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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 동대표고 똥대표고

낙농콩단/Season 6-10 (2006-2010)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10. 7.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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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13대 더퍼스트로얄팰리스인이스트서울 (변경 전 이름: 장일주공아파트) 337동 동대표 선거가 목전으로 다가왔다. 바꿔 말하자면 로얄팰리스가 13년 되었다는 뜻이다. 337동 505호 김유석 (Kim, You Suck) 주민의 "그게 뭐 별건가?"라는 반응과는 별개로 337동은 완연한 선거 분위기로 들썩거렸다. 337동 1401호 방유만 (Bang, You Man) 주민과 337동 903호 강건신 (Gang, Gun Sin) 주민, 그리고 337동 707호 유석미 (You Suck Mee) 주민이 차기 동대표 자리를 노리고 입후보하였으며 각각 세 명씩 선거운동원을 동원하였다. 별 의미 없는 동대표에 이웃 사촌끼리 나온 셈인데 뭐 치열할 일이 있겠느냐 싶겠지만, 실은 상상 이상의 치열한 전쟁이 전개되고 있었다. 세 후보자 모두 차기 동대표 자리를 간절히 원했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방유만 후보자가 팜플렛을 만들어 돌리기 시작하자 이에 질세라 강건신 후보자는 20장 분량의 정책집을 제작했고 유석미 후보자는 작은 신문을 발행했다. 강건신 후보자가 단지 내를 돌며 거리 유세를 시작하자 이에 질세라 방유만 후보자는 트럭을 임대했고 유석미 후보자는 리무진을 임대했다. 유석미 후보자가 여론 조사를 시작하자 이에 질세라 강건신 후보자는 리서치 업체를 섭외했으며 방유만 후보자는 지역 방송사에 컨택했다. 사실 최소한의 상식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 우스꽝스러운 삼류 코미디를 진작에 알아챌 수 있었을 것이다. 첫째, 아파트 동대표 선거다. 팜플렛이나 정책집이나 신문에 담아야할 내용도 없었고 사실 그다지 담을 내용도 없었다. 둘째, 337동 동대표는 337동 주민들에게만 어필을 하면 되니 굳이 트럭이나 리무진을 타고 단지 내를 돌아다닐 이유도 없겠다. 셋째, 여론이라고 해봐야 337동의 84가구의 의지가 전부일 것이니 인근 초등학교의 전교어린이회장보다도 훨씬 적은 표로 승패가 갈릴 것이 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거라는 특수한 상황은 정상적인 사람들의 정상성을 망가뜨려놓는 법인지 너도 나도 바닥에 돈을 뿌려대는 헛짓거리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비단 337동만이 아니라 동대표 선거철이라고 모든 동에서 똑같이 벌어지고 있는 일이었다.


  1997년 4월 결의된 로얄팰리스 동대표 선출원칙은 1가구 1투표라는 대전제 위에 완성되었다 (물론 당시에는 장일주공아파트라고 불렸다). 84가구의 84표 중 과반의 찬성만 얻으면 동대표 자리 획득에 문제가 없었는데 처음에는 서로 맡지 않으려고 도망다니는 분위기에 가까웠다. 하지만 어느 순간 세상에 개떡같이 변하고 모두가 감투에 환장하기 시작하자 동대표도 스펙이 되었다. 동대표 입후보자들의 연령대에서 스펙을 쌓아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사람들의 시선과는 달리 몇 년 전부터 서로 동대표를 하겠다고 달려들었고 지난 몇 년간의 선거 열기가 과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마도 올해 2011년은 역대 최악의 지저분한 선거가 벌어질 참이었다.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337동은 네 개의 그룹으로 분열되었다. 337동 1401호 방유만 지지파. 337동 903호 강건신 지지파. 337동 707호 유석미 지지파. 그리고 어느 쪽에도 관심이 없는 무관심파. 사실 무관심파가 대부분이기는 했다. (사실 모든 크고 작은 선거가 그렇지만) 바로 이 무당파의 관심을 얻기 위해 세 사람의 입후보자와 강성 지지자들은 막대한 노력을 기울여야만 했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 수단과 방법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 이를테면 337동 1105호 박유범(Park, You Bum) 같은 남자에게는 말이다. 이 고학력의 40대 냉소적인 독신 남성은 머리 벗겨진 아저씨들과 펑퍼짐한 아줌마들이 괜한 열을 올리는 이 쓰잘떼기 없는 선거에 쥐꼬리만큼의 관심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한 유명 로펌의 중간 간부인 그에게 일을 제외한 관심사는 두 가지 뿐이었다. 프로야구와 ‘카라’라는 걸 그룹. 다시 말해서 그의 무거운 더듬이를 움직이게 하려면 중요한 프로야구 경기에서 ‘카라’의 멤버 하나가 시구자로, 또다른 멤버 하나가 시타자로 나서는 수준의 일은 일어나야 한다는 의미가 되겠다. 그 이외의 일은 그에게 ‘쏘우 3’와 ‘쏘우 4’를 합친 것만큼의 감흥도 주지 못했다. 연봉만 2억이 넘는다는 그가 서울 변두리의 중산층 아파트에 만족스러울리 없었다. 천한 이웃들을 탐탁하게 생각할리도 만무했다. 그는 진심으로 자기네 동네와 자기네 아파트와 자기네 이웃 사촌들을 (거의 온 힘을 다해서) 경멸했지만 달리 도리가 없었다. 마흔 아홉까지 이사가지 않고 이 아파트에서 견뎌야만 유산을 물려주겠다는 그의 아버지 때문이었다. 억대 연봉을 받아도 유산은 유산이었고 당연히 받아 챙겨야 할 그의 권리였다. ’치사한 늙은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는 단 한번도 유산을 포기하겠다고 생각해본 일이 없었다. 기어코 이 개미굴 같은 아파트에서 살아남아 당신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주겠다고 매일 다짐했다. 물론 그런 단단한 마음가짐을 가지고서도 견딜 수 없는 것은 있었다. 이를테면 이번 동대표 선거의 기호 3번 유석미 후보의 다음과 같은 선거송처럼.

♬ hey 거기 거기 기호 3번. 
나를 봐. 기호 3번. 
믿어 봐 기호 3번. 
찍어 봐 기호 3번.
나나나나나나. 나나나나나나. 
나나나나나. (원 투 쓰리 포 칠백칠호!) ♬


  ‘카라’의 노래를 개사한 이 선거송을 들을 때마다 그는 오한, 발열, 기침, 가래, 구토, 흉통, 발진, 건선, 습진, 두통, 치통, 관절통, 근육통, 소화불량, 식욕부진 등에 시달렸다. 아, 혈압 올라. 저 천박한 것들이 감히!


*


  아파트는 그의 아버지가 평생 일해 모은 돈으로 장만한 것이었다. 말 그대로다. 조금 더하지도 조금 빼지도 않고 순수하게 당신의 노력만으로 장만했다는 뜻이다. 여기에 숨겨진 결정적 내막이란 그의 아버지가 할아버지 유산을 일체 건드리지 않았다는 것이 되겠다. 그걸 건드렸다면 이 16평 아파트는 한강이 훤하게 내려다 보이는 펜트하우스가 되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는 그의 아버지가 자기 아버지를 경멸하는 한 가지 방법이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일제 강점기에 재산 대부분을 모았고, 아시다시피 그 시기에 좋은 방법으로 잘 먹고 잘 산다는 것은 디즈니 애니메이션보다도 현실성이 낮은 일. 가족들 모두가 쉬쉬했지만 그 역시 할아버지가 자랑스러울만한 일을 하셨던 것은 아니겠거니 짐작하고 있었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그게 무슨 상관이냐, 시대의 요구였다, 라는 것이 할아버지의 생각이었다. 반면에 쪽팔리다, 집안 망신이다, 라는 것이 아버지의 생각이었다. 낸들 좋아서 그랬나, 그게 다 니들 먹여 살리고자 그랬다, 라는 것은 할아버지의 변명이었고, 그럼 그 시절에 남들 가족들은 죄다 쫄쫄 굶어죽었겠네요, 라는 것이 아버지의 반박이었다. 그 강렬한 반발심으로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유산을 완전 봉인해버렸다. 마치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그리고 그 사이 땅값이 좀 올랐다. 원래도 적지 않았던 유산은 이제 정말로 ‘위대한 유산’이 되어 버렸다. 진짜로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펜트하우스를 사고도 남을만큼.


  이 문제에 대한 (할아버지의 손자이나 아버지의 아들인) 박유범의 생각을 말하라면 글쎄. 그는 아무래도 좋다는 입장이었다. 돈이 돈이지 깨끗하고 더러운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 또한 회사에서는 대기업들의 밑을 닦아주면서 월급을 받고 있었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기업들이 그의 회사에 지불하는 돈의 대부분은 선량하고 정직한 소비자들에게 돌아가야 할 몫이었다. 그 비용의 10분의 1을 뚝 잘라 너희에게 줄테니 대강 무마만 시켜다오. 이것이 기업들이 로펌에 생돈을 갖다 버리는 이유였다. 이렇게 따지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는 일이다. 깨끗하게 번 돈이라고 퇴계 이황이 세종대왕 만큼의 가치를 지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럼에도 참으로 잘나고 위대하신 성인군자 아버지가 이상한 강짜를 부리고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거기까지는 좋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부자지간의 일이 아닌가. 부자간의 일은 쿨하게 그 대에서 끝내고 털어버리는 것이 매너다. 문제는 아버지가 할아버지의 유산을 자식에게 순순히 넘겨줄 생각이 없다는 점이었다. 괴팍한 조건이 걸렸다. "마흔 아홉까지 이 아파트(당신이 평생 순수하게 일해 벌어 장만했다는 그 잘나빠진 16평 아파트)에서 살아라. 그럼 물려주마. 아니면 죄다 사회에 환원해버릴 것이다." 그는 이것이 일종의 염병할 리얼리티 쇼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도 아주 고약한.


  연봉 2억이 넘는 기업 전문 변호사로 서울 변두리 16평 아파트에 살면서 그는 자신이 마땅히 연봉에 걸맞는 집에서 연봉에 걸맞는 소비를 누리며 살아야 한다는 확고한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게 다 따지고 보면 국가 경제의 매끄러운 순환에도 이바지하는 셈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그에게 까짓 거 유산을 포기하고 하루 빨리 더 나은 삶을 누리라고 말했다. 유산이 아니어도 그에게는 벽에 똥칠할 때까지 써도 모자랄 돈과 명성이 있지 않으냐는 것이다. 사실 맞는 말이었다. 그는 일주일에 여섯번 하루 12시간씩 일하고 한 달에 2천만원 이상의 수입을 올렸다. 각종 명목의 합법적, 비합법적, 탈법적, 위법적, 초법적 보너스는 제외한 국세청 보고용 소득에 따르자면 그랬다. 한 마디로 돈은 넘쳐나고 쓸 시간은 부족하다는 뜻이었다. 16평 아파트에 살면서는 돈 쓰기도 참 애매한 감이 없지 않았다. 그의 BMW 740i는 할 일 없는 동네 아줌씨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고, 와이프의 미니 쿠페 컨버터블은 할 일 없는 동네 총각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으며, 집은 각종 고급 가구와 명품 의류, 희귀 와인, 그리고 하이-엔드 전자제품으로 넘쳐났다. 뭘 더 사도 늘어 놓을 자리가 없다는 게 문제였다. 쪽방에 켤레 당 500만원짜리 구두가 포개어 쌓여 있는 것은 그의 와이프 작품이었다. 과거 ‘러브 하우스’라는 오락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었을 때 그들 부부는 적은 수납공간을 두 배 세 배로 불려내는 인테리어 디자이너들의 신묘한 솜씨에 완전 반했던 적이 있었다. 그래서 ‘우리 형편이 이렇게 절박하니 집을 좀 고쳐주세요’라는 사연의 편지를 방송국에 보냈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했다. 


  이 모든 상황을 고려하자면 그냥 유산을 포기하라는 주위의 조언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게임을 쉽게 포기하지 못했다. 아버지와의 자존심 대결이 걸린 문제였기 때문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그렇듯, 세상의 모든 부자 관계에 내재된 숙명이 그렇듯, 그에게도 ‘아버지 이슈’라는 게 있었다. 게임에서 승리하면 그는 가장 먼저 선실 두 개짜리 요트를 살 생각이었다. 쪽빛 바다 위에 요트를 띄워 놓고, 갑판에 비스듬히 드러누워 피냐콜라타나 마시며 미련한 늙은이를 실컷 비웃어줄 참이었다. 아버지는 뭔가 인생의 교훈 따위를 내려주려고 그런 게임을 만들었겠지만 어림없는 일이었다. 결국 승리는 그에게 돌아갈 것이었다. 마흔 아홉살까지면 시간도 이제 겨우 오 년밖에 남지 않았다. 


  16평 아파트에 사는 것이 특별히 불편하지는 않았다. 그의 와이프 역시 예상외로 잘 견디는 편이었다. 하긴 앞으로 오 년을 더 참아도 84년생인 그녀는 서른 둘 밖에 되지 않을 것이었다. 그 정도면 버텨볼만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긴 자기 또래의 그렇고 그런 놈들이랑 결혼했으면 이 정도 환경(16평 아파트에서 사라 제시카 파커처럼 살며 문간 쪽방에 500만원짜리 구두로 성을 쌓는 것)도 감지덕지가 아니겠는가. 그는 가끔 자기가 환갑상을 받을 때 와이프가 지금의 자기 나이 정도 밖에 되지 않을 거라는 사실에 소름끼칠 정도의 두려움을 느끼곤 했다. 처음에야 고졸 유망주를 지명하는 프로야구팀처럼 미래 가능성을 보고 몇 년 접어주자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입장이 완전히 뒤집혀 시간마저도 그의 편이 아니었다. 스물 일곱 먹은 여자와 함께 산다는 점이 친구들의 시샘과 부러움을 일으켜 그를 뿌듯하게 만들기는 하지만, 가끔씩은 (정말로 아주 가끔씩은) 그래도 열일곱 살 차이는 조금 심했나 하는 양심적인 생각을 하기도 했다. 어쨌든 이 호사를 누리려면 건강하고 볼 일이었다. 그는 하루에 30분씩 꾸준히 유산소 운동을 했으며 의사가 권해주는 건강 식단 대로만 먹으려고 애를 썼다. 종종 와이프가 애쉬튼 커쳐가 나오는 멍청한 로맨틱 코미디를 보느라 넋을 빼고 있을 때면, 그는 발도 제대로 뻗기 힘든 좁은 베란다에 나가 PMP 플레이어로 걸 그룹 ‘카라’의 엉덩이 춤을 감상하며 혼자 이렇게 중얼거리고는 했다. “하여간 트로피 와이프’는 이래서 문제야.”


*


  특별히 불편하지는 않은 16평 아파트 생활에서 그를 가장 거슬리게 하는 것은 역시 이웃사촌들이었다. 그들은 여름이면 덥다고 현관문을 활짝 열어두었고 봄 가을이면 선선하다고 현관문을 활짝 열어두었다 (겨울이 되면 문은 열어놓지 않았지만 애들이 집 안에서 뛰는지 층간소음이 클라이맥스를 이루었다). 복도식 구조는 뛰어노는 아이들에게 아주 좋은 핑계거리가 되어주었고 집에서 시끄럽게 구는 애들이 마냥 귀찮은 부모들은 그걸 모른 척 방치했다. 복도에선 음식물 쓰레기 냄새가 진동을 했고 엘레베이터에선 항상 담배 냄새와 지린내가 났다. 그의 눈에 이웃들은 지루하고 무능하고 천한 사람들이었다. 게다가 과도하게 호기심이 많았다. 공포 영화였으면 1라운드 1순위 혹은 2라운드 1순위로 살해당하고도 남을 특성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선망하는 눈길과 시샘하는 눈길이 항상 그의 등을 따갑게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를 참을 수 없게 하는 것은 잊을만하면 돌아오는 동대표 뭐시기 선거였다. 별로 중요하지도 않고 누가 된들 하등의 상관이 없는 이 ‘눈 가리고 아웅’식 선거에 도대체 무슨 콩고물이 있길래 눈 까 뒤집고 입후보하는 사람들이 있는지, 유세씩이나 펼친다니 팜플랫을 제작하니 이리도 수선을 떨어야 하는 것인지, 그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콩고물이 있어봐야 단지 관리 업체, 청소 용역 업체, 쓰레기 수거 업체 등등의 재계약 시기에 갈비탕이나 한 그릇 얻어먹는 정도 아닐까? 그런데 동네 분위기는 대통령 선거 때보다도 뜨거우니 웃지도 못할 일이었다.


  며칠 전 그는 이 동네는 선거의 기본도 안되어 있다는 증거를 발견했다. 바로 엘레베이터 한쪽 벽면에 붙여진 입후보공고와 투표용지 샘플이다. 아파트 동대표 선거에 투표용지견본을 만들어낸 사람들의 국보급 센스야 일단 넘어가기로 하자. ‘견본’이라고 엄연히 적혀있음에도 거기다 투표하는 걸로 아는 사람들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바로 이렇게.

 


  아침 저녁으로 그게 눈에 띄일 때마다 그는 혀를 끌끌 찼다. '쯧쯧, 무식한 사람들. 생각들은 하면서 사는 건지.'


*


  다음 날 그는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다가 엘레베이터에서 이웃 아줌마를 하나를 만났다. 제발 말 걸지 마라, 제발 말 걸지 마라, 주문을 거는데 기어코 살가운 척 다가와 말을 붙인다. 눈치가 백단 천단 만단이다.
- 선거 열기 참 징하죠?
  그게 뭐 대단한 선거라고. 동대표고 똥대표고.
- 그렇습디다.
- 누구 뽑으실 거예요?
- 아직 생각 안 해봤는데요.
  무심코 던진 말에 아줌마가 기겁을 했고 예상 외의 과장된 반응에 그는 더 놀라버렸다.
- 당연히 우리 라인 사람인 기호 3번 뽑아줘야 되는 거 아니에요?
- 왜요?
- 나머지 두 사람은 저쪽 라인이잖아요.
  하마터면 ‘그래서요?’라고 되물을 뻔 했다. 아니 이쪽 라인이 무슨 상관이고 저쪽 라인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하지만 참기를 잘했다. 그랬다간 필경 말이 길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 뭐 봐서요. 그러던지요.


  8층에 멈춰서자 아줌마는 찝찝한 표정을 지으며 내렸다. 그러고 보니 337동 707호 후보자가 기호 3번이다. (믿어봐 기호 3번?) 오! 주여! 그러고보니 그 3번이 감히 ‘카라’의 노래를 선거송으로 쓰는 바로 그 3번이었던 것이다. 확심에 꼭지가 돌은 그는 포켓에서 몽블랑 마에스터스튁 만년필을 꺼내 ‘샘플 투표 용지’에서 그의 라인이 기호 1번, 기호 2번의 칸에 동그라미를 하나씩 그려넣었다. 이제 샘샘이니 고것 참 샘통이다. 그는 신이 났다. 상황이 달라졌음을 알게 된 다음 날 아침 출근 길까지는 말이다. 밤 사이에 상황은 이렇게 변해 있었다.

 


  분명히 세 개의 동그라미는 한 사람의 필체였다. 한번에 급히 그려넣은 티가 분명했다. 어떤 무식한 여편네가 또 여기다 투표해야하는 줄로 알았든지, 아니면 이쪽 라인 후보 혹은 강성 지지자들이 위기감을 느껴서 이런 만행을 저지른 것이 분명했다. 이 천박스런 ‘우리가 남이가’ 정신에 치를 떨고 분노하며 그는 다른 후보들에게 다섯 표씩을 더 하사했다. 물론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말이다. 이제 스코어는 6:6:4가 되었다.


  하지만 그 날 저녁, 그가 퇴근했을 때 상황은 다시 이렇게 변해 있었다.

 


  그는 뒷목을 부여잡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다들 미쳤다. 틀림없이 다들 미쳐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 연옥에서 과연 마흔 아홉까지 버틸 수 있을까? 무려 오 년을 더? 문득 어디선가 환청이 들리는 것 같았다. "hey 거기 거기 기호 3번. 나를봐. 기호 3번. 믿어봐 기호 3번. 찍어봐 기호 3번. 나나나나나나. 나나나나나나. 나나나나나. 원 투 쓰리 포 칠백칠호." 

 

(2010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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