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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 어 노웨어 맨

낙농콩단/Season 16-20 (2016-2020)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16. 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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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요한 건 11미터다. 키커와 볼은 11미터 앞에 있고 그는 골 라인을 지키고 서 있다. 휘슬 소리가 적막을 깰 때까지 그 짧은 시간이 한없이 길게만 느껴졌다. 그는 조용히 자문했다. 키커의 오른 다리와 페널티 킥 성공률이 두려운 걸까? 그건 아니었다. 그럼 키커가 찬 볼이 골 라인을  통과할까봐 두려운 걸까? 그것도 아니었다. 젠장, 생각해보면 그까짓 골은 하나도 중요한 게 아니다. 먹으면 먹는 거고 막으면 막는 거다. 축구는 골을 넣는 게임이고, 상대가 넣은 골보다 더 많은 골을 넣었을 때 비로소 승리하게 되는 게임이다. 날카로운 휘슬 소리가 열띤 함성을 되불러 낼 즈음에 비로소 그는 자신이 느끼는 두려움의 원천을 깨달았다. 그는 골키퍼가 아니었다. 쿼터백이었다. 자신이 쿼터백이라는 사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축구 경기장의 가장 외로운 한 모퉁이에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 두려웠던 것이다.

 

1

 

  2004년 4월 9일, ‘샌프란시스코 클로니클’의 스포츠 섹션에는 샌프란시스코 식스티나이너스의 지명을 받은 유망주 마이크 로치(Mike Rotch)에 대해 다음과 같이은 기사가 실렸다.

 

  유타 주 세인트조지 출신의 마이크 로치는 지난 2년 동안 주전 쿼터백으로 나선 26 경기에서 노트르담 대학교에게 25번의 승리를 안겼다. 그의 가장 큰 강점은 정교한 패스 능력에 바탕한 탁월한 게임 운영 능력이다. 5피트 11인치의 키, 176 파운드의 그리 크지 않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많은 팀들이 마이크을 탐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신인 지명 회의가 가까워지자 샌프란시스코의 열성적인 미식축구 팬들은 매일 같이 그를 데려와 달라며 홈 구장인 레비스 스타디움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는 했다. 물론 그런 목소리가 아니었어도 식스티나이너스 구단은 이미 그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게다가 2년 전 시애틀 시호크스와 맞바꾼 1순위 지명권도 있었다. 이제 그를 샌프란시스코의 품에 안기는 것만이 남았다. 구단이 바보같은 실수만 벌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가까운 미래에 제 2의 조 몬태나를 얻게 될 것이다. (후략)

 

2

 

  매일 아침 그는 와터포크 정션에서 내렸다. 20분 남짓의 짧은 출근길이었지만 마음이 편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차창 밖으로 흘러가는 풍경은 지루하리만큼 한결 같았고 무기력한 일상 속에선 희망이랄까 활력이랄까 하는 것들을 전혀 발견할 수가 없었다. 마이크는 생각했다. '내가 왜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는 걸까?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길래?' 때로는 그런 감정이 깊고 진한 우물이 되어 한 없는 나락으로 그를 추락시켰다. 때로는 형언하기 어려운 분노가 되어 몸이 떨리도록 전신을 휘감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둘 중 어느 쪽이든 그의 마음을 파괴한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었지만 말이다. 바쁜 출근길 한 가운데서도 번민과 회의는 늘 그의 발목을 잡았다. '도망가고 싶다.'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와터포크 FC의 홈 스타디움 ‘비카리지 로드’ 앞에 도착할 때까지 늘 그런 마음이었다.

 

  그는 와터포크 FC의 주장 겸 백업 골키퍼로 아직도 몇 경기를 더 치러야 한다. '하소연 할 곳이 없어.' 그는 여전히 미식축구가 하고 싶다. 축구는 관심 없다. 그럼에도 뜻대로 하지 못한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생각해보면 웃긴 일이다. 미식축구 선수가 미식축구를 하겠다는 게 그렇게 잘못된 일인가? 와터포크 FC는 축구팀이다. 물론 그 잘났다는, 프리미어 리그에 속한 팀이기는 하다. (강등권이라 문제지!) 그러나 그는 미식축구 선수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2004년, 샌프란시스코 식스티나이너스의 1지명을 받았다. 샌프란시스코 식스티나이너스는 미식축구팀이다. 미국의 4대 스포츠 리그 중 하나인, 내셔널 풋볼 리그(NFL)에 속한 팀이다. 그가 뛰었고, 또 지금 마땅히 뛰고 있어야 할 곳이다. 허나 그는 지금 대서양 건너편인 영국에서 와터포크 FC의 골키퍼로 뛰고 있다. 심지어 원하지도 않는데도 말이다. 그가 와터포크 FC에서 골키퍼를 맡게 된 사연은 이랬다.

- 손 쓰는 운동이 전공이라 공을 못 차시겠다고? 그럼 손 쓰는 골키퍼나 시키지?

  그렇게 그는 와터포크 FC의 골키퍼가 되었다. 이런 무심하고, 또 멍청한 일이 정말 있었던 일이다.

 

  아침의 공기는 상쾌하다기보다는 매캐했고 흐린 하늘은 우울하다기보단 음울했다. 엷게 깔린 안개를 헤치며 기차가 출발하는 사이 그는 동승한 승객들을 무심하게 바라보았고, 그들 안에 간직된 설레임을 자신의 안에서는 발견할 수 없음을 무기력하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랬다. 정말로 그랬던 것이다. 그의 앞에 놓인 것은 또 한 번의 무의미한 하루였다.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기적도 탈출구도 없었다. 그는 축구공이 정말로 싫었다 (원하지 않는 축구팀에서 뛰는 미식축구 선수하면 누구라도 그렇게 느낄 것이다). 검정색과 흰색의 육각 무늬가 교차하는 인조 가죽을 볼 때마다 그는 살의 아닌 살의를 느꼈다. 항상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빅토리아 녹스 주머니칼로 찔러 그 매끈한 표면에 사정없이 구멍을 내고 싶었다. 바람이 빠지며 형편없이 찌그러드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끊임없이 되뇌었다. '세상의 모든 축구공을 터뜨리고 싶다. 눈 앞에서 치워버리고 싶다'라고.

 

3

 

  축구와 미식축구의 차이를 사람들에게 이해시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스포츠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나 그 차이를 이해할 수 있을 뿐이고 생각 외로 많은 사람들이 스포츠에 많은 관심을 두지 않았다 (더 나쁜 소식은 여기 와터포크가 영국이라는 사실이었다). 지난 밤에도 그랬다. 그는 상심한 사람들이 으레 그러하듯이 바에 들어가, 실성한 사람들이 대개 그러는 것처럼 술을 퍼 마시며 중년의 남자 바텐더(팔자 모양으로 말아올려진 콧수염을 가진)에게 그 차이를 설명하는 중이었다. 손님들의 신세 한탄에 이력이 났을 법도 한 바텐더지만 그를 위로하기에 충분한 인내심은 없었던 듯 했다.

- 로치 씨, 지구상에 풋볼이라고 할만한 것은 단 하나밖에 없어요. 지금 어떤 풋볼을 이야기하고 있는 거요?

- 내가 말하는 풋볼은 풋볼이요. 대서양을 건너오기 전에 내가 엔에프엘, 그리고까 내셔널 풋볼 리그에서 뛰면서 했던 풋불.

- 오! 미안하지만 우린 그걸 풋볼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로치 씨.

- 아! 미안하지만 난 그걸 풋볼이라고 부릅니다. 당신들이 하는 사커라는 이름의 공놀이가 아니라.

  (이런, 너무 유치한 대응 아니야? 내가 어쩌다고 이렇게 된 거지?)

  바텐더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가 한 마디만 툭 내뱉고 돌아서 자기 일을 시작했다.

- 마음대로 하쇼! 그렇게 부르던가 말던가!

 

  그리고 나서 어떤 매력적인 여성 한 분이 (마치 그와 바텐더의 사이를 중재라도 하려는 듯) 끼어 들어왔던 것이다.

- 안녕?

- 그래요, 안녕.

- 난 로즈라고 해요.

- 내 이름은 마이크입니다.

- 반가워요, 마이크.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실 이런 일을 처음 겪는 게 아니었다. 그가 매력적이어서가 아니다. 보통 사람들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바를 전전하며 보내기 때문이었다.

- 그래서 마이크. 무슨 문제인 건지 한 번 나한테 털어놓지 않을래요?

  여자들에게 스포츠가 그리 호감가는 주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 그냥 별 일은 아니고…….

- 왜 이래요? 숨길 이유가 뭐 있어요. 앵그리 조랑 하는 말을 언뜻 들었다고요. 풋볼 이야기로 언성을 높이는 것 같던데 나도 좀 끼워줘요. 나도 풋볼에 대해 좀 안다고요.

  '앵그리 조'는 팔자 수염 바텐더의 별명이었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 풋볼 좋아하나요?

  로즈는 너털 웃음을 터뜨렸다.

- 이래뵈도 풋볼 팬이라고요. 응원하는 팀도 있어요. 와터포크 FC!

  마이크은 이 대목에서 잠시 뜸을 들였는데 그것은 극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뭐라 대꾸해야 좋을지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역시나 서로 다른 풋볼을 이야기하고 있음을 둘째 치더라도) 자신이 응원하는 팀의 선수를 못 알아보는 팬이라니 (물론 선수 얼굴을 다 익히라고 강요할 수는 없는 문제겠지만……). 그의 침묵을 로즈는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였던 듯 했다. 그녀는 마치 치어리딩이라도 하는 것처럼 두 팔을 높이 뻗어 흔들었다. 

- 예이! 와터포크 FC!

  동시에 그녀는 마이크의 방향으로 가슴을 한껏 내밀었는데 그 몸짓에 의도적인 부분이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건 마치 "이 강아지들을 좀 봐줘요"라는 표현과도 같았다 (그는 몸짓 언어에 능통하지는 않았지만 그 정도는 능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다만 크기와 형상 등을 고려할 때 '강아지들'보다는 '축구공들'을 연상케 한다는 것이 보다 적절한 표현이란 생각은 들었다. 축구공! 망할 축구공! 순간 생각이 그렇게 흐르자 축구공을 향한 오래되고 강렬한 적의가 오히려 묘하고 병적인 흥분과 뒤섞이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마치 남몰래 축구공을 탐하는 것이 짜릿한 일탈이 되기라도 할 것처럼. 그렇게 그는 마음을 먹었다. 상대가 공짜로 점수를 주겠다면 굳이 마다할 필요는 없겠다고.

- 실은 운동 선수에요. 풋볼을 하죠.

- 멋진데요. 어디서요?

- 미국에서 했었죠. (여기서 하는 건 풋볼이 아니니까. 적어도 나한테는.)

 

  그녀는 손을 뻗어 얼음잔을 잡고 있는 그의 왼손을 쓰다듬었다.

  (알 마이클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세컨 앤 쓰리! 두 번만에 7 야드를 전진했네요!") 

- 멋진데요? 난 운동하는 남자가 좋더라.

  신호는 점점 노골적인 것이 되어가고 있었다.

  (다시 알 마이클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퍼스트 다운! 세 번만에 10 야드를 찍었어요!")

- 보여줄 수 있어요? 여기 말고 다른 장소에서?

  게임이 잘 풀리는 날이 있다. 잘 안 풀리는 날이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다만 여자를 자기 방으로 데려가기는 싫었다. 그의 방은 작고 좁고 더러웠다. 춥기도 했다. 그리고 침대도 없었다. 침대 살 돈을 아끼느라 내내 인텍스의 에어 매트리스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매일 아침 허리가 끊어질 것 같은 고통이 밀려왔다. 한때 척추 보호를 위해 따로 보험을 들고 개인 마사지사까지 고용했던 남자의 오늘로는 더 없이 비참한 것이었다.

- 그런데, 내가 이 동네 사람이 아니라…….

- 괜찮아요. 내가 이 동네 사람이니까.

  그녀는 그의 속뜻을 빨리도 이해했다. 아니면 정말 작정한 모양이거나.

  (다시 알 마이클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골라인까지는 이제 25 야드! 대단하네요!")

 

  불켜진 앵그리 조의 바와 셔터가 내려진 철물점 사이 골목은 마치 어둠의 세계로 향하는 통로 같았다. 로즈의 집으로 향하기 전에 빠르고 확고한 키스가 이루어졌는데, 위치우드 에일, 말보로 맨솔, 그리고 쥬시 프레시의 칵테일을 마신 듯한 새롭고도 역겨운 느낌이었다. 그는 내내 축구공들에 대해서 생각하며 죄의식을 한껏 끌어올렸다. 한바탕 몰려왔던 파도가 일단 물러가자 로즈는 그가 왼손만으로 자신을 안고 있음을 알아챈 듯 했다. 

- 오른손을 외투에서 꺼내지 않네요. 바에서부터 그랬어요.

- 실은…… 좀 다쳤어요. 그래서 항상 주머니 속에서 꺼내지 않아요.

- 저런, 딱해라. 언제요?

- 아주 오래 전에. 그래서 풋볼도 그만 두었죠. 공을 던질 수 없으니까.

- 풋볼을 하는데 공을 던진다고요?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악의 없는 질문이었으나 그는 순간 마음 한 구석이 뒤틀리는 느낌을 받았다. 잘 막아두었던 나무 판자들 사이가 벌어졌다. 삐이익. 못대가리가 들썩거렸다. 끼이이익. 진틍색 구름이 다시금 그의 '고요한 마음 속 산장'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폭풍의 전조였다. 

- 당연히 공을 던지죠. 풋볼인데!

  그녀는 깜짝 놀라는 표정으로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 왜 소릴 질러요. 아, 알겠다. 처음부터 아메리칸 풋볼이라고 말을 해주던가. 난 그리드 아이언(Gridiron)를 말하는지 몰랐잖아요.

  (알 마이클스가 탄식했다. "아……, 터치 다운을 목전에 두고 디펜스 태클에 걸려 공을 놓쳤네요!”)

- 풋볼은 풋볼인데 내가 왜 일일이 설명을 합니까?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는 뭔가를 뽐내거나 과시할 생각이 아니었다. 단지 이해받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의 풋볼이 이나라 사람들의 풋볼과 다를 수 있음을. 문제는 그 고약한 불통의 책임이 로즈에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녀로서는 그의 정색이 황당할 따름이었다. 

- 그게 화낼 일인가요?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투로 어깨를 으쓱해보이며 한 마디 덧붙였다.  

- 그 차이가 그렇게 중요한가요?

 

  순간 그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그녀를 벽으로 몰아 붙이고 목을 졸랐다. 정확히는 조르려고 했다. 내내 감추어왔던 오른손도 자기도 모르게 꺼내었다. 하지만 오른손잡이였던 그는 왼손에 전혀 힘을 주질 못했다. 그리고 오른손의 상황은 더 나빴다. 손가락이 하나도 없었으므로. 처음엔 당황해서 공세에 밀렸던 로즈도 그의 힘이 예상외로 약하자 서슴치 않고 온 힘을 다해서 밀어냈다. 그나마 그가 넘어지지 않은 것은 10년 전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았던 하체 운동 덕분이라고 해야할 것이었다.

- 별 미친 놈 다 보겠네!

  (이제 알 마이클스는 아무 말 없이 머리를 감싸고 있었다.)

  누가 재촉하기라도 하듯 빠른 걸음으로 사라지는 로즈의 뒤에 대고 그는 소리를 질렀다.

- 도대체 그리드 아이언이란 말을 누가 쓰냐고! 

  그래도 럭비라고는 안 했으니 다행이기는 했다.

 

  그는 또 다시 자신의 마음이 주체할 수 없는 소용돌이에 의해 점령당했음을 발견했다. 시간 제한이 있는 시험 문제처럼 답을 할 수 없는 질문들이 그의  마음 속으로 진격해 들어왔다. 너는 누구인가? 너는 여기서 뭘 하고 있는가? 너는 왜 내일 아침 축구팀으로 출근해서 백업 골키퍼 놀이를 해야 하는가? 너의 인생을 다시 궤도 위로 올려놓을 수는 없는 것인가? 늘 이런 식이었다.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 '고요한 마음 속 산장'에 숨어 용케 잘 버티다가도 한 번 시작되면 돌이킬 수가 없었다 (최소한 이틀에서 사흘은 가겠지?). 홧김에 주먹을 들어 벽을 쳤다 (왜 하필 오른손으로?). 하지만 그의 오른손에는 주먹으로 규정될 수 있는 부분이 없었다. 그건 주먹이라기 보단 그냥 살덩어리였다. 나쁜 소식이 있다면 그래도 아프고 쓰라리기는 마찬가지였다는 사실이었고, 여기에 그나마 좋은 소식이 있다면 이럴 때 부러뜨리기 딱 좋은 작은 손가락뼈들이 남아 있진 않단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오른손에 (덜렁거리며) 달려있는 민둥산의 끄트머리가 긁히고 찢어져 검붉은 피가 스며나는 것을 보았다. 화산이 폭발하여 용암이 밖으로 흘러나오는 기괴한 그림을 상상했다. 그는 온 힘을 다해 악을 썼는데 그 소리에는 힘과 안정감이 전혀 없었다. 불안에 끈적끈적하게 적셔진 괴성이었고, 어떤 끔찍한 것이 성대를 긁으며 몸 밖으로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이라고 할 수 있을만한 것이었다. 조용하고 어둡고 좁은 골목길 한가운데서도 그 소리는 울리거나 반사되거나 흔적을 남지 않았다. 마치 벽에 부딪히지 않고 투과하여 사라져 버린 듯 했다. 그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 앉았다.

 

  내일도 그는 축구팀으로 출근할 것이었다. 종일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고 회의하고 분노하다가 밤이 되면 이 거리로 나와 일회적이고 의미없는 만남을 갈망할 것이다. 그는 문득 방금 겪었던 일이 (그 여자의 이름이 무엇이었더라? 노라? 캐시? 에이미?) 정말 오늘 겪은 일인지 의심을 갖게 되었다. 어제나 그저께 있었던 일이었던 것 같기도 했고, 내일이나 모레 겪게 될 일이었는지도 몰랐다 (어쩌면 매일 같은 일을 겪고 있는지도 모르지). 오늘도 기적은 없었다. 여전히 탈출구는 보이지 않았다. 일어나서 점퍼를 털고 그는 걷기 시작했다. 고통으로 욱신거리는 오른손을 주머니 안에 넣은 채로 아침이 올 때까지 걸었다.

 

4

 

  2005-2006 시즌부터 2007-2008시즌까지 샌프란시스코 식스티나이너스 프로미식축구 선수로 3년을 보내는 동안 마이크 로치가 이뤄낸 것은 생각보다 많았다. 우선 프로 선수로 성공적인 커리어의 시작을 만들어냈다. (신인에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뿐만 아니다. 더불어 신인상도 탔다. 물론 운도 따른 결과였다. 입단 첫 해에 기회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시즌 초반 주전 쿼터백 더글라스 G. 라이먼의 부상 이탈로 인한 것이었고 덩달아 백업 쿼터백 케일럽 스미스까지 극심한 부진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케일럽이 욕받이가 되는 사이에 갓 대학을 졸업한 그가 얼결에 등 떠밀려 본 게임에 나서게 되었는데 초심자의 행운이었는지는 몰라도 마이크은 무난하게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 다음 경기도, 또 그 다음 경기도, 또 그 다음 경기도. 샌프란시스크 지역 언론은 마이크 로치라는 이름에 금가루를 뿌려댈 기세였다. 명성에는 평생 그가 원해왔던 부분이 있었고 그가 원하지 않았던 부분도 있었지만, 어찌 되었든 스타가 되는 기분은 과히 나쁘지 않았다. 그의 성과에 고무된 식스티나이너스는 5년간 주전 쿼터백이었던 더글라스 G. 라이먼을 (채 부상이 낫길 기다리지도 않고) 덴버로 보내는 대신에 약점이었던 러닝백 둘을 데려와 좌우를 보강했다. 팀의 기동력이 살아나면서 마이크의 자로 잰듯한 정교한 패스 능력은 날개를 달았다. 언론은 그에게 두 가지 별명을 경쟁하듯이 붙여주었다. 하나는 젊은 연금술사(Young alchemist)였고 다른 하나는 골든 보이(Golden boy)였다. 뭐가 되었던 그 시절 마이크은 금을 빼놓고는 이야기하기 어려운 남자였던 셈이다. 

 

5

 

  와터포크 FC의 전술 훈련은 화요일 오전 열시부터 시작되었다. 상황별 세트 플레이에서 서로 호흡을 맞추는 연습이었다. 마이크은 골라인 앞에 가서 섰다. 이런 일은 주전 골키퍼의 일이 아니었다. 백업 골키퍼인 그의 몫이었다. 그런 연유로 두 시간 동안 그는 쉬지 않고 사방으로 몸을 날려야만 했다. 채 10분도 지나지 않아 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었는데, 무엇보다 오른손의 통증이 그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그러게 제대로 줠 주먹도 없는 놈이 겁도 없이 벽에 화풀이는 왜 해서……). 그의 고통을 아는지 모르는지 와터포크 FC의 필드 플레이어들은 그를 향해 쉬지 않고 공을 날렸다. 그들로서는 훈련의 목적에 충실했을 뿐이지만, 이 대목에서 어쩌면 이런 의문을 갖는 독자들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이유야 모르겠지만 어쨌든) 현재 마이크은 한쪽 손을 제대로 쓰지도 못하지 않는가. 첫째, 그런 남자를 선수로 골키퍼로 (백업이든 뭐든) 쓰는 프로축구팀이 진짜 있을 수 있나? 둘째, 그 팀의 선수들은 한쪽 손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골키퍼를 향해 공을 차고도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않을까? 셋째, 보통 사람들 앞에서 미식축구와 축구의 차이를 논하는 일이 아무리 부질없다고 할지라도 프로 운동선수들이라면 그 경계에 대한 분명한 인지를 하고 있지 않을까? 이와 같은 질문들에 대한 답변은 단 하나 밖에 없을 것이다. 바로 그것이 그 팀의 분위기를 잘 드러내는 부분이라고.

 

  와터포크 FC는 1911년에 창단했다. 그리고 1967년에 프리미어 리그로 승급을 하였다. 놀라운 선전 끝에 1969년에는 4강에 들었지만 그 후로는 부침을 거듭하다 그저 그런 팀으로 돌아갔다. 정확히 말하자면 강등권을 맴돌았다. 그 사이 좋지 않은 팀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전통이 되었고, 지역 언론의 분위기는 차갑고 냉랭해졌다. 와터포크 FC의 감독직은 독은 들었으나 성배도 아닌 애매모호한 뭔가가 되었고, 선수들 사이에서는 적당히 시즌 수만 채우고 자유계약신분을 얻어 좋은 계약을 맺고 빨리 이 팀을 떠나야한단 생각이 퍼져나갔다. 선수들이 팀 지표보다는 개인 지표에 집착하기 시작한 것은 당연했고, 그 결과 팀 내 트러블이 늘어나는 것도 지극히 당연한 결과였다. 공격조는 수비조를 믿지 않았고 수비조는 공격조에 좋은 일을 하지 않았다. 라커룸에서 서로 멱살을 잡고 싸우는 일도 허다했다. 팀 스포츠에서 이와 같은 현상들이 팀 성적의 발목을 잡는 결과로 이어지지 않으면 그 편이 더 이상할 것이었다. 끔찍한 악순환이었다. 그리고 그 악순환의 끝에 벌어진 황당 천만한 일은 이러하다.

 

1. 어느 날 갑자기 전직 미식축구 선수가 우리 팀에 와서 뛰고 있더라.

2. 그 선수가 백업 골키퍼로 등록이 되어 있는데 오른손이 없더라.

3. 왼손에 가슴을 밀착하여 불안정하게 공을 잡고 민둥머리 오른손으로 안쓰럽게 펀칭을 하더라.  

결론: 그래서 알 게 뭐야? 나완 상관 없는 일이잖아? 

 

  마이크의 입장에서 보면 이 또한 딱한 일이다. 그의 불행에 무관심한 이들을 위해 시간을 벌어주며 이리 몸을 날리고 저리 몸을 굴려야 한다니. 개인 지표를 올려 성공적으로 팀을 떠나는 측면에 있어 그는 해당사항이 없었다. 그는 미식축구 선수였고 그 사실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축구에서 말하는 성적 지표는 미식축구에서 말하는 성적 지표는 달랐다. 반사신경, 볼핸들링, 일대일방어, 페널티장악력, 쓰루패스차단, 수비조율, 공줄볼처리, 골 킥, 펀칭빈도, 공중볼처리 등은 그의 커리어와 무관한 지표였다. 패스 성공률, 패스 시도 수, 패싱 거리, 러싱 거리, 리시빙 거리, 터치 다운, 스코어링, 태클스, 색스, 인터셉츠 등이 그가 이해하는 지표였다. 누구도 그 차이를 이해해주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이 망할 강등권 팀의 어떤 놈이 그랬다. ”로마에 왔으면 로마법을 따라야지" 그만큼 그에게 상처를 준 말도 없었다. 한때 그는 무대의 주연이었다. 경기는 그의 손 끝에서 시작되었고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모든 전개 상황을 조율했다. 지금 그는 한낱 엑스트라에 불과했다. 경기는 남들의 발 끝에서 시작되었고 손을 잃은 그는 어쩔 수 없이 그들의 리듬에 따라 수동적으로 움직여야 했다. 특히 골키퍼 - 주연들을 돋보이게 하고자 몸을 날리는 가장 소외된 존재. 흠뻑 땀에 젖은 몸으로 몸을 날려 가까스로 공을 쳐낼 때마다 그는 속으로 쉬지 않고 되뇌었다. '나는 원해서 축구팀에서 뛰는 것이 아니다. 어쩔 수 없이 묶여 있는 것이다. 말 그대로 어쩔 수 없이 묶여 있는 것이다.’       

 

6

 

  퇴근길에 지나치는 와터포크 정션은 출근길에 지나칠 때 보다는 덜 고약했다. 적어도 하루를 견디고 버텨야 한다는 부담감을 덜어버렸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물론 언제까지 이렇게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똑같은 무의미한 나날을 반복해야 하는지 답답한 마음은 들었다. 무의미한 연습. 무의미한 경력. 골키퍼로 공을 막으며 이리 뛰고 저리 자빠지는 건 그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이었다. 막말로 여기서 골키퍼로 열심히 뛴다고 잃어버린 커리어를 되찾을 수 있나? 다리는 뻐근했고 허리도 욱신거렸다. 무엇보다 오른손이 나무 아팠다. 단순히 지쳤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매일 뭔가가 서서히 몸에서 빠져나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느낌이었다.

 

  그는 알았다. 오늘 밤에도, 지난 밤처럼 바를 전전하게 될 것임을. 왜냐하면 그는 미식축구 선수인 자신이 왜 영국에 건너와 축구팀에서 뛰고 있는지에 대해 설명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누구라도 좋으니) 타인으로부터 이해를 받아야만 했다. 설령 그것이 새로운 관계 맺음의 가능성을 망가뜨릴 것이 너무도 분명하더라도 (이를테면 바로 어제 있었던 일처럼) 당장은 그것만이 외로움으로 미쳐버리기 전에 구원받을 유일한 길이었다.

 

  마이크가 미식축구 선수였을 때는 관계에 목말라한 적이 없었다. 그는 스타였고 항상 주위엔 사람들이 넘쳐났다. 연애에 대해 말하자면 평범하지 않은 사연도 많았다. 이를테면 은퇴 모델이라든가 (물론 그래봐야 이십대 후반이었지만), 현직 모델이라든가, 모델 지망생이라든가, 모델 지망생을 지망하는 어린 애들이라든가. 런웨이에서의 즐거운 모험 끝에 결혼을 약속한 사람도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클레어였다. 클레어 B. 윌리암스. 레몬색 머리칼과 길고 가느다란 다리가 인상적인 여자였다. 키에 비해 앳되어 보이는 얼굴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 같았다. 만난지 석 달만에 그녀는 캘리포니아 산호세에 있던 마이크의 저택으로 짐을 챙겨 들어왔다. 두 번째 시즌을 성공적으로 마쳤을 때 그는 푸른 빛이 감도는 16캐럿 다이아몬드 반지와 함께 프로포즈를 했고, 두 사람은 한 달 동안의 유럽 여행 패키지로 허니문을 보내기로 꽤 구체적인 계획까지 세운 상태였다. 웨딩 플래너에게 선금을 지불하는 단계를 넘어 웨딩 싱어를 놓고 고민하는 단계까지 진행되었더랬다. 그때만해도 일이 이런 식으로 틀어질 수 있으리라는 상상은 해보지 않았다. 당연히 그도 그랬고, 아마 잘은 몰라도 그녀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십년이 지난 지금 클레어는 모델을 은퇴하고 광고 에이전시에서 일하고 있다 (그렇게 전해 들었다). 이름이 B로 시작하지 않는 남자와 결혼도 했다. 몇 해 전 우연히 페이스북을 찾아본 덕분에 알게 된 사실들이다 (망할 놈의 페이스북!) 아이도 낳은 것처럼 보였다. 엄마의 레몬색 머리칼을 물려받은 예쁜 여자아이와 예쁜 남자아이였는데, 일란성 쌍둥이가 틀림 없었다. 아마 맞을 것이다. 과거 클레어는 입버릇처럼 그런 말을 했었으니까. "우리 집안엔 쌍둥이 유전자가 있어." 후일 그와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 아이를 갖게 되면 결코 스코어가 1점씩 올라가는 일은 없을 것을 암시하는 말이었다. 그때는 그 말이 불안하면서도 꽤나 달콤하게만 들렸었다. 어차피 그는 한꺼번에 스코어가 벌어지거나 급격하게 줄어드는 상황에 익숙한 미식축구 선수였다. 그는 젊었고 튼튼했고 자신감까지 넘쳤다. 더구나 커리어에 있어 전성기를 향해 가고 있는 중이었다. 최고의 날이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이었던가.

 

  지금도 그는 가끔씩 클레어를 떠올렸다. 그녀를 안고 정수리에 코가 닿았을 때 정말로 갓 짜낸 레몬 내음이 났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했다. 인생에 있어 좋은 일과 나쁜 일은 공평하게 돌아온다는 것을 모를 나이는 아니었지만 여전히 미련이 남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누군가 그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났다. "어쩌다 딱 한 가지 놓쳤는데 그 한 가지가 행운일 수 있어." 그 한 가지가 클레어였는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물론 그녀와 결혼했어도 인생에 부침은 있었겠지. 하지만 최소한 지금처럼 궤도를 잃고 미아가 되진 않았을꺼야. 

 

7

 

  와터포크 인근에 위치한 낡은 이층 목조 주택은, 캘리포니아 산호세의 저택과 여러 면에서 달랐다. 비슷한 점이 있다면 이층이라는 것 뿐이었다. 그리고 가장 크게 다른 점은 집주인이 따로 있어 1층에 산단 사실이었다. 스미스 부인은 성미 고약하고 까탈스러운 노파였다. 때문에 마이크는 집으로 들어서는 순간 스미스 부인에게 들키지 않고 조용히 재빨리 2층으로 올라가는 편을 선호했다. 현관 바로 앞에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단 점은 폭이 좁고 길이가 긴 영국 주택들의 장점이었다. 처음 집을 계약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스미스 부인은 마이크 로치라는 남자를 꽤 우호적으로 생각했다. (오른손의 상태 때문인지) 약간 딱하게 생각하는 마음도 드러냈다. 그러나 이후 몇 년간 이어진 그의 무기력하고 비전없는 삶을 지켜보며 서서히 비판적인 입장으로 돌아선 듯 했다. 침대도 없이 에어매트리스에 누워 빅맥으로 저녁을 때우는 것도, 오밤중에 기어나가서 바를 전전하다가 흠뻑 술에 절어 돌아오는 것도, 가볍고 일회적인 만남 끝에 여자들을 집에 데려오는 것도, 스미스 부인이 그를 싫어하게 만든 대표적인 이유들이었던 것 같았다.

 

  2층의 나무 바닥은 낡은 것이 문제라기 보단 일년 내내 스며 나오는 축축한 습기가 문제였다. 급한대로 구해도 깔아 놓은 리놀륨은 효과적이기는 했지만 방의 미관이라는 측면에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한쪽 벽면으로는 자질구레한 상자들을 포개어 쌓아놓았는데 대부분의 그 내용의 절반은 과거 열정적으로 뛰던 시절에 대한 스크랩북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여전히 NFL 현역에서 화려하게 뛰고 있는 당시 동료들에 대한 기사를 오려서 끼워 놓은 것이었다 (가끔씩 그걸 넘겨볼 때마다 질투와 회한이 범벅이 되어 잉크처럼 손에 묻어났다). 특히 욕받이 '케일럽 스미스'의 재능이 워싱턴 레드스킨스에서 만개하여 올스타급 활약을 펼쳤던 2010 시즌, 자신에게 자리를 빼앗기고 덴버 브롱코스로 팔려갔던 더글라스 G. 라이먼이 슈퍼볼에서 전설적인 활약을 펼친 2011 시즌, 정작 샌프란스시코 식스티나이너스는 독보적인 쿼터백이 없어 부침을 거듭했던 2012 시즌……. 과거의 골든 보이는 오늘 폐인이 되었고 과거 연금술에 실패했던 자들은 오늘 빛나는 인생을 쟁취했다. 인생사는 돌고 돈다. 그런 걸 보면 세상의 오묘함에는 실로 이해하기가 힘든 부분이 있지 않은가 싶었다.

 

  그는 찬바람이 스며나오는 창가쪽 공간 대부분을 홈쇼핑으로 구매한 인텍스 에어매트리스가 떡하니 차지하게 내버려 두었다. 사실 최근 그의 몸상태가 과히 좋지 않은 이유에는 에어 매트리스 탓도 있는 듯 했다 (잠깐씩 누워 텔레비젼을 보거나 잡담을 나누기엔 나쁘지 않지만 매일 몸을 눕혀 잠을 청하기에는 꽤 문제가 있는 제품 아닌가!). 그는 그걸 '바람 덩어리'라고 불렀고 퇴근 후에는 늘 그 위에 앉아 빅맥을 먹었다. 빅맥이 물려도 다른 선택이 없었다. 불투명한 미래와 불안한 예금 잔고를 생각하면 그의 인생은 2.29 유로짜리 햄버거에 최적화된 삶이었다. '바람 덩어리' 옆에는 작은 필립스 스탠드가 있고 그 아랜 항상 몰스킨 노트와 몽블랑 스타워커 만년필을 놓아두었다. 만년필은 그가 NFL 신인상을 타던 스물여섯번째 생일에 어제의 아내감이 (물론 클레어다) 준비했던 깜짝 선물이었다. 클레어는 내일의 남편감이 되도록이면 기록하는 습관을 들이길 바랐다. 아름다운 포물선의 패스만큼이나 정확하고 꼼꼼하게. 하지만 그리고 십년이 지났고 오른손을 쓰는 것이 불편해진 오른손잡이에겐 훌륭한 종이와 정교한 만년필도 무용지물이었다. 아쉬운대로 왼손으로 끄적이면 꼭 그만큼의 아쉬운 글씨가 유령처럼 따라왔다. 누구라도 그의 몰스킨을 쭉 넘겨보면 예순일곱 차례나 다음과 같은 문장이 등장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비극은 F로 시작하는 한 단어로부터 시작되었다. 풋볼(Football).'

 

  일단 배가 채워지고 다른 필요가 느껴질 때마다는 반복해서 이런 글을 적어넣기도 했다. 비슷한 문장이 서른 일곱번이나 등장한다. 꼭 같지는 않지만 대개는 비슷하다.

 

  '벼랑 끝에서도 동물적 욕구는 사라지지 않으나, 평범한 살덩어리가 되어버린 오른손으로는 스스로 사랑할 수도 없다.' 

 

  물론 이런 문장도 스물 세 번 등장한다.

 

  '나는 왜 왼손잡이가 아닌가, 혹은 왜 오른손 대신 왼손을 잃지 않았는가?'

 

  어떤 날에는 또 이렇게 적었다. 마치 누군가에게 변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하지만 그런 이유로 바를 전전하며 만남을 갈구하는 것은 또 아니다. 난 그저 F로 시작하는 한 단어가 어떻게 인생을 망가뜨릴 수 있는지 그들이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 뿐이다.'

 

  글씨가 삐뚤빼뚤한 것은 비단 부끄러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와 비슷한 상황을 겪은 이들은 신체적 감퇴와 함께 그런 욕구가 사라지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괴롭하는 쾌락의 갈증은 너무도 생생했다. 최근 바에서 만났던 여자들이 아쉬웠다. 조금만 더 까탈스럽게 굴었어야 했다. 노라든, 캐시든, 에이미든, 무슨 차이가 있으며 무슨 상관이 있는가. 누구의 온기라도 간절한 처지가 아닌가. 하지만 ……, 축구와 미식축구의 차이를 알아주는 건 진실로 중요한 일이었다. 저들이 말하는 패스 성공률과 내가 말하는 패스 성공률은 같은 게 아니야. 그걸 알아야 비로소 그의 고통의 근원을 들여다 볼 수 있지 않겠는가.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도 쉽고 태연하게) 그런 말을 하지. "그냥 눈 딱 감고 몇 시즌 와터포크 FC에서 뛰면 안돼?" 그럴 때면 악을 쓰듯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 게 아니야! 그런 게 아니라고!”라고. 그는 어딘가에 속한 사람이거나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또 다시 자신의 마음이 주체할 수 없는 소용돌이에 의해 점령당했음을 발견했을 때 그는 기계적으로 의자에 걸쳐 두었던 얇은 가디건을 걸치고 방을 나섰다. 그 모습은 마치 체념에 가까운 의식처럼 보였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갔지만 사실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9시만 되면 스미스 부인은 세상 모르고 잠이 들었으니까. 9시만 되면 세상 모든 이를 깨워 자신의 기구한 인생에 대해 설명하고 싶단 생각에 시달리는 남자는 오늘도 어김없이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밤거리로 나섰다. '바를 전전하다가 흠뻑 술에 절어 돌아오겠지. 운이 좋다면 노라나 캐시나 에이미나 뭐 그 딴 이름을 가진 애들을 만나 (알 마이클스의 생중계를 상상하며) '터치 다운까지 전진하기' 놀이를 시작할 수도 있을 테고.' 뭐가 우스웠는지 그는 혼자 키득거렸다. 한 번 터진 웃음은 홍수 때 둑을 넘어 불어난 물이라도 되는 듯 좀처럼 막기 쉽지 않았다. 다시 클레어의 기억을 떠올리게 될 때까진 아마도 멈추지 않을 것만 같았다. 

 

8

 

  그때 영화관으로 향한 건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술의 축축한 기운 혹은 씁쓸한 성분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마법 같은 밤안개 입자들이 그를 그리로 인도하였던 걸까? 어쩌면 안팎의 긴밀한 화학 작용이 그의 연약한 안쪽 세계까지 미지의 영향을 미쳤는지도 몰랐다. 소득 없는 밤이었다. 몇 번의 터치다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그의 귓가에 열성스런 라이브 중계를 속삭여주던 알 마이클스의 목소리에도 이젠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이도 저도 다 지겨워졌으나 딱하게도 집으로 돌아가 잠을 청할 수도 없었다. 소용돌이치는 마음이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을 모양이었으니까. 그렇게 우연히 발길이 닿은 곳이 와터포크 변두리의 작은 극장이었다. 단 한 개의 상영관에서 새벽 상영을 하고 있는 영화는 우디 앨런의 2005년작 '매치 포인트(Match Point)'. 선택의 여지는 없었지만 딱히 싫은 선택도 아니었다. 중계는 포기했지만 여전히 좋은 친구인 알 마이클스가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좋은 선택이네, 키도. 물론 선택권이 없긴 했지만……. 훌륭한 영화인데 본 적이 있나?)

 

  물론이었다. 2005년이면 그의 인생이 동화처럼 아름다웠던 시절이었고 늘 옆에는 클레어가 있었다. 이 영화도 시즌이 끝나고 난 다음에 그녀와 함께 보았던 것이었다. 에밀리 모티머가 연기했던 영화 속 주인공의 약혼녀 이름이 클로에였다. 클로에와 클레어는 ‘아기 이름 짓기' 책에 알파벳 순으로 나란히 등장할만한 이름이라 상당히 가깝게 들렸기 때문에, 그들은 한동안 넉넉히 써먹을 '둘만의 농담'을 만들기도 했다 (두 이름의 기원에 연관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나중의 일이었다. 정말로 '아기 이름 짓기’ 책을 마을 도서관에서 빌려왔을 때……). 아무튼 그땐 순진했던 봄날이었고 인생이라는 기차에 탈선 가능성이 항상 잠재되어 있단 생각을 해보지 않았었다. 우디 앨런식 세계와 그의 세계는 (문자 그대로) 백만 야드는 족히 떨어져 있었으며 그는 영화가 지나치게 냉소적이라고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프닝 장면만의 나레이션만은 놀랄만큼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있었다. 클로즈 업 된 네트 위를 바쁘고 오가는 테니스 공……, 그 위로 나직하게 흐르던 조나단 라이 메이어스의 목소리…….

 

"나는 잘하기보단 운이 좋았으면 좋겠다"라는 어느 이의 말은 삶의 속성을 간파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삶의 많은 부분이 운에 의해 좌우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길 두려워한다. 통제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섭기 때문이다. 테니스 게임에선 공이 네트의 윗 부분을 건드리는 경우가 있는데, 바깥쪽으로 넘어갈지 안쪽으로 되돌아올지를 결정짓는 것은 아주 짧은 순간에 이루어진다. 운이 좋다면 공은 바깥쪽으로 넘어가고 당신이 이길테고, 만약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질 것이다."

 

  걷잡을 수 없는 결말과 함께 영화가 끝났을 때는 이미 새벽 4시 30분을 넘은 시각이었다. 마치 추운 겨울 날 따뜻한 이불 속에서 그러하듯 그는 영화 바깥의 세계로 나가는 것이 싫었다. 이제 세 시간쯤 지나면 다시 출근을 해야겠지, 오늘도 날아오는 성치 않은 몸을 던져 날아오는 축구공을 막아야겠지, 또 명색이 주장이라고 이런 저런 성가신 일들의 책임이 내게 쏟아지겠지, 그러다보면 또 다시 그런 생각을 하겠지.

  '나는 누군가?'

  또는,

  '도대체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가?'

 

  영화관을 빠져나가는 그의 어깨를 누군가 가볍게 (하지만 의도적으로) 건드렸다. 돌아보니 어떤 여자가 그를 올려다보고 있는데 낯선 얼굴이었다. 적어도 그가 기억하는 한 모르는 사람으로 보였다. 그의 어깨까지 오는 키에 어깨에 살짝 닿는 길이의 머리칼을 포니테일로 묶었다. 염색과 탈색을 반복하다 가장 최근엔 금색을 물들였지만 타고난 머리색은 붉은 빛인 걸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하얀 얼굴에 자잘한 주근깨를 보면 (조금 미안한 이야기지만) 원래 머리색과 더 잘 어울릴 것 같았다.   

- 저기요?

- 저 말이에요?

  그는 처음에 다른 사람을 부르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여자가 고개를 끄덕거리는 걸 보니 그를 불러세웠던 게 확실한 모양이었다.

- 맥도날드 자주 오시죠? 매일 빅맥을 사가시잖아요.

  그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빅맥을 사가기야 하니까, 그것도 매일. 하지만 이 여자가 그 사실을 어떻게 알지?

- 내 이름은 엠마라고 해요. 맥도날드에서 저녁 시간대 파트 타임으로 일하죠. 당신을 여러 번 봤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들떠있었다. 마치 처음으로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이라도 한 사람처럼. 입꼬리가 올라갈 때마다 보조개가 오목하게 파였다.

- 그걸 어떻게…….

- 기억하느냐고요? 단골은 많지만 하루도 빼지 않고 오는 손님은 드물거든요.

  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 혹시 절 기억하실 수 있겠어요?

  그녀는 오른손을 바르게 펴서 앞머리가 이마를 가려 보였다. 맥도날드에서 노란색 M이 그려진 모자를 썼을 때의 얼굴을 보여주려는 듯이.

- 미안해요. 잘 모르겠네요. 

  하지만 그가 어떻게 반응하기도 전에 그녀는 그의 귀에 가까이 다가와 속삭였다. 누가 훔쳐 듣기라도 하면 안된다는 듯이.

- 사실은 우리 아르바이트생들 사이에서 당신을 두고 다양한 추측들이 있었다고요. 매일 빅맥을 사가는 이유가 궁금했거든요. 누구는 우릴 감시하고 있는 맥도날드 본사 사람일 거라고도 했고 다른 누구는 집에서 개를 키우는데 개밥 대신 빅맥을 주는 게 아니겠냐고 했죠. 또 누구는 당신이 납치범 비슷한 건데 피해자에게 매일 식사로 빅맥을 사다주는 게 아니냐고 했고요. 또 어떤 아이는 (참고로 그 애 이름이 수진데) 꽤나 로맨틱한 상상을 했죠. 당신이 우리 아르바이트생들 중 하나에 마음이 있어서 매일 찾아오는 게 아니냐고 말이에요. 아무튼 우린 내기까지 했어요. 당신을 두고 말이에요! 

 

  초면에 (비록 상대는 초면이 아니라고 굳게 믿고 있지만) 이렇게 쉬지 않고 떠들어대니 부담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보통 사람들은 새벽에 마음이 차분해진다고들 하지만, 적어도 그녀에게 있어 그 말은 해당 사항이 없는 듯 했다. 알 마이클스가 그의 반대쪽 귀에 대고 속삭였다.

  (조심하게, 키도. 빨간 머리들 중엔 살짝 나사 빠진 애들이 많다니까.) 

  하지만 뭐 어떤가. 이 여자애가 이야기의 나사를 조여주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면…….

- 그래서…….

- 그래서 왜 말을 걸었냐고요? 반가워서요.

  (내 말이 맞지, 키도? 약간 맛이 간 애라니까.)

- 그래요. 나도 반가워요. 엠마.

- 좋아요. 미스터…….

- 로치에요. 마이크 로치. 그냥 마이크이라고 불러줘요.

- 그래요. 마이크. 이 늦은 시간에 여기서 뭘 하시는 거죠?

- 영화를 봤죠. 보시다시피…….

- 그래요? 심야 영화를 즐기시나 보죠? 자세히 듣고 싶은데요?

- 왜요?

- 맥도날드 와터포크점 아르바이트생들을 대표해서 미스테리 맨의 정체를 파헤치고 싶달까요?

  자기 말이 뭐가 그리 우스웠는지 엠마는 낄낄거렸고, 알 마이클스는 고개를 저으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답이 없네, 닶이 없어. 이 친구야. 지금이라도 '비상 탈출' 버튼을 눌러야 해.)

 

  하지만 '비상 탈출' 버튼을 누르기에 그는 너무도 외로웠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이 길을 잃었음을 누군가 알아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는 이 도시에 친구가 없었다. 새벽까지 술집을 전전하다 혼자 심야 영화를 보고 나온 사내. 상상 속의 ‘선데이 나이트 풋볼’ 캐스터와 대화를 나누는 사내. 그런 마당에 나사 빠진 애를 좀 상대해주면 어때? 이야기라도 잘 들어주면 그것만으로도 고맙지. 어디서 이야기했으면 좋겠냐고 묻자 엠마는 자기 집이 근처라고 했다. 펑크 록밴드 ‘더 라몬즈’의 노래가 들리는 듯 했다. (“헤이, 호 가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집에 따라와 기네스를 몇 잔 얻어 먹은 상태였다. 언제나 그렇듯이 기네스에는 마음의 문을 여는 힘이 있었다. 그녀는 맥도날드에서 쓰는 커피 슬리브를 (집에 가져와 쌓아놓고 있단 사실을 매니져에게 일러바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자기 이마에 붙였다. 'CAUTION: I'M HOT'이라고 쓰여진 부분이 보이도록. 그녀는 킬킬 웃었다. 그도 킬킬 웃었다. 웃으니 술기운이 더 빨리 도는 것 같았다. 용기를 얻은 그는 끈질기게 숨겨두었던 자신의 오른손을 바지 주머니에서 꺼내어 보여주었다. 코가 빨갛게 달아오른 그녀는 존재한다고 보기도, 그렇지 않다고 보기도 애매한 그의 오른쪽 손목 윗부분을 만지며, "이제까지 이 방에 들렀던 다른 모든 남자들은 손이 두 개였어요. 하지만 당신은 다른 부분을 두 개 갖고 있군요"라는 제 나름의 독창적 해석을 내놓고는 귓바퀴까지 빨개져 미친 사람처럼 킬킬거렸다. 그는 중얼거렸다. "한번도 그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내 경고 했어지, 키도? 난 분명히 경고했다고…)

 

  조금 더 용기를 얻은 그는 샌프란시스코 식스티나이너스의 프로미식축구선수(그것도 쿼터백)가 영국으로 건너와 와터포크 FC의 프로축구선수(그것도 골키퍼)로 뛰게된 사연에 대해 설명하고 싶어졌다. 네트 위에 공이 살짝 걸쳐 어느 쪽으로 떨어질지 알 수 없었던 그 순간의 이야기. 이제껏 그가 맺고자 하였던 모든 인간 관계에 있어 예정된 파국을 불러왔던 그 마법같은 이야기. 자신의 사연을 다른 이들에게 이해시키는 일은 항상 그를 초라하고 비참하게 만들었다. 모두가 자신의 인생을 숫자로 보여주는 시대에 구구절절한 설명을 들이 밀어야 한다는 건 딱한 일이었다. 아무리 엠마가 (과도하게) 열린 자세로 적극적으로 그와의 대화를 주도해나가고 있다고 한들……, 스포츠에 큰 관심이 없는 타입의 여성에게 축구와 미식축구의 차이를 명확하게 이해해주길, 나아가 그 중요성에 공감해주기를 바라는 건 역시나 무리한 일이었을 것이다.

- 그럼 어쩌다 여기 축구팀으로 오신 거예요? 그렇게 유명한 선수라면 그냥 '미국 축구팀'에 있었으면 되었을 것을.

  (미국 축구팀?)

 

  수도 없이 마주한 이 질문 앞에서 그는 항상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할 말이 없어서는 아니었다. 사실 할 말은 너무 많았지만 운을 떼기조차 힘들었다. 마치 가슴에 뭔가 묵직한 것이 걸린 것처럼. 얇게 썰어진 문장들이 눈 앞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때문에 몇 가지 단어를 소리 내어 말할 수는 있을지언정 매끄럽게 이어가지를 못했다.  '이러다가 미쳐 버릴지도 모르겠어.' 그래서 상담 치료를 받은 적도 있었다. 효과는 없었지만. 대부분의 상담사들은 아주 짧은 시간에 작은 운의 작동 여부가 인생의 지침을 돌려 버릴 수 있다는 점은 이해해도, 그 분석 공식에 '축구'와 '미식축구'라는 항을 대입하는데는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니 나사 빠진, 맥도날드 아르바이트생 엠마를 탓할 일도 아니다. 

- 아무튼 꼬이는 인생이라는 거로군요. 거기에 대해선 나도 일가견이 있어요.

 

  그런 정도가 엠마로서는 최선의 이해였던 것이다. 그리고 엠마는 자기 인생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원래 그녀는 와터포크의 인디 음악가였고, ‘치킨 사테이’라는 이름의 포크 록 밴드의 홍일점으로 건반을 담당했다고. 당시 밴드의 리더와 사귀고 있었고 ‘치킨 사데이’의 괜찮은 곡들은 모두 자기가 만든 것이라고. 자기는 그 남자를 너무도 사랑했었기 때문에 모든 곡을 공동 작곡으로 발표했지만 사실 엄밀히 기여도를 따지자면 그 남자는 연필조차 깎아준 적이 없었고. 그런데도 그 남자는 기회가 찾아오자 그녀가 만든 모든 곡을 훔쳐 ‘치킨 사테이’를 팽개치고 도망가 혼자 메인스트림에 데뷔를 했다고. 언론에서 '제 2의 ‘멈포드 앤 선즈’가 될지 모르는 신인들'라고 호들갑을 떨자, 자기가 '브리티쉬 포크 록'의 이정표를 세우겠다는 꼴값으로 화답했다고. 그리고 눈물 한 바가지와 함께 남겨진 그녀는 시간당 5.55 유로를 받고 2.99 유로짜리 빅맥을 팔면서 처량하게 맥도날드에서 일하고 있다고. 아무튼 그 인간이 자기 없이 다시 그런 곡을 써낼 수 있다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고 매일 이를 갈면서.

- 내 처지도 당신과 다르지 않아요.

  그 말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아니 내 상황이랑은 달라.)

- 아마도 와터포크는 저주받은 영혼들이 모이는 도신가봐요.

  그 말은…… 조금 동의해줄만 했다.

 

  마티넬리 골드메달 애플쥬스의 작고 넓직한 병에 알뜰하게 타들어간 던힐 멘솔 라이트을 눌러 끄고 엠마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살짝 입을 맞췄다. 달큰한 사과향과 약간 역한 박하향이 났다. 그리고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빅맥의 맛도 났다. 덩달아 나사가 풀어지는 기분이었다. 좋은 친구 알이 함께였다면 그를 말렸겠지. 이런 식으로 상실감을 채워가는 데 한계가 있단 사실은 그도 알았다. 동시에 이 도시가 허락하는 최대의 위안이라는 사실도 알았다. 아주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그녀는 왼손으로 머리끈을 풀며 오른손으로 라디오를 켜고 볼륨을 적당히 낮추었다. 

- 벽도 얇고, 집 주인도 예민하고, 음악을 틀어놓으면 덜 낯설 것 같고…… 아무튼 그래요.

 

  그녀가 천천히 그의 얼굴을 쓰다듬는 동안 라디오에서는 재즈 스탠다드 'Isn't it a pity?'의 연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침대 스프링이 아코디언처럼 소리를 내며 그럴듯하게 박자를 맞추었다. 다른이의 온기가 살갗에 닿았다는 것보다 그를 더 안도하게 하는 것은 오래간만에 느껴보는 진짜 침대 매트리스의 감촉이었다. 물론 시몬스나 탬퍼가 아닌 싸구려임은 분명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에어 매트리스의 느낌과는 비교가 될 수 없었다.

 

♬ Why did I wander

Here and there and yonder

Wasting precious time

For no reason or rhyme

 

Isn't it a pity

Isn't it a crime

My journeys ended

Everything is splendid

 

Meeting you today

Has given me a wonderful idea

Here I stay

 

It's a funny thing

I look at you

I get a thrill

I never knew

 

Isn't it a pity

We never met before? ♬

 

  그의 오른손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 오늘은 내가 당신의 머큐로크롬이 되어줄께요.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 어떻게 보면 당신 손이 럭비공을 닮은 것 같기도 해요.

 

  그 말이 이상하게도 호수에 던져진 돌맹이처럼 파문을 일으켰다. 순간 그는 정색을 했다.

- 럭비용 공과 미식축구용 공은 다르죠. 물론 크기나 모양이 상당히 비슷한 건 사실이지만 절대 같은 공이 아니에요.

- 미안해요. 내가 몰라서 그랬어요.

  하지만 그는 이미 듣고 있지 않았다. 증기 기관차가 머릿속을 통과하는 기분이었다. 칙칙폭폭.

- 크기는 11인치로 같아요. 하지만 가장자리 모양이 다릅니다. 럭비공은 양쪽 끝이 평평하지만 미식축구공은…….

 

  인내심이 한계에 이르렀는지 엠마는 신경질적으로 그를 밀어내며 일어났다.   

- 알았어요. 알았다고요. 난 평생 럭비고 축구고 한 번도 보고 앉았던 적이 없는 여자라고요. 이제 당신이 대단한 미국 축구 선수라는 걸 알았으니까 이제 그만 좀 하라고요.

  그녀는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던힐 멘솔 라이트를 찾아서 불을 붙였다.

- 그 차이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요? 가장자리의 모양이 공기 역학적인 차이를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공의 궤적이 달라지고, 그래서 패스의 방식이 달라지죠. 그 결과 완전히 다른 스포츠가 되는 겁니다.   

  그가 순순히 물러서지 않자 그녀도 지지 않고 쏘아불이기 시작했다.

- 아, 그러세요. 전 몰랐네요. 다시 미국 축구를 잘 해보세요. 그리고 여긴 영국이고 (이 대목에서는 ‘잉글랜드’가 아니라 ‘더 유나이티드 킹덤’이라고 했다) 제 집이니 그만 나가주셨으면 좋겠네요. 

- 물론 다시 할거요. 난, '미국 축구'가 아니라 미식축구를 하러 다시 고국에 돌아가 샌프란시스코 식스티나이너스에서 뛸거라고요.

- 잘해보세요. 오른손이 그 모양인데 어떻게 다시? 당신 정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죠?  

 

  그 말이 조용히 물러나려던 그의 발목을 잡아챘다. 거의 동시에 그의 눈앞에 옛날식 이발소 표지등이 나타났다. 빨간 리본, 파란 리본, 하얀 리본……. 리본은 점점 더 빠르게 회전했다. 칙칙폭폭 소리가 귓전을 맴돌았다. 그는 번개처럼 뒤돌아 섰고, 순식간에 그녀를 침대로 밀어 넘어뜨렸고, 무서운 기세로 그녀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이런 말을 하려는 듯 했다. "내 목을 조르겠다고? 그 흉물스러운 오른손으로? 어림도 없어." 그는 숨을 쉴 수도 끓어 오르는 화를 주체할 수도 없었다. 빨간 리본, 파란 리본, 하얀 리본이 어지럽게 엉켜 그의 몸을 휘감았다. 과거에는 저 삼색등이 각각 동맥과 정맥과 붕대를 의미했던 걸 알아? 그녀는 막을 썼다. “미스테리맨이 연쇄살인마라는 사실을 알면 맥도날드 친구들이 웃겨서 배를 잡겠군요.” 그는 다시 일어나려는 그녀를 있는 힘을 다해 다른쪽 벽으로 밀었다. 책장에 부딪힌 그녀는 책장과 함께 넘어왔다. '쿵' 소리가 났다. 정말로 무섭고 소름끼치는 '쿵' 소리가. 책장 아래로 보이는 것은 그녀의 손목 뿐이었다. 언제 다시 나타났는지 모르는 (항상 좋은 친구) 알 마이클스가 조심스럽게 다가가 그 손목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그를 돌아보면서 웃기 시작했다. 

(내가 경고했지? 정말 골 때리는 일이 벌어졌군, 키도.) 

 

그도 웃었다. 멈출 수가 없었다. 너무 웃어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9

 

  와터포크 경찰국의 제임스 던 형사에게는 몇 가지 좋아하는 것들이 있었다. 적당히 냉장된 크롬바허 맥주, 필터 없는 카멜 담배, 그리고 토트넘 핫스퍼 FC의 경기. 가히 인생의 낙이라고 칭할만한 것들이었다. 안타깝게도 근무 중에 동시에 즐길 수 있는 것은 셋 중 하나에 불과했다. 다섯 개비째 비벼 끄고 나서도 자기도 모르게 또 손이 담배갑으로 향했던 이유였다. '기회가 있을 때 외근을 나갔어야 했어.' 바람 빠진 풍선 같은 체형의 남자가 뛰어 들어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늘어 놓던 그 때 하필 던 형사는 딱히 할 일이 없음에도 자리에서 뭉개는 중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마치 미리 이런 일을 예상이라도 했던 것처럼)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후였다. 후회가 막심했다. 이런 종류의 일에는 아드레날린을 끓어오르게 할 만한 구석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여섯개째의 카멜에 다시 불을 붙였다. 환풍기가 제대로 동작하지 않는 취조실의 공기는 가장 안개 짙은 날의 와터포크보다도 음산했다. 

- 처음부터 다시 차근차근 이야길 들어 봅시다, 미스터…….

- 로치입니다. 마이크 로치.

- 그래요. 로치씨. 일단 몇 가지 분명히 할 사실이 있습니다. 우선 이걸 공식적인 과정으로 받아들이진 맙시다. 나는 당신을 취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접견실에서 듣기에는 적절치 않을 것 같고 휴게실은 리모델링 중이라 취조실에 왔을 뿐입니다. 보이시죠? 카메라도 꺼져 있습니다.

 

  던 형사는 카멜을 든 손으로 방 한구석을 가리켰고 아지랑이처럼 하얀 꼬리를 늘어뜨리며 담배 연기가 따라갔다. 사실 취조실을 택한 솔직한 이유 중의 하나는 와터포크 경찰국의 금연 정책이었다. 2012년 여름부터 접견실이나 휴게실에서는 흡연이 허락되지 않았다. 때문에 옥상을 제외하고는 취조실만이 유일하게 허락된 해방구였다. 마치 니코틴의 화학 작용 없인 정상적인 취조가 불가능하기라도 한 것처럼.

- 그러니까 당신이 점퍼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어도 아무 말 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취조는 이런 식으로 진행되지 않습니다.

  설명은 그 정도로 충분했다. Smoke Break인 셈 치고 한 한 30분 정도 조사하는 시늉만 하고 돌려보내면 될 것이었다.  

-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시겠습니까?

  남자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 좋습니다. 성함은 마이크 로치. 나이는 35세. 혹시 하시는 일을 물어도 되겠습니까?

- 전직 미식축구 선수입니다.

- 축구 선수라고요?

- 미식 축굽니다. 엔에프엘(NFL)요.

  아, 그거! 던 형사는 어떤 이미지를 떠올렸다. 갑옷을 입은 사내들이, 납작한 공을 들고, 파란 잔디 위를 뛰어가는.

- 그러니까 전직 미식축구 선수시라는 겁니까?

  마이크은 고개를 끄덕였다.

- 현재는 아닙니까?

- 현재는…… 아닙니다.

  그는 무슨 말을 덧붙이려다가 말았다. 아마도 '적어도 아직까지는요'와 같은 말일 것이었다. 

- 그럼 현재 하시는 일은 뭡니까? 직업이 있습니까?

 

  그 질문에 마이크은 입술을 움찔거렸다. 말이 나오려다가 성대 어느 곳에선가 걸린 듯한 느낌이었다. 그는 자신을 와터포크 FC의 축구 선수라고 밝히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심지어 모든 소셜 네트워크에서도 그의 직장과 소속은 샌프란시스코 식스티나이너스로 되어 있었다. 애써 수정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남들처럼 인생에 맞춰 페이스북을 업데이트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페이스북에 맞춰 인생을 되돌리고 싶었다. 그의 타임라인은 2008년을 마지막으로 끊겨 있었고 (물론 페이스북 따위의 앙상한 기록이 지난 인생을 대변해주진 못하겠지만) 그에게는 10년에 가까운 그 이후의 시간이 무의미한 빈 공간처럼 느껴졌다.

- 로치씨?

  던 형사가 답을 재촉했다.

- 축구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 그러니까, 미식축구팀이겠군요?

- 아닙니다. 음…… 축구팀입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축구말입니다.

 

  마이크은 스스로 자문했다. '지금 내가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까?' 한편 던 형사는 약간의 의문이 들었지만 (전직 미식축구 선수가 현재는 축구팀에서 일하고 있다고?) 굳이 문제 삼진 않기로 했다. 이런 일을 하다보면 별의 별 사연과 이유를 다 접하기 마련이었다. 인생이 뜻한 방향으로 순조롭게 풀려가는 것도, 그 역의 방향으로 달음질 치는 것도 살다보면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형사 자신의 경우를 돌아보자면, '일류 로펌의 잘 나가는 변호사가 될 줄 알았던 시골뜨기 형사'라고도 표현할 수 있었다. 쥐꼬리만한 봉급에 위험 수당을 더해 간신히 먹고 사는.

- 좋아요. 나도 축구광입니다. 토튼햄 서포터즈에도 속해있죠. 요즘 게임이 잘 안 풀려서 속이 내 속이 아닙디다. 지난 주말에도 맥주를 진탕 마셨죠. 그래, 아무튼 축구팀에서 무슨 일을 합니까?

  축구 이야기는 그나마 던 형사가 흥미를 보일만한 것이었다. 

- 그게, 사실은…… 와터포크 FC에서 일합니다.

  던 형사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일하면 일하는 거지, ‘그게 사실은, 일합니다’라니……. 

-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시는 겁니까?

- 백업 골키퍼입니다.

 

  던 형사는 가만히 고개를 들어서 남자를 쳐다보았다. 누가 보면 한 방 제대로 당한 사람의 얼굴이라고 생각할만한 표정이었다. 던 형사는 남자가 축구팀에서 일을 한단 말을 했을 때 정말로 일을 한다고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구단 운영팀에서 사무를 보는 것과 같은……. 필드에서 뛰는 선수라고는 상상조차 해보질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10여년의 세월 동안 마이크의 건장했던 몸은 많이 왜소해졌고 오히려 운동 선수가 아닌 보통 사람들보다도 더 운동에 거리가 멀어 보이는 이미지로 바뀌었다. 그의 첫 인상이 '바람빠진 풍선'처럼 느껴졌던 이유를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던 형사는 축구광 형사가 마땅히 던질만한 질문을 테이블 위로 올려 놓았다.

- 당신이 프리미어 리그에서 뛰는 선수라고요? 그럼 내가 왜 한 번도 못봤죠?

- 글쎄요? 백업 골키퍼니까 그렇지 않을까요?

- 아무리 그래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 그렇다고 형사님이 프리미어 리그에 등록된 모든 골키퍼의 이름과 얼굴을 기억하시는 건 아니잖습니까?

 

  물론 그렇긴 했다. '게다가 골키퍼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건 드문 일이기도 하지. 레프 이바노비치 야신이나 올리버 칸, 부폰과 카시야스, 또 최근의 조 하트처럼…… 그럴 수 있는 사람들이 몇이나 되겠어? 하지만……. ' 던 형사는 또 다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을 때 나오는 습관적인 버릇이었다. 전 부인은 입버릇처럼 이런 말을 했었다. '자기 그러다가 옆머리가 다 닳아 없어지겠어.' 하지만 천만의 말씀. 지금까지도 던의 곁을 지키고 있는 건 옆머리 뿐이었다. 

- 잠시만요. 다시 정리해 봅시다. 조금 전에는 당신, 미식축구 선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 그랬죠. 그랬습니다. 미식축구 선수였습니다.

- 그러니까, 엔엘에프 선수가 프리미어리그에 와서 백업 골키퍼로 뛰고 있단 얘깁니까?

- 엔에프엘입니다. 엔엘에프가 아니라. 내셔널 풋볼 리그의 약자니까요.

- 그렇군요. 내셔널 풋볼 리그.

  던 형사는 서피스 프로에 익스플로러를 띄워서 남자의 이름을 검색해 보려고 했다.

- 찾아볼 필요 없어요. 형사님. 좋은 친구 알이 내 말을 증명해 줄 겁니다.

- 예, 잠시…… 뭐라고요? 누가 뭘 한다고요? 

- 제 친구 알이요. 알 마이클스. 지금 제 옆에 앉아있는.

 

   변호사가 될 뻔 했던 형사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 말을 듣는 사이 이미 구글에 '마이크 로치'라는 이름을 쳐 넣었고 확실히 그런 미식축구 선수가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2008년 미스테리한 사건 끝에 은퇴하여 화제를 모은 남자의 프로필 사진과 자기 앞에 앉아있는 남자의 얼굴이 닮은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제 이야기의 사실 여부는 크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제는……. 이제는 보다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 그게…… 누굽니까?

- 연봉으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스포츠 캐스터를 모르십니까? 알, 형사님한테 말 좀 해줘요. 제가 얼마나 잘 나갔던 사람이었는지 말이에요.

 

10

 

  던 형사는 알았다. 당장 전화기를 들어 자기 눈 앞의 이상한 남자를 내보내야 한단 사실을. 하지만 실행에 옮기질 못했다. 설명하긴 어렵지만. 대신 형사는 입을 벌려 질문을 이어갔다. 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는지는 오직 신만이 아실 것이다.

- 여기에 온 이유가 뭐였습니까? 누군갈 해쳤다고 했습니다. 기억합니까?

  그렇게 Smoke Break는 끝났다. 이젠 카메라를 켜야할 때였다. 할 수만 있다면. 하지만 취조실 밖의 녹화 버튼을 앉은 자리에서 누를 재간은 없었다. 어떤 저능아가 이 따위로 취조실을 설계했는지 짜증이 났다.

- 간밤에 만난 어떤 여자였습니다.

- 어디에서요? 구체적으로…….

- 그녀의 집이었습니다. 요크 스트리트 31-B번지. 2층.

 

  형사는 손때 묻은 수첩의 깨끗한 페이지를 펼치고 주소를 적어 넣었다. 그리고 바지 주머니에서 노키아 폰을 꺼내어 책상 밑에서 한 손으로 문자 메세지를 보냈다 (어째서 남자가 모르게끔 문자를 보내고 있는지는 그도 알지 못했다). 아무라도 좋으니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순찰 경관이 해당 주소의 집을 확인해 보라고.  

- 좋아요. 시간 순서대로 해봅시다. 누가 먼접니까?

- 먼저 어떤 여자를 만났어요. 맥도날드에서 일하는. 심야 영화를 보고 나오다 극장 밖에서 만났죠.

- 맥도날드라고요? 이름이 뭐였습니까?

- 기억이 나지 않아요. 캐시? 에이미? 엠마? 뭐 그런 비슷한 이름이었던 것 같습니다.

- 좋아요. 그게 언제쯤이었습니까?

- 새벽 다섯시 경이었습니다. 영화가 네시 삼십분에 끝났거든요.

- 어쩌다가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이었습니까?

- 그녀의 집으로 따라갔었죠.

- 그리고 무슨 일이 벌어졌습니까?

  남자는 머뭇거렸다.

- 이야기를 나누었고…… 약간의 스킨쉽도 있었고…… 그러다 목을 조르고 서로 밀치다가…… 그만 책장이 넘어가서 그녀가 깔렸어요.

- 여자분이 심하게 다쳤습니까?

- 그런 것 같습니다.

- 그런 것 같다고요? 직접 확인해 본 건 아닙니까?

- 알이 확인하고 말해줬습니다.

 

  던 형사는 속으로 혀를 찼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람.

- 잘 이해가 가지 않는데……, 다투게 된 원인은 무엇이었습니까?

- 말씀드렸던 그대롭니다. 쿼터백이 골키퍼가 된 사연을 설명하려다 오해가 생겼고 결국 서로를 자극하는 말들이 오가게 되었던 거죠.

- 구체적으로…….

- 미식축구공의 모양을 설명했는데 제가 흥분을 했는데……, 사실 핵심은 그게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 그럼 뭐였습니까? 핵심은?

- 아무도 절 이해해주지 않는다는 것이죠. 사실 그녀의 잘못은 아니었어요. 

- 어떻게 이해받지 못하신다는 거죠?

 

  이 말을 하면서 던 형사는 자기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마치 상담사처럼 말하고 있잖아.' 그는 총 세 건의 상담을 받아 본 경험이 있는 남자였다. 하나는 지난 8월 총격 사건의 외상 때문에, 다른 하나는 진창에 처박힌 결혼 생활 때문에,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알콜 중독 때문에.

- 전 주인공이었어요. ‘제 세계’에선 말이에요. 제 손 끝에서 게임이 시작되었죠. 그런데 ‘이 세계’에선 들러리에요. 멍하니 서서 남들이 뛰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하는 처지에요. 공이 저한테 날아올 때까지. 더구나 그 순간에도 주인공이 아니에요. 관중의 시선이 따라가는 곳은 공이지 골리가 아니거든요.

  형사는 누렇게 변색된 손톱 끝으로 관자놀이를 찍어 눌렀다. 카멜 생각이 간절했다.

-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주인공이라고 생각하고 삽니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그렇지 않단 사실을 발견하죠. 당신만 그런 건 아닙니다.

  미치겠군. 그건 언젠가 상담사가 형사에게 들려준 말이었다.

 

- 무슨 말씀인진 알겠는데 조금 다릅니다. ‘이 세계’의 사람들은 제가 ‘제 세계’에서 주인공이었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그게 너무 싫고, 분통 터지고, 화가 납니다. 축구 선수를 꿈꿨던 사람들에게 있어 프리미어 리그를 뛰어 보는 건 당연히 영광스러운 일이겠죠. 설령 강등권 팀에서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하지만 멀쩡이 잘 뛰고 있는 미식축구 선수를 데려와 프리미어 리그에서 뛰고 있으니 좋아하라고 강요해선 안되는 겁니다. 축구장 위에서의 일 분 일 초가 축구 선수 아닌 사람들에게는 인생의 기회 비용일 수 있습니다. 전 엔에프엘 신인왕 출신입니다. 왜 제가 여기서 뛰는 걸 감사하게 생각해야 합니까?

- 그게 그 여자분의 잘못은 아니지 않습니까?

- 맞아요. 그렇죠. 저도 알아요. 

  남자는 힘없이 고개를 숙였고 형사는 바지 주머니 속의 노키아 폰을 만지작거렸다. 아직 아무 연락도 오지 않았다.

- 그냥 그만 두면 안되는 겁니까? 당신은 축구 선수도 아니라면서요?

- 그게…… 복잡합니다.

- 뭐가 복잡하다는 거죠? 아주 간단한 문제 같은데…….

- 설명드리고 싶은데,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 왜요?

  그는 입을 다물었다가 한참만에 토해내듯 대꾸했다. 

- 살다보면, 거지같은 선택만 남을 때가 있죠.

  그 순간 순찰 경관 중 한 사람으로부터 문자 메세지가 도착했다.

 

말씀하신 주소를 확인해 본 결과 2층은 비어 있습니다. 집 주인 말로는 세입자가 나타나지 않아 비어 있은지 6개월도 넘었다고 합니다.

 

  던 형사는 헛기침을 했다. '이럴 줄 알았어.' 제 발로 찾아와 이렇게 횡성수설하는 사람들의 태반이 이런 식이었다. 다만…… 설명하기 어려운 찝찝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 좋습니다. 미스터 로치. 저희 순찰 경관 중 하나가 말씀해주신 주소를 확인해보고 제게 연락을 줬습니다. 그 친구 말로는 그 주소에 살고 있는 사람이 없다더군요. 집 주인의 이야기도 들어봤습니다. 인근 지역에서 들어온 신고가 있었는지도 확인해 봤지만 특별한 것은 없었습니다.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동자에 초점이 없었다.

-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당신은 어제 좀 심하게 취했었던 것 같습니다. 현실과 꿈 혹은 무의식에서 있었던 일은 혼동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다친 사람은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으니 '동석하신 친구분'과 함께 일단 댁으로 돌아가셔서 쉬십시오. 필요한 일이 있다면 연락을 드리죠.

  형사는 자리에서 일어서 남자가 나갈 수 있도록 문을 열어 주었다 ('동석하신 친구분'이란 말을 했다니, 믿을 수가 없군!). 남자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결심한듯 일어서서 밖으로 나갔다. 취조실의 불을 끄고 돌아서며 형사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았다. 정말로 누군가와 어깨동무라도 하고 있는 듯한 자세에서 절뚝거리며 걸어 나가는 중이었다. 점퍼 주머니에서 잠시 빠져나온 창백하고 쓸쓸하고 수동적인 오른손이 그의 시선을 잠시 사로잡았다. '저 남자가 전직 미식축구 선수였단 말이지?' 외근을 나갔다는 서의 동료들은 여전히 한 사람도 돌아오지 않았다. 시원한 맥주가 생각났다. 소 그는 적당히 미지근한 맥주를 선호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오늘만큼은. 

 

11

 

   모든 이야기에는 적절한 결말이 필요하다. 결말을 맺지 못하는 이야기는 아무 의미가 없다. 비슷한 맥락에서 나는 어느 정도 생의 마지막 순간을 스스로 결정하는 사람들은 존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어쩌면 자신들의 이야기에 결말을 맺으려는 능동적 노력의 결과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사회, 윤리, 종교적 맥락을 전혀 감안하지 않고 '자살'을 옹호한다는 뜻은 아니다. 순전히 이야기 구성이라는 측면에서의 의견일 뿐이다). 인생은 많은 부분에서 스포츠와 같아서 (혹은 스포츠가 인생의 맥락을 성실한 모방하였기에) 결정지어야 할 때 결정짓지 못하면 영원히 때를 놓치는 경우가 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어쨌거나 모든 이야기에는 적절한 결말이 필요한 것이다.

 

  마이크 로치씨의 상담의로 나는 아래와 같은 내용을 진술합니다. 이는 특수한 사례에 있어 법 집행기관의 요청에 따라 공공의 이익을 위한 비밀 유지 의무의 예외에 따른 것이며 이러한 부분에 있어 저의 법률 자문을 맡고 있는 ‘핀리 & 핀치’사의 도움을 받아 법률적 문제가 없음을 확인하였습니다.

 

  로치씨는 2년 6개월간 제 환자였습니다. 정확히는 2013년 3월부터 2015년 9월까지 저와 함께 주당 네시간씩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대개는 화요일과 목요일 저녁 여섯 시부터 여덟시까지 진행되었습니다. 모두가 아시다시피 로치씨는 자신이 겪고 있던 고통의 근원을 '미국에서 뛰던 프로미식축구선수(그것도 쿼터백)가 영국으로 건너와 프로축구선수(그것도 골키퍼)로 뛰게 되었다'라는 부분에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상담의인 나 역시 미식축구와 축구의 사이에 어떤 구체적인 차이가 있고 그로 인하여 어떤 어려움이 수반되는지를 소상히 이해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다만 직업적인 기술의 일환으로 그 거리감을 더 많은 이야기를 끌어내기 위한 동력으로 전환하고자 애를 썼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 저를 이해시키기 위해 로치씨는 여러가지 예를 들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화성에 떨어진 지구인'이라든가, '외눈박이 나라에 도착한 두눈박이'라든가, '하드웨어 공장의 소프트웨어 전문가'라든가, '관료들에게 둘러싸인 시인'라든가. 또 여러가지 문화 레퍼런스를 열거하며 자신의 처지를 비교하기도 하였습니다.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 장 폴 사르트르의 ‘구토’, 필립 K. 딕의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 알프레드 히치콕의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등. 이를 통해 로치씨가 꽤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인 동시에 운동 선수치고는 제법이라고 할만한 지식 및 교양 수준을 갖춘 남자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측면에서 분명 로치씨는 해당 기간 동안 가장 나의 흥미를 끄는 존재였습니다. 

 

  로치씨의 마음 속에는 굳게 닫힌 문이 있었습니다 (적어놓고 보니 이런 비유는 법률적 진술에는 적절치 않은 표현인 것 같습니다만). 그의 인생에 있어 몇 가지 이해할 수 없는 의문과 상응하는 답변이 그 안에 세트로 숨겨져 있었습니다. 특히 다음 두 가지 의문과 관련하여서는 답을 끌어내는데 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첫째) 어째서 프로미식축구선수가 프로축구팀에 와서 뛰고 있느냐?

  둘째) 그렇다면 왜 그만두고 떠나지 못하는가?

 

  여기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질 때마다 그는 상당히 긴장하여 단신히 벌려놓은 문의 틈을 단단히 걸어 잠그었습니다. 단편이나마 이야기를 끌어내기까지 상당히 긴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야말로 1,000 피스 분량의 직소 퍼즐을 맞추는 심정이었습니다. 무려 2년 이상 인내하고 나서야 비하인드 스토리를 맞출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사실 당시 그에게 약속을 했습니다. 절대로 여기에 대한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하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이렇게 결국 털어놓게 되는 마음이 결코 편하지만은 않음을 기록으로 남겨주셨으면 합니다. 이제 와서는 별 의미 없다고 한들 말입니다.

 

  이야기는 영국계 미국인이었던 그의 아버지로부터 시작됩니다. 그가 NFL에서 '골든 보이' 혹은 '젊은 연금술사'로 불리며 승승장구하던 시점에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며 가세가 기울었습니다. 그러자 영국에 남아있던 아버지 친구분들은 그가 '풋볼'을 했단 이야기를 듣고 '풋볼'팀에 넣어주겠다는 의도로 (이미 프로 풋볼팀에서 성공적으로 뛰고 있는 그를 굳이) 영국에 데리고 오려는 시도를 했다고 합니다. 마침 한 분이 와터포크 FC의 구단주였고 말입니다. 조금 믿기 어려운 이야기지만 그 당시 친구분들 중 단 한 사람도 축구와 미식축구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 같습니다. (이게 말이 되는 이야기인지 저 역시 고민을 적잖이 고민을 하였습니다만 세상엔 이보다 더 말도 안 되고 황당한 일도 많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아무튼 이러한 소문이 업계에 은밀하게 퍼졌는데 샌프란시스코 식스티나이너스측에서는 그 소문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계약 의무 위반으로 간주하여 상당히 불쾌하게 받아들였고 경고 차원에서 그를 몇 달간 2군으로 내려보냈습니다 (당시 스포츠 섹션의 기사들을 찾아보면 이유 없이 갑자기 그의 팀 내 서열이 밀렸다는 내용을 찾을 수 있습니다). 자존심에 상처를 받은 그는 술에 절어 지냈다고 합니다 (당시 자신의 상태를 일컬어 그는'나사를 조이려다 망쳤다'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놀랍게도 헨리 제임스를 인용하기도 했습니다). 약혼녀와 틀어진 것도 이맘때의 일이었습니다. 내막을 알리 없는 지역 언론과 팬들은 구단을 들쑤셔 그의 복귀를 청원했습니다. 그가 빠지고 난 다음 식스티나이너스는 5승 6패로 힘에 부치는 모습이었으니 멀쩡히 사라진 주전 쿼터백을 당장 데려오라고 성화를 부렸던 겁니다. 분위기는 무르익었고 어쩌면 자연스럽게 자리를 되찾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문제는 술독에 빠지고 난 다음부터 그의 주특기라고 할 수 있는 '예술적 패스'가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나사가 풀렸는지!). 

 

  그 당시 그의 에어전트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이봐, 이대로 경기에 나가는 건 돈 뭉치를 변기에 넣고 시원하게 물을 내리는 격이야." 에이전트는 그에게 스테로이드 복용을 권했습니다. 얼마나 고민을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며칠 뒤 그는 여드름이 송글송글 난 얼굴로 필드 위에 섰다고 합니다. 팀은 가까스로 승리했지만 에이전트가 장담했던 것과는 달리 그는 도핑검사에서 적발되었고 징계위원회에서 제명당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와터포크 FC에선 (구단주의 지시로) 다시금 갈 곳이 없어진 그의 합류를 종용하는 연락을 했습니다. 무직자 신분의 그는 울며 겨자먹는 심정으로 일단 영국으로 날아왔다고 합니다. 처음엔 양해를 구하고 미국으로 다시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어쩌다보니 옴싹달싹할 수 없게 말려 들어 지금까지 8년의 시간을 하릴없이 보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중간에 퇴단 이야기가 오간 것만 열두 차례인데 그때마다 (구단주의 의지에 의해) 번복되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번복이 이루어진 정확한 이유야 모르겠습니다만 구단주는 '모든 스포츠는 하나로 통한다'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야구고, 농구고, 하키고, 미식축구고, 뭐가 되었든간에 모두 축구에 융화하여 녹여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여전히 로치씨를 자기 구단으로 데려온 결정이 옳았다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반면 로치씨는 자신이 미식축구선수라는 강한 프라이드를 가지고 있어 구단주의 관점이 다분히 일방적이고 축구-중심적이며 타 분야에 대한 모욕과도 같다고 생각합니다). 어찌보면 그것이 참으로 딱한 일 아닙니까? 구단주 역시 좋은 뜻으로 추진한 영입이었을텐데 그게 로치씨에게는 치명적인 독이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판단을 완강하게 고수하면서 여전히 매듭의 한 쪽 끝을 잡고 있는 탓에, 어느 시점에서는 다시 풀리기 시작했어야 하는 로치씨 인생은 점점 더 엉켜진 상태로 빠져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로치씨가 본인의 의사권을 행사하여 퇴단을 할 수는 없느냐는 의문이 이 대목에서 나올 법 합니다만…… 그 또한 계약 파기의 위험을 안고 있어 로치씨가 '천문학적까지는 아니어도 적지 않은 위약금'을 물어내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로치씨의 입장에서는 의사권을 행사하기 위해서라도 축구 경기를 위해 몸을 날리고 꼬박 꼬박 주급을 받아와야만 했는데, 그 상황이 이루 말로 표현하지 못할 모멸적인 것임은 다시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는 사이 그의 오른손은 마치 퇴화라도 하는 것처럼 작아졌습니다. 증빙 자료로 첨부한 왓더퍼드 시립병원의 기록을 보면 고용량 스테로이드를 복용한 부작용이라는 견해를 확인할 수 있는데, 한쪽 손에 도드라지게 이런 증세가 나타나는 것은 상당히 드문 일이라고 담당의도 밝혔습니다. 당시 비뇨기 병동의 담당 간호사였던 앤드류 카마이클 군 역시 "스테로이드 부작용으로 작아지는 것은 보통 다른 은밀한 부위로 알고 있는데……." 라며 기이했던 케이스를 분명하게 기억했습니다. 그의 오른손은 서서히 작아졌고 손가락과 손가락이 서로 달라붙어 갈퀴처럼 변했다가 종래에는 하나의 덩어리로 뭉뚝해졌습니다. 그리고 손톱이 부러지며 빠져나갔습니다. 그야말로 민둥산이었습니다. 마치 미식축구공이 몸의 일부가 된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그의 순탄치 않은 커리어와 관련하여 어떤 상징성이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런 손으로는 더 이상 공을 던질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술적 패스'가 문제가 아니었죠. '모든 패스'가 어려워진 것입니다. 당혹스럽게도 왓더퍼드 FC는 그런 그에게 골키퍼 자리를 맡긴 것이 썩 멋진 배려였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손 쓰던 운동을 했단 경력과 장애로 인한 신체 상태를 골고루 반영하여 주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당연히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쿼터백은 단위 플레이의 시작과 연관된 포지션입니다. 골키퍼는 단위 플레이의 끝과 연관된 포지션입니다. 그가 자신의 심경을 "주인공에서 엑스트라가 되어버린 듯하다"라고 토로한 적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가 골리로 나서 플레이하는 장면을 보러 바카라지 로드에 간 적이 있습니다. 다른 관중들이야 내막을 모르니 '병신 골키퍼'를 내보냈다고 성화가 대단했지만, 나는 그의 움직임 하나 하나가 안쓰럽게 느껴지더군요. 그렇습니다. 어제의 '젊은 연금술사'가 오늘의 '병신 골키퍼'가 된 것입니다.

 

  제가 들은 내용이 맞다면 팀에서 그는 이런 상황 아래 놓여 있었습니다: (1) 구단주는 그는 데려온 자신의 결정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고 싶어합니다 (세상에는 '내가 맞았다'를 증명하기 위해 어떤 장기전이라도 벌일 수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2) 코칭 스태프는 구단주의 눈치를 봅니다 (어정쩡하게 걸쳐 있는 그런 꼴이 과연 선수 경력을 위한 것이겠습니까?). (3) 팀 만족도가 낮은 선수들은 남의 사연에 별 관심이 없거나 분노에 가득 차 있습니다 (나아가 더러는 마치 그가 팀 내 부조리의 상징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4) 모두가 바라는 것처럼 시간을 채워 자유계약신분을 얻기만 하면 그의 경력에도 손해가 아닐거라고 생각합니다 (와터포크에 오기 전까지 그의 삶과 이력에 대해서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결론적으로 당연히 그는 팀에서 뛰는 것을 불안하게 받아들였고 자존감을 확립하는데도 큰 애를 먹었습니다. 당장이라도 그만 두고 싶었지만 여기까지 오게 된 사연과 구단주의 고집, 그리고 계약 조건이 기묘하게 얽혀 꼼짝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하루에도 천번 만번 다시 미식축구팀으로 돌아가는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상상 속에서 달린 거리만 백만 야드라고 합니다. 누구로부터 이해받지 못한 그는 밤마다 자신의 이야기를 이해해줄 낯선 상대를 찾아 거리를 해맸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방 안에 가만히 앉아서는 터질 것 같은 머리와 가슴을 주체하질 못했던 것입니다. 물론 이제까지 드러난 이야기에 바탕하여 판단해보면 우리는 압니다. 그가 다시 미식축구 선수로 뛰지 못할 것을. 제명 결정을 거두어지는 일이 쉽겠습니까? 설령 가능하다고 해도 얼마나 많은 절차와 시간이 소요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리고 설령 가능하다고 해도 이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 형편없이 뭉그러진 오른손으로.

 

  그는 잘못된 선택을 했습니다. 묘하게 운이 따르지 않았지만 순간적인 판단력 상실로 제대로 처신하지 못한 책임은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번 일도 그럴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번의 비극적 사건에 있어 상담의의 입장으로 반드시 고려되어야 하는 사항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름 아닌 그런 극단적 선택을 하게된 배경에 대한 것입니다. 어느 영혼도 그렇게 오랫동안 길고 지루한 쳇바퀴를 돌게 하여서는 안되었습니다. 여기가 지옥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2015.12.11

프랭크 M. 고든, M.D.

 

12

 

  또 다시 아침. 나는 출근한다. 바카라지 로드로. 비극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비극은, 하나의 단어에서 출발하였다. 풋볼(Football). 볼을 차서 골에 넣는 맥락에 있어 두 종목의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는 무딘 인식들의 집합이 결국 내 안에 지옥을 만들었다. 그곳이 뜨겁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서서히 날 녹여가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오늘은,

 

  오늘은 마지막 날이다. 누군가의 동의, 합의, 협의 하에 결정된 것이 아니다. 내 스스로 결정한 사항이다. 내가 결정했다. 모든 이야기엔 응당 결말이 필요하다. 나는 결말을 만들 것이다. 그럼으로써 내 의사와 무관하게 씌여져 내려온 과정에 직접 구두점을 찍어는 결단을 보여줄 것이다. 더는 변화도, 번복도, 재고도 없을 것이다. 이 결말을 통해 모든 가능성을 '제로'로 수렴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게 남은 마지막 '매치 포인트'다.

 

  ‘더 쇼생크 리뎀션’에서 앤디 듀프레인은 수감자 동료들을 위해 모차르트를 틀었다. 하지만 이 곳의 유일한 수감자인 나는 오직 나만을 위한 선곡을 고집할 생각이다. 당연히 토니 베넷이다. 'I Left My Heart in San Francisco.' 가장 화려했던 시절을 보낸 팀의 연고 도시를 예찬하는 그 아름다운 노래가 복도 구석 구석의 구형 스피커를 울리는 동안 나는 유니폼을 갖춰입고 돌진할 것이다. 미식축구 유니폼 말이다. 인저리 패드, 암 패드, 니 패드, 엘보우 패드, 허벅지 패드를 차고, 손목과 발목에 테이프를 감고, 체스트와 숄더에 보호구를 착용한 다음에, 저지를 입고, 가드가 달린 헬멧을 쓰고, 장갑을 끼우고, 철심 크리트가 달린 미식축구화를 신고, 14 내지 15 온즈 무게의 미식축구공을 안고 달리는 것이다.

 

  만원 관중의 바카라지 로드를. 당신들식 축구 경기가 한창인 후반 30분의 필드 위를.

  한쪽 끌에서 다른 한 쪽 끝까지 가로 질러.

  알, 내 인생 마지막 플레이를 중계해줄 수 있겠어? 그래준다면 큰 영광일꺼야.

  (물론이지, 키도. 자네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더는 남들에게 이해를 구하지 않을 것이다. 이해를 바라지 않을 것이다. 이게 나고, 내 모습이고, 내가 누렸어야 했던 것이다.  (받아들이거나…… 싫으면 그냥 꺼져버리던가.) 그리고, 터치 다운이다. 있는 힘을 다해 달려 있는 힘을 다해 찍고, 그대로 달려 복도로 뛰어 들어가 스타디움의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 아래로 (아니 햇살 속으로) 뛰어 내리는 것이다. 내릴 것이다. 내렸다.

 

  누가 그랬더라? 태양이 너무 눈부셔서 그랬다고?

 

♪ When I come home to you, San Francisco.

Your golden sun will shine for me. ♪

 

  눈이 부셨다. 잠시 동안 행복한 시절의 연금술을 떠올렸다.

  많은 것을 망쳐왔지만 이제 더는 망칠 것도 없을 것이다. 과연 그렇지 않은가? 

 

 

(2016년 0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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