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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 황혼의 로망스: 월마트 연애사건

낙농콩단/Season 6-10 (2006-2010)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06. 8.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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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대는 남들과의 한두 살 차이가 참 크고 넓게만 보이는 시절이다. 달랑 한두 살 많을 뿐인 대학생 형님 누나들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존재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달랑 한두 살 적을 뿐인 중고생들의 민증 없고 개념 없음을 탓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흔 살 쯤 먹고보니 상황이 달라졌다. 그깟 한두 살 차이쯤은 백지장보다도 얇은 것으로 느껴지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서너 살쯤 차이나도 (일흔 세살 먹은 노친네와 일흔 다섯살 먹은 노친네의 사회적, 신체적, 기능적 차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뭐, 쉽게 말하자면 '같이 늙어가는 처지' 아니겠어?

 

  나아가 백이십살쯤 먹으면 앞 뒤로 십 년쯤 차이는 총체적으로 무의미해진다. <띠동갑도 동갑처럼!> 인류의 평균수명이 백오십세를 훌쩍 넘어간 초초초(超超超) 고령화 사회에 걸맞는 이 발랄한 구호야말로 생활 수준의 향상 및 기술 의학과 예방 의학의 발전으로 '노년기만 육십년째' 보내고 있는 신인류에게 주어진 최후의 선물일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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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평균수명이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세계보건기구(WHO)가 18일 전격 발표한 <세계 보건 통계 2080>에 따르면 2078년 통계를 기준으로 한 한국인의 평균 수명은 158.68세로 전년도의 157.55세보다 1.13년, 10년 전인 2070년의 150.13세보다 8.55년이 늘어난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성별로는 남성이 155.35세, 여성이 161.01세를 기록하여 약 5.66년의 차이를 보이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이와 같은 결과는 OECD 평균치를 넘어선 것은 물론이고 유럽 국가들의 수준에 근접하고 있는 것으로 이미 본격적인 '실버 사회'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에 걸맞는 국가적, 사회적 노력 또한 시급할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입니다. 이 뉴스는 '20개의 건강한 치아를 80세까지', <덴탈 클리닉 2080치약> 제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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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대공씨는 지난 달 120번째 생일을 맞았다. 설날 떡국만 통산 120그릇을 먹었고 추석 보름달을 보며 무려 120번이나 소원을 빌었다는 얘기다. 세상에는 그보다 어린 사람들이 서울역에서 해운대까지 양 팔 간격으로 정렬하고도 남을만큼 많다. 사실 엄밀하게 따지자면 그보다 조금 더 많기는 한데, 말이 그렇다는 얘기다. 막 스무살 이 되었을 때 그는 자기가 120살까지 살 거라는 상상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당시 한국인의 평균 수명은 65.8세였다. 80학번. 세월은 하나의 커다란 원을 그리며 올해 봄 각 대학의 캠퍼스에는 새로운 80학번들이 푸릇푸릇한 젊음을 과시하며 입학을 했다. 그는 이제 '낡은 80학번'이 되었다. 요즘 그는 '춘천 엘레베이터 터미널'에서 일하고 있다. 평생 가져 본 일곱번째 직업이다. 등록금을 벌려고 시작했던 풀빵 장사에서부터 세어보자면 여덟번째다. 졸업 이후 마블 일렉트릭스라는 전자기업에 들어갔다가 삼년 후 사직서를 던지고 유학 길에 올랐고 학위를 한아름 안고 다시 돌아와 일렉트릭스와 라이벌 관계에 있는 DC 일렉트로닉스라는 전자기업에 입사, 끝내는 임원까지 올랐고 오십줄에는 재무부 산하의 기관장으로 전격 발탁되며 팔자에 없는 감투까지 써봤다. 은퇴하고는 고향으로 내려가 ‘우뢰옥’이라는 평양 냉면집을 열었고, 장사하며 틈틈히 공부를 하여 65세에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이후에는 아들에게 냉면집을 물려주고 바로 그 옆의 상가를 임대하여 공인중개 사무소를 열었는데, 이때가 바야흐로 2030년. 이미 인류의 평균 수명이 120세를 너끈히 돌파하고도 남은 다음이었다. 당시 주치의는 그가 천수를 다 누릴만큼 건강하고 정정하다고 살짝 귀띔해주었는데, 그즈음에서야 그는 자신의 산술적 인생이 넉넉히 50년은 남아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물론 더할 나위 없이 기뻤지만, 하필 '노땅'으로 50년을 더 살아야 한다니. 기왕이면 이삼십대의 젊고 팔팔한 시절이 30년쯤 더 길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이후 그는 소일거리 삼을 겸 보수 야당인 무가당의 화끈한 지원을 받아 고향의 도지사자리에 출마를 하는데 이 때 덜컥 당선이 되어 이후 4년을 강원도지사로 지내게 된다. 임기를 마쳤을 때의 나이가 일흔 하나. 그는 다시 남은 돈을 긁어모아 유학 길에 오른다. 개나 소나 다 가졌다는 그 유명한 MBA를 하기 위해서다. MBA까지 이마에 떡 붙이고 나타나니 몇몇 대학에서 그에게 이미 정년은 넘었으니 다른 자리는 곤란하지만 가능하다면 '명예 감투'라도 씌워드리겠노라고 나섰다. 다시 십년 가까이 그는 을밀대의 명예 교수로 정력적인 활동을 하게 된다. 그래도 아직 백살이 안 되었네, 하하하. 생애 네번째인가 다섯번째 은퇴를 마친 그는 개인 택시를 몰기 시작했다. 그렇게 20년쯤 지나자 종일 운전하기엔 아무래도 기력이 딸려 내친김에 택시를 팔고 다시금 '춘천 UET(우주엘레베이터 터미널)'에 특채로 지원했다. 승강장에서 표를 검수하는 자리에 말이다. 지난 이백여년간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편의가 현실화되었지만 어찌하여 터미널에서만큼은 아직도 일일이 그런 순도 백퍼센트의 노가다를 감수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사실 학력으로 따지자면 산업공학박사에 MBA, 경력으로 따지자면 증권예탁결제원장에 강원도지사에 을밀대 명예교수까지 - 지원자들 중에서 이력이 화려하기로는 다섯 손가락 안쪽이었지만 쉽게 마음을 놓기엔 일렀다. 경쟁자 중에 대한민국 제 21대 대통령 양산박씨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춘천 터미널을 배경으로 번쩍거리는 카메라 플래시 앞에서 양산박 전 대통령은 쑥스럽게 머리를 긁으며 이렇게 말했다. "퇴임하고 오십년이 좀 넘게 연금 받으며 놀았습니다. 제 나이가 올해로 '일 백 받고 더하기 열 하나'인데 이젠 무슨 일이든 해야지 않겠습니까? 아직도 살아갈 날이 창창한데 말입니다." 퇴임 후 오십년이 넘도록 후평동 사택을 문지방 닳도록 드나들던 양 전 대통령의 가신들이 일렬로 서서 ‘백번 옳으신 말씀입니다’라며 짝짝짝 박수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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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릉빈씨는 108번째 생일을 일주일 남겨두고 있다. 그녀는 젊은 시절에 피아니스트였는데 본인은 부인하지만 꽤 잘 나가는 축에 속했다. 비록 월드 클래스로 세상을 들썩거리게는 못했어도 이름만대면 누구라도 단박에 알아들을만큼 꾸준히 활동해 온 연주자였기 때문이다. 짧지만 화려했던 전성기에는 (오 헨리의 표현을 인용하자면) ‘악단석이나 칸막이 좌석의 빈자리를 보고 까닭없이 목이 아파지며 집에 남겨두고 온 랍스터 생각이 나서 무대 오르길 거부하는’ 레벨을 맛보기도 했다.   


  열일곱에 뒤늦게 시작한 피아노로 그 바닥에서 알아주는 거물이 되기까지 그녀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피아노를 쳤다. 그녀의 하루 일과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어김없이 건반을 조율하는 것으로 시작되어 건반을 쓸고 닦는 것으로 끝나곤 했다. 사설 교습소 겸 음악까페 ‘슈만과 클라라’를 열어 틈틈히 후진 양성에도 관심을 기울였는데 오십이 되었을 무렵엔 직접 사사한 제자만 백여명이 넘었고 제자가 가르친 또 다른 제자들까지 그녀의 이름을 팔고 다니는 통에 졸지에 대한민국에만 기천명의 제자들을 두게 되었다. 그녀는 공공연히 백살을 먹고서라도 계속 연주하겠노라고 공언해왔다. 하지만 환갑을 넘기며부터 기운이 몰라보게 떨어지기 시작한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동작은 굼떠지고 머리와 귀와 손이 따로 놀았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지. 일상 생활에는 전혀 아무런 지장이 없는데…….' 사람들은 공공연히 그녀의 연주가 예전만 못하다는 눈치를 보임으로써 일찍이 그녀가 밝힌 공공연한 의지를 ("백살을 먹고서라도") 무안하게 했다. 


  언제나 문제는 그렇다. 날로 늘어나는 생물학적 수명을 사회적 수명이 따라잡지 못한다는 것이다. 요절한 예술가들은 왜 한없이 추앙받을 수 밖에 없는가? 그들은 사회적 수명을 미처 다 누리기도 전에 생물학적 수명을 다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중들은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기억하는 방식으로 그에 대한 보상을 해주고자 한다. 설사 때로는 그것이 과잉일지라도 말이다. 반면에 예술가로의 인생이 끝나고 또다른 반세기를 살아야 하는 경우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의지와는 무관하게 끊임없이 계상되는 감가상각의 무게란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런 이유로 그녀는 눈물을 머금고 은퇴를 선언했다. 그녀의 나이, 예순 하나적의 이야기다. 당시 그녀의 건강은 마라톤 선수가 와도 울고 갈 만큼 튼튼하고 이상이 없었다. 단지 귀의 감각이나 손의 놀림이 젊은 시절만큼 영민하지 못했을 뿐이다. 또한 무섭게 치고 올라오는 젊고 열정적인 피아니스트들을 상대하기 버거웠을 뿐이다. 이후 십년을 그녀는 집에서 보냈다. 열정적으로 활동하던 당시에는 나이보다 20년은 젊어보인다는 (은퇴 직전의 그녀는 실제 사십대 초반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세평이 무색하도록 그녀는 순식간에 늙고 무기력해졌다. 마치 그동안 아껴두었던 나이를 한꺼번에 먹은 것도 같았다. 결국 그녀는 새로운 일을 찾아 나설 수 밖에 없었는데 50년 가까이 피아노만 치던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세상에 별로 없었다. 50년 가까이 피아노만 치던 사람이 이후 50년을 꾸준히 할 수 있는 일은 더더욱 없었다. 그녀는 예술계 고등학교를 지망하는 중고생들을 일대일로 과외시켜주거나, 까페나 레스토랑에서 한창 때의 연인들을 위해 적당히 분위기 좋은 팝 넘버를 연주하거나, 혹은 정보 고위관료들의 석식 만찬에서 고상하지만 의미없는 배경음악을 깔아주는 일을 하며 세월을 보냈다. 그러다 치열한 경쟁 논리에 의하여 그마저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녀는 월마트 춘천점에 취직을 했다. 시급 4,500원짜리 캐셔 업무였지만 아무런 기술 없이 그 나이에 구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것밖에 없었다. 계산대가 한가할 때에는 매장으로 투입되어 상품 보충진열 및 관리를 돕기도 했다. 평생 피아노만 어루만지던 길고 섬세한 손으로 돼지순대 바코드나 찍고 때묻은 동전이나 세고 있다니. 113,890원입니다, 손님. 봉투 필요하세요? 현금 영수증 필요하세요? 캐쉬백 카드 있으세요? 영수증 드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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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마트 춘천점은 우주 터미널로 바로 이어지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한때 시외버스터미널이었던 이 곳은 이제 강원도 유일의 '우주엘레베이터 터미널'로 새롭게 태어났는데 하루 평균 18,000명, 주말 평균 35,000명의 인구가 이 곳을 경유하여 우주로 나가고 우주에서 돌아왔다. 2080년은 엠티도 강촌이 아닌 달로 가는 시대이기 때문에 라면 보따리를 짊어진 대학생들도 이제는 춘천터미널에서 1,300원짜리 강촌행 티켓을 끊는 대신에 1,800원짜리 달나라행 티켓을 끊었다. 우주 터미널과 월마트가 연결되어 있는 구조는 여러모로 이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터미널을 오가는 여행자들은 남는 시간을 심심하지 않게 활용할 수 있어서 좋았고, 월마트의 입장에서는 그만큼 수입이 올라가니 좋았고, 터미널의 입장에서는 여타의 상업 시설을 유치하지 못해 골머리를 썩지 않아도 되니 좋았다. 아무래도 여행자들 역시 좁고 답답한 대기실보단 월마트의 일층에 있는 스타벅스, 커피빈, 할리스, 베스킨라벤스, 던킨 도너츠, 롯데리아 등을 선호했으니 누이도 좋고 매부도 좋은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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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주 엘레베이터는 지구 상공 36,000킬로미터 지점의 정류소까지 곧장 올라갔는데 상승 및 하강시의 충격으로부터 승객들을 보호하기 위해 안전벨트가 구비된 좌석형으로 만들어졌다. 때문에 한 기(機)에 탈 수 있는 인원의 제한이 있었다. 지대공씨는 오늘도 달나라행 엘레베이터에 올라타는 승객들의 표를 검수한다. 고달프지는 않아도 골치는 아픈 일, 나이는 먹었지만 기억력만큼은 어느 젊은이 못지 않은 그는 운송 약관을 한 단어도 틀리지 않게 외울 수 있었다. 물론 굳이 그 모든 내용을 암기할 필요는 없었다. 검수원은 그저 검수원에게 필요한 부분만 숙지하고 있으면 될 뿐이었으니까. 

* 3조2항. 해당 시간 승차권 미소지자의 추가 탑승은 공석(空席)가 발생하였을 경우에 한한다. 
- 이때의 추가 인원 선발은 전적으로 선착순에 준하며 정원을 넘지 않는 것으로 한다. 
* 7조3항. 다음의 경우에는 승차를 거절할 수 있다. 
- 인화성 물질과 승객에게 불쾌감을 주는 물품 소지자. 
- 만취자, 또는 신변이 불견한 자. 
- 중환자, 혹은 전염성 환자. 
- 안전 운행을 위한 승무원의 지시에 불응하는 자. 


  필요 이상의 어렵고 딱딱한 말로 가득한 이 약관에 기초하여 지대공씨는 그에게 주어진 일을 충실하게 수행했다. 만취자를 끌어내고, 잡상인을 끌어내고, 엉뚱한 엘레베이터에 올라탄 멍청이들을 끌어내고……. 물론 그 중에서도 가장 골치아픈 일은 입석이라도 좋으니 제발 타게만 해달라는 막무가내들이었다. 아니, 그렇게 바쁜 사람들이라면 진작에 미리미리 예매를 하던가. 살다 보면 생각지도 않았던 급한 일이라는 것이 있을 수도 있음을 그 역시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없는 자리를 만들어 달라며 생떼를 부리고 바닥에 드러눕는 사람들을 감당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그것이 바로 출발시간이 지연되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라는 점에서 더더욱 그랬다. 달 정류소에서는 연착이 일어날 때마다 춘천으로 재깍 보고를 했고, 보고를 받을 때마다 터미널 소장은 그를 불러 말로 다하기 힘든 짜증을 부렸다. 
- 선생님, 더 독하게 하셔야지요. 그게 안되면 그만 쉬셔야 하는 거고요. 


  마흔 살이나 어린 새파란 놈에게 이런 소리나 듣다니. 그가 강원도지사로 당선되었을 때 소장은 고작 새파란 스물 아홉의 청년이었을텐데. 그럴때마다 그는 그냥 이 하잘 것 없는 일을 때려치우고 연금이나 보전하면서 살아볼까 하는 생각을 했다. 사실 그의 연금은 혼자 살기에 부족한 수준이 아니었다. 설사 평균수명만큼 앞으로 삼십년을 더 살지라도. 직장인들이야 90세가 넘어가면 연금이 끊긴다고들 하지만 (이것은 지난 2048년 국회에서 통과된 법에 의한 것이다. 평균 수명이 급속하게 늘어나면서 기업들은 퇴직자의 연금을 충당하는데 어려움을 느꼈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로비 끝에 '퇴직 후 20년까지'로 자신들의 책임을 못박았다. 평균수명의 비약적 연장에 따라 개정된 정년 규정에 의하면 대부분의 사무직 노조원은 65세, 비노조원은 70세가 정년이었으므로 사람들은 기껏 은퇴한 이후에도 새로운 일을 찾아 85세에서 90세 이후 남은 50 내지 60년 인생의 호구지책을 마련해야만 했다) 그나마 국가 공무원으로 일했던 경력만큼은 인정되어 죽을 때까지 일정액의 연금이 지급되니 그로서는 아쉬울 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 놈의 체질, 일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는 이삼일도 버틸 수 없는 그 놈의 체질이 그를 이 소란스럽고 번잡한 터미널까지 몰아놓고야 만 것이다. 
- 자, 오징어 있어요! 오징어! 형씨 오징어 하나만 사주지? 부드러운 게 입에서 살살살 녹아. 
  잠시 한 눈 파는 사이에 또 잡상인이 올라탔다. 그는 재빨리 따라 타서 오징어 장사의 팔을 잡아끌었다. 
- 아, 참. 영감님. 왜 이러세요? 거 좀 같이 좀 먹고 삽시다! 
- 한 두번도 아니고. 자꾸 이럴겨? 
- 그럼 어쩝니까? 그게 제 먹고 사는 일인데. 
- 그럼 어쩔까? 이게 내가 먹고 사는 일인데. 


  이쯤 되면 근방의 모든 잡상인, 노숙자, 기타 상습 무임승차자의 용모파기는 훤히 꿰뚫고도 남을 지경이다. 어쩌면 매정하게 떠나가고 매정하게 돌아오는 여행자들보다 매일 애증속에 부대끼고 사는 그들이 더 그에게는 친근한 존재일런지도 몰랐다. 따지고 보면 그들 또한 하나같이 평생 일해오던 자리에서 밀려나 나머지 노년의 반세기를 위한 새로운 자리를 찾아 헤메는 불우한 노인들이었다. 자리란 원하는 사람은 많아도 그 수효란 언제나 일정한 법이니까. 젊고 팔팔한 일꾼들이 수도꼭지만 틀면 콸콸콸 유입되는 마당에 숨이 붙어있단 이유만으로 빌빌거리는 노인들의 자리를 보전해 줄 조직이란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그들은 모두 경쟁의 결과 자리에서 밀려났고, 밀려난 바로 그 곳에서 또 다른 자리를 위해 경쟁하고 있다. 터미널 근처 잡상인들의 평균 학력이 서울 소재 4년제 대졸자임을, 춘천 시내 노숙자들의 태반 이상이 오십년 전엔 7급 이상 공무원이었음을 과연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어찌하여 평균 수명이 비약적으로 늘어났음에도 인류는 비약적으로 행복해지지 않은 것인가. 복도에 앉아서라도 가겠으니 태워만 달라는 떼쟁이들을 떨궈놓고 엘레베이터가 막 터미널을 빠져나갔을 때 그는 자기도 모르게 기운이 쏙 빠져 바닥에 털썩 주저않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바로 그때 문자가 왔다. 

[오늘 교대시간은 아홉시에요. -홍로- ] 


  '홍로'는 가릉빈씨의 애칭이다. 지대공씨와 둘만이 공유하는 애칭이다. 그럼 가릉빈씨는 지대공씨를 뭐라고 부르는고 하니 '홍시'다. 홍시란 말 그대로 연감을 이야기 하는 것이고 홍로는 뜨거운 화로가 아닌 사과 품종의 하나다. 빨간 물감이라도 덕지덕지 칠해놓은 듯 아주 빨간 사과 말이다. 올해로 108세의 가릉빈씨가 '홍로'라 불리는 까닥은 까딱하면 얼굴이 빨개져서 그렇고 올해로 120세의 지대공씨가 '홍시'라 불리는 까닭은 홍시를 먹다가도 이가 빠질만큼 잇몸이 약해서다. 단 '오프 더 레코드'로 - 두 사람만 아는 미성년자 관람불가성 비밀에 의하자면, 홍로가 홍로인 까닭은 서로 꼬옥 껴안았을 때 화로처럼 급속하게 뜨거워지기 때문이기도 했고, 홍시가 홍시인 까닭은 잇몸이 너무 물렁물렁하여 흡사 홍시를 베어먹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기도 했다. "어머머. 아니 나이도 먹을만큼 먹고 그걸로도 모자라 더 먹은 양반들이……." 라며 남들이 욕할까봐 두 사람은 그런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지만 뭐, 백 살 넘은 게 죽을 죄도 아니고. 

*



  두 사람은 월마트 춘천점 2층 옥외 난간에서 처음 만났다. 당시 지대공씨는 종일 검표원의 임무를 충실히 다하다가 발목을 삐어 절뚝거리며 올라오던 중이었고, 당시 가릉빈씨는 고된 파트 타임 캐셔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절뚝거리는 노인이 어찌나 안되어 보였던지 가릉빈씨는 "저기, 어르신. 많이 불편해 보이시는데, 도와드릴까요?" 라며 손을 내밀었고 가뜩이나 힘에 부쳤던 지대공씨는 생각지도 않던 미인의 따뜻하고 고운 손길에 옳다구나, 손을 덥썩 잡아 그렇게 그날의 케토톱 사건은 그 장대한 막을 올리게 되었던 것이다. 가릉빈씨가 지대공씨의 도가니에 '케토톱'을 붙여주는 동안, 그 막간조차 허비하지 아니하고 조근조근 나누었던 이야기에 의하면 두 사람은 공통점이 참 많았다. 일단 백 살이 넘어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밖에 없었고, 정확하게 두 번의 이혼을 경험하였으며, 자식들 (아들, 딸, 손주, 증손주, 고손주 등)에게 사실상 버림받아 현재 홀로 외로이 살고 있었다. 두 노인은 적어도 서로의 시린 도가니에 '케토톱'을 붙여주고 서로의 가려운 등판에 손톱으로 자국을 내어줄 인생 동지가 필요하다는 점에 전격적으로 동의했다. 강산이 열 번도 넘게 바뀌는 한 세기 이상 숨쉬며 살다보니 그 동안 믿고 의지했던 도덕과 윤리와 관습과 종교와 체면 따위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 다음 날 바로 두 사람은 각자의 방을 빼어 전세금을 모아 종전보다 조금 더 크고 아담한 방을 얻었다. 그리고 동거를 시작했다. 
- 그러고보니 우리…… 띠 동갑이네. 딱 열두살 차일세. 
  함께 살기 시작한 첫 날, 저녁 밥상을 앞에 두고 지대공씨가 씁쓸하게 한 말이다. 
- 나이가 두 자리 수였을 땐 그럼 큰 일이라도 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나이가 세 자리 수가 되니 정말 아무런 감이 없네요. 
- 띠동갑도 동갑처럼? 
- 띠동갑도 동갑처럼! 


  서로 마주보고 킬킬거리던 두 사람은 아로마 향 촛불이 밝히고 옛날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한세기 전, 가릉빈씨가 초등학교 입학식을 치르던 그 시간에 지대공씨는 대학 신입생 환영회 자리에서 막걸리 열 되를 원샷하고 앰블런스에 실려갔다. 지금으로부터 94년 전, 가릉빈씨가 중학교 입학식을 치르던 그 시간에 지대공씨는 마블 일렉트로닉스 전자회사의 면접장에서 마음에도 없는 충성의 언약들을 내뱉고 잇었다. 지금으로부터 91년 전, 가릉빈씨가 고등학교 입학식을 치르던 그 시간에 지대공씨는 미국 유학행 비행기를 타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88년 전, 가릉빈씨가 드디어 대학생이 되었을 때 이미 삼십대 중반에 접어든 지대공씨는 미국에서 재미교포 여성과 첫번째 결혼식을 올리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85년 전, 가릉빈씨가 첫번째 남자친구와 헤어졌을 때 지대공씨는 첫번째 부인과 갈라서고 다시 한국행 비행기에 오르는 중이었다. 지금으로부터 83년 전, 가릉빈씨가 10만원짜리 졸업 화장을 하고 평생 한 번 뿐일 졸업 사진을 찍던 그 시간에 삼십대 후반의 지대공씨는 새로운 직장에서 생애 최대 프로젝트를 성사시키며 파격적 승진의 주인공이 되는 중이었다. 지금으로부터 80년 전, 스물 여덟의 가릉빈씨가 생애 첫 단독 연주회를 갈채 속에 끝내던 그 순간에 마흔의 지대공씨는 여의도에 있는 현대컨벤션웨딩홀부페에서 주한미군 여성과 두번째 결혼식을 올리고 있는 중이었다. 나이도 다르고 삶의 궤적도 전혀 달랐던 두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만날 수 있었을까? 이것은 예정인가 아니면 우연인가? 어쩌다가 가릉빈씨는 월마트 춘천점에서 시급 4,500원짜리 캐셔를 하게 되었고 어쩌다가 지대공씨는 월마트 춘천점 옆의 우주 엘레베이터 터미널에서 시급 4,800원짜리 검표원이나 하게 되었던 것일까? 인류의 평균수명이 158.68세(2078년 기준)가 되지 않았더라면 결코 가능하지 않았을 일이다. 



- 어머, 너무 예뻐요. 매일 여기서 생활하면서도 어쩜 저걸 한 번도 못봤을까요? 
  비번을 맞춰 데이트를 하는 날. 올해로 108세의 가릉빈씨는 하늘 높이 치솟아 올라가는 우주엘레베이터의 찬란한 불꽃을 보며 감탄한다. 타원형의 엘레베이터는 발사대의 철로를 따라 무지개색 불똥을 튀기며 하늘로, 하늘로 올라간다. 두 사람은 월마트 일층의 스타벅스에 앉아 제가끔의 시급보다 비싼 라떼를 마시는 중이다. 결국은 그런 것이다. 사람은 변하고, 사랑은 변하고, 운명은 변해도, 자본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월마트는 월마트고 스타벅스는 스타벅스다. 팔십년 전에도 춘천의 이 곳은 월마트였고 이 자리에는 스타벅스가 있었다. 팔십년 후에도 아마 그럴 것이다. 
- 사실, 저 발사대를 예전 우리 회사에서 제작했었어. 
- 정말이요? 
- 응. 우주까지 연결할 수 있는 가볍고 끊어지지 않는 케이블이 없어서 그때까진 엘레베이터를 못 만들고 있었거든. 
- 저걸 타고 달나라에 가면 어떤 느낌일까요? 
- 곧바로 달에 가는 게 아니야. 저기 위의 정류소에서 내려서 스페이스 셔틀을 타야 비로소 달에 갈 수 있는 거지. 
  또 다른 엘레베이터 한 기(機)가 아름다운 불꽃을 내며 춘천의 하늘 높이 올라간다. 

*



  인간의 창의력이란 엄마 뱃속에서 나오는 순간 최고점을 기록하여 이후로는 내내 퇴화의 과정을 거친다고 한다. 세 살이 되면 처음의 60퍼센트 뿐만 남고 아홉 살이 되면 채 10퍼센트도 남지 않는다. 시간이 흘러 스무 살을 넘고 사회적 성인이 되면 그때 인간의 창의력이란 티끌보다도 더 미미한 것이 된다. 하물며 백년이 넘게 살았다면 더 이상 남았을 창의력 비스무리한 것이라도 있겠는가? 그러니 여러분, 혹여 이 어르신들의 로맨스가 구태하고 따분하게 보이더라도 한없는 아량으로 이해해주시길 바란다. 자그마치 각각 120년과 108년을 살아보신 분들이 아닌가. 아! 황혼의 로망스 - 스타벅스에 앉아 시급보다 비싼 라떼를 앞에 두고 총천연색 우주 엘레베이터의 불꽃을 감상하는 일 말고 이 분들이 무얼 더 하실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2006년 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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