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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 소프트-보일드 원더랜드

낙농콩단/Season 11-15 (2011-2015)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13. 3. 24.

본문

  창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다. 아주 길고 가느다란 물의 화살이 하늘을 가른다. 창을 때린다. 적군에게 포위당한 작은 성 같은 느낌이다. 벌써 일주일째다. 아주 지독한 비다. 화살들이 날아와 유리창을 두들긴다. 타닥. 타다닥. 그 예사롭지 않은 리듬감. 충격은 넓은 창문 유리를 타고 창틀을 따라 전해져 바닥을 울린다. 뒤이어 실내 공기가 공명한다. 나도 마찬가지고 이 건물 모두가 마찬가지일런지도 모른다. 타닥 타다닥, 비의 리듬에 맞취 춤을 추고 있을 뿐이다. 적응을 해야 하는 것이다. 비가 오면 비에. 눈이 오면 눈에. 바람이 불면 바람에. 결국 적응하는 자가 살아남는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게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하다. 고로 적응은 강함을 위한 필수적 요건이다.


  이 곳은 호텔이다. 하이얏트 리젠시 샌프란시스코. 바로 베이 브릿지가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나는 지금 15층 이그제큐티브 라운지 창가쪽 테이블에 앉아 있다. 여기에 앉으면 당연히 샌프란시스코 물이 보인다. 깊고 무한한 푸른 물이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물의 화살은 지금 바다에도 맹공을 퍼붓고 있다. 지나간 자리마다 수면에 파문이 인다. 어쩌면 바다에서 솟음친 물줄기가 하늘로 올라가는지도 모른다. 어떻게 보면 하늘에서 바다까지 이어진 투명한 물기둥이다. 하이얏트 리젠시와 샌프란시스코 만 사이에는 아름다운 곡선의 해안 도로가 있다. 여기서 보면 성냥갑만해 보이는 자동차들이 해안을 옆에 끼고 달려지나간다. 좌우로는 열대의 나무들이 병정처럼 가지런히 사열해있다. 이 훌륭한 경치를 고스란히 전세낸 듯 좋은 기분이다. 깃발이 흔들리고 나무가 흔들린다. 하지만 밖의 바람이 안으로 들어오지는 않는다. 실내 공기를 자체적으로 순환시키는 최고급 시스템 덕분이다. 뿐만 아니다. 누구나 이름만 들으면 바로 알 수 있을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만들었다는 실내의 구조 또한 독특하다. 공간에서 또 다른 공간으로 들어갈 때 나선형으로 휘어지며 전혀 다른 차원으로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알고보니 그건 조명과 벽지의 색깔, 그리고 각도를 달리한 사물의 배열에 의한 효과라고 한다. 철저한 공학적 계산에 기반했음은 물론이다. 정말 그것만으로도 그런 느낌이 가능한걸까? 신기하다. 하지만 신기해야 한다. 이 곳은 자그마치 별이 네 개짜리 최고급 호텔이기 때문이다. 


  매일 오후 세 시. 나는 여기 이그제큐티브 라운지에 온다. 나는 12층 주니어 스위트에 묵고 있다. 아침 늦게 일어나서 양치질을 하고 찬 물에 세수를 하고 면도 크림을 듬뿍 발라 시간을 잘라내고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일을 하다가 마침내 세 시가 되면 여기에 올라온다. 세 시는 일을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시간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정신력이 좋아도 그때쯤 되면 몰려오는 식후의 노곤함에 늘어질 수 밖에 없다. 하물며 이렇게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고 일해야하는 나 같은 사람은 더더욱 그렇다. 비효율적으로 일을 하느니 하지 않는게 차라리 낫다. 그리고 어차피 나는 새벽에 일을 하는걸 즐긴다. 그러니 조급해하거나 서두를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다. 오후 세 시는 내게 있어 충전의 시간이다. 초당 6미터를 올라간다는 엘레베이터를 타고 15층에 도착하여 기형적으로 비틀어진 공간과 공간을 통과해서 이 라운지에 온다. 이름을 알 듯 말 듯한 클래식 음악이 들리 듯 말 듯 흘러나오는 가운데, 창 밖을 보며 카푸치노를 마신다. 별 네 개짜리 호텔에서 만들어주는 카푸치노는 별이 네 개여야 합당하겠지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오히려 밖에서 먹던 것보다 약간 떨어지는 감이 있다. 하기야 별 네 개짜리 호텔이라고 모든 면에서 별 네 개의 면모를 보여줄길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별 세 개 반, 어떤 면에서는 별 네 개 반, 그런 것들이 모이고 합쳐져서 이 거대한 별 네 개짜리 호텔이 만들어진게 아니겠는가. 사람도 마찬가지다. 어떤 면에서는 100점, 어떤 면에서는 50점, 이렇게 저렇게 합쳐놓고 보면 평균 75점이 되는 것일지 모른다. 다만 사람의 경우는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항목을 규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을 대하는 일이 어렵고 이 일이 어려운 것이다.


*


  엄밀하게 말해서 나는 지금 세상으로부터 격리되어져 있다. 자의든 타의든 격리는 격리다. 수용소의 돌담이든 최고급 호텔의 스위트든 격리는 격리다. 이 곳에서 나는 텔레비젼도 신문도 보지 않는다. 라디오도 듣지 않는다. 세상을 구성하는 기호들은 저 크고 넓직한 유리창 너머에서 마구 스쳐진다. 마치 한껏 속도를 높이고 해안도로를 달려가는 자동차처럼. 지금 나와 저 바깥 세상은 서로 다른 셀과 다른 레이어에 따로 그려진 그림처럼 단순히 겹쳐져 있을 뿐이다. 물론 그 동안에도 시간은 톱니바퀴처럼 부지런히 돌아가고 있을 것이다. 이를 테면 오후 세 시. 어쩌면 바깥 세상에서 가장 바쁜 시간에 나는 느긋하게 라운지에 앉아 카푸치노를 마시고 있다. 이는 바깥세상의 논리로는 정당하지 않다. 혹은 처음 만난 여성과 '외로움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진지한 토론을 한다던가. 이 또한 정말 웃긴 일이다. 격리되지 않은 세상의 나에겐 불가능한 것이다. 그녀와는 어제 처음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처럼 매일 이 15층 이그제큐티브 라운지에 올라오는 여자였다. 어제는 유독 빈 테이블이 없었던 것이 발단이었다. 내가 혼자서 창가의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인지 라운지 직원이 다가와 말을 건넸다. "괜찮으시다면 손님, 이 분과 합석하셔도 되겠습니까?" 그 질문에 나는 "예, 괜찮습니다,” 라고 말했다. 나로서는 별 상관이 없는 문제였다. 한 달이 넘도록 혼자 지내고 있었고 특히 지난 엿새간은 끝이 없이 쏟아지는 비를 보고 있었다. 더는 지루할 방법도 없었다. 멋쩍은 듯 다가온 그녀는 "감사합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나 역시 고개를 끄덕거려 괜찮다는 말을 대신했다. 


  그녀는 에스프레스를 주문했다. 이윽고 블랙홀처럼 새까만 액체가 작고 앙증맞은 컵에 담겨 나왔다. 나는 그녀에게 덜컥 말을 걸었다. ”그 에스프레소, 별 네 개짜리 맛인가요?” 그녀는 뜻밖이라는 듯 놀라는 눈치를 보이다가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렇지는…… 않은 것 같네요. 더 맛있는 에스프레소를 만난 적이 있어요,” 라고 그녀가 말했다.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카푸치노나 에스프레소나. 기본적으로는 같은 콩을 같은 사람이 같은 기계로 내렸을테니 그 놈이 그 놈인 것이다. "하지만 뭐……, 호텔이 별 네 개짜리라고 커피까지 별 네 개이겠어요. 어떤 부분에서는 별 네 개보다 낫고 어떤 부분에서는 별 네 개보다 못하겠죠. 사람도 그렇잖아요. 더 잘난 부분이 있고 더 못난 부분이 있고." 그녀는 정확히 내가 얼마전 커피 맛을 두고 생각했던 것과 거의 일치하는 말을 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 시점에 살짝 놀랐다. 우리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가진 특유의 더듬이가 반응하는 느낌이 들었다. 부끄러운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서둘러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째 그녀와는 말이 잘 통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라고 그녀에게 물었다. 지금은 오후 세 시. 바깥 세상에선 역시 한가하지만은 않은 시간이다. "일이 있어서요. 시간이 좀 남아 경치나 보려고 좀 올라왔어요,” 라고 그녀가 말했다. "그쪽은요?" "나도 마찬가지죠. 일이 있어서. 일을 하다가 이 맘때쯤 쉬러 올라온답니다,” 라고 대답했다. 빗물처럼 대화도 이어지기 시작했다. 타닥 타다닥. “혹시 무슨 일 하시는지 여쭤보면 실례가 될까요?" 라고 그녀가 물었다. "실례는요. 다만 이렇게만 말해두죠. 혼자 하는 일이에요. 저는 한 달째 이 호텔에 묵고 있어요,” 라고 대답했다. 나로서는 그녀가 상상력을 동원하여 여러 가지로 추측해보길 바랬던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그녀는 "혼자서요? 퍽이나 외로우시겠네요,” 라고 대꾸했다. 


  그리하여 나와 그녀는 급기야 '외로움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는 전혀 예상치도 못한 방향의 전개였다. 나는 뭐에 홀린 것처럼 외로움의 질적인 차원에 대한 평소 생각을 털어놓았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외로움에는 두 가지가 있는 것이다. 껍질적 외로움과 열매적 외로움. 껍질에 드러난 외로움은 남의 눈에 띄인다. 하지만 껍질에 둘러싸여있는 열매는 그렇지 않다. 바로 그런 것이다. 마찬가지로 진정 심각한 외로움은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한다. 누군가에게 이해받는 순간, 그 외로움의 질적 심각성이 크게 떨어져서 그만큼 외롭지 않은 것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런 외로움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요,” 라고 덧붙였다. "그런 외로움이란 어떤 것인가요?" 라고 그녀가 되물었다. "그런 외로움이란 건전하고 고상한, 상대적으로 견딜 수 있을만한 외로움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에요." "이를테면요?" "얼음으로 만든 송곳처럼 차갑고도 예리한 것이 6밀리미터 간격으로 몸속을 통과하는 느낌이랄까요?" 그녀가 어깨를 으쓱했다. ”음…, 그래도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그녀는 정말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나는 적절한 예가 없을지 라운지를 이리저리 돌아보았다. 마침 피아노가 보였다. 어쩌면 피아노라면 꽤나 적절한 예가 아닐가 싶었다. "이렇게 한번 생각해봐요. 여기에 업라이트 피아노가 한대 있습니다. 거기에 앉아 건반을 누르며 노래를 부르는 거죠. 어빙 벌린이나 콜 포터의 발라드 같은 노래를요. 만약 아무도 없는 불꺼진 까페에서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견딜 수 있을 외로움이에요." 이 대목에서 그녀가 반론을 제기했다. “이상해요. 아무도 보아주지 않으니 더 외로운 것이라고 봐야하는 것이 아닐까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아무도 보지 않으니 덜 외로운 거에요." 나는 단언했다. "어째서 그럴까요?" "반대로 생각해 보세요.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넓은 길에서 피아노를 치면서 노래해 본다고 생각해 보는거에요. 그 순간 외로움을 느낀다면 그건 그야말로 진정 절실한 것이겠죠." 여전히 그녀는 아리송한 표정이었다. ”뭔가 이상해요. 사람들이 더 많은 곳이라면서요. 그중엔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주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테고 그러면 아무래도 덜 외롭지 않을까요?" 나는 정답이라는 듯이 테이블을 가볍게 두들겼다. ”바로 그래서 더 외로운거에요. 누군가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르거든요"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물론 이해를 했다는 표정도 아니었고 이해를 못하겠다는 표정도 아니었다. 


*


  어제의 우연한 합석 때문인지 그녀가 다시 내 테이블을 찾아왔다. 어제와 달리 빈 자리가 많은데도 말이다. "어젠 고마웠어요. 흔쾌히 자리를 내어 주셔서요,” 라고 그녀가 말했다. 이제보니 제법 키가 컸다. 높은 구두를 감안해도 말이다. “천만에요,” 라고 말했다. 뭐 그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니까. "어제 그 외로움에 대한 얘기 말이에요……. 곰곰히 생각해보니 알 것도 같아요,” 라고 그녀가 말했다.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런 건 긍정이나 부정으로 결론지어질 수가 없는 문제다. 그녀가 가지 않고 다가온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다. "괜찮으시면 오늘도 같이 앉으시죠?" 라고 내가 말했다. 


  "실례지만 무슨 일을 하시나요?" 라고 그녀에게 물었다. "어제보단 좀 더 구체적으로요.” 그녀는 빙긋 웃고는 웨이트리스에게 생과일 주스를 한잔 주문했다. 딸기와 키워 중에서 키위로. "어제 커피가 별로더라구요? 별점을 매기자면 한 두 개쯤될까?" 라고 그녀가 말했다. 나도 따라 미소지어 보였다. 


  “저는 원래 작가 지망생이었어요. 대학때는 교내 공모에 참가해서 상도 많이 탔죠. 그땐 정말로 나중에 유명한 작가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혼자서 속으로는 말이에요." 그녀의 말에 난 고개를 끄덕거렸다. “졸업하고선 뉴욕 소재의 출판사 중 한 곳에 들어갔죠. 그나마 책과 연관이 있는 직장을 잡아놓고 틈틈히 글을 써보자는 생각이었는데… 결국 쉽지가 않더라구요. 몸이 피곤하니까 마음도 피곤해지는 거 있죠. 특히 남의 글을 다루는 일을 반복하다보면 나의 글을 쓰는 능력은 서서히 사라지는 것 같아요. 결국…… 시간이 지나니까 그냥 흐지부지 되더라구요. 뭐 그런거죠." 그 사이에 키워 쥬스가 나왔다. 거짓말처럼 초록 빛깔을 띠는 액체 사이로 검고 작은 씨들이 공전하듯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나는 창 밖으로 눈을 돌렸다.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벌써 여드레 째다. 비는 그치지 않는다. 타닥 타다닥.


  “그러다 남편을 만났어요. 남편은 뉴욕 출신의 음악가였고요. 재즈의 역사에 대한 책을 우리 출판사와 함께 작업하고 있었죠. 제가 담당자여서 서로 연락을 주고 받게 되었던 것인데 뭐… 대충 아시겠죠? 그렇게 인연이 시작된 거죠.”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나는 사랑이라던지 인연이라던지 그런 분야에 있어 썩 능통한 편은 못된다. 자랑은 아니지만 사실이 그렇다. 사람을 다루는 이런 일을 하다보면 사람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리기 마련이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그렇게 된거죠. 남편의 책은 꽤 성공했어요. 좋은 서평을 받기도 했고 출판사에 상당한 이익을 가져다 줄만큼 팔렸어요. 덕분에 나도 직장에서 입지가 탄탄해졌고요. 말하자면 사랑과 성공을 모두 얻은 셈이었죠. 그리고 남편은 연주회를 다니는 한편 다음 책을 쓰기 시작했지요.”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키워 주스를 한 모금 마시고나서야 침묵을 깼다. “행복한 시절이었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솔직히 이런 생각이 있었던 것 같아요. 남편은 재능있는 음악가지만 글쓰기에 전문성을 가진 사람이 아닌데 선계약을 하고 글을 쓰고 있잖아요. 음악가/작가라는 타이틀도 얻고요. 반면 전공 교육을 받은 (글쓰기가 교육이 가능한 분야인지는 일단 차치해두기로 하죠)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걸까? 직장에서도 그의 글을 봐주고 집에서도 그의 글을 봐주고……” 나는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창 밖을 힐끔 보니 여전히 비는 내리고 있다. 그칠 기미가 없다. 타닥 타다닥.


  그녀가 갑자기 눈물을 보인다. 굵게 떨어진 몇 방울에 이내 하얀 식탁보에는 젖은 자국이 생긴다. 별안간 벌어진 예측하지 못한 상황에 나는 당황한다. 직원이나 라운지 내 다른 사람들의 주목을 끌지나 않을까 염려하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를 제외하고는 고작 두 테이블 뿐이고 모두 저들 나름대로의 이야기에 열중하고 있다. 오후 세 시. 붐빌 시간은 아니다. 직원들도 몇 시간 후에 시작할 이브닝 칵테일 타임을 준비하느라 바빠 투숙객들에게 별 관심이 없다. 그녀가 말을 잇는다. “죄송해요. 이러려고 했던 건 아닌데 저도 모르게 감정적이 되어서……”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지만 사실 이번에는 온전히 이해가 가서 고개를 끄덕거린 것은 아니다. “아무래도 그런 생각 때문에 벌을 받았던 것 같아요.” 갑자기 입 안이 바짝 마른다. 커피를 더 마시고 싶지만 썩 좋지 않았던 커피 맛을 떠올리고 더 주문하려는 마음을 접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시점에 직원을 불러 이야기를 끊을 수는 없다. 듣기 시작했으니 끝가지 들어보기는 해야한다. “벌을 받았다고요? 어째서 그런 말씀을 하시죠?” 그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런 생각 때문에 남편과의 관계가 서서히 어그러졌거든요.” 뭐랄까, 이런 문제에 대해서 어떤 대꾸를 해야할지 모르겠다. 나같은 사람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아도 모든 관계를 어그러뜨리니 말이다. 더 캐묻기가 편하지 않아 말을 돌리려고 하는데 그녀가 털어놓는다. “남편은 이제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에요. 이럴 줄 알았으면 제가 그러지 않았어야 해요. 더 잘해주었어야 했다고요.” 그녀는 또다시 눈물을 쏟는다. 당황스럽다. 이번에는 직원들의 이목이 집중된다.


  나는 기다린다. 그녀가 진정될 때까지. 나는 사람을 위로하는데 익숙하지 않다. 처음보는 남자에게 (아니 두번째 보는 남자라고 해야하나?) 사별한 남편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는 사실이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만큼 외로운 처지라고 한다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나…… 어쩌면 내가 주장하는 질적으로 심각한 외로움과 개념적으로 통하는 면이 있는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얼음으로 만든 송곳처럼 차갑고도 예리한 것이 6밀리미터 간격으로 몸속을 통과하는 느낌. 군중들에게 둘러싸여 건반을 두들기며 부르는 발라드의 외로움. 


  그녀가 웃는다. 눈물을 멈추고. “제가 쓸떼없는 이야기를 했네요.” 그녀는 화제를 돌린다. “이곳 생활은 어떠세요?” 나는 대답한다. “만족스럽습니다.” 그녀가 묻는다. “여기서 언제까지 계세요?” 나는 대답한다. “당분간은요.” 그녀가 다시 묻는다. “여기서 잘 지내시나요?” 나는 대꾸한다. “잘 지내지 않을 수가 없죠. 별 네 개짜리 호텔인데.” 이후는 영원처럼 느껴지는 찰나의 침묵이었다. 마치 최면 같은 빗소리의 공명에 귀를 기울이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다. “내일도 이 자리에 계시나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그녀는 가볍게 인사를 하고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다. “그러면 내일도 뵐 수 있으면 뵈어요. 오늘 정말 실례가 많았네요.” 나도 가볍게 목례를 한다. “별 말씀을요.” 그녀는 아주 중요한 사실이라는 듯이 한 마디를 던지고 걸음을 옮긴다. “커피보다는 과일 주스를 드세요. 과일 주스는 조금 낫네요.” 곡선형으로 휘어져가는 복도로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본다. 아름다운 구두와 그보다 더 아름다운 다리를 바라본다. 마치 다른 차원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신기하다. 하지만 신기해야 한다. 이 호텔은 자그마치 별이 네 개짜리 최고급 호텔이기 때문이다. 

 

*


  들릴듯 말듯한 클래식 음악 속에서 나는 휴대전화를 꺼내어 걸려온 전화를 받는다. 전화 속의 남자는 샌프란시스코 경찰국의 마이크 로치 (Mike Rotch) 경감이다. 그는 내게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나는 잠시 망설였다. “아무래도 그녀는 범인이 아닌 것 같습니다.” 로치 경감은 확실하냐고 되물었다. 나는 대꾸했다. “적어도 제 직감으로는 그렇습니다.” 그랬더니만 로치 경감은 내 직감이 그렇다면 아마도 맞을 것이라고 수긍했다. 우스운 일이지만 그럴만도 하다. 지난 5년 동안 내 직감이 틀린 적은 손으로 꼽을만하기 때문이다. (내 직감이 맞을 확률이 스티브 내쉬의 커리어 통산 자유투 성공률과 비슷하다고 해두자.) 전화를 끊고 창 밖의 끝없는 빗줄기를 내다보며 나는 잠시 생각에 잠긴다. 우리는 그녀의 남편이자 음악가/작가 헤먼드 에그(Hammond Eggs)의 살인 사건을 수사중이다. 그의 아내인 쉐리 D. 에그(Sherry D. Eggs)가 유력한 용의자인데 바로 이 호텔 하이얏트 리젠시 샌프란시스코에 묵고 있고 바로 조금 전까지 나와 이야기를 나눈 그 여자다. 물론 내가 지금 이 호텔에 있는 이유도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접근하기 위해서이고 말이다. 어쨌든 나의 직감은 그녀가 범인이 아니라고 말한다. 나는 그녀가 두고 간 유리잔을 들고 남아있는 키위 주스를 맛 본다. 립스틱 자국이 남은 쪽으로. 미적지근한 시큼함. 여전히 나의 직감은 그녀가 범인이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한 줌의 호기심은 남아있다. 내일 이 자리에서 그녀를 또다시 만나게 될까? 그럴지도. 어쩌면 아닐지도. 내심 몇 번 더 만나서 이야기해보고 싶은 생각은 든다. 라운지에 슬슬 손님이 늘어나는 것을 보며 나도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어떻게 될지는 내일 두고 보면 될 일이다. 


  창 밖으로 여전히 비가 내린다. 지금 이 건물은 비의 리듬에 맞춰 흔들린다. 타닥 타다닥. 적응. 뭔든 적응을 해야하는 것이다. 비가 오면 비에. 눈이 오면 눈에. 바람이 불면 바람에. 적응하는 자만이 살아남는다. 들릴 듯 말 듯한 클래식을 벗어나 라운지를 나와 복도를 걷는다. 나선형으로 휘어지며 전혀 다른 차원으로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든다.

 

(2013년 0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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