어떤 소스 레서피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 이런 거야. 한 번 들어봐. 소주에 고추장을 섞고, 그 다음에 식초, 우유, 참기름, 올리고당, 담배꽁초, 김치 국물, 자판기 커피까지 넣고 믹서기에 갈아내는 거야. 그 다음에 군용 워커에 담아 한동안 숙성을 시키는 거지. 역겨운 맛일 것 같지? 그런데 향이 야릇해. 은근히 중독성이 있다니깐. 순대나 떡볶이나 둘 중 하나쪽 소스로 활용할 방법이 없을지 한 번 고민들 해봐.

- 알겠습니다. 사장님. 그런데 외람되지만, 혹시 이 레서피에 관해 저희가 알아두어야 할 사항이 있습니까? 이를테면 출처라던가, 발명자라던가, 소유권자라던가, 만약에 경우 우리가 대처를 해야할 상황이 닥칠 수도 있다면 저희도 알아야 하니 드리는 말씀입니다. 정말 그렇게 특별하고 신비한 소스라면 저희만의 영업비밀로 보호해야하지 않겠습니까.

- 됐어. 그런 거 없어. 내가 개발한 거야. 혼자 고민을 좀 해보다가 만들었어. 음… 그런거나 마찬가지야. 내 꺼라고. 그러니 자네들은 신경쓰지 않아도 돼. 알겠나?


 

(2012년 04월)

 

반응형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