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빌 워 (Civil War, 2024) B평
by 김영준 (James Kim)소설가가 스크린라이터나 감독으로도 성공할 수 있을까? 이 대목에서 아마 마이클 크라이튼과 스티븐 킹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경우는 소설가로 이미 독보적인 성공을 거두고 난 이후에 갖게 된 기회이고 (그 누가 감히 마이클 조던의 골프 성적을 평가할 수 있단 말인가?) 본인 작품의 필름 어댑테이션 등을 포함한 경력이기는 하다. 소설가로의 경력에 있어 그들에 비할 레벨은 아니지만 최근 ‘파고(FX, 2014-현재)’의 노아 홀리나 ‘트루 디텍티브(HBO, 2014-현재)’의 닉 피졸라토의 사례도 있다. 다만 이들의 성공은 아직까지는 TV의 영역 안에 머물기에 조금 더 지켜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다음으로 주목할 사례는 알렉스 가렌드이다. 세 권의 장편 소설과 대니 보일 영화의 스크린라이터로 이름을 날렸던 이 런던 출신의 남자는 ‘엑스 마키나 (알렉스 가렌드, 2014)’로 감독 데뷔하여 대중의 호응과 비평을 모두 잡았고 이후 직접 쓰고 직접 연출하며 한 단계씩 체급을 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드디어 2024년, 자신의 경력과 A24의 역사를 모두 다시 쓰는 성공을 거두며 흥행까지 가능함을 증명하였다.
‘시빌 워’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 있다. 교전 장면과 종군 저널리즘의 묘사는 피부에 와닿는 리얼리즘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야기의 배경을 지금의 현실과 직접적으로 엮을 거라는 예상은 일단 빗나간다. 처음에는 마치 평행우주에서의 일처럼 느껴지는 순간마저 있다. 가령 백악관의 대통령은 3선에 성공했고 대통령에 맞서는 서부군(Western force)의 주축이 되는 두 개의 동맹 주는 캘리포니아와 텍사스이다. 두 가지 경우 모두 어쩌면 지구 마지막 날에나 가능할 일. 당장 오늘의 정치적 분열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고 현실에서 내전을 운운하는 극단적 사람들의 세계관과도 차이가 있다. 일차적으로는 물론 이러한 설정이 작품에 정치색을 씌우려는 이들의 시도를 원천 차단하는 안전장치로 작동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어느 순간, 어디 다른 우주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우주에서 가까운 미래에 벌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현실 정치의 극단적 분열 이후에 다가올 다음 챕터에 대한 섬뜩한 예언이랄까. 극 중 제시되는 몇 가지 사실도 이러한 추정을 뒷받침한다. 대통령은 (앞서 기술한 것처럼) 가능할 수가 없는 3선을 이루어냈는데, 아시다시피 3선 대통령 도전이 가능하려면 수정헌법 22조를 건드리는 것으로 시작해서 먼저 해결해야 할 부분이 보통 많은 것이 아니다. 의회와 국민의 반대 역시 어떤 방법으로든 넘어섰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가 연방수사국(FBI)을 해체하였음을 언급하는 대목도 있다. 군대를 동원하여 시민을 공격하고 언론 장악도 시도하였음을 암시하는 대목도 있다 (텔레비젼에 나와 대통령은 폭도들을 진입하고 있다는 대국민 담화를 내어놓는데 현실의 전세는 반대로 서부군에게 크게 밀리고 있는 상황이다). 군인들이 워싱턴 DC에서 저널리스트들을 발견 즉시 적군으로 간주하고 사살하고 있고, 대통령이 언론과의 인터뷰를 거부한지 오래되었다는 언급 역시 상황을 짐작하게 하는 중요한 단서다.
‘시빌 워’의 가장 큰 울림은 포토 저널리스트인 리 스미스(키어스틴 던스트)를 비롯한 주인공 일행이 익숙하지만 낯선 디스토피아를 목도하며 느끼는 고통스러움에 바탕하고 있다. 그녀가 포착한 사진 속 장면은 전혀 미국처럼 보이지 않는다. 마치 서방의 저널리스트들이 몹시 불안정한 어떤 먼 나라의 내전을 취재하는 듯한 과정이지만 사실 이들의 여정은 뉴욕에서 출발하여 버지니아로 우회하여 수도 워싱턴 DC로 향하고 있을 뿐이다. 그녀의 탄식 그대로 다른 세계의 사건처럼 보이는 일들이 내 나라의 한복판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실은 이들을 절망하게 만든다. 다소의 개인 차와 시간 차는 있지만 부정, 분노, 타협, 우울, 그리고 수용으로 이어지는 이들의 감정은 마치 퀴블러 로스 모델을 따라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특히 던스트의 초췌하고 공허한 표정이 마치 포토 저널리스트로 그녀가 촬영해야 할 사진 속 결정적 순간처럼 보인다는 아이러니는 이 작품의 백미라고 할만하다. 과연 이런 현실성 없어 보이는 일들이 실제로 벌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남았을까? 생각보다 그리 멀지 않았을 수도 있다. 지금은 정치인이 옆집 개를 물어 죽여도 의견이 반반으로 갈리는 시대 - 나와 다른 의견을 용납할 수 없고 그 과정에서 상식은 마비된다. 최근 들어서 지구상 거의 모든 민주 국가에서 ‘심리적 내전’ 혹은 ‘사실상의 내전 상태’을 운운하는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극 중 스미스 일행이 곳곳에서 만나는 극단주의자와 인종주의자들 역시 이미 우리 주위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을 이용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차별과 혐오의 메세지를 남발하는 정치인들도 늘어나고 있다. 그 결과가 괴물의 등장으로 이어지지 않을 거라고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2025년 0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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