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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9. 리바운드 걸

낙농콩단/Season 16-20 (2016-2020)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16. 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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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쟝 마리 시립도서관에 자가 대출 반납기가 들어오던 날을 기억한다.

 

  나는 즐거움을 감추지 못하고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렇다. 평소 내 성격을 생각하면 분명 흔한 일은 아니다. 그만큼 기분이 좋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귀찮은 일이 줄어들 것이라는 기대감. 그게 전부였다. 그거면 충분했다. 물론 따지고 보면 세상에 귀찮지 않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더욱이 도서관으로 한정하자면, 따분한 동시에 귀찮은 것이 이 곳 업무의 본질적 생리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이기적인 사람이 아니다. 세상에서 내 일만 귀찮고 힘들며 고되다고 여기는 그런 부류가 아니다. 어질러진 장서를 정리하거나, 반납된 책을 원위치하는 일에도 나름 귀찮은 부분이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잘은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알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페이지들의 직무이기 때문이다. 나와 같은 라이브러리 어시스턴트들의 직무가 아니라.


  나는 쟝 마리 시립도서관의 라이브러리 어시스턴트다. 대출이나 반납을 담당하고 연체료를 징수한다. 또한 현장 및 유선 문의에 응대하는 일도 겸한다. 그리고 또 뭐더라…… 도서관 카드 발급 업무도 담당한다.


 *

 

  새로 들어올 자가 대출 반납기. 나의 바람대로 그것은 대출 도서의 반납 과정에 혁신을 가져왔다. 많은 부분에서 일을 덜어주었다. 사람 손을 거치지 않고도 대출과 반납 프로세스가 어느 정도는 돌아가게 되었으니 말이다. 물론 모두가 기뻐하지는 않았다. 이를테면 어린 페이지들은 시큰둥했다. 심지어 시샘 어린 시선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 아이들은 이렇게 볼멘 소리를 내었다.


- 새 기계가 들어왔지만 우리 일은 조금도 덜어지지 않았어.


  맞는 말이었다. 페이지들의 직무는 책을 정리하여 제 자리에 위치시키는 것이었다. 자가 대출 반납기는 반납된 책을 제 자리로 돌려보내지 못했다. 뒤섞인 장서의 순서를 맞춰주지도 못했다. 그 아이들은 항상 불평만 했다. 꼭 이번만이 아니라 모든 문제에 대해서 항상 그러했다. 솔직히 나는 그 아이들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아이들은 대부분이 아르바이트 학생으로 파트-타임이었다. 나는 엄연한 풀-타임 직원이다. 비록 라이브러리안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 아이들에게 만만하게 보일 위치는 아니다. 사실 세상 이치가 그렇다. 그 아이들도 라이브러리안들 앞에서는 꼬리를 내린다. 이빨을 드러내고 기어오르는 것은 (나와 같은) 라이브러리 어시스턴트들을 상대하는 경우 뿐이다. 내가, 그리고 나의 직무가 만만한 것이다. 고속도로 톨게이트 직원들이 그러하듯이 대출과 반납의 행렬 속에서 동전이나 받아 챙기고 있단 이유로 하찮게 보는 것이다.


 *

 

  쟝 마리 시립도서관에는 두 사람의 라이브러리 어시스턴트다. 한 사람은 나이고 다른 한 사람은 옆자리의 캐시 펠티에라는 스물 다섯살 먹은 아가씨다. 솔직히 나는 사람들이 도서를 대출하려고 할 때 되도록이면 그 아이 앞으로 줄을 서주기를 바랐다. 아니면 자가 대출 반납기를 이용하던가. 대출 도서를 반납할 때도 마찬가지다. 되도록 그 아이나 자가 대출 반납기 중 하나와 일을 처리했으면 싶었다. 혹시나 오해를 살까 밝혀두지만 나는 게으른 사람이 아니다. 단지 그렇게 단순하고, 손이 많이 가고, 비위생적이기까지 한 일은 (비록 이 직군의 핵심 업무라고 할지라도) 너무 열심히 할 필요는 없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런 면에서 펠티에 양의, 아니 캐시의 캐퍼시티(처리용량)는 항상 아쉬웠다. 오! 주여! 진실로 그 아이는 빠릿빠릿하게 일을 처리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참말로 멀었다. 자가 대출 반납기가 들어오기 전까지 나는 거의 악전고투라고 해도 좋을만큼 어려움을 겪었다. 끔직한 시절이었다. 하지만 이제 자가 대출 반납기가 들어온 것이다. 나는 효율적 업무 분담에 대한 핑크빛 꿈을 꾸었다. 장기적으로는 캐시와 자가 대출 반납기가 성가신 현장 일을 분담하고 나는 (말하자면, 일종의) 관리직으로 올라서기를 희망한다. 충분히 예상해봄직한 일이다. 나는 펠티에 양보다 직급과 연차가 위에 있다. 고로 주급도 더 많이 받는다. 따라서 만약 라이브러리 어시스턴트 중에서 누군가 (말하자면, 일종의) 관리직으로 승진을 하게 된다면 순서는 응당 다음과 같아야 할 한다고 생각한다.

 

(1 순위) 나, 소피
(2 순위) 캐시 펠티에
(3 순위) 자가 대출 반납기

 

*

 

  명색이 하나 밖에 없는 같은 직급의 동료를 내가 썩 좋아하지 않는 것처럼 들린다면 그건 오해다. 부분적으로는 그렇다. 아니, 물론 일부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기는 하다. 첫째, 그 아이는 좀 모자라다. 둘째, 그 아이는 눈치가 더럽게 없다. 셋째, 그 아이의 비위생적인 생활 습관은 소름끼칠 정도다.


  내 자랑은 아니다. 다만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약간의 청결 강박을 가지고 있다. 더럽고 지저분한 건 딱 질색한다. 종종 조금 지나치다는 소리도 듣지만 타고나 오랜 시간 길들여진 습관을 쉽게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 토드백을 뒤집어 털어 보면 비닐 장갑, 라텍스 장갑, 페브리즈, 액상 비누, 손 세정제, 그리고 물휴지가 나온다. 여러개가 나올 수는 있지만 하나도 나오지 않는 일은 없다. 깨어 있는 내내 보이는 구석 구석을 쓸고 닦는 내 눈에 캐시는 위험 관리 대상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당장 방역 격리가 필요하다고 볼만한 상황을 여러차례 목격했다. 할 수만 있다면 (나에게 그럴 권한만 있다면) 정말로 그리했을 것이다.


  나의 직업과 청결 강박 증세의 궁합은 사실 묘하다. 사람 대면하는 빈도가 비교적 적은 조용한 일이라는 점에서는 나쁘지 않다. 하지만 심각하게 오염된 공공 도서관 장서들을 생각하면 영 찝찝한 마음을 떨치기가 어렵다. 여러 사람의 손을 타면서 청결하기를 바랄 수야 없을 것이다. (자기 집 화장실과 공중 화장실의 차이를 굳이 이 대목에서 언급할 필요까지 있겠는가?) 수십 차례에 걸쳐서 나는 경고했다. 때로는 개선을 위한 의견도 제안했다. 쟝 마리 시립도서관 내의 상급부서는 물론 전국 도서관 위원회나 정부 관계부처에 보고하기도 했다. (물론 그 사람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 놈의 예산을 핑계로…….)


  공공 도서관 책들은 세균 배양 접시나 다름없다. 막말로 무슨 종류가 얼마나 자라고 있을진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최근 한 대학에서 이뤄진 연구 결과에 따르면 공립 도서관의 '대출 불가 도서'와 '대출 가능 도서' 사이의 세균 검출 빈도가 18배 이상 차이가 난다고 한다 (어느 쪽이 18배 높은지는 상상에 맡긴다). 곰팡이는 그 종에 있어 자그마치 32배나 다양했다. 누군가 도서관 대출 도서로 인해 호흡기 질환이나 피부 질환을 앓았다고 하더라도 이상할 이유가 하나 없으리라. 안타까운 것은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문제의 심각성을 모른다는 사실이다.먼지, 세균, 곰팡이가 돌고 돈다. 우리 직원들은 그 악순환의 고리를 긴밀하게 공유하고 있는데도 너무 안이하게들 생각한다. 이를테면 캐시. 심지어 그 아이는 반납된 책을 만진 손으로 자기 코를 만지고, 그 손으로 다시 샌드위치를 먹은 적도 있다. 그러니 그 불결한 계집애와는 거리를 두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쟝 마리 시립 도서관에 자가 대출 반납기 2.0이 도입되었을 때 나는 다시 한 번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자가 대출 반납기 2.0은 반납 도서를 소독액으로 세척하는 놀라운 기능을 갖춘, 위생과 청결에 특화된 다음 세대 모델이었기 때문이다. 사용설명서에 따르면 거의 98.9%의 세균을 제거하는 효과가 있다고 했다. 브라보! 마치 누군가 나의 속마음을, 저의 바람을, 저의 필요를 속속들이 읽어내어 마법이라도 부려준 것 같은 느낌이었다. (과연 누가 그렇게 해줄 수 있었을까? 페어리 갓마더?)


  하지만 나는 나름 이성적인 사람이어서 마법보다는 기술을 믿었다. 2.0 모델의 상세 동작 원리를 이해하고 싶었다. 거의 98.9%라는 구체적 성능 지표의 근거에 대해서도 궁금함이 일었다. 유감스럽게도 사용자 매뉴얼은 너무 직관적이고 너무 단순했다. 나의 의문에 충분한 답을 줄 수 없었어요. 도서관의 누구에게도 물어볼 수 없었다. 잘난 사서들도 몰랐다. 심지어 라이브러리 디렉터 뒤상씨도 잘 모르는 듯 했다. 쟝 마리 시립도서관에서 가장 가방 끈이 긴 뒤상씨도 모르는 걸 도서관의 다른 누가 알 리가 없을 것이다.
- 뒤상씨, 자가 대출 반납기 2.0에 대해서 좀 아세요?
- 모르겠는데요, 캐시. 왜요?
- 소독액을 쓰면 종이가 젖지 않을까 해서요.
- 그렇군요. 일리 있는 말이네요.
  뒤상씨는 언제나 그렇듯, 시선을 모니터 위의 스프레드 시트에서 떼지 않고 건성으로 대답했다.
- 종이가 젖지 않는 소독액 같은 것이 있지 않을까요?
- 그렇겠죠. 아마도.
- 맞아요. 아마도 그런 식이겠죠? 그럼 앞표지랑 뒷표지는 깨끗하게 될텐데 책 안쪽은 어떡하죠? 
- 그러게요, 캐시. 정말 궁금하네요.
- 뒤상씨, 손에 침을 묻혀가며 페이질 넘기는 사람들이 있단 사실을 아세요?
- 몰랐네요, 캐시. 놀랍군요. 그런 사람들이 있다니.
- 책 안쪽은 어떡하죠?  어떻게 한 장씩 넘길 수 있을까요? 맞아요. 로봇 손 같은 게 있는 거에요. 그렇죠?
- 그렇네요, 캐시. 그러면 되겠군요.
  뒤상씨의 맞장구는 무미건조했지만 나는 덩달아 신이 났다.
- 그렇군요! 로봇 손들이 책장을 한 페이지씩 넘기면서 적외선인지 자외선인지를 조사하여 세균 등 기타 이물질을 척살하는 거에요! 
- 거 참 시간이 꽤 걸리겠군요.
- 아마 그렇겠죠. 수천페이지짜리 러시아 소설 같으면 어림도 없겠지만 상관없어요. 요즘 세상에 그런 걸 빌려가는 사람이 어딨겠어요? 직업이 없는 사람이 아니고선 반납일 이전에 반도 읽지 못할 걸요? 
- 그렇게 소독이 끝나면 하단의 보관함에 차곡차곡 보내는 거죠. 다음 날 아침 페이지들이 열쇠로 보관함을 열면, 짠! 깨끗한 반납 고서들이 쌓여 있겠죠.
- 축하해요, 소피. 새 기계의 원리를 밝혀냈군요.  


*

 

  라이브러리 디렉터 뒤상씨는 쟝 마리 시립 도서관의 최고 책임자였다. 또 인정받는 문헌정보학자이기도 했다. 나이는 40대 중반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열 살쯤 어려보였다. 갸름한 턱선에 두꺼운 뿔테 안경이 지적인 인상을 풍겼다. 외모를 굳이 셀러브리티와 비교하자면 배우 젊었을 적의 알랭 들롱을 닮았다. 뒤상씨는 도서관의 풀-타임과 파트-타임을 통틀어 직원 중 유일한 남성이었고 또 (돌아온) 싱글이었다. 그는 어렸을적 사고로 시신경이 손상되어 거의 시각 장애인과 다름없는 시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동시에 그 덕에 나머지 감각에 있어서는 보통 사람 이상인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그는 지팡이를 두들기며 다녔기 때문에 도서관 직원들은 딱딱딱 소리와 함께 그의 등장을 예측할 수 있었다. 또한 항상 깨끗하게 세탁한 잘 마른 면직물 냄새가 났기 때문에 후각이 예민한 직원들의 경우엔 향기로 그의 존재를 인식할 수도 있었다. 잘생기고 싱글에다가 (안쓰럽게도) 핸디캡을 안고 있는 남자. 직원들 사이에서 회자될만도 했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직원들이 뒤상씨를 연모했다. 물론 나도 그 중의 하나였다. 무의미한 짝사랑은 아니었다. 우리는 작년 봄부터 가을까지 7개월에 걸쳐 만났었다. 우리가 깨진 것은 내 결벽증 때문이었다. 뒤상씨가 입을 맞추려는 걸 내가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뒤상씨를 사랑했지만 입과 입을 맞추는 행위는 너무 불결하게만 느껴졌다. 어쩔 수 없이 뒤상씨는 날 떠나갔다. 그이는 외로움을 많이 느끼는 남자여서 여자 없이는 살 수 없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여전히 날 사랑한다고 확신한다. 그건 본능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자가 대출 반납기의 등장은 대체적으로 만족스러웠지만 그래도 여전히 나는 라텍스 장갑을 끼운 채로만 책을 만졌다. 1.1%의 불안감 때문이었다. 여전히 페이지들의 손을 타면서 2차, 3차 오염이 일어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책은 돌고 돌았다. 화폐처럼. 어차피 다시 그 생물학적 무기들은 돌고 돌고 돌아 대출 희망자들의 손에 들려서 내 앞에 나타날 것이었다. 모쪼록 많은 수의 대출 희망자들이 캐시에게 향하기를! 언제나 그러했듯 저는 굼뜬 동작으로 천천히 처리하는 선임자의 위엄을 누릴 계획이었다.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큰 진보가 아닐 수 없어.

 

  나는 이 짧은 한 마디로 자가 대출 반납기 2.0의 도입을 논평했다. 마스크를 쓴 채로 캐시에게 의견을 물었다. 
- 얘, 넌 어떻게 생각하니?
  한심스럽고 위생 관념이 투철하지 못한 나의 파트너는 헤벌쭉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 뭐, 좋은 것 같아요. 잘은 모르겠지만. 
  나는 그 멍청하고 대책없는 계집애에게 질문을 던진 자신을 질책했다. 캐시는 반납된 책을 만진 손으로, 자기 코를 만지고 머리를 긁고 귀를 후빈 다음에 자기 샌드위치를 먹은 적도 있는 아이다. 대책이 없단 짧은 말 정도로는 그 무지함을 설명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


  쟝 마리 시립 도서관에 자가 대출 반납기 3.0이 도입된 것은 그해 겨울의 일이었다. 그때 역시 나는 환호하며 휘파람을 불었다. 자가 대출 반납기 3.0은 정말이지 굉장한 기계였다. 이제는 소독한 반납 도서를 서가의 제자리에 가져다 놓는 일까지 수행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비교적 아주 정확하고 신속하게. 내가 보기에는 페이지 열 명 몫은 충분히 해내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부분은 소독 과정을 거친 반납 도서가 다시금 여러 사람 손을 타지 않는단 점이었다. 아주 합리적이었다. 또 위생적이었다. 딱 하나 아쉬운 점이 하나 있다면 자가 대출 반납기 3.0이 서가 사이를 누비며 책 정리를 수행하는 동안에 대출 및 반납 업무에서 빠지게 된다는 정도였는데 …… (자가 대출 반납기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대출 희망자들이 반양장 세균 덩어리를 들고 나타나면 어쩌지? 게다가 그 사이 하필 캐시가 화장실에 가서 코를 후비고 있으면?) 생각해보니 그 부분은 문제될 것이 없었다. 이미 자가 대출 반납기 2.0이 한 대 있었으니까. 자가 대출 반납기 3.0이 종종 자리를 비운다고 해서 크게 업무 부담이 늘어나진 않을 것이다. 과거에 나와 캐시 두 사람이 나누어 하던 일을 이제는 나와 캐시, 자가 대출 반납기 2.0과 자가 대출 반납기 3.0, 이렇게 넷이 나누어 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누구를 닮아 호기심이 많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자가 대출 반납기 3.0의 원리도 궁금했다. 이를테면 어떤 책이 반납되었을 때 기계가 그 책이 무슨 책인줄 어떻게 알고 원래 꽂혀져 있던 자리를 찾아서 다시 가져다가 놓는다는 말인가?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도서관의 누구에게도 물어볼 수 없었다. 잘난 라이브러리안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가방 끈 긴 라이브러리 디렉터 뒤상씨도 모르는 듯 했기 때문이다. (거듭 언급하지만 뒤상씨도 모르는 걸 도서관의 다른 누가 알 리 없지 않은가!)
- 뒤상씨, 자가 대출 반납기 3.0에 대해서 좀 아세요?
- 모르겠는데요, 캐시. 왜요?
- 무슨 책인지 어떻게 알고 뒤섞인 책을 제자리에 갖다놓을 수 있는 걸까요?
- 그렇군요. 일리 있는 말이네요.
  뒤상씨의 시선은 여전히 모니터 위의 스프레드 시트에 박혀 있었다.
- 맞아요. 어쩌면 생각보다 어렵지 않을지 몰라요. 반납시 바코드를 인식하면서 전산에 서지 정보 역시 연동되지 않았을까요?
- 그랬겠죠. 아마도요.
- 그럼 어떤 순서로 책이 쌓여 있는지 알 수도 있겠죠. 그렇게 순서대로 원래 위치로 가져가 꽂는 것이고요. 기차역 택시 승강장에서 처럼 미리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손님을 하나씩 태우는 거죠.
- 그렇네요, 캐시. 그러면 되겠군요.
- 그렇담 이동은 어떻게 하는 걸까요? 바퀴가 있어 굴러다니는 건 알겠는데 서가 높은 곳에는 어떻게 올라갈까요? 도서관에선 정숙이 중요하잖아요.
- 그러게요, 그거 참 큰 문제로군요.
- 로봇 팔을 밖으로 빼서 책장을 기어 올라갈 수도 있겠네요. 어쩌면 로봇 다리가 있을지도 모르죠. 로봇 팔이 있는데 로봇 다리가 없을 이유는 없잖아요?
- 훌륭하군요, 소피. 새 기계의 원리를 밝혀냈네요.  
  물론 목소리의 톤으로 미루어보면 그가 그렇게 놀라워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


  그 무렵 페이지들 사이에서는 감탄과 한탄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그들이 할 일이 없어졌으니까. 쟝 마리 시립 도서관에는 총 여덟 명의 파트 타임 페이지들이 있었는데 모두 일괄 전환 배치가 이루어졌다. 파트 타임에서 또 다른 파트 타임으로, 다시 또 다른 파트 타임으로. 그리고 더 이상 전환할 파트 타임이 없어졌을 때 거짓말처럼 해고 통지가 이루어졌다. 시험조로 걸린 두 명이 마리와 르네였다. 


  나는 솔직히 그 아이들과는 그리 친하지 않았다. 해고 소식을 듣고도 별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안타깝지만 뭐 어쩌겠어. 그러니까 파트 타임이지.' 도서관 정문 앞에서 그녀들이 1인 시위를 벌일 때도 마찬가지였다. 별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반면 대책없는 캐시는 눈물 콧물을 질질 짰다. 마치 마리와 르네가 자기 친 언니들이라도 되는 것처럼. '과연 친 언니들이 직장을 잃어도 저 애가 저럴까?' 싶을 정도였다. 하여간에 반납된 책을 만진 손으로 눈물 닦고 콧물 닦고 그 다음에 그 손으로 다시 샌드위치를 먹는 그 아이는 정말로 구제 불능이었다. 정녕 노력한다고 구제할 수 있는 영혼이 아니란 확신이 들었다. 

 

*


  쟝 마리 시립도서관에 자가 대출 반납기 4.0이 도입된 것은 그 해 겨울의 일이었다. 나는 한껏 기대에 부풀었다. 매번 새로 나올 때마다 그러했던 것처럼 4.0도 놀라운 혁신의 결과물일 거라고 짐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의외의 상황이 벌어졌다. 충격적이라고 할만한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실망스러웠다. 다소 맥이 빠졌다. 휘파람을 불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자가 대출 반납기 4.0은 자가 대출 반납기 3.0과 거의 유사했다. 비단 외양만이 아니었다. 본질까지 닮았다. 굳이 새로운 특징을 따지자면, 도서간 회원증을 발급해 준다는 점이 있었다 (뭐? 겨우?). 또 연체료를 징수한다는 부분도 있었다 (설마……, 농담이지?). 회원증이나 연체료 때문에 큰 돈을 들여서 새 기기를 도입한다는 것은 얼토당토 않은 일이었다. 말하자면 자가 대출 반납기 3.0을 구비하지 않았던 도서관에나 구매를 고려함직한 제품인 셈이었다. 


  그럼에도 쟝 마리 도서관은 자가 대출 반납기 4.0을 도입했다. 자세한 내막은 몰랐다. 파트-타임 페이지들을 해고함으로써 운영비를 절감한 덕분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내 입장에선 특별히 좋을 것도 싫을 것도 없었다. 일손이 하나 더 늘어난 것은 싫을 이유가 없는 일이다. 벌써 세 대였다 (2.0과 3.0, 그리고 새로 자리를 잡은 4.0). 나 같은 담당 직원들보다 처리 속도도 빨랐다. 자연히 줄을 서서 기다리는 일도 적었다. 자가 대출 반납기 도입 이후 귀찮은 일은 꾸준히 줄어들고 있었다. 꽤 많은 사람들이 기계와 대면하는 일에 빠르게 익숙해졌다. 사람들이 수백년동안 나와 같은 담당 직원들을 거쳐서 책을 빌려왔노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놀라운 일이었다. 무인 주차권 발급기처럼, 자가 대출 반납기도 어느 순간부터인가 너무도 당연한 것이 되어가고 있었다. 나쁘지 않은 공생 관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냉장고 세 대를 나란히 줄지어 놓은 것처럼 보이는 자가 대출 반납기들. 팔짱을 끼고 늠름한 녀석들의 자태를 감상하고 있는데 캐시가 뒤로 슬그머니 다가와 말을 걸었다. 
- 이젠 저 아이들이 더 많네요?
- 응? 뭐라고?
- 저 아이들이 우리보다 더 많다고요. 우리는 둘인데 저쪽은 셋이잖아요.


  그 대목에서 두 가지 거슬리는 점이 있었다. 첫째는 그녀가 내게 말을 걸었다는 사실이었다. 둘째는 나와 자기를 싸잡아 '우리'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는 부분이었다. 물론 직원 구성비에 대한 그 아이의 지적이 틀렸다는 건 아니다. 쟝 마리 시립도서관은 분명 거대한 변화의 물결에 휩싸여 있었다. 미처 눈치채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그건 남은 직원이 얼마 없어서일 가능성이 크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마리와 르네를 비롯해서) 파트-타임 페이지들이 차고 넘쳤다. 사람 직원이 열다섯이었다. 하지만 자가 대출 반납기 3.0이 도입되면서 여덟명의 페이지들이 짐을 쌌다. 부분적으로(파트-타임이니까 짐도 그만큼만 있었을 것이다). 이제 남은 사람 직원은 일곱이다. 청소 용역 직원 둘을 빼면 다섯이다. 디렉터 뒤상씨와 표정 없는 사서 두 사람, 캐시, 그리고 나.


  아이러니한 것은 그 이후 우리 도서관이 풀-타임 직원 구성 비율 (굳이 셈하자면 100%) 우수 기관으로 선정되었단 사실이다. 뒤상씨가 대표로 정부 표창을 받았다. 나도 시상식장에 따라갔다. 캐시도 물개처럼 짝짝짝 박수를 쳤다. 표정 없는 사서 두 사람도 영혼없는 손 마주치기의 기적을 보여주었다. 그때 뒤상씨는, 뭐랄까…… 조금 멋쩍은 표정이었다. 숫자의 장난으로 덜컥 상을 받게된 것도 쪽팔린 일이었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지 싶다. 뒤상씨가 파트-타임 페이지들을 각별히 아꼈던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아꼈다는 것은 업무 시간 이후에 뒤상씨의 사무실에서, 열람실에서, 또 비품실에서 둘 혹은 셋 만의 은밀한 시간을 보냈다는 뜻이다. 내가 아는 바로는 마리도 그랬고, 물론 르네도 그랬고, 또 다른 모두도 (길게든 짧게든 파트-타임으로 일했던 거의 모든 아이들이) 그랬다. 파트-타임 페이지들은 대개 어렸다. 어리다는 게 쉽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재주 좋은 뒤상씨에겐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던 듯 했다. 혹은 그 어린 것들이 꼬리를 쳤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느 쪽이 진실이든간에 뒤상씨로서는 어린 애인들을 해고한 댓가로 받는 상찬이 민망스러울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

 

  난 뒤상씨의 파트-타임 연애가 진실된 사랑에 기반한 관계였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뒤상씨는 틀림없이 나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저 단발적으로, 이따금 참을 수 없을만큼 외로웠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짐작했다. 결국 그 남자가 내 품에 안기게 되기까지의 일종의 과정일 뿐이라 확신했다. 사실…… 그런 맥락에서 은근히 기대했던 부분도 있었다. 여덟명의 파트-타임 아가씨들이 차례 차례 도서관을 떠나게 된 덕분에 불필요한 과정이 상당히 줄어들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시점 쟝 마리 시립도서관에는 치마를 입은 사람이 둘 밖에 없었다 (스웨이드 숄더백 대신에 걸쇠가 달린 서류가방을 들고 다니는 표정 없는 사서들은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쯤되면 슬슬 나에 대한 마음을 표현할 시기가 무르익지 않았나 생각했다. 그 겨울, 나는 되도록 예쁘게 보이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그를 볼 때마다 일부러 한 번 더 웃어주었던 것 같기도 했다. (초록불이에요! 뒤상씨! 멈추실 필요 없어요!) 

 

  표정 없는 사서들에 대해서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여성으로 매력이 없다시피한 수준이었다. 그들의 생물학적 성별은 오직 인사 기록표를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었다. 웃지도 않고 화를 내지도 않았다. 늘 무표정했다. 말을 하는 것도 들어보지 못했다. 옷도 오트밀 색상로만 골라 입었다 (일부러 그렇게 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두꺼운 뿔테 안경을 끼운 채로 책 사이에 머리를 박고, 오로지 일, 일, 일만 했다. 다른 직원들은 그들을 '로봇'이라고 불렀었다. 십대 고등학생들과 필적할 수준으로 남성 호르몬을 뿜어내는 뒤상씨, 파리 디즈니랜드에서 심지어 미니 마우스와 데이지 덕에게 작업을 걸었던 바로 그 뒤상씨조차 그들 앞에서는 도 닦는 승려처럼 조신하게 행동할 정도였다.

 

 *


  예상치 못했던 것은 뒤상씨의 여성 감지 센서가 캐시 펠티에를 탐지할 수 있었다는 부분이었다. 그렇다. 옆자리 캐시. 그녀는 한없이 대책없고 청결하지도 못했고 내가 보기엔 별로 매력적이진 않았지만 그래도 뒤상씨의 탐지 영역 안쪽에 위치하기는 했던 모양이다. 어쩌면 내가 그 아이를 과소평가 했을 수도 있겠다. 예쁜 꽃에만 벌이 꼬이란 법은 없지 않은가! 50 퍼센트의 가능성. 한편으로는 힘이 빠진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확률의 신이 나를 외면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의도적으로 날 피해간 것이 확실했기 때문이었다. 일단 다시금 나와 사귀기 시작하면 그 다음을 기약할 수 없기에 가능한 내게 고백하는 것을 늦추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제대로 된 남자가 캐시 같은 애를 만날리 있겠는가!)


  아! 감동적이었다. 뒤상씨가 얼마나 나를 사랑하는지. 또 얼마나 아끼고 배려해주고 있는지 마음으로 느껴져 행복했다. 물론 덕분에 캐시를 싫어하는 마음은 더욱 더 견고해졌다. 원래도 싫었지만 더 싫어졌다. 저 아이만 없었어도 '용기없는 바보' 뒤상씨가 조금 더 과감하게 내게 한 걸음 다가올 수 있었을테니 말이다. 나는 생각했다. '하루라도 빨리 저 아이를 내보내야겠어.' 훗날 보다 진보한 버전의 자가 대출 반납기가 등장하여 남은 도서관 직원들 중 누군가 해고 되어야 한다면 명백히 그 아이가 1순위일 것이다. 그때쯤 내가 관리직(말하자면, 일종의)으로 올라서는 것도 좋은 그림일 것이다.

 

*

 

  어느 날 나는 기회를 보아 뒤상씨를 찾아갔다. 나는 뒤상씨와 캐시가 열람실에서, 비품실에서, 때로는 양쪽을 오가며 무슨 짓을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들이 더럽혀 놓은 곳을 쳥소하는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청소 용역 직원들? 천만의 말씀이다. 락스를 뿌리고 수세미질을 해가며 흔적을 지운 사람은 따로 있었다. 이 도서관에서 유일하게 청결에 대한 정상적 관념을 지니고 있는 사람 말이다.
- 뒤상씨, 캐시에 대해 좀 아세요?
- 아뇨. 잘 모르겠는데요.
  거짓말. 그는 모니터 위의 스프레드 시트에서 눈도 떼지도 않았다. 찔리는 게 있어 그랬을 것이다. 두 사람이 열람실 책상 위에서 열렬히 서로를 끌어안고 있는 모습이 떠올랐다. 내 눈을 똑바로 마주칠 면목이 없을 것이다.
- 그냥요. 요즘 부쩍 캐시랑 면담하시는 일이 많아진 것 같아서요.
- 글쎄요. 특별히 잦았던 건 아닌데……. 오히려 소피가 더 잘 알지 않나요? 바로 옆자리 동료 아닌가요?
  난 코웃음을 쳤다. 속으로 생각했다. '치마 속까지 들여다 본 당신보다 더 잘 알겠어요?' 꾸욱 눌러참았다. 
- 아무리 동료라도 터 놓고 이야기하기 힘든 비밀이 있을 수는 있잖아요. 
- 물론이에요, 소피. 사적인 사연을 다 털어놓지야 못하겠죠. 사적인 사연이라면.
  능숙한 플라잉 낚시꾼처럼 찌를 살살 움직였더니만 그도 미끼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 맞아요, 뒤상씨. 그게 다에요. 전 그냥 제 짝꿍에게 무슨 일이 있나 궁금했을 뿐이에요.
  '짝꿍'이라니. 우웩. 헛구역질을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내 입으로 그런 말을 했단 말야? '짝꿍'이라고?
- 훌륭하네요. 소피. 동료를 아끼는 마음이 대단해요.  
  나는 빙긋 웃어보였다. 겉으로만 말이다.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했다. 하루 빨리 이 불쌍한 남자를 구원해주어야 한단 생각을. 그게 우리 모두를 위한 최선의 길이었다. 하루 빨리 주제 파악을 하고 그릇에 맞는 인생을 찾아가는 편이 캐시에게도 좋을 것이다. 그 더러운 계집애로부터 하루 빨리 정화되는 편이 당연히 뒤상씨에게도 좋을 것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캐시는, 반납된 책을 만진 손으로 자기 코를 만지고, 발 뒤꿈치도 긁은 다음에, 어쩌면 그 사이에 은밀한 부위도 만지작거리다가, 다시 그 손으로 샌드위치를 먹는 아이다. 충분히 그러고도 남는 아이다.

 

*


  쟝 마리 시립도서관에 자가 대출 반납기 5.0이 들어온 것은 그로부터 두 달 후의 일이었다. 겨우 두 달만에 신제품이 나온 것이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사이에, 마치 자가 대출 반납기 4.0은 깜짝 예고편이었다는 듯이 말이다. 우수 기관 선정으로 가속이 붙은 정부 지원이 예산 집행의 부담을 덜어주었던 듯 했다. 자가 대출 반납기 5.0에는 물론 두드러진 장점이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두 달만에 출시한 신제품이 마주하여야 할 시장의 저항을 감당할 수가 없었을테니!). 하지만 더 눈에 띄는 것은 우선 외양이었다. 상단의 스캔부가 사라졌다. 반납도서 투입부도 없어졌다. 하단의 보관함도 없었다. 대신…… 머리와 몸통과 팔과 다리가 있었다. 누가 봐도 사람과 닮은 구조의, 그러면서도 로봇이라는 사실은 알 수 있을 정도의, 말하자면 C3PO와 같은 형상을 하고 있었으므로, 휘파람을 불려던 기분이 싹 사라지고야 말았다. 나는 항상 자가 대출 반납기의 진일보를 환영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그때만큼은, 잘 판단이 서지 않았음을 고백해야겠다. 설명할 수 없는 묘한 예감 같은 것이 있었다고 할까.


  자가 대출 반납기 5.0은 반납된 도서를 '오른손'으로 받아들었다. '왼손'으로는 핸디스캐너를 가져다가 바코드를 찍었다. '몸통'에 여닫을 수 있는 작은 챔버가 있어 반납된 도서를 넣고 30초간 자외선 살균을 수행하였다. 마지막으로 소독된 도서를 꺼내어 북 카트에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 그 능숙한 움직임이 소름끼칠 정도였다. 도서관 이용객이 한산해지면 자가 대출 반납기 4.0은 튼튼한 '두 다리'로 걸으며 북 카트를 '두 팔로' 밀어 서가를 한 바퀴 돌았다. 반납도서를 제 자리에 꽂고 뒤섞인 장서를 원위치했다. 가끔식 그는 (그는?) 도서관 정문 오른편에 나란히 세워진 자신의 이전 모델들 - 자가 대출 반납기 2.0과 자가 대출 반납기 3.0, 그리고 자가 대출 반납기 4.0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는데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무표정하기로는 2층의 사서들 뺨 쳤으니!). 에메랄드색 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의 (그의?) 마음을 조금 더 들여다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똑바로 쳐다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두려웠다. 


  자가 대출 반납기 5.0이 가져온 혁신이 결코 싫지는 않았음에도. 그의 합류 이후 도서관은 거의 무균시설이나 다름 없을 청결도를 자랑했다. 장서들은 미개봉 상태의 수술복만큼 깨끗했고 대출 프로세스를 거친 도서의 멸균 과정도 철저하게 관리 되었다. 자가 대출 반납기 5.0이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종전 대비 세균은 23.7배 줄어들었고 무작위 표본 추출 검사 단 한 종의 곰팡이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했다. 감히 단언하자면 쟝 마리 시립도서관 역사상 이렇게 깨끗했던 시기가 없었다고한들 결코 과언이 아닐 것이다. 분명 내가 바랐던 신세계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기쁘지 않았다. 틈나는대로 쓸고 닦는 자가 대출 반납기 5.0는 로봇 버전의 나를 보는 듯 했다. 그럼에도 내가 느낀 건 동질감과는 거리가 멀었다.
 
  자가 대출 반납기 5.0은 이전 모델들과 달랐다. 자판기나 냉장고처럼 멀뚱히 세워 놓을 것이 아니었다. 앉을 자리가 필요했다. 사람 직원들처럼 자리를 만들어 줬다는 얘기다. 마치 정말로 새 직원이 채용된 것처럼. 뒤상씨의 지시로 나와 캐시가 앉았던 대출/반납 창구에 파티션이 하나 더 세워졌다. 두 칸에서 세 칸으로. 그 무렵까지도 뒤상씨는 업무 시간 전후로 캐시와 비밀스러운 시간을 보내고는 했다. 두 달이나 한 여자와 관계를 지속해나간 것이 뒤상씨에게 이례적인 일이긴 했다. 한계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가 내게 고백할 시간이 임박했단 확신이 들었다. 그를 떠보고 싶은 마음에, 그리고 자가 대출 반납기 5.0으로 인한 불안감을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은 마음에 나는 뒤상씨를 다시 찾아갔다. 
 
- 뒤상씨, 자가 대출 반납기 5.0 말이에 대해서 좀 아세요?
-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 그냥요. 좀 신기해서요. 팔 다리가 달린 로봇이라니……. SF 영화에서나 나오던 거 아니에요?
- 그렇군요. 신기하긴 하더군요.
  뒤상씨는 모니터 위의 스프레드 시트에서 눈을 때지 않고 대답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말이다. 얼마나 날 쳐다보기가 힘들면.
- 도대체 어떻게 움직이는 걸까요? 
- 예전에 소피가 그랬잖아요. 자가 대출 반납기 안에 로봇 팔이 있을 거라고요. 또 로봇 다리가 있을 수도 있다고 했죠. 
- 맞아요. 그랬었죠. 자가 대출 반납기 3.0이 들어왔을 때의 일이었어요.
  뒤상씨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 그럼 소피가 예상했던 그대로 아닌가요? 다만 로봇 팔과 로봇 다리가 바깥에 나와 있을 뿐이죠.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 그건 그렇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잘 모르겠어요.
  뒤상씨는 머리를 긁적거리다가 고개를 들어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 선글래스에 햇빛이 반사되어 번쩍거렸다. 
- 그래서 나한테 물어보러 온 건가요?
- 맞아요. 뒤상씨라면 잘 아실 것 같아서.
- 굳이 왜요? 소피는 기계의 원리를 이해하는데 천부적인 능력이 있잖아요.
  퉁명스러운 목소리. 그 말이 진담인지, 아니면 비꼬는 것인지 잘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리고 이내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모니터 위의 스프레드 시트를 작업하는데 열중하기 시작했다. 나는 생각했다. '마음을 들킬까봐 부러 정을 떼려고 무뚝뚝하게 저러는 거야' 라고. 
 

*


  다음 날 저녁이었다. 어쩌면 그 다음 날이었을지도 모른다. 날짜가 언제였는지는 상관없다. 퇴근하던 뒤상씨가 대출/반납계를 들렸다. 딱딱딱 소리가 먼저, 그리고 깨끗하게 세탁한 면직물 냄새가 뒤이어 그의 등장을 알렸다. 나와 캐시는 제각기 다른 이유로 그를 반겼다. 하지만 뒤상씨의 눈길이 향한 곳은 자가 대출 반납기 5.0이었다. 그는 특유의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 시간 좀 있어요? 로즈?
  순간 누군가 프라이팬을 들어 내 뒷통수를 후려갈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로즈? 로즈라고? 캐시의 놀란 표정 또한 가관이었다. 원래 덜 떨어지게 생긴 표정을 하고 다니는 아이인데 입을 떡 하니 벌리고 못생긴 이를 드러내니 한층 더 멍청하게 보였다. 아무튼 뒤상씨의 그러한 돌발 행동을 그 계집애 또한 예측하지 못했던 것만은 틀림없었다. 로즈…… 로즈라니……. 


  나는 그제야 자가 대출 반납기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이전 모델들과 달리 얼굴과 몸통과 팔과 다리가 달려있다는 사실 때문에 미처 신경쓰지 못했던 사실들이 눈에 들어왔다. 자외선 살균기가 내장된 몸통의 윗 부분, 그러니까 가슴이 있을 부분이 볼록하게 나와 있었고, 허리가 있을 부분과 엉덩이가 있을 부분은 분명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으며, 튼튼하다고만 생각했던 두 다리는 사실 가늘고 매끈했다. 오! 하나님! 그는 (아니, 그녀는) 뒤상씨를 향해 수줍게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서야 얼결에 바라본 그의 (이니, 그녀의) 얼굴은 작고 갸름했다. 도발적인 콧날과 아담한 입술의 대조가 묘하게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에메랄드색 눈동자. 과연 그랬다. 크롬과 티타늄 소재의 번쩍거리는 민머리가 아니었다면 누구라도 당연히 여성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뒤상씨는 손을 내밀어 그를 (아니, 그녀를!) 일으켜 세웠고 옷걸이에 걸려있던 외투를 가져와 손수 입혀주었다. 뒤상씨와 자가 대출 반납기 5.0 (아니 '로즈')는 손을 잡고 도서관 정문으로 사라졌다. 


  나는 나도 모르게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물이 끓기 직전의 주전자 같은 표정을 했던 캐시는 이내 울음을 터뜨리더니만 눈물 콧물을 질질 짰다. 조금 전 반납된 책을 만졌던 손으로 코를 닦고 눈을 비볐다. 맙소사! 저 손을 씻지도 않고 나중에 샌드위치를 먹겠지? 하지만 이제 문제는 그 계집애 입으로 들어갈 오염된 샌드위치 따위가 아니었다. 설명할 수 없었던 묘한 예감이 결국엔 현실을 침공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


  며칠 후, 자가 대출 반납기 5.0 (a.k.a. 로즈)는 쟝 마리 시립도서관에 가발을 쓰고 출근하기 시작했다. 뒤상씨가 선물해줬다는 풍성하고 탐스러운 금발이었다. 포니 테일로 묶어서 길게 내려 뜨려 그녀가 걸을 때마다 고운 금빛 머리채가 좌우로 찰랑거렸다. 머리칼이 더해진 것은 용의 그림에 눈동자를 그려넣은 것에 견줄만했다. 여자가 보기에도 정말 숨이 막힐 정도로 매혹적었으니까. 나도 모르게 탄식이 새어나왔다. 옆자리 캐시 역시 입술을 깨물었다. 결코 이길 수 없는 상대와 맞서야 하는 것처럼 절망적인 기분이 대출/반납계를 휘감았다.


  그녀가 처음 도서관에 도입되었을 때, 내가 그녀를 C3PO와 비교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잘못된 비유였다. 굳이 스타워즈를 전고로 삼을 것이었다면…… 뭐랄까, R2-더블D2쪽이 훨씬 적합한 표현이었을지 모른다 (왜 D2가 아니라 더블D2인지는 알아서 생각하시길 바란다). 


  로즈는 원래 아름다웠다. 그리고 날이 갈수록 아름다워졌다. 분명 사실이었다. 분명 로즈의 눈은 처음보다 더 커졌다. 코도 조금 더 높아졌다. 가슴도 (확실히) 커졌다. 몸매 또한 점점 더 R과 T 사이에 위치한 알파벳에 가까워졌다. 아름다움이 진화의 정방향에 있노라 가정한다면 그녀는 분명 진화하고 있었다. 혹시 또 모를 일이었다. 소프트웨어를 업데이트하듯이 하드웨어도 주기적으로 업데이트가 가능한 것인지도. 
  예상대로, 뒤상씨는 (나의 뒤상씨는) 로즈가 만들어내는 막강한 중력 우물로부터 헤어나오질 못했다. 그동안 숱하게 많은 애인을 돌려가며 사귀어 온 그로서도 이만큼 강렬한 상대는 처음이었을 것이다. 평소 한 여자와 두 달 이상의 만남을 지속해오지 못하던 그였다. 하지만 로즈와의 관계로 말할 것 같으면 무려 여섯 달이 지나도록 견고했다. 몸이 달아 불안해하는 쪽도 늘 뒤상씨였다. 그는 (시도 때도 없이) 그녀를 호출했다. 혹은 (시도 때도 없이) 로즈가 자신을 호출하도록 지시했다. 열람실에서, 비품실에서, 심지어 자기 사무실에서. 업무 시간 전에, 업무 시간 후에, 심지어 업무 시간 중에도. 
- 언니,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이에요?
  자가 대출 반납기에게 남자를 빼앗긴 최초의 여성으로 기록될 (하지만 자신의 희박한 위생관념에 대해서는 반드시 자기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캐시 펠티에 양의 푸념이었다. 모두가 짐작하시겠지만 나는 세 가지 이유에서 그 아이의 말이 언짢았다. 첫째, 그 아이가 나한테 말을 붙였다는 점. 둘째, 나를 자꾸 '언니'라고 부른다는 점. 셋째, 겨우 두 달짜리 주제에 마치 뒤상씨가 완전한 자기 남자였던 것처럼 굴고 있다는 점. (다시 한 번 강조하다면 날 사랑하는 뒤상씨는 외로움을 몹시 타는 남자고 캐시는 그의 수많은 리바운드 걸 중의 하나였을 뿐이다.) 물론 한 가지 점은 고소했다. 어쨌거나 '여자 사람'이 '여자 로봇'에게 '남자 사람'을 빼앗겼다는 사실은, 두 글자로 요약하면 '망신'이요, 세 글자로 요약하면 '개망신' 아닌가. 로봇보다 매력이 없는 사람이라고 인증한 꼴 아닌가! 이보다 더 망신은 2층의 표정없는 사서 아줌마들에게 남자를 빼앗기는 것 밖에 없을 것이다.  
- 안되겠어요 분명히 항의를 해야겠어요.
  그 아이의 표정은 전에 없이 결연했다. 마치 혁명을 목전에 두기라도 한 것처럼.
- 무슨 항의를 한다는 거야?
  의아한 표정으로 내가 되물었다.
- 기계들이 우리 일자리를 빼앗고 있잖아요.


  살다보니 별 일이 다 있군. 그땐 그런 생각을 했다.  맹꽁이 같았던 캐시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오다니. 조금만 더 있으면 러다이트 운동이나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Race Against the Machine)'을 운운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물론 쟝 마리 시립도서관에는 그런 내용을 다룬 책도 많았다. 그 덜 떨어진 계집애가 읽었을리 만무하지만). '사실 네가 빼앗겨서 억울했던 것은 일자리가 아니라 남자잖아!'라고 지적질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솔직히 그 아이에게 어울리는 구호는 '실리콘밸리를 점령하라!'라기 보다는 '뒤상씨를 점령하라!'겠지. 아니 본인은 이미 점령했다고 믿고 있으니 '뒤상씨를 사수하라!'쪽이 더 나으려나? 
- 굳이 그렇게 말할 필요까지 있을까? 아직까지는 이렇게 잘 공존하고 있잖아. 솔직히 로즈가 우리에게 피해를 준 것도 없잖니.
- 마리 언니와 르네 언니를 생각해봐요. 언제 우리 차례가 될런지 몰라요. 


  그때까지도 나는 그 쫓겨난 파트-타임 아이들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가져야 하는지 확신하지를 못했다. 언젠가 그만 두게 하려고 뽑는 직원이 파트-타임 아닌가. 자가 대출 반납기들이 아니었어도, 늦던 빠른던 그 아이들은 도서관을 나가야 했을 것이다.
- 저길 봐요. 우린 사람이고 저 것은 로봇이에요. 스스로 생각하는 존재가 아니에요. 
- 자가 대출 반납기 구모델들을 바라보는 로즈의 눈빛을 본 적이 있니? 그 모습을 보니 생각하는 능력이 있을 수도 있단 생각이 들더라.
- 설마요. 저 애가 할 줄 아는 말이라고는 <어서오세요>, <감사합니다>, <살펴가세요> 밖에 없다고요. 
  물론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어서오세요>, <감사합니다>, <살펴가세요> 외에도 상당히 많은 의사 표현이 로즈의 뇌에 (메모리든 뭐든) 저장되어 있음을 나는 알았다. 뒤상씨와 함께 보내는 은밀한 시간에 그녀가 속삭이는 말들을 훔쳐 들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당신 없이는 살 수 없어요>라든가, <머뭇거리지 마요, 내 사랑>이라든가, <내 귓볼을 깨물어줘요>라든가, <당신 걸 보여주시면 제 걸 보여드릴께요>와 같은. 
- 하지만 우리는 감정이 있고 지향점을 지닌 생명체란 말이에요.
- 2층의 사서들과는 다르게 말이지.


  그 말에 캐시의 웃음보가 터졌고 나도 덩달아 웃기 시작했다. 그 아이와 어울려 웃고 있다는 생각이 썩 유쾌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캐시는 자가 대출 반납기 신규 모델 도입을 막는 1인 시위를 벌였다. 나는 무슨 그 아이가 하루 아침에 캣니스 에버딘이라도 된 줄 알았다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은 그 무렵 수잔 콜린스의 황당한 판타지를 열신히 읽고 있었던 탓도 있을 것이다). 그 아이의 평소 성격을 생각하면 놀라운 발전이었지만 질투심만으로 혁명을 추동하기에는 확실히 한계가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캐시의 캐퍼시티(용량)는 어떤 일을 하기에도 역부족이었다. 그 아이가 뭘 해보기도 전에 해고 통지가 먼저 이루어졌다. 


  가방 끈만 긴 것이 아니라 해고 경험도 풍부한 뒤상씨는 상당한 위험성을 내포한 대면 통지 대신에 짧고 간결한 이메일로 해교를 통지했다고 했다. 캐시는 샌드위치를 먹던 손으로 눈물 콧물을 닦고 다시 그 손으로 개인 물품을 정리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 비위생적인 손으로 뒤상씨는 건드릴 일이 더는 없을 것이란 사실이었다. 마음이 아프지는 않았다. 그 아이가 자가 대출 반납기에게 남자를 빼앗긴 최초의 여성일지는 모르겠지만 세상 어딘가에는 더 기막힌 사례가 없으라는 법도 없다. 무인 발권기에게 연인을 빼앗긴 남성 혹은 여성이라든가, ATM과 바람난 배우자를 둔 남성 혹은 여성이라든가, 주차권 발급기와 도망간 약혼자를 둔 남성 혹은 여성이라든가. 더구나 그 아이는 뒤상씨의 연인이나 배우자나 약혼녀도 아니지 않았는가. 그저 또 하나의 '리바운드 걸'일 뿐이었지. 뒤상씨에게 유일하고도 영원한 사랑이 있다면 바로 그건 나를 향한 것일 터였다. 
 

*


  로즈의 매력은 변화 무쌍했다. 그녀에 흠뻑 취한 뒤상씨는 본연의 직무를 나 몰라라하기 시작했다. 거기에는 정신적인 요소와 육체적인 요소가 모두 있었다. 2층의 사서 아줌마들이 없었다면 쟝 마리 시립도서관의 행정이 올-스톱 되고도 남을 지경까지 갔다. 반면 최초의 '로봇 라이브러리 어시스턴트' 로즈쪽은 전혀 일에 영향을 받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자기 일에 철두철미했다. 변함없이 정확했고 신속했으며 깔끔했다. 나무랄 이유가 없었다. 내가 당황하게 만든 것은 그녀가 친절하기까지 했다는 부분이다. 5년이 넘는 시간 동안 쟝 마리 시립도서관에서 일하면서 나는 단 한 번도 일어서서 이용객들을 맞은 적이 없었다. 허리를 숙여 인사한 적도 없었다. 다른 누가 그렇게 행동하여야 한다고 말해준 적도 없었다. 그런데 로즈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생글생글 웃으면서, 친절하게 이용자들을 맞았다. 그녀가 상대했던 모든 이용객이 만족스러워 했던 것은 비단 그녀가 미인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당황스러움을 느꼈다.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나도 일어나야 할까? 웃어야 할까? 고개 숙여 인사해야 할까?). 많은 도서관 이용객들이 로즈 앞으로 줄을 섰다. 아이러니하게도 과거 내가 그렇게 바라왔던 꿈이 (되도록 나 말고 다른 직원들 앞으로 줄을 섰으면 했던 바로 그 꿈이) 드디어 이루어진 것이다. 기분이 묘했다. 가슴에 손을 얻고 자문해보았다. 지금 기쁜가? 아니었다. 기쁘지 않았다. 휘파람을 불고 싶은가? 역시 아니었다. 그럴 마음이 들질 않았다.


*


  쟝 마리 시립도서관에 자가 대출 반납기 6.0이 들어온 것은 다음 해 5월의 일이었다. 그것도 최신 모델 두 대를 한번에 도입했다. 자가 대출 반납기 6.0의 특장점은…… 자가 대출 반납기 5.0의 혁신을 충실하게 계승하면서 유저 편의를 위한 작지만 큰 변화를 추구한 제품이라고 매뉴얼에 적혀 있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별로 달라진 것은 없는데 많이 달라진 것처럼 포장하여 나온 제품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의 이름은 캔디와 체리였다. 


  로즈, 캔디, 체리…… 폴 댄서들의 무대 별명을 지을 때나 고민해 봄직한 목록처럼 들리지 않는가? 다음에는 슈가, 핑크, 록시, 폭시도 나올 판이군.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캔디는 생기 넘치는 붉은 눈동자에 탄탄하고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아이였다. 높은 솔 음의 근처를 맴도는 명랑하고 경쾌한 목소리가 듣는 이를 기분 좋게 만들었다. 반면에 체리는 갈색 눈동자에 부드럽고 피부를 가진 아이로 다소 차가운 듯 음계의 어느 반음 근방에서 갈라지는 듯한 새침한 목소리가 매력적이었다. 뒤상씨가 둘 모두를 마음에 들어했느냐고? 말해 입 아픈 소리. 알랭 들롱을 닮은 뒤상씨는 쟝 마리 시립도서관의 셔터를 내리기도 전에 캔디와 체리와 함께 가발 쇼핑부터 나섰다. 당장 출근 이틀째부터 캔디는 샤기 스타일의 짧은 붉은 머리칼을, 체리는 어깨 위에 닿을 정도 길이의 단발 갈색 머리칼을 쓰고 나타났다. 의도적으로 눈동자 색에 맞추어 고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둘 모두에게 잘 어울리는 머리색이었다.        


  쟝 마리 시립도서관의 역사상 대출/반납계에 이렇게 많은 직원이 일한 적이 없었다. 뒤상씨는 손수 파티션 하나를 더 가져와 세움으로써 한 사람과 세 로봇이 앉을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그리하여 내 업무 공간은 정확히 과거의 절반이 되었는데 사실 자리가 좁고 넓고는 별로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만약 자리가 2분의 1이 되는 대신에 일이 200분의 1로 줄어든다고 한다면 (적어도 내 관점에서는) 썩 나쁘지 않은 장사였다. 어떤 면에서는 200분의 1로 줄어들었다는 말도 과장이었는데, 많은 (아니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하면 대부분의) 도서관 이용객들이 로즈, 캔디, 체리만 찾았기 때문이었다. 내게 다가와 뭔가를 묻거나 요청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심지어 로즈, 캔디, 체리 앞으로 늘어선 줄이 너무 길어 기다리기 부담스러울 정도가 되자 내 눈치를 보면서 슬금슬금 자가 대출 반납기 3.0이나 자가 대출 반납기 4.0을 이용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분명 내가 바라왔던 바였지만 묘하게 유쾌하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그 무렵부터는 전세가 역전되어 나도 모르게 로봇 아이들을 따라하게 되었던 것 같다. <어서오세요>, <감사합니다>, <살펴가세요>라고, 자리에서 일어나, 애써 미소 지으며. 그렇게 나름 노력도 해보았지만 내 앞으로 다가와 대출이나 반납을 진행하려는 이용객은 거의 없었다. 차라리 이런 상황에서는 내가 (말하자면, 일종의) 관리직으로 올라서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내가 로봇 아이들보다 직급, 연차, 연봉이 높으므로 만약 누군가 승진을 한다면 마땅히 이런 순서가 되어야 옳을 것이었다.

 

(1 순위) 나, 소피.
(2 순위) 자가 대출 반납기 3.0
(3 순위) 자가 대출 반납기 4.0
(4 순위) 로즈
(5 순위) 캔디와 체리

 

*


  캔디와 체리가 있다고 뒤상씨가 로즈에게 신경을 덜 쓰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1교대가 3교대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이 얼마나 외로움에 취약한 남자인가! 동시에 세 여자로도 채워지지 않는 거대한 공허함을 운명처럼 품고 산다니!). 다만 로즈 입장에서는 이상 징후를 느꼈던 것 같다. 상대적인 박탈감이 있어 보였다. 언젠가부터 그 아이가 내게 푸념을 늘어 놓는 시간이 늘어났다. 
- 언니, 요즘들어 뒤상씨가 절 대하는 태도가 많이 달라진 것 같아요. 
  이런 부분만 보더라도 자가 대출 반납기 5.0의 언어 구사 능력은 <어서오세요>, <감사합니다>, <살펴가세요>에 결코 국한되지 않았다.
- 어떤 면에서?
  로즈는 주위를 힐끔거리더니만 속삭이듯 내게 속 마음을 털어 놓았다.
- 아무래도 캔디나 체리에게 집착하는 시간이 늘어난 것 같아요.
  나는 생각했다. 오! 이 가련한 고철 덩어리야. 그런 일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란다. 네가 마지막이지도 않을 것이고.
- 요즘 뒤상씨가 네게 시큰둥하게 구니?
  로즈는 고개를 저었다. 금발이 치렁거리며 눈부신 빛의 산란이 일어났다.
- 아니요. 저와 함께 있는 동안에는 예전과 다르지 않아요. 문제는……. 
- 문제는?
- 다른 아이들 앞에서도 그렇다는 거예요. 캔디랑 있을 때는 캔디가 그의 전부인 것처럼 보여요. 또 체리와 함께 있을 때는 체리 없이는 잠시도 못 살 것처럼 행동해요. 그 사실이 저를 괴롭게 해요.
- 그걸 어떻게 알았니? 그러니까 뒤상씨가 캔디나 체리랑 같이 있는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 훔쳐봤어요. 몰래 숨어서.
  그건 내 모습이기도 했다. 나도 항상 숨어 뒤상씨의 취미 생활을 훔쳐 보았었으니.     
- 언니, 뒤상씨는 여전히 날 사랑하는 거겠죠?


  나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한편으로는 나의 그이 뒤상씨를 두고 이런 말을 하는 (너무 예쁜) 그 아이가 껄끄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나도 그 마음을 느껴보았기 때문에 딱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사람인 캐시가 그런 말을 했을 땐 짜증이 났는데 로봇인 로즈의 그런 말은 크게 싫지 않다니. 그랬다. 분명히 나는 로즈가 싫지 않았다. 비현실적으로 아름답고 나의 그이를 무려 일년동안 점유했던 몹쓸 계집애지만, 분명 싫지가 않았다.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좋았다. 이를테면 위생 관념. 그 아이도 나처럼 비닐 장갑, 라텍스 장갑, 페브리즈, 액상 비누, 손 세정제, 물휴지를 항상 가지고 다녔다. 깨어 있는 내내 보이는 구석 구석을 쓸고 닦았다. 세균 배양 접시와 다를 바 없던 도서관 대출 반납 도서들을 살균해주는 건 덤이었다. 누구와 달리 그 아이는 절대로 반납된 책을 만진 손으로, 자기 코를 만지고 머리를 긁고 귀를 후빈 다음에 자기 샌드위치를 먹지 않았다. 심지어 그 아이가 뒤상씨의 몸을 쓰다듬는 상상을 해도 전혀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분명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의 일정 성분은 동질감이었다. 그리고 그 감정은 캔디나 체리에 대해서도 유효했다. '우리'의 대출/반납계 조합이 과히 싫지 않았다고나 할까.


 *

 

  뒤상씨가 3교대 휴먼-로봇 인터페이스 연애로 공허한 마음을 채워가고 있는 사이, 문제아 캐시 펠티에 양은 일곱 번 정도 3층의 디렉터 사무실에 무단 침입을 했다. 세 번 정도는 그 방 창문에 돌을 던졌다. 어떻게든 뒤상씨의 얼굴을 보고 대답을 듣겠다는 결심이었던 것 같았다. 그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며 출입 제한 조치를 받게 되엇을 때 그 아이는 여덟 번째 무단 침입을 다소 과격한 방법으로 시행했다. 도서관 옥상에서 거꾸로 줄을 타고 내려와 뒤상씨의 방으로 들어가겠다는 작전이었다. 그 거창한 계획은 그 아이가 도서관 측면 벽의 배관 하나를 잘못 잡는 바람에 비극적인 결말로 치닫았다. 3층에서 떨어져 크게 다친 것이다.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척추를 다쳐 하반신을 쓸 수 없게 되었다고 들었다. 나는 그 아이가 반납된 책을 만졌던 그 손으로, 그러니까 자기 코를 만지고 발 뒤꿈치도 긁은 다음, 어쩌면 그 사이에 은밀한 부위도 만지작거리다가 샌드위치까지 먹었던 그 미끌미끌한 손으로 배관을 잡았다가 미끌어진 것이라고 확신했다. 딱하지만 어쩌겠는가 싶은 마음이 들었다. 비위생적인 캐시의 자리는 이 위생적인 도서관에 더 이상 없었다. 뒤상씨도 그녀를 원하지 않았고 대출/반납계도 완벽한 조합으로 꾸려져서 완벽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다시 돌아오려는 것은 과한 욕심 아니야?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

 

  쟝 마리 시립도서관에 앰브로시아가 나타난 것은 그로부터 3개월 후의 일이었다. 앰브로시아는 새로 개발된 자가 대출 반납기의 이름이 아니었다. 그럴 듯한 폴 댄서 이름이라는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 날을 기억한다. 잊을 수가 없다. 그녀는 커다란 망치를 들고 나타나 자가 대출 반납기 2.0과 자가 대출 반납기 3.0과 자가 대출 반납기 4.0을 때려 부수었다. 쾅, 쾅, 쾅, 소리에 놀란 우리 (나와 로즈, 캔디, 체리)가 멍문으로 달려 나갔을 때는 이미 남아 난 것이 없었다. 


  철저하게 해부된 구형 자가 대출 반납기들의 모습에서 나는 그 동안 품어오던 궁금증 몇 가지를 해결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그 안에 로봇 팔이나 로봇 다리가 과연 들어가 있었다는 점. 결국 구형 모델들이 일종의 배아 상태였다고 한다면 그 팔과 다리가 밖으로 나온 신형 모델들은 발생 이후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우문에 대한 뒤상씨의 현답은 상당히 무성의했지만 적어도 한 가지에 있어서는 정확했던 셈이다). 


  그 난장판을 벌인 장본인은 커다란 망치를 든 채로 우리를 등지고 있었는데 그녀가 바로 앰브로시아였다 (물론 그때까지는 이름을 몰랐다). 그녀가 우리를 향해 돌아섰을 때 나는 그녀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캐시 펠티에. 4년 3개월 동안 나와 나란히 대출/반납계에 앉아서 일했던 그 아이, 반납된 책을 만진 손으로 샌드위치를 먹던 그 아이, 뒤상씨의 마음을 돌려보려다 3층에서 추락해 척추와 인생의 지침이 동시에 돌아가버린 그 아이. 그 아이가 멀쩡히 두 다리로 지탱하고 서서 그 특유의 맹한 눈으로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대목에서 몇 가지는 정정해야 할 것 같다. 얼굴은 캐시 펠티에가 맞았다. 하지만 몸은 아니었을 수도 있다. 물론 과거에 내가 그 아이를 유심히 살펴보았더라는 뜻은 아니다. 낯선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과거에 내 시야를 어지럽히며 돌아다니던 몸뚱이가 아님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었다. 캐시는 키가 작았다. 그리고 통통했다. 균형이나 미학이라는 것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몸이었다. 그녀의 팔은 저렇게 가늘고 길지 않았었다. 그녀의 다리는 꼭 남자 중학생의 다리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더랬다. 하지만 그때 내 눈 앞에 나타난 캐시는 (나중에 앰브로시아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알려진) 빅토리아 시크릿 패션쇼에 등장하는 모델들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로즈, 캔디, 체리와 닮았고, 그래서 나는 한 눈에 '그것'이 로봇의 몸임을 인지할 수 있었다. 주책바가지 뻐드렁니 캐시의 얼굴에 고도의 정교함을 갖추었을 로봇의 몸이라…… 실로 상상하기 어려운 조합이 아닐 수 없었다.


*

 

  나중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캐시의 변신은 최근 난립하는 로봇 제조업체 중의 하나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했다. 그러니까 쟝 마리 시립도서관이 구입했던 자가 대출 반납기 제조사처럼 말이다. 요즘은 다 그런 식이었다. 마트 계산원을 만드는 회사도 있었고 우버 기사를 만드는 회사도 있었으며, 발렛파킹 직원을 만드는 회사도 있었다. 그런 회사들의 맞은 편에 장애를 입은 사람들을 위해 신체를 재생하는 기술을 개발하는 회사도 있었다. 과거에는 전자와 후자 사이에 경계가 있었지만 이제는 명확하게 선을 긋기가 어려워졌다. 캐시에게 접근했던 사람들이 그런 회색 영역에 있었던 것 같았다. 병상의 캐시에게는 그게 유일한 희망이었을지 모른다. 평생을 침대 위에서 누워있느냐, 하프 휴먼-하프 로봇 형태로라도 세상 밖으로 나오느냐의 문제였으니까. 내가 그 아이를 좋아하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결정을 탓할 생각은 없었다.

  문제는 두 가지였던 것 같다. 첫째는 캐시에게 접근했던 사람들이 장애를 입은 사람들에게 인간다운 삶을 선물하는 것보다 다른 쪽에 관심이 더 많았다는 점이었다. 다시 말해서 앰브로시아의 스펙은 '무리없는 일상생활'이라는 목표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들은 캐시가 척추에 손상을 입었기 때문에 머리 (뇌를 포함하여)를 제외하고는 다 로봇화하여야 했다고 주장했지만, 분당 10 킬로미터를 주파하거나 5층 높이를 뛰어 올라가거나 500 킬로그램짜리 망치를 자유자재로 휘두르는 것은 한때 시립 도서관의 평범한 라이브러리 어시스턴트였던 여자에게 그다지 필요한 능력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둘째는 뒤상씨를 향한 캐시의 병적인 집착이다. 그녀 역시 일상의 회복을 염두에 두고 이런 모험을 감수한 것이 아니었다. 순전히 사랑의 쟁취를 위해 개조에 동의했다. 그리고 자신의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는데 제조사의 은밀한 의도하에 이루어진 오버 스펙을 최대한 활용하고자 했다. 5백 킬로그램짜리 망치를 휘드러면서 말이다. 박살난 구형 자가 대출 반납기 앞에서 과거 그 아이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기계들이 우리 일자리를 빼앗고 있잖아요.' 그 말의 진짜 의미는 이것이었고 말이다. '기계들에게 뒤상씨를 빼앗길 수는 없어요.'    


   그래서 자가 대출 반납기 2.0과 자가 대출 반납기 3.0과 자가 대출 반납기 4.0을 이미 파괴한 앰브로시아의 다음 목표는 로즈, 캔디, 그리고 체리였다. 망치를 휘두르면서 우리쪽으로 걸어왔다. 하지만 이들 신행 모델들은 냉장고처럼 그 자리에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500 킬로그램짜리 날아오는 망치를 좌우로 날렵하게 잘도 피했다. 쾅, 쾅, 쾅, 바닥이 움푹 패였다. 놀라운 반사신경이었다. 휘두르는 앰브로시아나 피하는 로즈, 캔디, 체리나 힘과 속도가 놀라웠다. 마치 무슨 슈퍼히어로 영화를 보고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뒷통수로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에 나는 살짝 뒤를 돌아보았는데 도서관 2층의 휴게실에서 표정 없는 사서들이 차분하게 이 난장판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도 아무런 감흥이 없어하는 듯 싶어 순간 소름이 끼쳤다. 옛날에 그런 생각을 했었지. 저들이야 말로 로봇이 아닐까 하는 생각.   

 
  그제서 뒤상씨가 뛰어 나왔다. 그에게는 참 묘한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장면이었을 것 같다. 자신의 여성 편력 역사가 한 자리에 모여 대치하고 있었으니까. (그 중의 하나가 하프 휴먼-하프 로봇인 것은 보너스이고!) 나는 쟝 마리 시립도서관 50주년 기념비 뒤에 숨어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뒤상씨는 정중앙으로 들어가 두 팔을 벌리고 양측을 막아섰다. 깜짝 놀라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앰브로시아가 휘두르는 500 킬로그램 망치에 맞았다간 뒤상씨가 곤죽이 되고도 남을 것이었다. 뒤상씨의 용기 덕분에 잠시 상황은 소강 상태로 이루어졌지만 그가 겁이 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 싶었다. 갈색 벨루티 구두를 타고 누런 액체가 흘러나와 바닥을 적시고 있었으니까. 
  캐시(아니 이제는 앰브로시아)가 입을 열어 숨막히는 침묵을 깨었다. 
- 뒤상씨, 날 해고한 이유가 뭐였나요?
  캐시의 목소리는 그대로였다.
- 도서관 재정상 어쩔 수가 없었어요, 캐시.
  벌벌 떠는 뒤상씨의 모습은, 그야말로 구차하게 변명 중이라는 사실을 온 몸으로 드러내는 것처럼 보였다.
- 도서관 재정이 좋지 않은데 어떻게 자가 대출 반납기는 계속 사들이는 거죠?
- 이걸 알아야 해요, 캐시…….
- 이제 내 이름은 앰브로시아에요.


  그제야 우리 모두 그녀의 새 이름을 알게 되었다. 이 이름도 폴 댄서들에게 나쁘지 않은 스테이지 네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좋아요. 앰브로시아. 이걸 알아야 해요. 구형 자가 대출 반납기 한 대를 들이면 사람 직원 두세 명 몫을 해요. 심지어 신형 자가 대출 반납기 한 명이 들어오면 사람 직원 열 명 몫을 하죠. 이런 마당에 관리직에 있는 입장에선 선택의 여지가 없는 거예요.
  뒤상씨는 슬쩍 신형 자가 대출 반납기들을 (로즈, 캔디, 체리를) 힐끔거렸는데 내가 보기엔 자기 명을 재촉하는 멍청한 짓처럼 보였다. 저런 긴박한 순간에도 본능을 억제하지 못하는 것이 사실 그 남자의 매력이기도 했다.
- 거짓말.
- 자동화로 인한 인력절감이 진정 부당하다고 생각한다면 파트-타임 페이지들이 해고되었을때도 똑같이 나섰어야죠. 지금에 와서 이러는 것은 순전히 본인이 해고 당한 것에 대한 화풀이 아닌가요? 


  얼굴이 벌개진 앰브로시아는 망치를 치켜들었다. 뒤상씨는 눈을 감았고 나도 차마 볼 수가 없어 눈을 감았다. 로즈가 번개처럼 움직여 뒤상씨의 몸을 밀었고 500 킬로그램짜리 망치는 아슬아슬하게 뒤상씨의 머리통을 비껴나갔다. 그것을 신호로 캔디와 체리가 재빨리 앰브로시아에게 달려들며 로봇 전쟁 제 2막이 올랐다. 나는 숨을 죽이고 조용히 그들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마치 코트 중간에서 손을 떠난 공을 놓고 서로 엉겨있는 농구 선수들처럼 보였다. 뒤상씨를 빼았았다가 다시 빼앗기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앰브로시아의 망치가 캔디의 머리를 살짝 스치면서 부터다. 정통으로 맞지는 않았지만 충격이 없지는 않아 보였다. 무슨 논리 회로 이상 같은 것이 생겼나 싶더니만 갑자기 캔디가 뒤상씨를 혼자 소유하려는 듯 로즈와 체리까지 공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다시 한 번 난리통이 벌어졌다. 새로운 구도는 로즈와 체리의 전략도 변화시켰다. 그들 역시 뒤상씨의 보호가 아닌 뒤상씨의 쟁취를 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제 형세는 뒤상씨 한 사람을 두고 네 여자가 (세 로봇 여자와 한 하프 로봇 여자가) 뒤엉킨 꼴이 되었다. 뒤상씨는 그물에 걸린 고기처럼 발버둥쳤다. 가장 먼저 뒤상씨에게 입을 맞춘 것은 살짝 맛이 간 버전의 캔디였다. 그러자 화가 난 앰브로시아가 캔디를 밀치고 대신 입을 맞췃다. 로즈와 체리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네 여자는 서로 영역 표시라도 하듯이 혀를 내밀어 뒤상씨의 몸 곳곳을 햝았고 침을 발랐다. 머리와 머리가 충돌했고 로봇 팔과 로봇 다리가 서로 엉겼다. 뒤상씨의 일부라도 분할 소유하겠단 생각을 먼저 한 것은 상대적으로 열세에 있던 금발의 로즈였다. 그녀는 뒤상씨의 팔을 있는 힘껏 잡아 당겨서 자신의 품으로 끌어가려고 했다. 붉은 머리 캔디의 눈에서 불꽃이 튀더니 뒤상씨의 한쪽 다리를 잡았다. 앰브로시아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듯 경쟁적으로 다른쪽 다리를 잡았다. 남은 한쪽 팔은 갈색 머리는 체리가 재빨리 잡았다. 서로 자기쪽으로 당겼다. 뒤상씨가 비명을 질렀다. 순간 나는 중세시대의 거열형을 떠올렸다. 소리를 지를 뻔 했다. 입을 양손으로 틀어막았다. 뒤상씨의 팔과 다리가 점점 더 길어졌다. 고무줄처럼.  
- 뒤상씨, 앰브로시아에 대해 좀 아세요?


  그이의 사무실로 찾아가 이런 질문을 하면 어떻게 답해주려나. 모니터 위의 스프레드 시트에서 눈을 떼지도 않고 성의없이 대꾸하겠지. '잘 모르겠는데요, 소피.', '훌륭하군요, 소피. 새 기계의 원리를 밝혀냈네요.' 아마도 이런 식으로. 그이와 만났던 7개월이 영화 필름처럼 눈 앞을 스쳐갔다. 비록 로즈가 등장하며 기록이 깨졌지만 나는 여전히 사람 중에는 가장 뒤상씨와 오래 사귀었던 여자다. 그리고 아직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이의 유일하고도 영원한 사랑은 나일 뿐이라고. 그 많았던 파트-타임 페이지들을 비롯하여 저기 그이의 몸뚱이를 붙잡고 무지막지한 힘으로 당겨대고 있는 아이들도 다 흔하디 흔한 리바운드 걸에 불과하다고. 고무줄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뒤상씨의 비명이 귓가에 맴돌았다. 영혼 깊숙히에 영원토록 새겨질 것만 같은 그런 끔찍한 비명이었다. 그리고,

  딱, 하는 소리와 함께 고무줄이 끊어졌다. 비명도 끝났다.


  차마 볼 수가 없어 몸을 뒤로 돌렸다. 눈을 뜨는데 고여있는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2층 휴게실의 표정 없는 사서들과 눈이 마주쳤는데 그들은 여전히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듯 했다.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쟝 마리 시립도서관에 남은 사람은 이제 나 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이제, 나는, 어쩌면 좋을까. 내가 저들과 맞서 싸울 수 있을까. 아니다. 절대 아니다.         

 

*


  쟝 마리 시립도서관에 사람 도우미 자리가 생긴 것은 두 달 후의 일이다. 그게 나다. 종일 도서관 정문 앞에 서서 대기한다. 과거 구형 자가 대출 반납기들이 줄줄이 세워져 있던 바로 그 자리다. 도서관 근무 시간 이전이나 이후에 대출 도서를 반납하러 온 사람들은 내게 책을 맡기고 간다. 나는 그들에게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살펴가세요>라고 말한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서 반납 도서를 소독하여 카트에 실어 놓는다. 위생이 여전히 이 도서관의 프라이어티 넘버 원이라고 나는 믿는다. 


  대출/반납계에는 여전히 파티션 세 개로 나누어진 네 자리가 있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내가 앉아 일했던 바로 그 자리에 이제는 로즈, 캔디, 체리, 앰브로시아가 나란히 나누어 앉는다. 그들은 싸움을 멈췄다. 뒤상씨의 몸이 산산 조각 나서 흩어진 이후로. 흥미를 잃은 표정이랄까. 흡사 취미로 사냥하는 동물들처럼 (전성기의 알랭 들롱을 닮았던 그 남자를 기억하는 것은 오직 나뿐이다. 가끔 눈물이 난다). 로즈 캔디, 체리, 앰브로시아는 종종 일하다 말고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자기들끼리 무슨 말인가를 속삭이지만 그 내용을 전혀 알 수가 없다.  


  내가 그들 중 하나가 될 수 없는 것은 소피라는 이름이 폴 댄서의 스테이지 네임으로 적당치 않아서만은 아닌 듯 하다. 

 

(2016년 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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