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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 페이스 오프

낙농콩단/Season 16-20 (2016-2020)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16. 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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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 썸머 형사를 먹였다.

 

  뮐러는 애용하는 스테들러 2B 연필 끝을 잘근잘근 씹었다. 끝에서 흑연 맛이 났다. 썸머 형사는 그의 가장 성공적인 창조물이었다. <썸머 형사 시리즈> 그의 커리어에서 가장 많이 팔린 작품이었고 앞으로도 그는 이상가는 성공작을 결코 쓰진 못할 것이었다.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 그런 특수성을 감안하면 썸머 형사에 대한 도전은 자신에 대한 도전이나 다름 없었다. 그런데도 누군가 썸머 형사를 먹인 것이다. 그리고 그는 하릴없이 당한 것이다! 뜨고 베인 격으로! 이는 썸머 형사에 대한 도전이었다. 뉴욕 타임즈 베스트 셀러를 권이나 가진 소설가 뮐러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그는 참을 수가 없었다. 분통이 터져 견딜 수가 없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세상 천지에 자기 캐릭터를 도둑맞는 소설가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썸머는 씹던 이쑤시개를 뱉었다. . 맛을 보여줘야겠군. 썸머는 주먹을 날렸다. 닥터 챙은 가까스로 피했다. 거의 동시에 주머니에서 메스를 꺼내들었다. 그리곤 중국인처럼 찢어진 눈을 매섭게 빛내며 이죽거렸다.
- 어디 들어와 보시지!
  썸머는 어디 들어가 보았다. 운동과 훈련으로 다져진 그의 몸은 빠르고 날렵하게 메스의 은빛 궤적을 피했다. 닥터 챙이 수술실에서 어떤 솜씨를 가졌는지는 모르겠지만, 고도로 단련된 현직 형사에 육탄전으로 대적하기에는 분명 역부족이었다. 썸머는 신속하고 박력있게 닥터 챙의 손목을 가격했다. '' 하는 소리와 함께 메스가 튀어 올랐다가 시멘트 바닥으로 떨어졌다. 썸머는 재빠르게 닥터 챙의 팔을 꺾은 이후 무릎을 쳐서 거칠게 꿇어앉혔다. 그리고 귀에 대고 속삭였다. 뜨거운 숨을 불어 넣으며.
- 바깥 양반에게 가서 전해라, 년아. 썸머 형사가 왔다 갔다고.

(페이스 오프, 동료 C 뮐러에게 헌정하는 새로운 썸머 형사 이야기. 2016, 58페이지)

 

  남자가 썸머 형사라고? 절대 아니었다. 절대 그럴 수가 없었다. <썸머 형사 시리즈> 결코 따위 3 액션물이 아니었다. 썸머 형사는 몸으로 때우는 캐릭터가 아니었다. 또한 저런 무책임하고 뜨거운 싸구려 대사를 뱉을 리도 만무했다. 뮐러를 모르는가? 문단에서 젠틀맨으로 통하는 뮐러? 미스터 PG-13이라고 조롱받는 뮐러? 소설가로서 그는 비속어나 신조어 남발을 꺼려하는 편이었고 어떠한 상황을 묘사하든 정치적으로 올바른 묘사에 주의를 기울이자는 주의였다 (그래, 거기까지는 좋다, 이거야. 그가 스스로에게 유별나게 엄격한 것은 사실이니까). 그런데 한술 떠서 유치하다 못해 우스꽝스러운 장면과 대사는 무엇이란 말인가? ( 바깥 양반에게 가서 전해라, 년아. 썸머 형사가 왔다 갔다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뻔뻔스러움에 치가 떨렸다. 도대체 누가, 누가 이런 짓을 했단 말인가?

 

  소설가에게 있어 캐릭터는 친자식과도 같은 존재다. 다른 점이 있다면, 친자식과는 달리 캐릭터만큼은 원하는대로 수가 있다는 것일테다. 가장 순종적인 자식조차도 부모 마음대로 수는 없지만 (! 줄리!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우리 줄리!) 캐릭터 만큼은 온전히 그만의 것이었다. 폴의 전처는 그가 쥴리의 아버지로 실패했다는 냉정한 평가를 내렸다. 하지만 무려 5만명이 넘는 독자들이 그가 썸머 형사의 아버지로 성공했다고 인정했다. 코난 도일에게 셜록 홈즈가 있는 것처럼, 아가사 크리스트에게 에르큘 포와로가 있는 것처럼, 레이먼드 챈들러에게 필립 말로가, 대실 헤미트에게 스페이드가, 데니스 루헤인에게 패트릭 켄지가, 마이클 코넬리에게 해리 보슈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비록 그들만큼 성공하진 못했지만 그래도…….). 전설적인 작가들과 캐릭터들 사이의 끈끈한 관계를 생각해보면 남의 캐릭터를 건드리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라는 전제에 감히 누가 토를 있겠는가. 다시 강조하지만 그건 생각할 필요도 없는 '불문율'이었다. 그렇지 않은가?

 

*

 

  아무래도 제의를 받아들이지 말아야 했어. <페이스 오프> 프로젝트를 두고 하는 말이다. 폴의 에이전트였던 루돌프가 프로젝트를 들고 나타난 것은 2013 8월의 어느 날이었다. 폴은 그를 매리어트 로스엔젤레스 1층의 글랜스 로비 바에서 만났다. 조는 프로젝트에 상당히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이상하리만치 이상으로) 호의적이었다

- 이봐, . 이건 전혀 나쁜 기회가 아니야. 잠깐, 아니지. 천만에! 오히려 좋은 기회지.

  선그래스를 이마까지 올려 조는 게걸스럽게 샌드위치를 베어 물었다. 확실히 들뜬 목소리였다.

- 무슨 소리야. 아닌 다른 사람이 썸머 형사 시리즈를 쓰겠다는데.

- 겨우 30페이지 분량의 단편이지. 400 페이지가 넘는 단편집의 꼭지인 뿐이고.

- 겨우 단편 하나일 뿐이라니! 친구야! 썸머 형사는 자식과도 같은 존재야. 자넨  자식들을 남에게 맡기기도 하나

- 오버하지 말게. 남들도 그렇게 하는 . 꼭지야. 겨우 꼭지. 그리고 누가 자네보고 자식들을 버리라고 하나? 아니면 팔아 넘기라고 하나? 그냥 잠깐 맡겨보라는 거지.

  폴은 올드파 18년산의 특유의 기울어진 병을 기울여 자기 잔을 가득 채우며 조용히 말했다.

- 그래서? 맡겨서 어쩌라고?

- 맞아. 자네가 부모야. 누구도 사실을 부정하진 않아. 하지만 24시간 붙어서 자식을 가르치는 좋은 생각 같은가? 아니잖아. 자식을 학교에 보내 선생들한테 맡겨보면서 보너스로 얻을 있었던 장점들을 생각해 . 첫째, 객관적 평가. 둘째, 그리고 시간적 자유. 바로 자네에게 지금 필요한 것들이라고 생각하진 않나?

- 썸머 형사가 평가 받을 필요가 있다고? 물러서 가다듬을 필요가 있단 말처럼 들리는데 진심인가? 가장 최근에 출간한 장편 <1998년의 여름> 7…….

- 7 3천부가 팔렸지. 잊었나? 내가 자네 에이전트야.

- 그래, 7 3천부. 그리고 돈으로 우리가 위스키를 마시고 있단 사실을 잊지 말라고, . 어쩌면 자네의 아르마니도 썸머 형사 덕분인지 모르지. 그러니 감사할 알아야지.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폴은 제의를 받아들일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꼭지고 꼭지고의 문제가 아니라 ' 캐릭터를 남의 손에 맡기는 ' 내키지 않아서였다. 그렇게 완강했던 그가 울며 겨자먹기로 마음을 바꾸게 것은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들 때문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출판사와 에이전시에서 강력하게 프로젝트를 원했고, 그는 스티븐 킹이나 쿤츠 레벨의 A 작가가 아니었다. 모든 야구선수들이 마이너리그 거부권을 행사할 없는 것처럼 뮐러라는 남자 또한 무조건적으로 요청을 거부할 위치는 아니었다. 전속 계약은 오래된 속의 배선들보다 괴상하고 복잡하게 얽혀있었고, , 물론 그렇다고 백퍼센트 강제로 하게 되었다는 뜻은 아닌데…… 뭐랄까, 적당히 Win-Win하는 것처럼 보이는 선에서 타협하는 형태로 마무리할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나 할까 (다만 문제는 ‘Win’ ‘Win’ 주체가 누구였냐는 부분이지만).

- 나쁘지 않네요, 아빠.

  어느 밤의 통화에서 쥴리도 이렇게 말했다. 아이는 폴과 전쳐의 사이에 남아있는 유일하게 좋은 기억이었다. 쥴리가 나쁘지 않다고 한다면 정말 나쁘지 않은 건지도 몰랐다

- 글쎄, 아빠는 아직 모르겠구나. 남에게 썸머형사를 맡긴다는 아직도 내키지 않아.

- 아빠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모두 찬성인 거죠?

- 다른 사람? 루돌프? 마나북스? 펠리칸북스? 사람들이야 장사꾼 아니니. 진작에 자기들끼리 판을 짜놓았겠지.

  마나북스는 <썸머 형사 시리즈> 담당하고 있는 출판사였다. 이제까지 다섯 편을 출판하였고 권의 계약이 아직 남아 있었다. 펠리칸북스는 <페이스 오프>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있는 출판사였다. 그치들이야 신발이 닳도록 뛰어다니며 로비를 했을 것이다.

- 마나북스에서는 좋아했겠네요. 어떤 이유에서든 이제까지 아빠 책을 이제까지 읽지 않았던 사람들을 잠재 독자층으로 유인할 있을테니까요.

  ! 쥴리! 전처와는 달리 똑똑하고 영리한 쥴리! 조지타운대에서 외교학을 전공하는 쥴리! 비록 나라의 동쪽 끝과 서쪽 끝에 떨어져 있음에도 그는 진심으로 자기 편에 있어주는 딸의 목소리에 든든함을 느꼈다.

 

  아이의 분석은 어떤 면에서는 아주 정확했는데, 마나북스에서는 이제까지 폴의 책을 사지 않았고 폴을 좋아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다른 작가들이나 다른 캐릭터 때문에 (혹은 노골적이고 자극적인  기획이 야기하는 호기심에) <페이스 오프>라는 책을 구입하였다가 뮐러와 썸머 형사에 자연스럽게 익숙해지길 기대하고 있었다 (그렇게 표현하고 보니 이런 류의 옴니버스 기획 단편집이란 일종의 홈쇼핑 카탈로그 같은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전문가들의 분석에 따르면 (전문가? !) <페이스 오프> 독자의 최소 5.7%에서 최대 7.9% 정도는 향후 썸머 형사에게 지갑을 수도 있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었다 ( 말은 <페이스 오프> 20만부 팔리면 썸머 형사의 신작 판매량이 1만부 가량 증가한단 뜻이다). 아마 정도면 '썸머 형사는 5만부가 한계'라는 시장 평가를 뒤엎고 단계 올라설 수도 있을지 몰랐다. 그런 이유로 마나북스에서는 번거로움을 감수해가며 독점 계약인 썸머 형사가 남의 출판사의 기획 단편집에 등장하는 것을 허락한 것이다.

- 마나북스의 마나가 무슨 뜻이라고 하셨죠?

  그의 사랑스러운 쥴리가 물었다.

- 영적인 힘인가 뭔가 하는 뜻이었지. 하와이 말로.

  수화기 편에서 쥴리가 깔깔대며 웃었다.

 

 

*

 

  2013 12 11. 크리스마스를 2 앞두고 캐릭터를 교환하는 선정 작업이 이루어졌다. 누가 누구를 맡는지 서로 수가 없도록 추첨 장면은 비디오로 촬영되어 인터넷을 통해 전송되었다. 마치 복권 당첨 번호를 뽑는 것처럼, 추첨기 안을 굴러다니는 공을 뽑아낸 잘빠진 금발 미녀가 커다란 입을 헤에 벌리고 웃으며 공을 카메라에 큼직하게 비추었다 (살다보니 있군. 서점가가 불황이랍니다. e북인가 뭔가 때문인가도 싶지만 사실 사람들이 책을 읽는 다는 새로운 사실도 아니죠. 그래서 우리 관계 분야 종사자들은 되는 일이라면 뭐든지 마다하지 않는 답니다.

 

​  방대한 작가 캐릭터 스와핑 작업에 있어서 정작 당사자인 작가들은 서로 누가 누구를 뽑았는지 있는 방법이 없었다. 폴은 생각했다. ‘내가 누구 마누라를 만나게 알아도 마누라가 누구한테 갔는진 길이 없구만.’ 그는 항상 작가-캐릭터 사이의 관계를 부모-자식이라는 프레임에 맞추어 해석해왔는데, 이때 평생 처음으로 부부처럼 느껴지는 부분도 있단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정말 그랬다. 특히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동거동락을 함께한 캐릭터들의 경우라면 (그러니까 썸머 형사처럼!) 점점 부부에 가까워지는 면이 있는 했다.

 

  뮐러는 책상 번째 서랍을 열고 싱글몰트 위스키를 꺼냈다. 도저히 정신으로는 뜨고 자신이 없었다. 이런 것까지 허락을 정도로 소설가들의 위상이 바닥에 떨어진 거야? 그는 이미 정답을 알았다. 그렇다는 것이었다.

 

  연거푸 잔을 들이켰을 그의 차례가 돌아온 했다. 화이트 보드 위의 이름. 뮐러. 금발 미녀는 화려하고 과장된 몸짓으로 기계가 뱉어낸 공을 받았다. 그리고 스튜디오에서 뮐러의 눈을 대신하고 있는 카메라에 다가가 받아든 공을 들이 밀었다.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해리 보슈.

 

  그는 목을 넘어가려던 위스키를 바닥에 그대로 뱉어냈다. 그러다 사레가 들렸는지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배를 강하게 걷어 차인 느낌이었고 나중엔 급기야 눈물마저 났다. 해리 보슈라니, 해리 보슈라니……, 해리 '망할' 보슈라니.

 

  마이클 코넬리가 뭐가 아쉬워서 이런 프로젝트에 참가를 하지? 그야말로 A 소설가가 아닌가. 이제까지 55백만부가 넘게 팔아치운 크라임 스릴러의 대가가 한권에 5만부 팔면 성공했다고 여기는 피래미들의 리그에 재림하시다니. 이건 균형이 맞지 않는 게임이었다. 썸머 형사가 허름한 동네 트레일러 식당에서 파는 2.99불짜리 치즈 버거라면 해리 보슈는 전세계에서 사랑받는 빅맥이나 와퍼라고 있었다. 아니, 소인국에서 걸리버 놀이를 하고 싶었다고 해도 좋다. 어쩌면 대가의 여유였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하필이면 폭탄 돌리기가 그의 앞에서 멈추냐는 말이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15명의 소설가가 참가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중에서 해리 보슈가 걸릴 확률은 7.1% 불과하다. 지독한 불운이었다. 말도 안돼. 병은 어느새 깨끗하게 비어있었고 허탈하게 새어나온 웃음의 뒷맛은 씁쓸했다.

- 해리 보슈를 건드렸다간 코넬리 팬들에게 뼈도 추릴텐데.

 

  나중에 돌아보니 그것도 일이 되지 않으려고 그랬던 것이 아닌가 싶었다. 펠리칸북스에서는 작가당 30페이지 분량의 아주 짧은 분량을 요구했다. 그래도 15명의 15편을 묶고 나면 460페이지에 육박할 것이었다. 분량이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정말 부담스러운 것은 마이클 코넬리와 해리 보슈였다 (낸시 드류나 배로니카 마스가 아니라 해리 보슈란 말이다). 그는 마이클 코넬리를 만난 적이 있었다. 번은 전미 미스터리 작가 협회에서, 번은 무슨 시상식 리셉션에서. 모든 팬과 우상의 관계가 그러하듯 그에게는 전율 넘치고 흥분되는 만남이 코넬리에게는 흔하디 흔한 만남에 불과했던 같다. 그리고 특유의 아우라에 그는 완전히 압도당했다. 해리 보슈가 그러하듯, 마이클 코넬리도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포스를 몸으로 풍겼다. 모니터 앞에 앉으니 절로 겁부터 났다. 억지로 침을 삼켜 말라붙어 까끌까끌한 입을 적시고는 루돌프에게 전화를 했다.

- 이봐, . 난데. <페이스 오프> 말이야.

- 결과 나왔나? 어떤 캐릭터가 걸렸을지 상당히 궁금한데. 그렇다고 털어놓으면 계약 위반이야.

  사실이었다. 15명의 소설가들은 누구에게도 (심지어 자기 에이전트에게도) 무슨 캐릭터로 이번 프로젝트 작업을 하게 될지 (혹은 하고 있는지)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어쩌자고 그런 계약서에 서명을 했던 거지? 멍청하게도. 바보 같이.

- 한숨이야. 결과가 좋아? 상대가 데니스 루헤인이라도 되나?

  하나의 워스트-케이스 시나리오가 상상만으로도 그를 소름끼치게 만들었다. 조는 수화기 너머의 자기 고객이 차마 상상도 하기 어려운 공포에 순간 얼어붙었다는 사실을 짐작도 못했을 것이다.

- 하긴, 데니스 루헤인 레벨에 이런 장난질에 뛰어들 리가 있겠어? 푸하하.

  사람을 놀라게 만들어 놓고도 조는 아무렇지도 않게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거의 맞췄어, 친구. 켄지와 제나로가 아니라 해리 보슈일 뿐이지. 그리고 그거 알아? 세계 코넬리 팬들이 물고 뜯어 육포처럼 질겅질겅 씹을꺼야. 어쩌면 만신창이로 만들지도 몰라.' 목구멍까지 이런 말이 올라와 간질간질했다

- 이제와서 계약을 파기할 수는 없는 거지? 그러니까 빼고 다른 사람을 넣는다던가…….

- 어려울꺼야. 이봐 친구, 이렇게 자신 없는 목소린지 모르겠군. 도대체 무슨 일이야?

- 아니야. 그냥 알아봐주게. 만약 가능하다면…….

 

  아마 가능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조는 크리스마스 주간이 지나가도록 먼저 전화하지 않았으니까. 결국 폴에게 필요한 것은 생존 전략이었다. 주의깊게 해리 보슈 시리즈를 탐독하고 코넬리의 스타일을 성실히 재현하기 위해 필사 연습에 들어갔다. 마치 처음 작가 수업을 받던 시절로 되돌아 기분이었다. 기교나 트릭은 감히 생각하지도 않았다. 겨우 30페이지 아닌가. 평범하고 무난하게, 부디 바라옵건대 코넬리 팬들을 자극하지만 않을 정도로 버텨낼 수만 있다면 감사할 같았다. 혼신의 힘을 다해 조심스럽게 썼다. 그리고 다시 혼신의 힘을 다해 조심스럽게 퇴고했다.

 

  그러는 사이 썸머 형사에 대한 생각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 문제였다. 금발의 미녀 추첨도우미가 썸머 형사라고 적혀진 공을 어느 소설가의 카메라에 들이 밀었는지 한번쯤은 생각을 해보았어야 했는데.

 

*

 

  뮐러가 썸머 형사를 만난 1971년의 여름. 당시 폴은 여섯 살이었다. 그때부터 항상 그들은 함께 지냈다. 유년 시절에는 유년 시절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청년 시절에는 청년 시절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지금은 지금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다른 사람에게는 털어놓지 않았다. 부모에게도, 형제에게도, 친구에게도, 부인(전처)에게도, 물론 사랑스러운 쥴리에게도. 형사는 항상 자리에 있었다. 때때로 힘이 강해지거나 (주로 폴이 혼자 지냈던 시기였다) 반대로 약해지는 경우는 있었지만, 완전히 사라지는 경우는 없었다. 썸머 형사가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주면 폴은 타고난 재능으로 이야기를 윤색해서 소설로 만들어내곤 했다. 썸머 형사와 그는 훌륭한 팀이었다. 그러나 형사는 그의 마음을 속속들이 들여다 보았고 때로는 그런 점이 폴을 두렵게 만들기도 했다. 나이를 먹으면서 폴은 썸머 형사로부터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썸머 형사 시리즈> 끝내고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 보려고 했던 적도 있었지만 아서 코난 도일과는 다른 이유로 실패했다. 팬들보다는 (팬들의 반응이 어떨지 알아보기도 전에) 썸머 형사 본인이 강력하게 반대하고 나섰던 것이다.   

 

  <페이스 오프> 프로젝트에 대해 알게 되었을 썸머 형사는 껄껄 웃었다.

  (마치 마니또나 비밀 산타 같지 않아?)

 

  그는 생각했다. 이건 웃을 일이 아니라고. 썸머 형사가 마니또나 비밀 산타를 해본 적이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영원히 베일에 싸인 마니또나 비밀 산타는 없다고. 역시나 형사는 그의 생각을 읽고 있었다.

  (출판 이후에도 밝히지 않는다는 말이지? 그대로 때리는 상황이로군.)

 

  사실이었다. 펠리칸북스측은 참여 소설가들이 서로 어느 캐릭터로 작업하는지 절대 밝히지 않도록 분명하게 계약 조건에 명시해 놓았다. 아마도 이런 형태의 마케팅으로 독자들의 흥미를 유발할 생각인 했다. 전체 대진표를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지구상에 사람 밖에 없었고 그나마도 각자 삼분의 일씩만 쪼개서 알고 있어서 리스트를 조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페이스 오프> 책을 뒤적거리다 말고 형사가 물었다.

  (말하자면 코카콜라 뺨치는 스타일의 비밀 엄수일세. 사람이 누군데?)

  펠리칸북스의 사장, <페이스 오프> 수석 편집자, 그리고 마이클 코넬리 (젠장할! 티어에 따라 차별하는 것도 아니고!). 물론 폴에게 필요한 것은 전체 리스트가 아니라었다. 오직 자신과 썸머 형사를 먹인 동료 C라는 놈의 이름 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상황이 낙관적으로 보이지는 않는 한데?)

  썸머 형사의 말이 맞았다. 낙관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동료 C라는 놈을 찾는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루돌프는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평소처럼 그들은 메리어트 로스엔젤레스에서 만났다. 평소와 다르게 풀이 죽어 조는 4등분하여 나온 큼직한 로메인 샐러드를 스테이크 썰듯 썰고 있었다. 얼마 의사가 붉은 고기를 자제하라고 권유한 이후 생긴 변화였다.

- 그치들이 순순히 말해주려고 할까? 가능성이 없다고 .       

  정말 입에 맞지 않는 모양이었다.

- 하지만 알아야 , 친구. C라는 놈이 썸머 형사에게 짓을 보라고.

  폴은 혹시나 썸머 형사가 끼어들어 마디 던질까봐 긴장했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썸머 형사가 튀는 행동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 그래, 찾는다고 치자. 찾아서 어쩔건데?

- 해명을 들어야지. 정말 궁금해서 그래. 썸머 형사를 싸구려 불한당처럼 묘사한 이유가 뭔지 말이야.

- 그리고는? 서점가에 풀린 책을 회수할꺼야?

  폴은 말이 없었다. 조의 지적이 전적으로 옳았기 때문이었다. 이미 책은 시중에 풀렸고 독자들은 읽었다. 펠리칸북스가 의도했던 것처럼 온라인 커뮤니티와 소셜 미디어에서는 논쟁이 한창이었다. 누가 누구의 비밀산타였을까를 추측하는.

- 그건 그렇고 말이야.

  야채 쪼가리를 씹느라 가라 앉았던 조의 목소리가 갑자기 높아졌다.

- 내가 제일 궁금한 마이클 코넬리의 비밀 산타 노릇을 사람이 누구냐는 부분이야.

  폴은 심장이 쪼그라드는 기분을 느꼈다.

- 어째서?

- 인터넷을 보니까 코넬리 팬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났던데? 해리 보슈를 제대로 망쳐 놓았다고 말이야. 누가 그랬는지 몰라도 밤에 뻗고 잠이나 있을지 몰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탄식이 나올 했단 사실이 멋적어 폴은 남은 위스키를 들이켰다. 사각 얼음까지 그대로.

- 그렇게나…… 상황이 좋아?

  조는 웃음을 터뜨렸다.

- 자네도 읽어보았을 아니야. 동료 A 마이클 코넬리에게 헌정하는 새로운 해리 보슈 이야기.

  그는 얼음을 채로 웅얼거렸다.

- 읽어보았지, 물론. 그렇게 나쁘지 않던데?

  이제 조는 아예 배를 잡고 웃고 있었다. 눈물이 찔금 삐져나온 것이 보였다.

- 나쁘지 않다고? 농담이지? 사람아. 제목부터 가관이잖아. 생각해낼 있는 가장 멍청한 제목 아니야?

  폴은 생각했다. <코요테 인터체인지> 정도면 나쁘지 않은 제목인데.

- 아마존에도 들어가 보았어? 서평 중의 다섯 개는 <코요태 인터체인지> 대한 혹평이야.

- 그래? 썸머 형사에 대해서는? 단편의 제목이 황당하지 않아? <도나, 썸머>라니.

- 괜찮다는 평이 지배적이던데? 그러니까, 친구. 마음 풀어. 코넬리도 가만히 있는데 자네가 펄펄 뛰면 안되지.

  조는 쩝쩝거리며 로메인을 씹었고 얄밉게도 마디를 덧붙였다.

- A 놈이 누군지 잡아내려고 혈안이더라고. 요즘 인터넷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지?

 

*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조의 말이 맞았다. <코요태 인터체인지> 대한 평은 대단히 좋지 않았다. '이건 해리 보슈가 아니다'라는 선언에서부터 '코넬리 작품을 번도 읽어본 적이 없는 저능아가 같다' 막말까지 퍼레이드처럼 이어졌다. 좋은 말이 하나도 없었다. 폭격으로 초토화된 황량한 벌판을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폴은 혀를 끌끌 찼다. '셀러브리티들이 인터넷 악플 때문에 정신과에 다니는 이유를 알겠군.' 한편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는 정말로 성실하게, 마치 대가의 작품을 필사하는 견습생의 자세로, 해리 보슈에 대한 짧은 소품을 완성하였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절대 기교를 부리지 않았다. 간결하되 박력있게. 트릭도 도박도 없없다. 평범하고 무난하게. 게다가 주제는 부성애. 안전 지대도 이런 안전 지대가 없다고 자평했었다. 그런데 이런 반응이란…….  물론 서평 다섯 개가 <코요테 인터체인지> 향한다는 높은 지분률에는 거기에는 코넬리가 유일한 A 소설가라는 이유도 있는 했지만…….

  (다른 작가들이야 겨우 5만부짜리들이니. 뮐러처럼. 그래?)

 

  썸머 형사가 책상 끄트머리에 걸터 앉아 파이프 담배를 물고 이죽거렸다. 그런 태도가 거슬려 마디 하려는 차에 1층에서 와장창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가 났다. 뛰어 내려가보니 누군가 벽돌을 던진 모양이었다. 썸머 형사가 집어 벽돌에는  종이가 묶여져 있었고 종이에는 'cheapie (싸구려)'라고 빨간색 유성 매직으로 갈겨쓰여져 있었다.

  (어쩌면 인터넷의 성난 팬심과 관련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아?)

 

  폴은 거실 쇼파에 주저 앉았다. 그로서는 아무 것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분명한 오직 하나였는데 '동료 A' 정체가 대중에 공개되는 날에는 결코 벽돌 하나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곱씹을 수록 황당한 일이었다. 정작 이런 선물을 받아야 놈은 따로 있는데…….

 

  한편, 놀랍게도 썸머 형사를 먹인 <도나, 썸머> 대한 독자들의 평은 대체로 호의적이었다. 대충 썸머 형사가 닥터 챙이라는 악당으로부터 도나라는 여성을 우연히 구해내면서 짧지만 열정적인 사랑에 빠진다는 이야기인데 이제까지 <썸머 형사 시리즈> 배제되어 있던 로맨틱한 (아니 정확히는 로맨틱보다는 살짝 수준의) 요소가 마음에 든단 말이 많았다.

  (시장이 원하고 있네. 우리도 슬슬 등급을 올려야 하지 않을까? 미스터 PG-13?)

- 웃기지 . 그런 원하면 E.L. 제임스에게 가라고 ! 다락방에 처박혀 V.C. 앤드류스나 읽던가!

 

  이제까지 <썸머 형사 시리즈> 읽지 않았던 독자층에서 나온 반응이야 어쩔 없다 치더라도, 기존 독자층에서 <도나, 썸머> 호의적이라는 사실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를테면 아마존 아이디 egnifks967 독자가 남긴 다음과 같은 .

  '나는 이제까지 <썸머 형사 시리즈> 권도 빼놓지 않고 읽은 팬인데, 이번 단편은 신선하고 유쾌하고 로맨틱해서 좋았수다.'

   신선하고, 유쾌하고 로맨틱해서 좋았다니. 도대체 뭐가? " 바깥 양반에게 가서 전해라, 년아. 썸머 형사가 왔다갔다고!" 같은 개소리가? 아니면 장장 10페이지에 걸쳐서 ( 30페이지 중에) 썸머 형사와 도나가 열정적으로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묘사하는 것이?

  (나에게도 이런 모습이 있는 몰랐다네, 친구.)

  태평스러운 썸머 형사의 말에 폴은 역정을 냈다.

- 지금 우리가 이야기를 하고 있어? 이야기잖아. 캐릭터야. 캐릭터이기도 하고. 상황이 아무렇지도 않아?

  (진정하게, 친구. 분명 낯설긴 한데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가. 방식에 동의하진 않지만 자네가 분발해줘야겠단 생각은 들어. 우리는 사람들의 인기로 먹고 사는 업종에 종사하고 있지 않은가. 몸이 사랑받을 있는 방법이 있는데 그러지 못했다면 그건…….)

- 아마도 책임이겠지.

  (지당하신 말씀. 전적으로 자네 책임이지.)

  폴은 얼음잔에 18년산 올드파를 콸콸 부었다. 평범한 소다수라도 되는 것처럼.

  (자네, 요즘 알콜 문제가 있어. 알고 있지?)

- 다물어. 모든 소설가들에겐 알콜 문제가 있지. 그래?

​  썸머 형사는 낄낄거리며 그를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올린 다음 껑충 뛰어 그의 책상으로 다가와 <페이스 오프> 초판본을 내려놓고 꾹꾹 눌러 목차 페이지를 펼쳐 놓았다.

  (일단 몸을 먹인 용의자 리스트부터 만들어 보세. 어떤 놈부터 잡아 족칠지 생각을 해보자고.)

 

  폴은 백지를 꺼내 스테들러 2B 연필로 참여 소설가 15명의 이름을 적어 내려갔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지웠다. 14. 마이클 코넬리의 이름도 지웠다. 13 (티어에 따라 차별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코넬리는 용의 선상에서 제외시켜도 좋을 같았다. 팬이자, 독자이자, 동종 업계 종사자 특유의 감각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남은 사람들은 13. 나이글 딕슨, 마일스, 필립 허레인, 앨리시아 그레이엄, 아키바 데루카, 딜런 톰슨, 거스 바우스필드, 트레이시 타일러, 데이비드 맥코맥, 앤드류 랭카스터, 크레이그 앤더슨, 펠릭스 윌리엄슨, 라이자 루이슨…… 대부분 폴과 비슷한 레벨의 (5만부 클럽?) 작가였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개 출판 행사나 시상식에서 안면이 있는 처지였다. 중의 사람이 <도나, 썸머> 써내려 갈긴 문제의 동료 C 것이다.

  ( 중에 범인이 있다, 이거지? 이건 뭐랄까, 전형적인 아가사 크리스티적 상황인데?)

 

  썸머 형사가 낄낄거리면서 웃었다. 종이 위에 적어 놓고 보면 모든 문제가 머릿 속으로만 생각할 때와는 다르게 보인다. 신기하게도 그리 복잡하지 않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간단하잖아? 13 중의 하나인데? 그냥 아무나 찍어도 유다를 잡아낼 확률이 7.7%라는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폴도 덩달아 마음이 편해져 웃음이 터져나왔다. 함께 낄낄거리며 웃었다. 분명 평소의 그들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썸머 형사는 품에서 봉투를 하나 꺼내 폴에게 건넸다. 펠리칸북스에서 보내온 초대장이었다. 도미니카 공화국의 푼타 카나에서 <페이스 오프> 프로젝트의 성공적 런칭을 축하하는 연회를 가질 계획이라고 했다. 그랜드 팔라디움 바바로 리조트의 스위트룸. LA에서 푼타 카나 국제공항으로 향하는 델타 항공권 왕복권. 고맙게도 문제의 13명을 자리에 모아주신다는 말이다. 일일이 찾아다닐 수고로움이 없도록.

 

*

 

  쥴리의 전화는 폴이 푼타 카나로 떠나기 하루 걸려왔다. 아이도 <페이스 오프> 읽어본 모양이었고 (물론 폴은 펠리칸 북스로부터 오십권의 초판을 받았지만 딸에게만큼은 직접 보내주지는 않았다. 살인, 강간, 납치, 실종이 먹듯이 등장하는 소설집을 열아홉살 딸에게 권해주는 아버지가 과연 있을까? 성경과 그리스 로마 신화 정도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심지어 아이는 아마존의 서평 역시 충분히 확인해 모양이었다. 유감스럽게도 역시 <코요테 인터체인지> 대해서는 볼멘 소리를 내었다.

- 뭔가 이상해요. 해리 보슈 답지 않더라고요.

  폴은 연필을 거꾸로 물고 끝을 잘근잘근 씹었다. 아니, 도대체 해리 보슈 답다는 것이 뭐지? 썸머 형사는 옆에서 폭소를 터뜨렸다.

  (자네 딸내미가 말이야. 동료 A 사실 아빠였다는 알면 놀라 기절하겠군.)

  썸머 형사를 슬쩍 흘겨보고 폴은 쥴리에게 물었다.

- 얘야, 혹시 썸머 형사가 나오는 단편도 읽어보았니?

- , 괜찮았어요. 뭐랄까, 새롭다고나 할까요? 저는 썸머 형사가 목석같은 남자라고 생각했었거든요. 밝고 경쾌한 면도 있는 몰랐어요.

  폴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건 괜찮았다니……. 죽을 맛이로군. 이제 썸머 형사는 배를 잡고 웃다 못해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했다.

  (동료 C 누군지 몰라도 혈을 뚫어주었다네. 이제 나도 여성 독자들에게도 사랑 받는 섹시한 형사라네.)

  하지만 쥴리가 덧붙인 마지막 말이 폴의 얼어붙은 기분을 거짓말처럼 녹여주었다.

- 물론 그래도 저는 아빠가 쓰셨던 썸머 형사가 훨씬 좋아요.

  어쩜, 누구 딸인지, 말도 이렇게 예쁘게…… 그렇지 않나? 썸머 형사.

 

  강렬한 햇살에 눈이 부셨다. 상쾌한 바닷 바람이 코로 스며 들어왔다. 폴은 <썸머 형사 시리즈> 편에서 푼타 카나를 묘사한 적이 있었지만 실제로 와본 것은 처음이었다. 꽃무늬 셔츠 차림의 썸머 형사가 중얼거렸다.

  (나는 두번째지만 자네는 초행이겠군.)

 

  첫번째든 두번째든 폴은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그의 머릿 속에는 <도나, 썸머> 써갈긴 동료 C 잡아낼 생각 뿐이었다. 썸머 형사는 도나 썸머의 1977년곡 ‘I Feel Love’ 흥얼거림으로써 신경을 긁었다. 자기가 언제부터 디스코를 좋아했다고. 분명 디스코는 썸머 형사의 취향은 아니었다. 폴이 창조한 캐릭터, 썸머 형사는 바그너와 멘델스존을 듣는 남자에 가까웠다. '모든 엉망이 되어가고 있어'라고 폴은 중얼거렸다. 또한 어떤 의미에서는 <페이스 오프> 때문이었다. 망할 단편이 튀어나오기 전까지 썸머 형사는 그가 만들었던 주형을 부수고 나간 적이 없었다. 차갑고 이지적이지만 마음 깊은 곳에는 온기를 지닌 남자. 하지만 일단 폴이 단편을 읽고 나니 그의 앞의 실제 썸머 형사조차 미묘하게 (하지만 분명하게) 변해가기 시작했다. <페이스 오프> 병균으로 가득한 페트리디쉬였다. 그의 캐릭터를 감염시다. 썸머 형사는 그의 생각을 읽었지만 그리 동의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봐, 친구. 지금 순간 내가 감염된 있다면 <토요일 밤의 열기> 뿐일꺼야.)

 

  연회는 기대 이상으로 성대했다. 주인공은 20  남짓인데 (마이클 코넬리는 참석하지 않았다. 아마도 훨씬 중요한 행사에 참석하고 있으리라.) 행사 스탭만 배는 되는 했다. 조용히 해변에서 마가리타나 홀짝거리다가 끝날 행사라고 생각했던 폴로서는 놀랄 만도 했다. 일곱 곳에 설치된 총천연색 칵테일 바에 3인치 두께의 휠렛 미뇽을 피자박스처럼 쌓아놓고 구워대는 진풍경에 그는 전적으로 압도당했다. 하지만 정말로 말을 잃게 것은 7피트 높이의 초콜릿 분수였다. 하루 저녁에 번이나 파인애플에 초콜릿을 찍어먹는다고 저런 분수를 세운단 말인가? 기껏해야 일개 출판사일 뿐인 펠리칸북스가 돈을 이렇게 펑펑 써댄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잘해야 20만부 넘길 권을 내고선 많이 쳐주어야 C+ 작가들 (다시 5만부 클럽) 모아놓고 접대하느라 이렇게 흥청망청 돈을 쏟아 붓는다고? 차라리 돈을 네스 호의 괴물을 연구하는데 투자하는 것이 낫겠군. 로키산맥의 빅풋이나. 위스키 생각이 간절해졌지만 해변의 스테이크 파티에 그가 찾는 위스키가 있을 만무했다. 썸머 형사는 딸기와 바나나로 범벅이 애들 장난을 빨대로 쪽쪽거림으로써 다시 그의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었다.

  (, 자네 칵테일 이름이 뭔지 아나?)

- 뭔데?

  (킬러 콤보야. 지금 우리 상황에 어울리는 이름 아닌가!)

- 맙소사, 친구야. 그런 진짜 술이 아니야. 잠바 주스지.

 

*

 

  슬슬 수사를 시작해보세. 폴이 중얼거렸다. 썸머 형사에게 하는 말인 동시에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연회가 끝나고 밤이 내린 푼타 카나의 리조트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고요했다. 행사 스텝들은 각자 집이나 숙소로 돌아간 모양이었고 영광의 주인공들은 해변에서 500미터 떨어진 2층짜리 19세기풍 목조 별장으로 이동했다. 귀빈들은 귀빈들끼리. 다행히 방해꾼들이나 목격자들로 북적거릴 일은 없어 보였다. '조용하고 은밀하게 해치우는거야.'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웃음이 났다. 마치 소설 인물의 대사처럼 느껴져서다. 그가 소설에도 이런 대사가 있었을까? 어찌된 일인지 쉽게 기억해 없었다.

  (이봐, . 누구에서부터 시작할지 생각해 보았나?)

- 일단 생각에 여류 작가는 아니야.

  그는 샘소나이트 29인치 캐리어 안쪽 깊숙히 숨겨 가지고 18년산 올드파를 꺼내며 담담하게 말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 가장 화나게 만들었던 대목이 어딘지 기억하지?

  (물론이지. 닥터 챙과의 클라이맥스 격투씬 아닌가? 느끼한 싸구려 대사로 발라져있던.)

- 맞아. 그런데 생각에 여성이라면 굳이 그런 표현을 고집하지 않았을 같아.

  ('억울하면 남편에게 가서 일러 바쳐라?')

- 그래, 정확히는 ' 바깥양반에게 가서 전해라'였지만. 아무튼 전형적이잖아. 약간은 성차별적인 뉘앙스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니 말이야. 대개 남자들끼리 싸울 '계집애' '겁쟁이' 동일시 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잖아.

  (하지만 소설이잖아. 작가의 성격과 어떤 인물에게 특정 대사를 부여하는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아? 자네도 자네가 창조한 악당들이 - 썸머 형사의 네메시스들이라고 부르는 그들이 - 뱉는 대사가 뮐러라는 남자의 프로파일을 반영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잖나.)

- 맞다 아니다를 떠나서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거야. 최소한 여성들 중에 동료 C 있을 가능성은 후순위로 미루어 놓을 있을 거라고 생각해.

 ( 정도야 가능하지. 앨리시아 그레이엄, 트레이시 타일러, 라이자 루이슨. 완전 축하하네. 용의자를 13명에서 10명으로, 무려 3명이나 줄이는 성공했군 그래.)

 

  폴은 집게로 얼음을 집어 잔을 채웠다.

  (지금은 코난 도일의 시대가 아니잖나. 정도 소거법으로 독자들의 관심이나 있겠어?)

- 그러는 자네는 뾰족한 수라도 있나? 대단하신 썸머 형사?

  (자네가 모르는가 본데, 나이스 가이. 지금은 첨단 기술의 시대라고. 혹시 e북이라고 들어봤는가?)

- 당연히 들어봤지. 루돌프가 매일 노래를 부르는 e 아닌가. 친구 말로는 늦어도 10 안에 완전히 종이책 시장은 절단날 거라더군. 그럼 나는 5만부 클럽이 아니라 5 다운로드 클럽에 속하게 되겠지.

  (그때까지 자네가 업종을 바꾸지 않으면 말이야.)

 

  폴은 썸머 형사를 살짝 흘겨보면서 얼음잔을 들어 보였다.

  자리에서 일어서 파이프를 물고 썸머 형사는 말을 이어갔다.

  (e북이 좋은 점이 무엇인고 하니 내용 검색이 된다는 거야. 모든 전자 문서가 그렇듯이. 덕분에 키워드 검색으로 용의자를 추려볼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

  폴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whodunnit?

  ( 몸은 <도나, 썸머> 5 이상 등장하는 모든 단어를 리스트 업을 해서 변별력이 떨어지는 지나치게 일상적인 단어는 제외하고 50개를 추렸지. 그리고는 <페이스 오프> 프로젝트에 들어온 5만부 클럽 작가들의 최근작들과 비교했어. 정확히는 3 이내에 나온 작품으로만. 그래서 어떤 결과가 나왔는지 아나?)

- 누군가 걸렸겠군.

 (당연히 누군가 걸리기야 하겠지. 그냥 찍어도 맞을 확률이 7.7 % 라지 않았나. 다만 문제는 유무가 아니라 정도인거지.)

- 얼마나 솔리드한데?

  파이프를 입에서 떼면서 썸머 형사가 선언하듯 말했다.

  (87.5%).

  역시 깜짝 놀라 위스키잔을 탁자에 소리내어 내려놓았다.

- 말도 안돼! 사람만 그렇단 말이야?

 (믿을 없겠지만 사람만. 키워드 일치율이 정도 높아.)

- 그게 누군데?

 (앤드류 랭카스터. 조지아주 메이콘에서 친구지.)

- <이름을 붙일 없는 > 사람 말이야?

 (사무엘 베케트 말고 뱀파이어 탐정물을 쓰는 사람을 말한 거라면, 그래 맞았어.)

- 사람이 그럴 이유가 뭐가 있지? 내가 잘못했다고.

 (어쩌면 친구는 <도나, 썸머> 자네가 그렇게 생각할 몰랐을 수도 있지. 좋아하는 독자들도 있지 않나. 자네도 야심차게 <코요테 인터체인지> 썼지만 코넬리 팬들은 별로 좋아하지. 어쩌면 코넬리도 좋아할 수도 있고. 같은 원리야.)

  폴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문득 쥴리의 말이 떠올라서였다. 아마존 아이디 egnifj967 따위야 뭐라 지껄이더라도 상관 없지만.

- 그렇다면 아무리 늦은 시간이라도 우리의 동료 C에게 인사는 가야겠지?

  달그락거리며 얼음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위스키 잔이 비워졌다. 샘소나이트 캐리어 깊숙한 곳에서 스미스 웨슨 M60 꺼내어 허리춤 뒤에 찔러넣고 방을 나섰고 폴의 그림자를 따라 썸머 형사도 어둠 속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

 

  앤드류 랭카스터. 조지아주 메이콘에서 남자. 1963년생. <이름을 붙일 없는 >라는 처녀작으로 1993 화려하게 데뷔. 하지만 이후 거짓말처럼 내리막길을 걸은 탐정소설계의 M. 나이트 샤말란. 2009 시류에 영합하여 10 취향의 뱀파이어 탐정물로 전향 (혹은 변절)하여 5만부 클럽을 가까스로 사수. 뱀파이어 탐정의 이름은 고도? (미치겠군) 펠리칸북스의 요청으로 <페이스 오프> 프로젝트에 참여. 푼타 카나의 연회에 초청. 방갈로 12호에 숙박 . 최근 작품은 2014 <어떤 식으로 그것이>. 작품이 그랬던 것처럼 사무엘 베케트의 작품에서 제목을 차용.

 

  '꿈은 그냥 꿈일 뿐이란다. 그것이 좋은 꿈이라고 지나치게 미련둘 필요도 없고 나쁜 꿈이라고 지나치게 두려워할 필요도 없어.' 폴이 어렸을 악몽을 꾸는 날마다 폴의 아버지가 어린 그를 달래며 들려주었던 말이다. 말은 아주 오랫동안 기억 어딘가에 조용히 침전되어 있었다. 오늘 예상치 못한 사건이 거센 소용돌이를 일으켜 그것을 수면으로 끌어올리기 전까지는.

 

  뮐러는 악몽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앞에서 펼쳐진 광경이 너무도 비현실적이어서 차라리 꿈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먼저 반응을 보인 쪽은 썸머 형사였다. 앤드류 랭카스터가 밧줄에 묶인 채로 늘어져 피를 흘리고 있는 의자로 다가가 라텍스 장갑을 끼운 손으로 상처를 살펴보고 맥을 짚어 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폴을 힐끔 쳐다보았고 고개를 저었다. 폴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곳이 범죄현장이라는 사실도 잊은 채로 말이다. 숨막히는 침묵이 지나간 이후 썸머 형사가 마디 덧붙였다.

  (상처가 여러 군데야. 치명상은 목을 그은 방이지만 이전에 여러 차례에 걸쳐서 치명적이지 않은 자상을 입혔어. 이런 유형의 상처를 있는 흉기는 주방칼이라기보다는…….)

- 도끼에 가깝지.

  (맞았어. 그리고 묶여 있는 모습을 종합해보면…….)

- 고문을 당했다는 뜻이군.

  주저앉아 머리를 다리 속에 파묻은 채로, 폴이 대꾸했다.

  (그래, 맞아. 고문을 당한거지.)

  그들이 문을 열었을 때의 광경. 기억이 다시금 섬광처럼 지나갔다. 폴은 빚을 받으러 사람처럼 저돌적으로 문을 두들겼다. 왼손은 허리춤의 스미스 웨슨 M60 쥐고 있었다. 썸머 형사는 엄호하는 사람처럼 그의 뒤에 서서 주위를 살폈다. 아무런 반응이 없자 폴은 문을 밀었다. 열렸다. 눈을 찌르는 밝은 스탠드 불빛 아래 문을 바라보고 앉은 남자의 형상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그리고 의자 아래로 가득히 차오른 웅덩이. 따금씩, 방울씩, , , .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떨어지는 핏방울. 마호가니 의자의 이음새를 타고서, , , . 어쩌면 현실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꿈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꿈이라면, 너무 두려워 필요도 없겠지.

 

- 누가 그랬을까?

  폴이 물었다.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은 채였다.

  (그럴 분위기는 아니지만 말은 해야겠어. 그거 탐정소설가다운 질문이군.)

  앤드류의 방갈로를 둘러보며 썸머 형사가 대꾸했다. 테이블 재떨이에는 피다 듯한 쿠바산 시가가 모로 걸쳐 있었다. 그리고 옆에는…… 결국 모든 난장의 원흉이라고 있는 , <페이스 오프> 있었다. 여기 저기 찢기고 군데 군데 볼펜으로 줄이 그어진 채로.

  (이봐, . 낙서가 곳이……)

- 같아. <보름날의 고도>로군. 동료 X였나?

  동료 X라는 놈은 앤드류 랭카스터와 탐정 고도에게 헌정하는 <보름날의 고도>라는 단편을 썼다. 아마도 앤드류는 작품이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았던 했다. 찢겨진 책에는 거친 밑줄과 화풀이에 가까운 동그라미, 그리고 분노에 가까운 가위표가 넘쳐났다. 여백에 가득 채워넣은 욕설은 말할 것도 없고.

  (이해 것도 없다고 . <보름날의 고도> 뱀파이어 탐정 고도가 어느 보름날에 웨어울프를 쫒는단 내용이잖아.)

- 하지만 뱀파이어 탐정물을 써대고 있었잖아. 웨어울프 하나   등장한다고 너무 나가진 않은 한데…….

  (그의 입장에서도 물러날 없는 선이 있었겠지. 자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가까스로 폴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끔찍한 난장은 여전히 자리에 있었고 울렁거리는 속에 어느 때보다 술기운이 간절해졌다.

  (좋아, 그럼 정리해보자. 자네는 동료 C 자네 작품을 망친 것이 싫어서 여길 찾아왔어. 앤드류 랭카스터가 동료 C인줄 알았던 거지. 하지만 앤드류 역시 마찬가지로 동료 X 자기 작품을 망친 것을 싫어하던 차였어.)

- 하지만 친구가 꼴이 보면 누군가 우리 이전에 여길 왔더라는 얘기고. 그럼 결국…….

  (앤드류가 자기 작품을 망쳤을 거라 생각하는 다른 작가가 밖에 있었다는 뜻이겠지. 물론 이런 짓을 놈이 자기의 비밀 산타를 정확히 찾아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우린 헛다리를 짚은 셈이지.)

- 정확히는 자네가. 잘난 키워드 분석인지 뭔지가 틀렸다는 것이니.

  썸며 형사는 어깨를 으쓱하며 문으로 걸어갔다. 속히 여길 뜨자는 손짓과 함께.

  (확률은 확률일 뿐이지. 하지만 87.5 % 분명 수상한 숫자야. 단지 100 % 아닐 뿐이지.)

  폴이 덧붙였다.

- 100% 확실한 것도 있네. 펠리칸북스의 야심찬 프로젝트가 문제라는 사실. , 참여 작가들 누구도 행복해하지 않았잖아.

 

  폴의 전화기가 울렸다. 에이전트 루돌프의 전화였다. 그는 전화를 받는 사이에 썸머 형사는 방갈로 12호의 문을 조심스럽게 닫고 주위를 돌아보았다. 둘은 암묵적으로 경찰에 신고는 하지 않기로 했다. 아침이 오면 자연스럽게 누군가 발견하리라.

- 이봐, . 자나? 연회는 즐길만한가?

  즐길만하냐고? 폴은 속이 메스꺼웠다. 꿈은 제발 꿈일 뿐이길.

- 이러시나, . 그게 궁금했으면 진작에 전화를 했겠지.

- 사실, 그래. 문제가 있네. 그게 말이야.

  제발 <페이스 오프> 관련된 일은 아니었으면 좋겠어. 물론 앤드류 랭카스터도. 자존감에 상처를 입은 C+ 탐정 소설가들이 아름다운 휴양지 푼타 카나에서 서로를 죽이는 게임을 벌이고 있더란 말도 아니었으면.

- <페이스 오프> 관련된 일이야. 자네가 <코요테 인터체인지> 조금 문제가 되었는데…….

  폴은 깜짝 놀라 전화기를 떨어뜨릴 했다.

- 내가 썼다고? 방금 그렇게 말했나?

- 그래. 유감이지만 자네가 동료 A라는 사실이 인터넷에 유출되었어. 어떤 경로인지는 몰라. 하지만 내가 말했지? 코넬리 팬들이 혈안이 되었더라고. 그리고 비밀 산타의 정체가 드러난 지금 인터넷은 거의 폭발하기 직전이야. 펠리칸북스 홈페이지, 마이클 코넬리 홈페이지와 팬페이지, 그리고 자네 홈페이지와 팬페이지와 페이스북 계정, 그리고 페이스북 계정까지…….

- 잠깐만, 나한테 페이스북 계정이 있어?

- 그래. 7년쯤 되었어. 아르바이트생을 고용해서 관리 중인데…….

- 지금 그게 중요한 아니겠지?

- 정확하네, 친구. 전화통에 불이나서 소방관들이 출동할 정도라고. 때문에 그래도 아직은 농담할 상황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실상 전혀 그렇지가 않아. 정말 정말 심각하네. 10 척도로 심각성을 말해주자면 8점에서 9 사이야

  폴은 보도의 경계석 위에 주저 앉았다. 며칠 집으로 날아온 벽돌이 생각났다. Cheapie (싸구려). 썸머 형사도 자포자기한 표정으로 그의 옆에 앉았다.

-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나?

- 일단은 조심하게. 멀리 있어서 다행이지만 혹시 모르니. 기자들의 연락은 절대 받지 말고. 말을 하려고 전화했네.

- 그러지. 잠깐, 망할 프로젝트에서 정체만 유출된건가?

- 아직까지는. 하지만 다른 놈들도 멀지 않았지. 결국 망할 책이 독자들이 원하는 것과 거리가 멀다는 사실이 드러났으니. 펠리칸북스의 바람은 이게 탐정소설계의 <어벤져스> <저스티스 리그> 되길 바랐던 같은데…….

  조의 힘없는 웃음이 빠진 소리를 냈다.

- 대응 방안은 내일 아침까지 세워 알려주겠네. 어쩌면 기자 회견을 해야할지도 몰라. 조금 자두게힘든 하루가 될꺼야.

  폴은 고개를 끄덕였다. 휴대전화 편에서 알리 없지만.

- 내가 얘기했지, 친구. <코요테 인터체인지>라는 제목은 정말 나쁜 선택이었다고.

  끝내 마디 덧붙이는 조였다.

 

*

 

  폴의 방갈로로 돌아가는 길은 고요했다. 사람은 마치 '누가 먼저 말을 꺼내나' 게임을 하는 같았다 (물론 그런 게임이 있다면 말이다). 이국적인 열대 나무들의 벗겨진 살갗은 방갈로 12 안의 남자를 떠올리게 했다. 달빛 사이로 이름 모를 벌레들이 울어댔다. 앤드류가 엿을 먹인 작품이 뭔지는 모르지만 (물론 폴은 아직도 그게 썸머 형사였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봐야 5만부 클럽 작가들 머리에서 나온 캐릭터들은 대개 인기나 인지도 면에서 비슷비슷했다. 어떤 관점에서 보더라도 칼부림이 정도의 슈퍼스타는 아니었다. 반면에 마이클 코넬리와 해리 보슈는 버러지들의 천국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있었다. 예수랄까, 비틀즈랄까. 신성 모독의 댓가를 치러야 한다고 한다면 조지아주 메이콘에서 뱀파이어 탐정 소설가가 겪었던 일은 아무 것도 아닐 터였다. ! 하나님! 악몽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꿈은 그냥 꿈일 뿐이란다. 꿈은 그냥 꿈일 뿐이란다. 꿈은 그냥, 꿈일 뿐이란다.

 

  휴대전화가 짧게 울렸다. 단문 메세지였다. 쥴리가 보낸.

 

아빠, 미안해요. 아빠가 쓰신지 몰랐어요. 저는. 말은 나쁘단 뜻이 아니었어요. 기존 해리 보슈 시리즈와 느낌이 다르다는 것이었어요. 마음 아실 거라고 믿어요. 사랑해요 : )

 

  도대체 소문이 얼마나 거야? 업계 마당발인 에이전트와 평범한 대학생인 딸이 거의 동시에 알게되다니. 인터넷 시대의 소름끼치는 생리에 폴은 몸을 떨었다. <그래, 알아. 나도 사랑한다. 우리 : ) >이라고 손으로 답장을 보내면서,

  (꿈은 그냥 꿈일 뿐이야. 그렇지?)

 

  그렇담 동료 C 놈은 도대체 누굴까 하는 생각을 했다. 앤드류 랭카스터가 맞을까? 굳이 말하자면 맞아도 문제요 틀려도 문제였다. 누군가 남자를 죽였으니까. 맞다면 뮐러는 1순위로 용의선상에 오를 판이었다. 틀리다면 원점으로 돌아가 동료 C 찾아야 하는데 <코요테 인터체인지> 사건으로 팔이 묶인 탓에 공격은 커녕 수비조차 버거운 상황이었다. 아침이 오면 전화까지 빗발치겠지, 기자들이 몰려올테고, 이게 펭귄북스인지 펠리칸북스인지 때문이었다. 5.7 %에서 7. 9% 신규 독자 유입률. 고작 그런 이유로 난장판을 겪어야 하다니. 돈에 눈이 멀었던 마나북스도 문제고 (지금이야말로 마나 - 영적인 힘이 필요한 아닌가?) 그를 열심히 설득했던 루돌프 놈도 문제였다

 

  썸머 형사가 방갈로 고리에 걸린 카드를 빼냈다. Do NOT Disturb. 한밤중의 모험을 떠나며 카드를 걸어놓은 기억은 없었다. 폴은 침을 삼켰다. 꿀꺽. 마침내 문을 열었을 누군가 다녀갔다는 짐작은 마침내 단순한 예감만은 아닌 것이 확실해졌다. 안은 엉망이었다. 테이블은 뒤집어져 있었고 물병과 술병은 산산조각이 채였다. 그의 샘소나이트 캐리어는 흉물스럽게 입을 벌린 채로, 속을 모두 게워낸 채로 바닥에 널부러져 있었다. 그리고 TV 위에 빨간 잉크로 쓰여진 단어가 보였다. Cheapie (싸구려). 그와 썸머 형사는 마주 보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낸시 드류나 베로니카 마스가 아니라…… 해리 보슈란 말이다. 해리 '망할' 보슈.)

 

  그날 폴은 꿈을 꾸었다. 새벽부터 루돌프가 전화를 해서 뱀파이어가 나타났다면서 호들갑을 떨었는데 그러다가 기자놈들 때문에 불이난 전화통을 진화하러 소방수들이 출동했다. 정말로 그에겐 소셜 미디어 계정이 있었는데 사이버 검사님들의 거센 질의로 초토화가 되었고 열두명의 성난 배심원들은 앤드류 랭카스터의 마호가니 의자를 망쳐 놓았다고 그에게 무기 징역을 구형했다. 법정 밖에서는 사람들이 서로의 마니또 혹은 비밀 산타를 찾아내 살해하고 있었고 도망다니느라 녹초가 그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하러 전처가 나타나 상처에 칼을 쑤셔넣고 비틀어 돌렸다. 끔직한 것은 그녀가 느끼는 쾌감이 그대로 그의 상처로 전해져 왔다는 것이다 (문득 '언젠가 칼로 상대를 찌른 다음에 비트는 장면이 나오는 영화가 있었는데……' 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이때 그는 꿈에서 깨어났다. 방갈로 창을 두들기는 새벽비 소리를 들으며 그는 다시 잠을 청했다 (꿈은 그냥 꿈일 뿐이잖아, 그렇지?). 그러나 번째 꿈도 악몽이었다. 성난 마이클 코넬리가 도끼를 들고 자신을 따라오는 . "앤드류 뭐시긴 알았는데 알고 보니 놈이었어. 뮐러! 나이스 가이! 미스터 PG-13!"

 

​  식은땀에 흠뻑 젖어 잠에서 깼을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침대에서 곤히 잠이 썸머 형사가 부럽다는 생각을 했다. 썸머 형사는 그의 자식이요, 그가 창조한 소설 캐릭터일 뿐이니. 아마도 그가 허락하지 않는 결코 악몽같은 일도 없지 않겠단 마음에서였다.

 

  (정말로 그런가? 그의 허락 없이는?)

 

  폴은 겪었던 썸머 형사와의 격렬한 의견 대립을 떠올렸다. 나이스 가이 밀러는 시리즈 특유의 분위기를 유지하고 싶어했던 반면 썸머 형사는 강하고 자극적인 방향으로의 변화를 원했었지. PG-13 이상으로, 보다 잔인한 사건을 다루는 보다 하드코어한 방향으로. 당시 격분한 폴은 <썸머 형사 시리즈> 종결해버리려고 했었고 반대로 썸머 형사는 그의 아버지, 창조주, 혹은 친구로부터 주도권을 빼앗아오고자 했었다.

 

  아마 이런 사연을 털어놓으면 사람들은 비웃을지 모른다. 아니, 틀림없이 비웃을 것이었다. 자기 캐릭터에 휘둘리고 눈치를 보는 소설가라니 (등신도 그런 등신이 없지. 그래?) 그와 썸머 형사는 1971년에 처음 만났다. 당시 밀러는 여섯 소년이었고 그의 유년기동안 유일무이한 친구였던 썸머 형사는 이미 성인이었지만 나이가 정확히 살인지는 몰랐다. 첫번째 작품을 때가 되어서야 폴은 썸머 형사가 1965년생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알고 보니 동갑내기였군.' 썸머 형사가 말했다. '처음엔 아이와 어른으로 만났는데 동갑내기라고?' 폴의 대답이었다. 썸머 형사는 그가 소설가가 되기 전에도, 심지어 그가 어린 아이일 때도, 지금 모습 그대로 존재하고 있었다. 쌍둥이 래리와 배리 사이의 우주 여행 이야기처럼, 단지 시간이 상대적으로 다르게 흘러갔을 뿐이다. 작가 밀러가 썸머 형사를 창조했는가? 그건 사실이면서 사실이 아니기도 했다. 썸머 형사는 이미 자리에 존재했으므로. 그가 소설가가 되기 훨씬 전부터. 그렇다면 혹시 썸머 형사가 작가 밀러를 창조했을 수도 있을까? 입안이 바싹 마르는 것을 느끼면 그는 억지로 침을 삼켰다

 

  폴의 방갈로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적지 않은 사람들의 낮고 불길한 톤의 웅성거림으로 미루어 판단하건데 (무슨 일인진 몰라도) 연회의 즐거움과는 거리가 있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느새 잠에서 깨어났는지 썸머 형사가 다가와 어깨에 조용히 손을 얹었다. 온기가 전해져왔다. 18년산 올드파를 가득 채운 얼음잔을 건네면서 썸머 형사는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걱정하지 . 모든 풀릴꺼야. 친구. 우린 정말 오래된 팀이잖아.' 라고.

 

(2016년 0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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