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기묘한 우편물 취급소
by 김영준 (James Kim)거대한 시간의 흐름을 특정 공간이 거부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뜻밖에도 그런 마력이 작용하는 공간을 종종 발견하는 경우가 있기에 하는 이야기이다. 바깥 세상의 변화 속도와는 무관한 고집스러운 관성이라. 만약 그것이 정당한 이유가 있는 것이라면 모르겠다. 예컨대 과거의 아름다운 전통을 지키고 근본 없는 무조건적 변화를 경계하기 위함이라면 어렵지 않게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 다른 이유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도 있다. 얼마 전 친구를 따라 찾아 들어갔던 S시의 우편물 취급소가 그랬다. 불과 다섯 평 남짓한 그 마법적 공간은 들어가는 순간부터, 그 곳이 결코 예사로운 장소가 아님을 강하게 어필하는 직감이라는 녀석 때문에 오른쪽 귀가 먹먹할 정도였다. 우리를 건성으로 맞이하는 두 아주머니 직원의 목소리는 따분함의 음성화된 요체라고 해도 좋을 지경이었다. 뭐랄까. 굳이 해독하자면 그 “어서오세요”는 “우리는 무척 오랫동안 매우 지루한 일을 하고 있는 중이다. 니들이 들어오건 나가건 알아서들 해라”쯤이 될 터였다. 세상의 모든 무기력을 모은다고 한들 과연 저런 목소리가 나올 수 있을까. 이 우편물 취급소가 세계와 격리된 상태였던 것이 비단 어제 오늘의 일만은 아님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때는 열한시 오십 분. 점심시간이 임박한 시각이었다. 점심은 ‘점심시간에 먹는’ 것이지 ‘점심시간이 임박하여 먹는’ 것이 아님에도 이미 어디선가 찌개백반은 배달된 후였다. 시큼한 김치 냄새와 퀴퀴한 된장 냄새가 서로 뒤섞여 코를 자극했다. 마치 이 공간처럼, 비단 하루 이틀을 묵혀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발효물 특유의 강렬함이었다. 친구가 소포를 포장하는 사이에 나는 가만히 소파의 팔걸이에 앉았다. 굳이 팔걸이에 앉은 이유는 회갈색으로 보이는 레자 소파가 한때는 베이지색이었음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저만큼 색이 바래고 때가 타려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탄력이라고는 백만 년 전에 잃었을 것이라 추정되는 그 소파에서는 오로지 세월의 무게를 고스란히 업은 눅눅한 만이 느껴졌다. 마치 거기에 앉는 순간, 그것의 공장 출고 과정에서부터 오늘날까지의 길고도 몽롱한 역사가 눈앞을 스쳐갈 것만 같았다. 잘못 앉았다가는 어쩌면 나 역시 이 신비한 공간의 일부가 되어버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소름이 돋았다.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천천히 둘러보았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우편물 취급소 뒷벽 중앙에 걸린 태극기. 나라와 겨레의 상징으로, 응당 충분히 익숙해야 하는 태극기임에도 다르게 보였던 것은 그 바탕의 누런 빛깔 때문이었다. 마치 구한말의 기록 사진에서나 만나볼 수 있을 풍부하고도 깊숙한 누런 색감은 “도대체 언제부터 걸어놓은 태극기일까?” 하는 의문을 가지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혹시나 유서 깊은 태극기인가 싶어 태극 문양 및 네 궤의 위치를 유심히 살펴보았으나, 뭐, 오늘날의 태극기와 크게 다른 점은 없었다. 태극기의 상태로 미루어 보건대 문제의 우편물 취급소 안의 사물들은 반드시 바꾸어야 하는 상황이 아닌 이상 그대로의 상태를 유지하려는 습성이 있는 것 같았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이 우편물 취급소가 생기고 태극기가 바뀔 일은 없었을 테니 굳이 새 태극기로 바꾸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큰 문제가 없는 한 그대로 둘 가능성이 커 보였다. 이러한 가설은 다른 물건들로 미루어 보건대 충분히 설득력 있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텔레비전은 손으로 채널을 돌려야 하는 구형 모델이었지만 아직까지 방송을 수신할 수 있었고, 입구의 도자기 화분은 4분의 1쯤 깨어져 나간 상태였지만 여전히 아슬아슬하게 꽃이 자라고 있었다. 만약 텔레비전이 나오지 않았다던가, 깨어진 화분에서 꽃이 자라지 않았다면 상황이 어떻게 달라질는지 모른다. 하지만 아직 괜찮다면, 오케이.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다.
친구가 우편물의 포장을 마쳤을 무렵. 직원들은 식사를 마쳤는지 누런 신문지를 구겨 뚝배기를 쌌다. 뒷벽 중앙의 태극기 색이 #E3DDCB이고 포장대 아래 처박아 둔 우편물 자루 색이 #D8C8B라면, 점입가경이라고 문제의 신문지 색은 #BB9E8B 이라 할 만했다. 어쨌든 본연의 순백색에 가까운 것은 하나도 없다는 얘기가 되겠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이곳은 모든 것이 누렇게 바래진 상태다. 한 직원이 뚝배기와 신문지가 어지러이 뒤엉킨 축구공만 한 큼직한 물체를 문가에 내다 놓았다. 힐끔 넘겨다보니 '콜럼비아호 무사히 왔다'는 헤드라인이 보인다. 옆에는 중간 크기의 세로 글씨로 '오늘 새벽 에드워드 기지에/ 예정 코스 따라 활강착륙 완벽'이라고 적혀 있다. 작년 2월에 귀환하다가 폭발한 콜럼비아호가 완벽한 활강착륙을 보였더라면 도대체 언제적 사건이라는 말인가. 군데군데 한자가 보였다. 신문에 한자를 쓰지 않은 것이 도대체 언제부터였더란 말인가. 어안이 벙벙했다. 계속해서 구석구석에 눈길을 주어 살펴보았다. 일반적인 개념의 우편물 취급소에는 없어도 되리라 여겨지는 물건들이 그곳에는 상당히 많았다. 무궁화로 가득찬 대한민국 전도, 파라솔, 빨래판, 세숫대야, 나이키 운동복, 마르크스 책, 구식 라디오, 정체불명의 달력, 일 년 치는 족히 되어 보이는 신문뭉치 등. 그 아무런 연관성 없는 사물들의 조합이 주는 기묘한 느낌 때문에 문득 오싹함을 느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런 곳에서 발송하는 친구의 우편물이 제대로 목적지에 도착할지가 걱정스러웠다. 정말이지 시간을 가지고 찬찬히 둘러보았다면 20년에서 30년쯤 전의 세상 어딘가로 통하는 비밀의 문이라도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곳이었으니까. 친구를 따라 밖으로 나오다가 나는 다시 한번 마지막으로 시간이 멈춰진 것 같은 그 공간을 들여다보았다.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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