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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 댁의 배리 매닐로우는 안녕하십니까?

낙농콩단/Season 6-10 (2006-2010)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06. 7. 23.

본문

- 단호박, 내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야. 지구는 둥근 게 아니라 평평한 것 같아.

  양반 김씨 집안의 43대손 김유석 (Kim, You Suck) 선생은 어느 날 갑자기 지구본을 돌리다가 말고 이렇게 뜬금없이 봉창 타격하는 소리를 하셨더랬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선생과 36년을 함께 살아온 유소민(You, So Mean) 여사로서는 '이 양반이 대체…… 밖에서 뭘 단단히 잘못 자시고 들어왔나?'라며 고개를 갸우뚱 할 수 밖에 없다. 지구가 둥글다는 건 세 살 먹은 꼬마들도 아는 너무 당연한 사실 중의 사실인데 새삼스럽게 애써 부정하여 천치 소리를 애써 들을 필요도 없는 일이거니와, 사실 그까짓 거 둥글면 어떻고 납작하면 어떤가? 중요한 건 지구가 아무리 둥글어도 안 넘어지고 안 자빠지고 잘만 살 수 있는 '능력'이 아니겠는가. 

  유 여사의 부군 김 선생으로 말할 것 같으면 재작년 명예롭게 퇴직하신 전직 중학교 교감 선생님이다. 이제껏 담임을 하며 배출한 제자만 일천명에 달하며 담임이 아니어도 교과를 가르친 학생들을 모두 합하면 일만오천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한창 날리던 전성기에는 꼬장꼬장하고 까탈스러운 것으로 이름을 날려 ‘제물포: 쟤 때문에 물상 포기했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런데 그 지독한 (물론 학생들의 입장에서는 ‘지독히 재미없는’) 양반이 퇴직을 하고서부턴 몰라보게 쇠약해진 것이다. 대부분의 시간을 멍하니 먼 산을 보며 지냈다. 표현력이 현저하게 떨어졌으며 감정을 드러내는 일도 줄어들었다. 유 여사는 이따금 그가 거실에서 스포츠 중계를 틀어놓고 멀건이마냥 넋을 놓은 채 세월을 보내는 모습을 볼 때마다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을 느끼곤 했다. 

'혹시 저 양반이 저러다가 덜컥 우울증이라도 걸리는 게 아닐까?' 

  평생을 수업 중에 멍 때리는 놈들에게 분필 던지며 살아온 양반이다. 어깨를 너무 많이 쓴 탓에 상부관절와순파열까지 겪었다. 그런데 되려 자기가 멍 때리고 있으니 걱정이 될 수 밖에. 때문에 유 여사는 종종은 먼저 오버하여,

- 영감, 정히 심심하거들랑 요 앞에 노인정이라도 다녀보시지 그러우?
라며 운을 떼고는 했다. 

  하지만 김 선생은 그때마다 단호하게 싫다며 역정을 내었다. 그런 무식하고 못배운 늙은이들과 나란히 앉아 장기나 두고 농이나 치다 여생을 날려먹을 순 없다는 것이었다. 확실히 선생은 또래에서는 드물게 대학을 나온 고학력자요, 또 그 중에서도 누구나 알아주는 명문대를 졸업한 영예로운 일원이었다. 또한 평생을 교육자로 살며 사회에 기여해왔다는 자부심이 워낙에 강한 양반으로 동네에 소문이 자자했다. 동네 노인들은 노인들대로 자기들을 상대도 해주지 않는 선생을 싫어했고, 젊은 사람들은 젊은 사람들대로 난 척하기 좋아하는 꼬장꼬장한 선생을 피해 다녔다. 그나마 학교 선생님이란 타이틀이 달려 있을 때는 조금 나았지만 그마저도 없는 지금은…… 다름아닌 그런 처지가 퇴직 후의 김 선생을 더더욱 외롭고 고독하게 만드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유 여사는 종종 하고는 했다.
 
  허나 아무리 외롭고 고독할지언정 ‘이해할 수 있는 일’과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는 법. 난데없는 '지평설'의 의심이 갑작스런 퇴직으로 인한 노년성 우울증의 징후라기엔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 그것도 얼마 전까지 학생들에게 과학을 가르쳤던 양반이.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 유 여사는 여고 동창들과의 모임에서 그런 고민을 털어 놓기도 하였다.
- 요즘 우리 아저씨가 말이야…… 학교에서 퇴직을 한 다음부터 집에 계시잖니.
- 아이고, 얘기 들었어. 그랬다면서.
- 저런, 교장 선생님까지 하시고도 남을 분인데.
- 많이 심심해하시지? 그게 원래 그런거야. 우리 아저씨도 그 때 회사 그만두고는…….
  의외로 뜨거운 호응에 자신이 생긴 유 여사는 조심스럽게 '지구평면설'의 이야기까지 꺼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 요즘 갑자기 그런 얘기도 하시지 뭐니. 아 글쎄, 지구가 평평하다나?
- 그렇다니까. 많이 심심해하시지? 원래 그런 거야.
- 아니, 심심하고 말고가 문제가 아니야. 지구가 주사위처럼 네모반듯하단 소리를 하신다니까?
- 어머, 얘. 그래서 뭐? 과학 선생님이 네모나다면 정말로 네모난가 보지.
  모두가 호호호, 웃는다.
- 정말 너희들 생각엔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일인거니?
- 그래. 둥글던 네모나던 그게 뭐가 중요하다니. 우리 아저씨처럼 '타이 마사지'에 빠진 것보단 백배 천배 낫지.
- 아이고, 보라 엄마. '타이 마사지'가 어때서? 그거 이상한 데 아니야. 태국 사람들이 들으면 서운하겠네. 개중엔 그런 간판 걸어놓고 퇴폐영업을 하는 곳도 있다지만 본래 타이 마사지가 그런 건 아니야. 그리고 명함을 내밀려면 머리 다듬으러 간대놓고 매일 퇴발소 다니는 우리 바깥 양반 정도는 되어야지. 웃기지 않아? 머리도 몇 가닥 없는 양반이 머리 다듬는단 핑계를 대다니.
- 그래, 그건 준호 엄마 말이 맞네. 이제 아저씨들, 남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해 엉뚱한 짓 벌이고 다니는 시점이잖아. 딴 짓 안 하시고 점잖게 지구만 운운하면 그게 무슨 걱정이야? 우리 처지에 비하면 정말 배부른 소리다, 그거.
  하긴 그렇지. 유 여사는 어깨를 으쓱하고 고개를 숙인다.
 

*

 
  유사 이래 최초로 지구가 둥그노라 주장했던 남자는 피타고라스다. 물론 코끼리가 땅 덩어리를 떠받치고 있다고 믿는 시대에서 그의 말은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 물론 그의 제자들은 제외하고). 피타고라스의 논리는 '가장 완전한 물체의 형태가 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가장 완전한 동물인 우리들이 숨쉬고 살아가는 이 지구의 형태 또한 구가 아니겠냐는 것이었다.
 
  과학적 증거까지 갖추고 지구가 둥글음을 밝힌 최초의 남자는 아리스토텔레스다. 그는 크게 두 가지의 근거를 통해 자신의 주장을 설명하였다. 첫째, 월식 때 달에 생기는 그림자가 둥글다. 둘째, 먼 바다 수평선 끝에서 배가 다가오는 경우 돛대 끝에서부터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이어서 에라토스테네스는 '둥근 지구의 크기'를 계산해낸다. 시에나에서는 하지 날 태양빛이 우물의 바닥까지 닿는 데 반하여 알렉산드리아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로부터 단서를 얻은 것이다.
 

*

 
  김 선생은 다음 날부터 외출이 잦아졌다. 증거를 수집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말인즉슨 지구가 둥글지 않다는 증거말이다. 어떤 날에는 종일 노망난 늙은이처럼 산과 들을 쏘다니기도 했고 어떤 날에는 종일 혼이 나간 사람처럼 하늘만 올려다보기도 했다. 과학 선생이라는 이력에 걸맞게 관찰 및 문제 의식, 가설 설정, 탐구설계 및 수행 등 교과서에 명시된 <과학적 탐구의 과정>에 충실하게 따랐음은 물론이고 돋보기 안경을 새로 맞춘 김에 인터넷 사용법까지 배워 새로운 시대의 정보 접근법에 발 맞추려는 노력도 했다. 

  특히 7월 13일, 세 시간이나 걸려 간신히 개설한 다음 까페 <지평모 : 지구평탄설을 믿는 사람들의 모임>은 두 달만에 정회원 수가 천 명을 돌파하는 눈부신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회원 수가 부쩍부쩍 늘어나고 '지구평탄설'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축축하게 늘어졌던 그의 일상도 다시 활기를 찾았다. 그는 시삽이라는 위치에 걸맞게 하루 열 번 이상 방문하고 하루 다섯 개 이상의 게시물을 작성하는 등 어지간한 인터넷 세대 못지 않게 정력적으로 활동했다. '출첵'이나 '붐업', '불펌', '친추', '짤방', '안습', '오나전' 등의 신조어를 스폰지 물 흡수하듯 빨아들여,
[아이디: 해변의 커풀카] 시삽님 정말 환갑 맞으삼? 정말 님 좀 짱이셈.
[아이디: 호밀밭의 파스쿠치] 달리 할 말이 없네요. 오나전 존경합니다.
등의 뜨거운 호응을 이끌어 내었다.

  뿐만 아니라지구는 당연히 둥글다고 믿는 '상식적인 사람들'과 댓글 대전을 벌일 적이면 용감하고 무쌍하게 선봉에 서서 신들린 듯 자판을 두들겨주었다 (물론 독수리 타법이기는 했지만 지지자들의 영혼을 잔잔하게 울리기에는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지평모>의 부시삽을 맡고 있는 23세 휴학생 박유범(Park, You Bum) 군은 중력을 따라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으며 "우리 시삽님의 매력은 반 세기를 넘게 살아온 삭은 내 풀풀나는 꼰대의 굳었지만 노련한 머리와 달아오른 키보드 워리어 고유의 발랄한 파괴 본능이 공존한다는 것이다" 라는 평을 내리기도 했다. 또한 "그 앞에서 포션 빨리지 않을 자 그 누구인가?" 라며 일갈하기도 했다. 

  김 선생의 눈부신 활약담 중 으뜸이라면 역시 지난 8월 15일에 있었던 아이디 '왕제비를 기르다'과 있었던 새벽의 사계 논쟁 (만약 지구가 둥글지 아니하고 평평하다면 도대체 어떻게 위도 별로 다른 계절의 변화가 생길 것인가?) 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아이디 : 왕제비를 기르다] (전략) 님의 렉많은 논리대로라면 지점과 지점 사이의 거리 계산이 심각하게 왜곡된다능. 님하 오늘날 실측된 거리 값과 상응하는 지도를 평면상으로 도식할 수 있겠어염? 이를테면 남아메리카 대륙과 오세아니아 대륙 사이의 거리는? 또 아프리카 대륙과 인도는? 울 삼촌도 해봤는데 잘 안된대요. 날밤까서 매크로 돌려도 불가능할텐데……. 그게 설명이 안된다면 이제까지의 계절 논쟁은 무의미한 것에 지나지 않져. 휴우, 글이 길어졌네염. 두서 업시 (오타인지 아닌지 판독 불가능) 썼다면 정말로 지송. 근데 무엇보다 정말로 지구가 평평하다면 그 노래는 왜 생겼나염.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나가면/ 온 세상 어린이들/ 다 만나고 오겠네' 이거 어떡해염? 이 노래 어떡할꺼에염? 여튼 가능하다면 제발 좀 증거를 보여달라능, 그럼 제가 개쪽먹고 떡실신하기 전에 알아서 GG를 치고 꼬리를 내립죠.

[아이디 : 배리 매닐로우1001] 이 한낱 가련한 초글링아, 형아랑 현피뜨자! 10초 내로 굴다리 밑으로 뛰어와라.
 
  '배리 매닐로우1001'는 바로 김 선생의 아이디다. 배리 매닐로우는 선생의 단호박, 유 여사가 가장 좋아하는 팝 가수의 이름. 1001은 두 사람의 결혼기념일 10월 1일을 나타내는 숫자다. 재직시절 그의 제자들이라면 과거 그토록 근엄하고 엄격했던 '물상' 선생님이 인터넷에 저런 내용을 타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마 도저히 믿을 수가 없을 것이다.

 
*

 
  원래 클래식 학도였던 배리 매닐로우는 생계의 문제로 팝 컨템포러리 시장에 뛰어든다. 당대 최고의 여가수 배트 미들러의 전속 피아니스트, 그리고 작편곡자로 시장에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그는 그 유명한 '벨레코드'와 계약하고 야심차게 데뷔 앨범을 준비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결과는 신통치가 않았다. 삼년 후, 그는 새로운 앨범에서 스캇 잉글리쉬의 히트곡 '브랜디'를 '맨디'로 개사하여 리메이크한다. 사실 매닐로우는 이 곡을 커버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싱어 송라이터로 자존심이 강했던 그는 하고 많은 자기 자식들을 두고 남의 노래를 부르는 걸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참 인생이란 아이러니 하기도 하지. 그 노래 ‘맨디’가 바로 지금의 '레전드리' 배리 매닐로우를 있게 한 바로 그 '맨디'가 될 줄이야.
 
  '맨디'가 빌보드 넘버 원을 차지한 그 이듬 해, 대한민국의 서울특별시하고도 혜화삼거리에 위치한 음악까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서는 때아닌 '맨디' 열풍이 불어 닥친다.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모를 한 젊은 남자가 기타 하나를 등에 매고 나타나 밤마다 공연을 하게 해달라고 졸랐던 것이 이 유명한 이야기의 시작이다. 남자의 액면가가 그닥 나쁘지 않음을 확인한 까페 사장은 어디 한 번 제일 자신있는 곡으로 한 소절 뽑아보라고 주문을 한다. 남자는 금발이었어도 어울렸을 탐스러운 흑발을 쓸며 제일 자신있는 노래를 구성지게 부르기 시작한다. 바로 배리 매닐로우의 '맨디'다. 

  옳다구나! 

  그제서야 곰곰히 뜯어보니 이 남자,
배리 매닐로우와도 많이 닮았다. 스테끼를 먹지 않는 동양인이 그런 기름진 이목구비를 가지기는 쉽지 않은데 말이다. 
노래도 그정도면 꽤 수준급이다. 스떼기를 먹지 않는 동양인의 목에서 그런 기름진 소리가 나오기는 쉽지 않은데 말이다. 

  사장은 무릎을 탁, 하고 소리내어 친다. 사실 꼭 소리내어 치지 않아도 되는데 소리내어 무릎을 치는 사장의 과장스런 몸짓에 남자는 일이 성사되었음을 본능적으로 느낀다.
- 자네 내일부터 저녁에 한 타임씩 하지. 급료는 업계 평균. 인센티브는 하는 거 봐서.
- 당연히 그럴 줄 알았습니다만, 아무튼 감사합니다.
- 응, 그런데 조건이 있어. 다른 레파토리는 마음대로 해. 막곡은 꼭 방금 그 '맨디'로 하라고.
 
  다음 날부터 남자는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서 노래를 부른다. 막곡은 언제나 배리 매닐로우의 '맨디'다. 

  혜화 삼거리에는 '한국판 보급형 매닐로우'가 등장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다. 여중생, 여고생, 여대생, 여직원, 주부, 상기 범주로 분류가 가능하지 않은 여성 등이 저녁 일곱시만 되면 구름떼처럼 몰려든다. 남자의 창법을 흉내내어 '맨디'를 부르는 까페 알바들이 인근에 우후죽순처럼 늘어나지만 남자의 인기 가도에는 이상이 없다. 파격적 승진으로 두 타임을 맡게된 지 일주일 후, 남자는 운명적 사랑에 빠진다. 매일 까페에 찾아와 몰래 악보판에 꽃을 놓고 사라지는 여대생이다. 남자는 '몰래' 숨어있다가 '몰래' 꽃을 놓는 현장을 덮침으로써 그녀가 사라지지 못하도록 막는다. 

  기왕에 유치하게 시작된 일은 참도 동화처럼 흘러간다. 한 눈에 사랑에 빠지고,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이라 집 전화 번호를 적어주고, 그러다 부모에게 걸려 작살나게 맞기도 하고, 밤이면 작은 돌맹이를 던지며 차앙문을 열어다오, 그러다 그대의 차앙문을 깨먹기도 하고, 노래를 부를 적마다 환호하는 패, 경, 옥, 캔디, 브랜디, 하이디, 이런 이국 소녀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까페 사장님의 바람과는 달리 다른 까페에서 만나 데이트를 하고, 사장님에게 딱 걸려 '기왕 팔아줄거면 우리 집이나 팔아주지 인정머리 없는 자식'이란 비아냥마저 듣고, 그러다가 결국 극적으로 결혼에 골인한다.

  이후의 일은 동화 같진 않을지언정 마찬가지로 잘도 흘러간다. 자녀가 생기고, 뒤이어 또 자녀가 생기고, 분유값을 충당하고자 남자는 노래를 그만두고 본업인 선생님으로 눈에 띄진 않아도 성실하게 일을 하고, 가끔은 현직 교사 타이틀로 불법 과외도 하고, 여자는 흠결없는 가정 주부로 알뜰하게 집안을 꾸려나가고, 탱탱하던 피부에 주름이 잡히고, 전성기의 배리 매닐로우 같던 준수한 용모가 노년의 배리 매닐로우와 같은 중후한 용모로 바뀌고, 꽃처럼 갸녀리던 여대생은 눈 깜짝할 사이에 펑퍼짐한 아줌마가 되고, 기다랗고 부드럽던 생머리는 태양이 폭발해도 결코 풀어지지 않을 영원불변한 곱슬파마가 되고, 자녀들이 차츰 자라 말썽을 피우고, 술처먹고 들어오고, 머리 컸다고 개기고, 외박을 하고, 드디어 분가하고, 이제 평화롭고 오붓하게 살아볼까 싶었는데 덜컥 남자가 학교에서 퇴직을 하고,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남자는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기 시작했고,
다음에 까페를 개설하여 같은 믿음을 공유한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했으며,
심지어 캘리포니아주 랭카스터에 있다는 '플랫 어스 소사이어티' 본부에
이메일을 보내 회원으로 받아달라고도 했는데,
이게 도대체 무슨 베리 매닐로우 옆구리 터지는 소리냐는 말이다.
그나마 배리 매닐로우가 같이 늙어준 게 얼마나 고마우냐는 말이다.
 

*


  미국에는 '플랫 어스 소사이어티'라는 모임이 있다. 역시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들의 모임인데 19세기에 영국의 사뮤엘 로우바덤이라는 사람이 발족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현재 회원은 삼천명 정도. 이들에게 지구는 평평한 디스크 형태의 세계다. 레코드 판처럼 말이다. 이들의 논리에 따르자면 중앙에는 북극의 얼음덩어리가 있고 우리에게 남극이라 인식되는 지점에는 외곽의 호를 둘러싸는 길고 두꺼운 빙벽이 자리잡고 있다. 이들은 지구가 평평하다라는 주장을 개진하기 위해 온갖 과학적 근거를 축적하고 있다. 흔히 사람들에게 가장 결정적인 '지구구형설'의 근거로 제시되는 인공위성 사진 역시, 이들은 조작된 것이라 잘라 말하고 있다. 그렇다니까 그런줄 아는거지 실제로 나가서 본 사람이 몇이냐 되냐는 얘기다. '아폴로 달 착륙 사건' 또한 이들에게는 하나의 연출된 쇼로 이해되고 있다. 미항공우주국의 기획 아래 헐리우드의 스튜디오에서 만들어진 거짓 영상이라는 것이다. 이들 홈페이지의 메인 화면에는 아주 재미난 공지가 있다.
 
<제발 반론을 보내지 마시오>

*


  다음 까페 <지평모 : 지구평탄설을 믿는 사람들의 모임>은 9월 13일, 문화 까페 '뱀장어 영토' 혜화삼거리점에서 첫 정모를 가졌다. 시삽 김 선생은 물론이고 부시삽 박유범 군을 비롯하여 오십여명의 <지평모> 지도부가 참석한 뜻깊은 자리다. 이들은 알프스 소녀 하이디를 연상케하는 어여쁜 알바생들의 틈바구니에서 허브차를 마시고 공짜빵을 뜯어먹으면서 '상식적인 사람들'과 벌여야하는 소모적인 댓글 대전이 얼마나 고단하고 피로한 일인지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연자로 특별 초청된 은퇴한 천체물리학자 강건신(Gang, Gun Sin, 89)씨는 디스크형의 지구와 태양 사이의 거리 변화 양상을 산출하는 새로운 모델링을 발표해 박수를 받았다. 물론 듣도 보도 못한 꼬부랑 글씨가 뱀장어마냥 난무하는 그 프레젠테이션을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회원끼리 서로 더 잘 이해하고 연대하기 위해 사는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도 가졌다. 아직 대학생인 부시삽 박유범 군은 '이구백(이십대의 90퍼센트가 백수)'의 위기감이 어떻게 살갖에 와닿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에 얼마 전까지 S그룹에서 일했다던 방유만(Bang, You Man, 33)씨는 "이태백이 다 뭐냐, 그 전에 '삼태백(삼십대 태반도 백수)'도 있다" 라며 쫑크를 주었다. 이제 막 '체온퇴직(36.5세가 체감 퇴직나이)' 나이를 넘겨 불면증에 시달린다는 유석민(You, Suck Mean, 37)씨가 가소롭다는 듯이 얼라들의 푸념을 비웃자, '삼팔선(38세까지 직장을 다니면 선방)'에서 오도가도 못한다는 동덕희(Dong, Duck-Hee, 39)씨가 "그럼 난 뭐냐?"라고 맞받아쳤다. 

  <지평모>에서 세번째 연장자인 최돈호(Choi, Don-Hoe, 47)씨는 이름만 대면 알만한 중견 기업의 창업 이사였는데 구조조정을 거치며 면창족(퇴직 압력으로 일이 줄어 하염없이 창문만 바라보는) 신세로 전락했다고 했다. 

  놀라운 우연이지만 그들은 그런 점에서 위기 의식을 공유했다. <지평모>의 회원들은 구직의 공포를 말하는 조류중심의 백수, 백조, 십오야, 십장생, 이태백, 이구백, 삼일절, 삼태백들과 퇴직의 공포를 말하는 어류 중심의 조기, 명태, 황태, 북어, 노가리, 사오정, 오륙도로 크게 분류되었다. 일찍이 조류였던 것이 후일 자라서 어류가 된다니, 이거 원시 생물의 진화 과정을 완전히 엿먹이고 뒤돌려차는 골 때리는 일이 아닌가?
- 어떻게 된거야? '지구평탄설'은 우리 패배자들의 전유물인거야?
  누군가 홧김에 이런 말을 내뱉자 모두가 당혹감에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히스테리 증세를 보이는 회원들마저 나타났다. 에드리안 뭉크의 그 유명한 작품을 연상케하는 표정으로.
- 여기에 성공한 사람 없소? 성공해서 '아직' 잘 살고 있는 사람 말이오?
  
  한편 '뱀장어 영토'의 알프스 소녀 하이디들은 밖에서 삼삼오오 모여서 그 난장을 구경하는 중이었다.
- 가뜩이나 노땅들이 들어온 바람에 물이 흐려졌는데 저렇게 벽에 똥칠하는 치매 쇼까지 펼쳐주니, 참말로 버라이어티한 하루다
라며 자기들끼리 투덜대며 더없이 어여쁘고 더없이 동화스러운 눈을 사랑스럽게도 찡그렸다.
 
- 잠시만, 다들 잠시만 주목하시오.
  시삽 김 선생은 숟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들겨 회원들의 이목을 한 데로 모았다.
-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여기 있는 아무도 몰랐을거요. 그러니 속단하지들 말고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힙시다.
  몇몇이 고개를 끄덕였다. 몇몇은 아직도 긴장을 풀지 못해 얼굴이 굳은 채였다.
- 내가 그래도 시삽이기도 하고, 여기서 가장 오래 살아 본 사람이니 내 얘기를 좀 하지요. 여기 아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재작년까지 난 중학교에서 선생질을 했었습니다. 삼십여 년 동안 학생들에게 물상을 가르쳤답니다. 확실히 명예퇴직 전까지 나는 한 번도 지구를 의심한 적이 없었습니다. 당연히 둥글 거라고 생각했고, 23시간 56분 4.091초 하루에 한 바퀴를 스스로 돌아, 365.2564일 - 일년에 한 번 태양을 한 바퀴 돌거라고 생각했지요. 반지름은 6400킬로미터, 부피는 1.08 곱하기 십의 12승 세제곱 킬로미터, 질량은 5.97 곱하기 십의 24승 킬로그램, 자전 축을 중심으로 23.5도 기울어진, 적도 반지름이 극 반지름보다 약간 더 길어 타원형에 가까운……. 내가 맨날 학생들에게 가르치던 내용입니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매일' 말입니다. 그런 내가 난데없이 지금은 지구가 평평하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학교 선생풍의 설교조만 나오면 습관적으로 조는 버릇을 가진 두어 명이 꾸벅꾸벅거린다.
- 그럼 지금 나는 퇴직의 스트레스로 돌아버린 걸까요? 그럴지도 모르죠. 물론 내가 내 일에 객관적일 수야 없겠지만 분명한 것은, 아까도 말했지만, 매일 똑같은 하루를 로보트처럼 기계적으로 사는 동안에는 단 한 번도 지구를 의심치 않았다는 겁니다. 그러는 사이에 믿어오던 진리랄까 법칙이라는 것이 있었지요. 어느 날 갑자기 더 이상 학교로 출근할 필요가 없어졌을 때, 구회말 투아웃에서 역전 홈런을 맞은 듯한 허무감의 끝에서 하릴없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제까지 내가 일말의 의심도 하지 않았도 진리와 법칙들이 정말로 진리요 법칙인가? 예컨대, 지구가 꼭 낮은 편평도를 가진 타원에 가까운 구형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 하는 것입니다. 어렵게 생각하지 맙시다. 이중 코팅된 프라이팬처럼 그냥 온전히 평평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 곳에 거하는 우리 개체들의 인지적 한계를 감안하자면 그게 훨씬 직관적이고 명쾌한 해답일 수도 있지요. 당연히 <상식>은 우리를 비웃겠지만 그렇게까지 <상식>의 비위를 맞춰줄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상식>적인 '둥근 지구'를 믿으며 뼈골이 빠지도록 살아온 결과 지금 남은 게 무엇이 있느냐는 말입니다. 우리가 '지구의 실패자'여서 여기에 있다는 식으로는 생각하진 맙시다. 우리는 기존의 지구관에서 모순을 발견하기 시작한 사람들일 뿐입니다. 저 바깥에서 비웃고 있는 사람들도 한때는 우리와 같았고 언젠가 다시 우리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랬듯 그들도 너무 바쁘고 기계적인 시절에는 그 차이를 발견하기가 어려울 뿐입니다.
 
  좌중은 어느새 엄숙한 분위기가 된다. 침이라도 삼키면 그 작은 소리가 메아리를 불러올 정도로. 

  누군가 돌연 박수를 치기 시작한다. 뒤이어 일동 모두가 기립하여 박수를 친다. 귀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김 선생은 박수가 잦아들기를 기다렸다가 말을 잇는다.
- 여기, 레코드 판이 한 장 있습니다. 젊은 분들은 잘 모를 수도 있겠지만 배리 매닐로우라는 가수의 앨범입니다. 1974년에 내온 2집 앨범이고요. '맨디'라는 노래가 머릿곡으로 빅 히트를 했는데 다름아닌 젊은시절 나의 18번이올시다. 아무튼 우리 <지평모>가 생각하는 지구의 모습과 가장 흡사한 물건이 아닌가 싶어 가져왔습니다. 어디 한 번 실험을 해봅시다. 여기 이 레코드 판과 똑같은 표면적의 타원형 찰흙 덩어리가 있습니다. 여기에 중심 축을 약간 기울여 꽃고 천천히 돌게 만들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지구와 같은 형태입니다. 거기 선풍기 좀 켜주시고요. 아니 강풍말고 일단 약풍으로.

  그는 주머니에서 난데없이 수수깡 인형을 하나 꺼내어 '둥근 지구'에 올려 놓는다. 회원들이 호들갑을 떤다.
- 아이고! 아슬아슬합니다.
- 보기만 해도 위태로워요. 넘어질 것 같아요.
- 바람만 불면 날아가겠네요!
  그의 눈짓에 사람들이 선풍기의 모드를 강풍으로 바꾼다. 수수깡 인형은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우주 공간 저 멀리로 날아가 '뱀장어 영토' 고유의 원목 무늬 바닥에 퍽, 하고 떨어진다. 사지가 꺾인 그 끔찍한 모습에 일동은 일제히 몸서리를 친다.
 
  이번에는 평평한 지구다. 배리 매닐로우의 레코드 판을 지구로 삼는다. 몸통과 목이 다시 끼워 맞춰진 레고 인형이 '평평한 지구' 위에 거하도록 창조되었다. 턴 테이블 위의 레코드 판이 돌아가면서 '맨디'가 흘러나온다. 수수깡 인형은 밀려 돌아가되 결코 넘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건 지구가 아무리 둥글어도 안 넘어지고 안 자빠지고 잘만 살 수 있는 '능력'이 아니겠는가. 회원들은 다시 한 번 호들갑을 떤다.
- 확실히 안정감이 넘칩니다!
- 저 별에서의 삶의 양태는 훨씬 아름다울 것 같습니다!
- 과연,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면 되겠군요!
  김 선생의 눈짓에 사람들은 서둘러 선풍기의 모드를 강풍으로 바꾼다. <지평모> 일동은 그래도 끄떡 없는 인형의 굳건한 모습에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안도감, 안정감. 아아,

그러나 잠시 후, 모두의 바람과는 달리 수수깡 인형은 미친 바람에 휩쓸려 슬슬 밀려가더니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자빠진다. 그러거나 말거나 판은 어김없이 돌아가고 레고 인형은 줄줄줄 딸려간다. 파도처럼 밀려갔다 밀려온다. 아까 못지않게 비참한 모습이다. 자빠진 채로 질질질 끌려간다. 한 방에 날아간 것보다 어쩌면 더욱 측은하게 보인다. 어떻게 보면 팔이 부러진 채 브레이크 댄스를 추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빙글빙글 돌아간다. 오! 맨디! 급기야 판 까지 튀기 시작한다.

 ♬ 오, 매매매매맨맨디!
당신은 내게 다가와와와와 아낌없이 주고 아무 것도 바라지 않았지요오오오.
하지만 난 다다다당신을 떠나 보냈었네요.
오, 매매매매맨맨디!
당신은 내게 입을 맞추어주고오오오 내가 흔들리지 않게 잡아주었죠오오오.
오늘 난 다다다당신이 필요해요.
오, 매매매매맨맨디! ♬


  채 노래의 절반이 끝나기도 전에 수수깡 인형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그러나 어쩐지 더 비참하게 느껴지는 모습으로) 우주 공간 저 멀리로 날아가 '뱀장어 영토' 고유의 원목 무늬 바닥에 퍽, 하고 떨어진다. 사지가 꺾인 채로.

  순간 좌중은 빙하시대가 도래한 듯 차갑고 조용해진다. 

  당황한 김 선생은 서둘러 턴 테이블의 전원을 내린다.
- 우리의 첫 정모는 여기서 마치기로 합시다. 반론은 절대 사절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남자는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기 시작했고,
다음에 까페를 개설하여 같은 믿음을 공유한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했으며,
심지어 캘리포니아주 랭카스터에 있다는 '플랫 어스 소사이어티' 본부에
이메일을 보내 회원으로 받아달라고도 했는데,
이게 도대체 무슨 베리 매닐로우 옆구리 터지는 소리냐는 말이다.
그나마 배리 매닐로우가 같이 늙어준 게 얼마나 고마우냐는 말이다.

 

(2006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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