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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 잭 미쳐

낙농콩단/Season 16-20 (2016-2020)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17. 5.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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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과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을 알아본다. 마법도 아니고 과학도 아니다. 그냥 본능적으로 알아채는 것이다. 일과 연관지어 말하자면 일종의 직업병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미쳐에게 그것은 대개 강렬한 신체 반응으로 나타났다. 일정한 거리 안에 군인 혹은 경찰에 몸 담았던 경력이 있는 사람이 나타나면 온 몸의 세포가 들끓으며 마치 자석에 당겨지는 듯한 느낌을 받는 것이다. 특히 그 상대가 (자신과 같은) 헌병 출신이라면 더했다. 그 감각이 정밀한 레이더처럼 작동하는 것인지 때로는 상대가 시야 내에 있을 필요조차 없었다.


  미쳐는 여느 때처럼 국도 변 허름한 모텔의 침대 위에 누워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34번 국도의 ‘에델바이스’라는 이름의. 근방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왼쪽으로 50 마일. 오른쪽으로 50 마일. 그럼에도 손님이 뜸한 곳. ‘No Vacancy (빈 방 없음)’의 네온 사인에 마지막으로 빠짐없이 불이 들어왔던 것이 어쩌면 카터나 닉슨 때였을지 모르는 곳. 분명 좋은 숙소라고는 할 수 없었다. 좋은 방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너무 좁았고 습한 냄새가 났으며 침대 시트는 더러웠다. 아마 ‘친환경 정책’이라는 미명하에 몇 일에 한 번 청소하고 몇 주에 한 번 세탁하는 것 같았다. 물론 미쳐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는 훨씬 열악한 조건 하에서의 휴식에도 익숙했다. 풍천노숙만 아니라면 미쳐에게는 별 한 개짜리 모텔이든 힐튼 호텔의 주니어 스위트든 본질적으로는 다르지 않았다. 그가 허름한 단벌 외출복을 벗지 않은 상태로, 심지어 군화까지 신은 채로 누워 있었던 것도 불편해서가 아니었다. 단지 몸에 배인 습관 때문이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뒤이어 벌어질 뜻밖의 상황은 그의 계획에는 없었던 일이다.


  미쳐의 머릿속 시계가 1시 17분을 가리켰을 때 예민한 그의 레이더에 처음으로 이상 징후가 감지되었다. 옆 방이었다. 오른쪽? 왼쪽? 오른쪽이었다. 그의 방은 209호. 오른쪽이라면 208호. 침대 위에 가만히 누워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지만 그는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군인 혹은 경찰이, 혹은 그런 부류에 몸 담았던 경력이 있는 사람이 옆 방에 있었다. 명령과 복종, 규율과 훈련의 냄새가 났다. 더불어 청각 또한 예민해졌다. 낡은 냉장고가 덜덜거리며 끔찍하게 거슬리는 소리를 내는 중에도 208호에서 넘어오는 작은 소리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귀를 기울였다. 208호. 틀림없는 208호였다. 긴장감에 괄약근이 탄탄해져왔다. 그는 등허리에 힘을 주었다. 유사시에 반동을 이용해 재빨리 일어나 대처하는데는 10분의 1초면 충분할 것이었다. 아무리 오래 걸려도 10분의 2초를 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10분의 3초가 걸릴지도 모르지만 그 이상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별 일 아닐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냥 넘기는 것은 그의 스타일과 거리가 멀었다. ’희망은 최선을 꿈꾸며 품는 것이고 계획은 최악을 대비하여 세우는 것이다.’ 그의 지론. 


  이윽고 틀리는 법이 절대 없는 그의 머릿속 시계가 1시 21분을 가리켰을 때 돌연 젊은 여성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냄새와 같은 방향이었고 같은 위치였다. 오른쪽. 의심의 여지 없는 오른쪽. 그는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단 두 걸음만에 성큼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으며 한 걸음만에 다시 옆 방 문을 발로 걷어찼다. 원래 잠겨있던 문고리가 부서지며 활짝 문이 열렸다. 모든 과정이 채 2초도 걸리지 않았다. 마치 미리 준비하고 연습이라도 했던 것처럼. 마치 평생을 그렇게 하기 위해 연습해왔던 것처럼.


  하지만 미쳐는 옆 방에서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빈 방이었다. 그의 방과 똑같이 좁았고, 그의 방과 똑같이 습한 냄새가 났으며, 그의 방과 똑같이 더러운 침대 시트를 깔아놓았으나 손님을 맞지 못한 공실. 그의 예민한 레이더에 포착되었던 명령, 규율, 복종의 냄새 또한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바람처럼. 연기처럼. 불가능한 일이다. 절대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단 몇 초 사이에 그럴 수는 없다. 그리고 또 만약 실제 누군가 여기에 있었다고 한다면 (혹은 지금 도주 중이라고 한다면) 그가 느꼈던 위험 신호 역시 서서히 엷어지며 감각적으로 멀어져야 할 것이다. 이렇게 어느 순간 갑자기 사라져 버린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도깨비 장난. 상식과 논리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맞닥뜨렸을 때 헌병들은 그런 농담을 하곤 했다. 


  미쳐는 문을 닫고 조용히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물론 이번에는 문을 걷어차지 않았다. 조금 전 나갈 때 문을 잠그지 않았으므로. 달라진 것은 없었다. 조금 전까지 그가 누워 쉬던 침대 위에 낯선 금발 여성이 누워 있다는 사실만 제외하면.  그는 방을 잘못 들어왔을 거란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잭 미쳐는 그런 실수를 하는 법이 없었다. 그의 머릿속 시계가 1시 23분을 가리켰다. 옆 방에 다녀온 시간이라고 해 보아야 길게 잡아도 1분 30초. 계산이 맞다면 1분 26초. 그 짧은 시간 내에 누군가 그의 방에 들어와 몰래 들어와서 침대 위에 누웠다고?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왜? 


  미쳐는 경계를 풀지 않은 채로 천천히 다가가서 여자를 살펴보았다. 가까이 가기도 전에 알 수 있었다. 하얀색 블라우스가 반쯤 풀어 헤쳐져 있었으며 그레이색 플란넬 스커트는 허리 부근까지 말려 올라가 있었다. 하이힐은 한 쪽은 벗겨져 있고 다른 한 쪽은 발 끝에 위태롭게 걸린 채로 남아있었다. 손목을 가만히 짚어보았다. 차가웠다. 그리고 맥박이 느껴지지 않았다. 옅고 은은한 향수 냄새. 그 외에 특별할 것은 없었다. 이윽고 그의 시선이 여자의 목에 다다랐다. 크고 우람한, 검붉은 손자국. 남자의 손자국. 손의 크기로 미루어보아 덩치가 있는 자일 것 같았다. 키는 최소한 6 피트 4인치, 어쩌면 6피트 5인치. 체중은 최소 200 파운드, 어쩌면 그 이상. 미쳐와 거의 비슷한 덩치의 남자라는 뜻일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 방의 숙박 명부에 서명한 남자와 많은 부분에서 일치한다. 그게 무슨 뜻인지 미쳐는 너무 잘 알았다. 오컴의 면도날.


- 당황했소?
  전혀. 미쳐는 당황하는 법이 없었다. ‘당황'은 그의 사전에 등재되지 않은 단어였다. 그는 천천히 소리가 들려온 문쪽으로 몸을 돌렸다. 헐렁한 카키색 제복에 주렁주렁 반짝이는 금속성 뱃지들. 색 바랜 카우보이 모자. 복장과 어울리지 않게 흰 머리가 자욱한 노인. 하지만 성마르고 매서운 눈매. 마을의 보안관이 틀림 없었다. 
- 전혀. 당황할 이유가 있어야 당황하지 않겠습니까.
  보안관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문틀에 기대었던 몸을 바로 세웠다. 옅게 미소를 띠는 표정과 달리 한쪽 손은 여전히 허리춤에 총집을 단단하게 감싸고 있었다. 시골 마을의 사소한 사건 사고에 익숙해지며 실력에는 녹이 슬었겠지만 자세만큼은 여전히 프로다웠다. 미쳐는 보안관의 그 점이 존경스러웠다. 지위의 고하와 업무의 경중을 막론하고 법을 집행하는 이들에게는 합당한 존중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미쳐의 생각이었다. 
-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요?
- 보시는 그대롭니다. 이 숙녀 분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보안관은 미쳐와 적당한 거리를 두고 다가와 침대를 힐끔 넘겨다 보고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허름한 국도 변 모텔. 오고 가는 뜨내기들로 넘쳐나는 곳. 이 지역 주민은 아닌 것이다. 마치 미쳐 그 자신처럼. 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팽팽한 긴장 상태가 아니었음에도 보안관은 총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그 역시 시선을 보안관의 총에서 떼지 않았다. 보안관의 질문이 이어졌다.
- 그런데 댁은 뉘시오.
- 여행잡니다. 이 방에 묵는 중이었습니다. 209호. 4시간 전에 체크인 했습니다.
- 언제 발견하신 거요?
- 조금 전. 잠시 옆 방에 다녀오고 나니 제 침대 위에 있더군요. 
  보안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 옆 방이라고 하셨소?
- 옆 방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습니다. 208호. 가봤더니 빈 방이더군요. 바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 그랬더니 이 여성 분이 여기에 계시더라?
-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보안관은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방을 한 번 둘러 보는 척 했지만 큰 의미 없는 행동처럼 보였다. 평생 이 마을에서 살아온 노인이 관할 내 오래된 모텔의 구조를 모를 리 없을 것이다. 결론은 간단했다. 도망칠 곳이 없다. 의문의 금발 여성을 그의 침대 위에 올려놓은 범인은 물론 눈 앞의 덩치 큰 사내도. 조금 전 미쳐가 여자를 살펴 보았던 것처럼 보안관도 여자를 찬찬히 확인하였다. 거리를 둔 상태에서. 가까이 다가와 보지는 않았지만 미쳐와 비슷한 판단을 내렸을 것은 자명했다. 크고 우람한 남자의 손자국. 키는 최소한 6 피트 4인치, 어쩌면 6피트 5인치. 체중은 최소 200 파운드. 공교롭다면 공교롭게도 숙박 명부에 서명한 남자와 거의 일치한다. 오컴의 면도날.


- 누가 이런 짓을 한 것 같소?
  보안관은 짐짓 딴청을 하는 듯 질문을 던졌다. 의미없는 질문.
- 모르지요. 저는 아무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관건은 두 가지인 것처럼 보였다. 첫째, 결국 해야 할 일을 언제 실행에 옮기느냐. 둘째, 그 일을 실행에 옮겼을 때 뜻대로 일이 돌아가겠느냐. 보안관은 미쳐를 힘으로 제압하기 어렵단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이제 귓가에 제법 흰머리가 늘었지만 여전히 미쳐는 상대에게 위압감을 주는 거구 장신의 사내다. 미쳐 역시 그렇기 때문에 보안관이 쉽사리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사실 그는 노인에게 완력을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시골 마을은 비록 작고 초라한 무대인지 모르지만 그래도 법을 수호하고 법을 집행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주연 배우로 합당한 존중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보안관이었다.
- 나갔다가 들어오시기까지 얼마나 걸리셨소?
- 1분 30초입니다. 더 정확히는 1분 26초일 겁니다.
  보안관은 작고 주름진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
- 정말이오?
- 정말입니다. 나의 머릿속 시계보다 정확한 건 원자 시계 밖에 없습니다.
  보안관의 쓴웃음. 보통 미쳐가 자신의 정확한 시간 관념을 주장하면 듣는 사람들은 황당해하며 의심의 표정을 거두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다 (물론 그리고는 꽤 많은 수의 사람들이 자기 시계를 가리고 몇 시 몇 분인지 맞춰 보라며 그의 특출한 능력을 테스트하고는 했다). 하지만 보안관은 그러지 않았다. 그저 씁쓸하게 웃을 뿐이었다. 믿는다는 뜻일수도, 아닐 수도. 어쩌면 상관 없다는 뜻일 수도. 지금은 늦은 밤이다. 부하들을 줄줄이 끌고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소집하는데는 시간이 걸릴 것이고 지금 늙고 힘없는 법의 수호자는 여기 현장에 있다. 아마도 젊고 팔팔한 지원군들을 기다리며 시간을 끌어야 하는 처지일 것이다. 미쳐는 선수를 치기로 했다.


- 어르신, 혹시 제가 수사를 도와드리면 어떻겠습니까?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다. 나서서 용의자를 잡겠다고 자청하는 것은 자신을 용의선상으로부터 어느 정도 떨어뜨리게 하는 효과가 있을 거라고 그는 판단했다. 간단한 이치. 이 한 마디로 미쳐는 두 가지 사실을 어필하는 효과를 얻었다. 첫번째는 그가 이 사건과 관련이 없다는 것. 두번째는 그에게 이런 종류의 일에 풍부한 경험이 있다는 것. 보안관은의 얼굴에 한 방 먹었다는 표정이 잠시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10분의 1초? 어쩌면 10분의 2초. 이렇게 되면 대화가 이어질 수 밖에 없고 대화가 이어지면 미쳐는 자연스럽게 스스로를 변론할 기회를 얻게 된다. 보안관으로서는 그 의도를 알면서도 끌려갈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 수사 경험이 있다는 이야기처럼 들리는구려. 혹시 이쪽 일을 하셨는가 보오.
- 비슷합니다. 헌병이었습니다. 한때 110 특수부대 소속이었습니다.
  보안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천천히. 뜸을 들여 가면서.
- 잘 하셨는가 보오. 자신감이 대단하시네.
- 엉클 샘에서 받은 돈으로 먹고 살 정도는 했습니다.
- 모두 과거형이오? 그렇다면 현재 하시는 일은?
- 여행자입니다. 발길 닫는 대로 이리저리 떠도는.
  망설이는 눈빛. 콜이냐 드롭이냐. 하지만 답은 뻔했다. 지원군이 올 때까지는 물러설 수 없으므로 미끼를 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보안관의 다음 말은 미쳐에게 하는 이야기처럼도, 자신에게 하는 이야기처럼도 들리지도 않았다.
- 도와주시면 우리야 좋지. 우리 마을은 작고 평화로운 곳이라오. 강력 범죄가 마지막으로 발생한 게 십 년도 넘었지. 더구나 피해자가 외부인이니 더더욱 우리 힘으로 해보겠다 굳이 고집부릴 이유도 없고……. 댁도 현재는 프리랜서라고 하시니 우리로서도 다른 관할이나 상급 기관의 도움보다는 부담이 덜할 것이고…….
  나이와 경험에서 우러난 노련미. 어눌한듯 흘리는 그 말 속에는 여러 가지 포석이 깔려 있었다. 첫째, 여기는 어디까지나 나의 관할이며 당신은 어쨌거나 현역이 아니다. 둘째, 여기에는 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틀림없이 ‘우리’가 있으니 허튼 수작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미쳐는 그 의도는 모두 꿰뚫어보았다. 가능한 부드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도 긴장을 끈을 놓지 않았던 이유다. ‘희망은 최선을 꿈꾸며 품는 것이고 계획은 최악을 대비하여 세우는 것이다.’ 그의 지론. 
- 그러면 투숙객 면담부터 시작하시지요. 한 명씩 만나보면 뭔가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 그게 참…
  늙은 보안관은 난처하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 사실 선생을 제외하고는 이 모텔에 투숙객이 없는 것 같소만.


  분명 미쳐가 체크인하던 시점에 적어도 여섯개의 방에 사람이 있는 느낌이 들었다. 카운터 데스크 뒷편의 열쇠 걸이에도 절반쯤 비어 있었다. 또한 그가 방으로 걸어오면서 내려다 본 주차장에는 쉐보레 카마로와 토요다 캠리, 렉서스, 그리고 GMC 유콘이 있었다. 사무실 앞에 세워놓은 GMC 유콘은 모텔에서 운영하는 공용 차량일 수 있다치더라도 나머지 세 대의 승용차까지 투숙객의 차량이 아니라는 점은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34번 국도의 한 가운데. 왼쪽으로 50 마일. 오른쪽으로 50 마일. 차량 없이는 접근할 수 없는 곳. 미쳐처럼 히치하이킹에 이력이 난 사람이 아니고서야 말이다. 그런데 투숙객이 한 명도 없다고? 오컴의 면도날. 적당히 넘어갈 수만은 없을 것이다. 그래도 되도록 소란을 만들지 않고 마무리지어야 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희망은 최선을 꿈꾸며 품는 것이고 계획은 최악을 대비하여 세우는 것이다.’ 그의 지론. 


  미쳐의 머릿속은 그 순간 후속 상황에 대한 시뮬레이션으로 바쁘게 돌아갔다. 모텔 2층 객실의 장점 가운데 하나는 이상적인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모텔이 저층 건물이고 말발굽형 구조를 가졌기 때문에 2층 객실은 시야 확보에 상당히 유리하다. 행인과 주차장도 한 눈에 들어온다. 또한 대개 좁은 계단과 좁은 복도로 연결되어 있어 수적 열세를 극복하기에 좋다.  아무리 상대의 수가 많아도 그와 한 번에 마주할 수 있는 상대는 기껏해야 한두 명일 뿐이다. 그리고 그 한두 명은 바짝 따라 붙어 있는 동료들 때문에 퇴로조차 없을 것이다. 수적 우위가 오히려 약점이 되는 것이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보안관의 총을 빼앗는 것이다. 일단 총을 빼앗은 다음에는 방 안에 남겨 놓아도 별로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다. 보존해야 하는 사건 현장. 상대는 거인의 몸집을 가진 남자. 늙은 보안관이 덤벼들 가능성은 낮다. 그러면 미쳐는 외부에서 접근하는 적에 초점을 맞추면 된다. 예상컨대 많아야 한두 명의 부보안관들일 것이다. 작은 마을이니까. 물론 동네 어깨들을 끌고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런 경우 보나마나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얼마 전까지 미식축구 선수로 뛰었던, 동네 안에서는 힘 깨나 쓴다고 알려진, 그런 녀석들일 것이다. 오히려 그런 녀석들이 앞장 서는 것이 미쳐에게는 더 편한 상황이었다. 기왕에 한둘을 쓰러뜨려야 한다면 몇 달만 병원 신세를 지면 회복하여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을만큼 젊고 건강한 녀석들쪽이 훨씬 바람직한 법이다.


  좁은 복도. 길은 두 개다. 왼쪽, 아니면 오른쪽. 양쪽에서 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만한 수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느 쪽이든 문설주에 허리를 바싹 붙이고 그 쪽을 바라보면 된다. 그러면 방 안에 남아 있는 보안관도 동시에 시야에 들어온다. 선봉에 선 놈은 적절한 거리에서 멈출 것이다. 부보안관일 수도 있지만 동네 덩치들을 데리고 왔다면 앞세우고 들어올 가능성이 크다. 거리는 3미터 정도. 부보안관이 대화를 시도하겠지만 오해가 풀릴 가능성은 적다. 오컴의 면도날. 일단 순순히 서로 동행하는데 동의를 했다가 그 이후에 오해가 밝혀질 수도 있겠지만 그건 미쳐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는 타당한 이유가 없는 임의 동행을 싫어했다. 수갑을 채우는 것은 좋아했지만 수갑에 채워지는 것은 싫어했다. 결론은 제압 하느냐, 제압 당하느냐. 그의 도마뱀 뇌가 부지런하게 돌아가기 시작할 것이다. 3미터의 긴장. 팔이 아무리 길어도 리치가 닿지 않을 거리다. 덩치들은 젊은 혈기로 조금 더 가까이 들어올 수도 있다. 3미터가 충분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미쳐에게는 긴 다리가 있다. 문설주에 적절한 반동을 주어 앞으로 나간다면 최전방에 위치한 녀석의 의기양양한 무릎을 축구공처럼 걷어찰 수 있을 것이다. 간단한 물리. 충돌의 법칙. 그러면 녀석은 앞으로 고꾸라지게 되고 약진 중인 미쳐의 사정권 안에 머리통까지 들어오게 된다. 오른팔을 낫처럼 휘둘러 관자놀이를 가격하면 장엄하게 1막이 시작된다. 실은 끝난다. 군사작전이 아닌 이상 열세 앞에 돌진으로 맞설 이유는 없다. 그래봐야 등불을 향해 날아드는 부나비처럼 딱한 운명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3미터. 정확히 한 수만에 누구도 209호 방문에서 3미터 안쪽으로는 접근하지 않을 것이다. 찌그러져 쌔근대는 녀석이 과속방지턱처럼 그들과 미쳐 사이를 막아주는 효과는 덤이고. 의외로 한 명에서 그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상관 없다. 두 명이 더 오든 세 명이 더 오든 결과는 마찬가지고 과속방지턱만 높아질 뿐일테니까. 늦던 빠르던 그들은 미쳐와 대화를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결정은 되도록 빨리 내려지는 것이 신상에 좋을 것이고 말이다.


  미쳐의 예상은 대부분이 맞았다. 한 가지만 제외하고. 지역 보안관보는 동네 풋볼 선수처럼 보이는 애송이 두 녀석을 데려왔고 복도의 왼쪽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총집이 오른쪽 허리춤에 있는 것으로 보아 오른쪽에 빈 공간이 있는 편이 편하다고 느꼈을 수도 있고 어쩌면 별 이유 없이 주차한 곳에서 가까운 편을 택했을 수도 있다. 미쳐는 오른편 문설주에 느긋하게 기대며 몸을 폈다. 이미 큰 몸이지만 더 크게 보여 너뿐 이유는 없었다. 늙은 보안관은 총을 빼앗긴 채로 방 안에 있다. 유감이지만 노인의 역할은 당분간 관객 이상이 되기도 어렵고 스스로도 그런 처지를 실감한 것처럼 보였다. 


  예상과 다르게 흘러간 것은 이 대목 부터다. 풋내기 라인배커들은 계단과 2층 복도가 만나는 지점에서 멈췄다. 마치 그렇게 하기로 전략을 짜고 올라온 것처럼. 보안관보가 그들 틈을 빠져나와 단독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뜻밖의 일이었다. 좌우에 거느린 덩치들에 의존해서 이 문제를 해결할 뜻이 없다는 자신감. 어둠의 장막 속에서도 드러나는 단단하고 빈틈없는 자세. 5미터, 4미터, 3미터. 거리가 좁혀지면서 좁혀질수록 미쳐의 머릿속은 분주하게 돌아갔다. 새로운 상황에 대한 변수를 고려하여 공식을 수정하고 연산을 수행하는 컴퓨터처럼. 그러나 미처 보정을 마치기도 전에 미쳐의 눈 앞에 또 하나의 결정적 변수가 정체를 드러내었다. 미쳐의 시야에 카키색 제복 뒤로 포니테일로 묶은 금발 머리칼이 흔들리는 것이 포착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보안관보가 여자일거라고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


*


  미쳐는 양 손바닥이 보이게 손을 들었다. 그는 여성을 상대로 완력을 사용할 생각은 없었고 어차피 그럴 상황이라면 저항할 의사가 없음을 확실하게 전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특히 그처럼 체급이 남다른 남자의 경우 더더욱. 마지막으로 그는 보안관보의 눈을 마주 본 상태에서 보안관의 총을 거꾸로 잡아서 보안관에게 돌려주었다.
- 악의는 없었습니다, 어르신.
  노인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이해하는 것 같았다. 반면 여전히 보안관보는 의심하는 눈치였다. 그를 겨눈 총을 잡은 두 손은 단단히 경직되어 있었다. 미쳐는 노인을 쳐다보았다. 은근히 그녀를 제지해주기를 바랐다. 복도 저 편에서 낡은 아이스 메이커의 컴프레서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얼음을 얼리는 것이 아니라 굴착기로 땅이라도 파는 듯한 소음이었다. 몇 시간처럼 느껴지는 몇 분이 지난 다음에 보안관보가 총을 내렸다. 보안관도 돌려 받은 총을 왼쪽 허리 총집에 넣었다. 그제야 분위기가 누그러졌다. 양쪽 복도 끝에서 다가오던 덩치들도 뒤로 물러섰다. 보안관보는 챙이 넓은 모자를 벗었다. 아직 어리게만 보이는 얼굴이었다. 보안관과는 할아버지와 손녀 정도의 나이 차이. 그녀가 복도의 전구를 등지고 그녀의 금발 머리칼을 타고 넘어들어온 빛의 산란에 눈이 부셨다. 문득 그녀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물었다.
- 그런데 보안관님. 신원 미상의 여성 시신이 있다는 방이 어디입니까?
  보안관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 무슨 소린가? 바로 여기 209호 아닌가.
  보안관이 돌아보았다. 미쳐도 돌아보았다. 놀랍게도 침대는 비어 있었다. 여자는 없었다. 아무도 없었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구두 하나도 사라졌다. 보안관과 미쳐가 서로 마주보았다. 두 사람은 내내 함께 있었다. 물론 지원 병력이 들어오는 문쪽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 모두 침대를 등지고 있었다. 하지만 인기척이 있었다면 미쳐가 느끼지 못했을 리가 없다. 보안관 역시 마찬가지였다. 반대쪽으로는 창문 없는 욕실과 벽. 싸구려 모텔의 전형적인 구조. 누가 들어올 수도 나갈 수 없는 밀실. 도깨비 장난. 상식과 논리로 이해할 수 없는 일. 보안관도 같은 생각인 것 같았다. 자신이 함께 있었으므로 미쳐를 믿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 그래도 확인을 위해 서까지 동행을 요청해야겠지요?
  총집을 덮고 있는 보안관보의 손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보안관은 얼빠진 표정으로 잠시 망설이더니만 이내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미쳐 또한 큰 손을 더 크고 분명하게 들어 소란 피울 생각이 없음을 확실히 보여주었다. 그들은 모텔 주인을 불러 에델바이스 모텔의 2층 방을 하나씩 확인했다. 대니 드 비토를 닮은 모텔 주인은 아닌 밤 중의 홍두깨와 같은 상황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그들이 불러내어 잠이 깬 것은 아니고 이미 조금 전의 대치 상황에서부터 일어나 있었던 것 같기는 했다. 이어서 1층 방도 하나씩 확인했다. 모두 공실이었다. 아무도 없었다. 미쳐는 막간에 주차장을 내려다보았다. GMC 유콘. 쉐보레, 토요다, 렉서스. 모두 그대로 있었다. 미쳐가 체크인 하던 시점에 없었던 포드 크라운은 보안관의 것이고 나머지 쉐보레 타호 SUV 한 대는 보안관보가 마을 청년들을 데리고 온 것으로 짐작되었다.
- 저 차량들은 투숙객들의 것이 아니오?  
- 맞습니다. 투숙객들의 차량입니다.
  미쳐가 끼어들자 땅딸보 모텔 주인이 대꾸했다. 그리고는 이내 ‘도대체 이 남자는 누구지?’라는 표정이 되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209호 손님이 왜 나서서 질문을 던져대고 있는지 의문을 가질만도 했다. 보안관과 보안관보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는 것이 그들 중 누가 나서서 먼저 설명해주길 바라는 것 같았다. 
- 투숙객이 없는데 투숙객들의 차량은 있단 이야깁니까?
- 그렇죠. 가끔씩 에델바이스에 들려 묵고 사람들이 있습니다. 차를 여기에 세워두고 올 때마다 쓰고 싶다고 하기에 그러라고 했습니다.
- 가끔씩 온다고요?
  모텔 주인은 안경을 밀어 올리고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자긴들 어떻게 알겠느냐는 표정이었다. 34번 국도의 한 가운데. 왼쪽으로 50 마일. 오른쪽으로 50 마일. 차량 없이는 접근할 수 없는 곳. 가끔씩 여기에 오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은 쉽게 납득하기가 힘들었다.
- 그런데 그 제안을 받아들이셨단 말입니까?
  모텔 주인은 짧게 한숨을 쉬고 말을 이어나갔다.
- 이보세요. 난들 어떻게 하겠습니까. 먹고 살기 힘든데. 아시다시피 우리 모텔에 주차 공간이 부족한 상황은 아니고…… 공짜로 주차를 하겠다는 것도 아닌데. 내 입장에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단 말입니다.
  그 말을 하면서 보안관과 부보안관의 눈치를 살피는 것을 보니 암암리에 겸하는 이 비공식적 주차 사업에 대해서 제대로 신고가 되지 않은 듯 했다. 그렇다면 그간의 그 수입에 대해서 제대로 신고가 되었을리 없을 것이고.
- 그런데 저 사람은 도대체 누굽니까?  
- 나 말입니까? 오늘 밤 209호에 묵는 사람입니다. 한 명 밖에 없는 손님을 모른다고 하실 참입니까?
- 아니요. 그게 아니라 왜 보안관님이 아닌 저 사람이 질문을 하고 있는 겁니까?
  그제야 보안관은 미쳐와 모텔 주인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 어이, 마르코. 진정하게. 이 분은 군 수사관이신데 우연히 우리가 조사하는 일을 도와주시기로 했어. 그러니 그 부분은 신경쓰지 말고……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들이 얼마나 자주 차를 놓고 다니는지 우리에게 알려줄 수 있겠나?
  마르코라는 모텔 주인은 잠시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말을 이어갔다.
- 저도 잘 모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서 몰고 나갔다가 아침에 보면 다시 세워져있더군요. 어림잡아 한달에 한 두번? 많으면 세 번? 평범한 직장인들처럼 보였습니다. 정장을 입었고요. 좋은 안경에 좋은 시계에 늘 가죽서류가방 같은 것을 들고 다녔고 인상 착의도 뭐랄까, 인텔리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 알겠네. 오늘은 이쯤하세. 대신 나중에 저 차량들에 대한 부분은 다시 짚고 넘어가야 할 걸세.   


  보안관의 말에 마르코는 한숨을 돌린 듯 했다. 미쳐도 더 질문할 것은 없으므로 잠자코 있었다. 일단 미쳐는 그들과 함께 보안관 사무실로 일단 이동하였다. 보안관의 포드 크라운 조수석에 앉아 가는 동안 그의 여전히 조금 전의 대화 내용에 사로잡혀 있었다. 34번 국도의 한 가운데. 왼쪽으로 50 마일. 오른쪽으로 50 마일. 차량 없이는 접근할 수 없는 곳. 차를 상시 이 곳에 세워두고 가끔씩 여기에 오는 사람들이 있다. 좋은 정장, 좋은 안경, 좋은 시계, 가죽 서류 가방. 이상하지만 그럴 수도 있다고 치자. 208호에서 들려온 여성의 비명과 209호에 나타난 여성의 시신과 관련이 있는 문제인가? 또 그녀는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그를 자석처럼 끌어당겼던 군인 혹은 경찰 경력자의 접근 신호는? 도깨비 장난. 상식과 논리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맞닥뜨렸을 때 헌병들은 그런 농담을 하곤 했다. 

 

- 선생은 이제 어떻게 하실 참이오? 더 이상 우리가 알아볼 수 있는 것이 없는 것 같은데 보안관 사무실까지 굳이 가실 필요가 있을까 싶소. 피의자만 없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도 없으니 수사가 성립이 되지 않는 것 같은데. 밤이 늦었는데 일단 돌아가 쉬시는 것이 좋을 듯 하오. 그곳이 내키지 않으면 우리와 함께 마을로 가서 적당한 숙소 하나를 잡아드릴 수도 있고. 선생의 선택에 달렸소. 

  십분쯤 지나 보안관이 먼저 말을 꺼냈다. 아무래도 내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었다. 
- 그렇습니다. 그냥 아무 곳에나 내려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 아무 곳에나? 벌서 6마일이 넘게 달려왔는데.
- 걸어가면 됩니다. 히치하이킹을 하거나.
- 보시면 아시겠지만 여기는 차가 많이 다니지 않소. 지금은 특히 한밤중이고.
- 괜찮습니다. 저는 이런 일에 익숙합니다. 
- 그럼 이렇게 합시다. 


  보안관이 비상등을 켜고 갓길에 차를 대자 따라오던 부보안관의 쉐보레 타호 SUV도 바로 뒤로 따라와 비상등을 켜고 멈추었다. 차에서 내린 보안관은 보안관보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다시 돌아와 조수석의 창문을 두들기며 창문을 내려보라고 신호했다.
- 선생은 저쪽 차로 옮겨 타시오. 우리 보안관보가 다시 숙소까지 모셔다 드릴거요.
  그 말과 함께 포드 크라운의 뒷좌석이 열리고 동네 청년들이 올라 탔다. 보안관이 먼저 이들을 데리고 마을로 돌아가고 보안관보가 미쳐를 담당하기로 서로 이야기가 된 모양이었다.
- 정말 괜찮습니다. 괜히 폐를 끼치고 싶지 않습니다.
- 아니오. 우리가 괜히 여기까지 끌고 왔으니…… 어서 그렇게 하도록 해요.


  미쳐는 잠시 생각하고 그 말을 따랐다. 포드 크라운에서 내려서 쉐보레 타호에 올라탔다. 보안관보가 가볍게 알은채를 했는데 여전히 경계하는 마음이 남아 있는 듯 했다. 그녀는 보안관과 거의 똑같은 질문을 했다.
- 원하시는 곳으로 모셔다 드릴께요. ‘에델바이스’로 돌아가셔도 괜찮고 아니면 마을에 있는 적당한 숙소를 잡아드릴 수도 있어요. 물론 우리 마을이라고 힐튼이나 매리엇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에델바이스보다는 나을 거예요.
- 나는 ‘에델바이스’로 돌아갈 생각이오. 그런데 그러면 그쪽은 같은 길을 되돌아갔다가 다시 마을로 가야하는 입장이 되지 않소. 차라리 나를 그냥 여기에 내려는 주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 그러면 어떻게 가시게요.
- 모르겠소. 히치하이킹?
- 그럼 히치하이킹으로 내 차를 잡아탔다고 생각하세요. 
  그 대답이 스스로도 마음에 들었는지 그녀는 살짝 미소지었고 아주 짧게나마 부끄러워하는 표정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뺨의 보조개가 옴폭하게 들어갔다. 미쳐와 대치한 이후 처음으로 긴장이 풀린 모습이었다. 미쳐도 그녀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 또 미쳐는 그녀의 보조개도 마음에 들었다. 첫 인상도 나쁘지 않았지만 가까이에서 보니 실로 미인이었다. 미쳐는 자신의 또다른 직업병에 대해 생각했다. 유니폼을 입은 여성. 전문적이고 프로다우면서도 그 유니폼 속에 진정한 매력을 숨기고 있는 아름다운 여성들. 미쳐는 예전부터 그런 여성들에게 끌렸다. 경찰, 군인, 형사, 헌병, 군 수사관, 파일럿, 연방 요원, 소방수, 방화수, 사격수, 척탄수, 폭격수…… 뭐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지위의 고하와 업무의 경중을 막론하고 그런 전문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여성분들에게는 합당한 존중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미쳐의 생각이었다. 
- 우리 동네에 얼마나 계셨어요?
- 하루. 어제 도착했소.
- 얼마나 계실 건가요?
- 필요한만큼.
- 우리 지역에는 볼 일이 있어 오신 건가요?
- 아니오. 그냥 지나가는 길이었소.
- 그럼 이제 뭘 하시려고요?
- 나는 특별히 할 일을 정해놓고 사는 타입은 아니라서.
- 그럼 뭘하시게요?
- 몇 가지. 아마도 이것저것. 
  그녀는 이해할 수가 없다는 듯 웃어보였다. 미쳐는 그 미소도 마음에 들었다. 
- 그 여자분 말이에요. 정말 보셨나요? 물론 저는 믿어요. 오해하진 마세요. 보안관님도 그렇다고 하셨으니 있었겠죠. 당신의 침대 위에. 
- 그렇소. 분명히 있었소. 내 침대 위에.


  미쳐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느새 세보레 타호가 에델바이스의 주차장으로 미끌어져 들어갔다. ‘No Vacancy (빈 방 없음)’의 네온 사인은 여전히 꺼져 있었다. GMC 유콘. 쉐보레, 토요다, 렉서스. 가끔씩 에델바이스에 오는 사람들의 장기 주차 차량. 사무실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서성이는 사람의 그림자가 비치는 것으로 보아 대니 드 비토는 잠을 못 이루고 있는 듯 했다. 보안관보는 미쳐의 방으로 올라가는 계단 바로 앞에 타호를 세웠다. 
- 우리 마을에서 이것저것 하신다는 일이 정확히 뭔진 모르겠지만…… 조심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 왜 그렇게 생각하시오?
- 사연이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이 모텔을 둘러싼 이야기들이요. 
- 어떤 이야기요?
- 짦은 이야기가 아니에요. 
- 핵심만 요약하자면?
- 이 모텔에서는 계속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어요. 그러니까 제 말은……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요. 
- 아직 잘 모르겠는데 요약 버전 말고 긴 버전으로 들을 수 있겠소?
  그녀는 열쇠를 돌려 타호의 시동을 껐다.


*


  미쳐의 방인 209호는 일종의 사건 현장이었으므로 여전히 출입 통제 테잎이 붙어 있는 상태였다. 물론 (공식적으로는 아무 일이 없었던 셈이므로) 다음 날 아침이면 다시 테잎을 걷어내겠지만 대니 드 비토는 한사코 다른 방으로 옮겨주겠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일종의 룸 업그레이드라고 주장했다. 자기네 모텔에서 3층은 나름 로얄층이라는 것이다. 짐도 들어다 주겠다고 우겼는데 그래봐야 미쳐의 소지품은 칫솔 하나가 전부였다.  


  309호는 이전의 209호에 비해서 과연 덜 좁았고 덜 습했으며 덜 더러웠다. 좋은 점도 있었다. 그래도 마음에 드는 것은 넓고 평평한 킹 사이즈 침대였다. 미쳐와 같은 장신의 거구도 발 뻗고 누울 수 있을만큼 세로 길이가 충분한 침대. 그리고 한 사람 더 누워도 무방할만큼 가로 길이 또한 충분한 침대. 마치 예정된 수순처럼 미쳐와 부보안관은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넓고 평평한 침대로 쓰러져 사랑을 나누었다. 열정적으로. 유니폼에 가려져있던 매력. 마땅히 존중받아야 하는 프로. 미쳐의 예상대로였다. 그리고 놀라웠다. 이제까지 우연에서부터 운명에 이르기까지 미쳐는 수많은 여성들을 만나왔지만 이번 경험은 예전의 어떤 경험과도 달랐다. 비교할 수가 없었다.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각이었다. 이제껏 살아오면서 항상 사건은 미쳐를 따라다녔다. (혹은 그가 사건을 따라다니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사건에는 언제나 미인들이 따라왔다. 그가 현실주의자요, 또 지극히 현재중심적 사고방식을 갖고 있어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항상 그 순간에 누리는 사랑이 역대 최고인 것처럼 느껴졌다. 도마뱀 뇌의 불꽃놀이. 오늘의 폭발이 최고의 폭발. 기록 경신. 올림픽 레코드.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 수 있는지는 스스로도 설명할 수 없었다.  


  사랑을 나누고 난 다음에서야 그들은 서로의 이름을 아직 모르고 있음을 깨달았다.
- 개인적인 질문 하나 해도 돼요?
- 물론이오.
- 이름이 뭐예요?
- 미쳐요. 
- 성인가요? 이름인가요?
- 사람들이 다 그냥 미쳐라고 부르더군.
- 알겠어요. 미쳐.
- 내 이름을 밝혔으니 이젠 그쪽 차례가 아닌가 싶은데.
- 아만다라고 해요. 참고로 맨디라고 부르셔도 괜찮아요.
- 성? 이름?
- 답은 이미 알잖아요.
  그녀는 예의 보조개가 옴폭하게 파일 정도로 미소를 지으며 미쳐의 몸 곳곳에 훈장처럼 새겨진 상처를 하나 하나씩 부드럽게 쓰다듬기 시작했다. 수도 적지 않거니와 모양도 위치도 제각각이었다. 아만다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미쳐는   전류가 통하기라도 하는 듯한 짜릿한 느낌을 받았다.
- 와, 정말 상처가 많군요. 성한 곳이 없네요.


  미쳐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는 상처 하나 하나 얽힌 사연을 묻기 시작했다. 이건 뭐에요? 저건 뭐에요? 그런 식으로. 가장 먼저 질문을 받은 것은 컬리플라워 훈장. (그랬다. 그는 자기 몸의 상처 하나 하나에 이름을 붙여주고 훈장으로 간주하였다.) 다음은 바나나넛 머핀. 이어서 세크리테리엇, 메달 오브 아너, 베레타 92, 해마, 딤섬, 마가리타, 케빈 베이컨, 물음표, F-워드, 그레이 하운드, 솜브레로, 양털나선은하, 팝 타르트, 대관람차, 유칼립투스, 메두사, 트레일 믹스, 우디와 버즈, 말편자 등등. 마지막으로 미쳐는 이렇게 덧붙였다.
- 이번 일로 훈장이 하나 더 늘어날 일은 겪고 싶지 않소. 이젠 몸도 예전같지 않고 더 상처날 공간도 없거든.
- 그러면 어디에서부터 시작하죠?
- 여기에서부터 시작하기로 합시다.
  미쳐는 아만다에게 다시 한 번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 대단히 직선적이시군요. 
- 나는 게임 플레이어가 아니오.
- 우리가 이럴 거라고 언제 예감이 오시던가요?
- 당신이 타호의 시동을 끄고 내렸을 때. 


*


  두 사람은 바닥에 어지럽게 널려진 옷을 대충 찾아 상의와 하의 하나씩만 입은 다음 자리를 잡고 앉았다. 미쳐는 방 구석의 1인용 쇼파에 등을 기대고 앉았고 아만다는 침대 끝에 걸터 앉았다. 새벽 4시 55분. 미쳐는 커피가 간절했다. 뜨뜻한 커피는 언제나 그의 뇌 운동을 활발하게 만들어주는 묘약과도 같았다. 하지만 그의 질문에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근처에 쓸만한 커피는 없다고. 모텔 1층의 커피는 구정물에 가깝고 가장 가까운 커피샵은 50 마일 넘게 떨어져 있다고. 미쳐는 고개를 끄덕였다. 34번 국도의 한 가운데. 왼쪽으로 50 마일. 오른쪽으로 50 마일. 결국 그는 카페인 금단 증상을 조금 더 참아보기로 했다. 그녀가 왜 이 모텔을 두고 이상한 일이 일어나는 곳이란 표현을 썼는지, 그 설명을 들어야 할 순간이었다. 그녀가 눈썹을 찡그렸다. 마치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 이상한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이 모텔과 관련해서 기현상에 대한 보고들이 있었어요. 
- 기현상이라면?
- 무엇이 정확한 표현인지도 모르겠어요. 심령현상? 폴터가이스트? 
- 농담이오?
- 정말이에요. 
- 난 군인이오. 동시에 수사관이기도 했고.
- 전 이 마을 보안관보에요. 미네소타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했고요.


  미쳐는 고개를 들어 천장의 얼룩을 바라보았다.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뭐라 답해야 할지.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심령현상? 폴터가이스트? 한땐 그런 게 유행했다. 유령, 엑토플라즘, 저주 받은 집, 자연발화, 크롭서클, 유에프오, 외계인, 마인드 컨트롤, 초능력, 예언가… 요즘은 아니다. 언제부턴가 사라진 것들이다. 사람들이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는 것들. 이제 공포 영화의 소재로나 존재하는 것들. 언제부터였을까? Y2K? 9-11? 아니면 인터넷과 유튜브의 등장? 아니면 ‘엑스-파일’의 종영? 미쳐는 컴퓨터나 스마트폰 같은 최신 기기들에 익숙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시대가 변했다는 것은 안다. 그녀가 한 마디 덧붙였다. 
- 208호-209호는 우연이 아니었어요. 

- 그 말은?

- 내 말은… 뭔가 이상한 일이 그 모텔… 아니, 이 모텔에서 일어났다면 그건 209호였을 거란 뜻이죠.
- 알고 있었소.


  미쳐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에델바이스 모텔의 두 개 층에는 총 48개 객실이 있었다. 미쳐가 처음 도착했을 때 카운터 뒷편의 열쇠함에 열쇠가 남아 있는 방은 절반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나중에 밝혀진 것처럼) 미쳐 외에는 손님이 없었다. 확률은 48분의 1이지만 모텔 주인이 이미 어느 방을 내어줄 지 마음을 먹었다면 확률은 1분의 1이나 다름없다. 대니 드 비토는 처음부터 209호로 (혹은 208호의 옆방으로) 미쳐를 보낼 생각이었던 것이다.
- 알고 있었다고요?
- 그렇소. 
- 어떻게요?
- 그냥 아는 거요. 나중에 설명해주리다.


  미쳐는 잠시 생각을 이어갔다. 209호로 그를 유도했단 말은 209호에서 그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대니 드 비토가 알았다. 그녀도 알았다. 아마 늙은 보안관도 알았을 것이다. 
- 그럼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도 아시나요?
  미쳐는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런 것 같소.
- 무슨 일인데요?
- 아직은 아니오. 때가 되면 알려주리다.
  그녀는 입을 삐쭉 내밀었다.
- 늘 이런 식인가요? 정답을 알면서도 혼자만 알고 있고. 사람들을 궁금해서 안달하게 만들면서 쾌감을 느끼나보죠? 
- 늘 그런 건 아니오. 이럴 때만 그렇지.
  그 말과 함께 미쳐는 그녀에게 다시 입을 맞추었다. 
-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설명할 수 없는 일처럼 보이는 걸요.
- 맞소. 설명할 수가 없지.


  그녀가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을 짓자 미쳐가 물었다.
- 어떻소? 아만다. 당신 생각은. 당신에게도 좋은 이론이 있소?
- 이론이요?
- 내가 겪었던 일. 보안관님도 보았던 일. 사라진 여자.
  그녀는 골똘히 생각하더니만 말을 이었다. 
- 그 방들이 원래 날아다니는 서랍장과 저절로 돌아가는 수도꼭지의 공간인데 꼭 이론이 필요한가요?
- 그렇지. 그 말은 맞소. 하지만 당신이라면 뭔가 적절한 설명을 찾고 있을 듯한데.
- 절 그렇게 잘 아시나보죠? 우린 만난지 몇 시간 되지 않았는데…
  또다시 보조개가 옴폭 들어가는 것으로 보아 그 말을 기분 나쁘게 받아들이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 정확히 3시간 47분이 되었소.
- 3시간 47분이요? 분 단위로 체크하고 계셨던 건가요?
- 정말이오. 내 머릿속 시계보다 정확한 건 원자 시계 밖에 없다오.
  그녀의 쓴웃음. 마치 보안관과 닮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녀 역시 자기 시계를 가리키며 그의 특출한 능력을 테스트하지는 않았다. 
- 만난지 겨우 3시간 47분이라니! 대단하네요.


   아만다가 방을 돌아보며 말했자. 미쳐의 시선도 그녀를 따라갔다. 아직도 옷의 절반은 바닥에 널려있거나 의자에 걸려 있었다. 그녀가 부끄러움을 느꼈을지는 모르겠지만 미쳐는 그렇지 않았다. ‘부끄러움’ 역시 그의 사전에 등재되지 않은 단어다. 앞으로 개정판을 통해 더해질 확률도 없었다.
- 아무튼 그게 뭐요? 
- 뭐가요?
- 적절한 설명? 가설? 조금 전에 순간적으로 떠올랐던 생각?
- 싫어요. 말하지 않을래요. 너무 바보 같아요.
- 괜찮소. 나는 듣고 싶소.
- 알았어요. 하지만 먼저 이 점을 염두에 두세요. 분명히 문제의 상황은 상식적으로 또 논리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설명도 상식과 논리에 어긋나는 것들 밖에 남지 않는 거죠.
- 이해했소. 
- 그리고 두번째로 그 방들은 정말 이상한 곳이고 투숙객들의 괴상한 제보가 끊이지 않았다는 점도 확실하게 해두죠. 그래야 내가 미친 여자처럼 보이지 않을테니까.
- 그 점도 충분히 알겠소.
- 조금 엉뚱하게 들리겠지만… 두 개의 시공간이 나란히 존재하고 당신이 어느 순간에 우연히 그 사이의 문을 열었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 중 하나에서는 지금 우리가 설명할 수 없다는 생각하는 일들이 실제 일어나고 있는 거죠. 이를테면 당신이 들었다던 208호에서의 비명 소리가 좋은 예가 되겠네요. 209호의 사라진 사체로 마찬가지고. 
  미쳐는 맨 처음 자신의 시그니쳐 군경 감식 레이더망에 감지되었던 기이한 느낌에 대해 생각했지만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설명하기도 어려울 뿐더러 그녀의 말을 끊고 싶진 않았다.
- 잘 따라가고 있소. 적어도 아직까지는.
- 그런데 이 두 개의 시공간이 안과 밖처럼 나란히 존재하면서도 동시에 연속성을 갖고 연결되어 있기도 한거죠. 당신이 그 사이의 문을 여는 순간… 안과 밖이 바뀌는 거죠.
   그녀는 바닥에 널려있던 미쳐의 뒤집힌 청바지를 찾아 들어 미쳐에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끝을 찾아 손을 집어 넣어 안과 밖을 뒤집어 다시 미쳐에게 보여주었다. 미쳐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고 멍한 얼굴로 바라보자 그녀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윽고 미쳐가 말했다. 전에 없이 크게 미소를 지으면서.
- 차원간 웜홀을 청바지를 뒤집어가며 설명하는 사람은 평생 처음 보오.  
  그제서야 그녀의 긴장이 풀리는 듯 얼굴의 열기가 빠져나갔다.
- 잊었어요? 내가 미네소타 트윈시티에서 돌아온 물리학도라는 걸.


  미쳐는 생각했다. 어쩌면 그 설명이 맞을지도 몰랐다. 34번 국도의 한 가운데. 왼쪽으로 50 마일. 오른쪽으로 50 마일. 차량 없이는 접근할 수 없는 곳. 완벽한 밀실. 상식과 논리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맞닥뜨렸을 때 헌병들은 그런 농담을 하곤 했다. 도깨비 장난. 다른 설명이 없었다. 오컴의 면도날. 오컴의 도깨비 장난.
- 그래서 어때요?
- 뭐가 말이오?
- 제 바보같은 설명이 어떻냐고요.
- 마음에 드오.
- 말이 안되잖아요.
- 당신 입으로 그랬잖소. 상식과 논리에 어긋나는 일이니 상식과 논리를 벗어나는 설명 밖에 남지 않는다고. 원래 답이 아닌 것을 모두 제하고 남는 것이 정답인 법 아니겠소.


  미쳐는 생각했다. 심령 현상, 폴터가이스트, 유령, 엑토플라즘, 저주 받은 집, 자연발화, 크롭서클, 유에프오, 외계인, 마인드 컨트롤, 초능력, 예언가.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사라진 것들. 왜 요즘엔 이런 현상이 보고되지 않는가. 싸구려 가판대 잡지가 사라져서? 아니면 인터넷과 유튜브의 등장 때문에? ‘엑스-파일’이 종영해서? 또 그는 생각했다. GMC 유콘. 쉐보레, 토요다, 렉서스. 투숙객이 하나도 없는데 거의 찬 주차장. 투숙객이 하나도 없는데 채 절반도 남지 않은 열쇠판. 모텔 주인의 비밀스러운 주차 사업과 그것을 이용하는 은밀한 고객들. 
- 하지만 당신은 정답을 알고 있잖아요. 


  아만다의 그 말에 미쳐는 조용히 미소지으며 다시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처음에 그녀는 ‘또 이렇게 어물쩡 설명을 미루려는 거예요?’라고 대꾸하려는 표정이었는데 이내 미쳐와 같은 마음이 되었다. 미쳐는 자신이 평생 매진해 온 이론의 정립에 큰 희열을 느꼈다. ‘항상 두번째 나누는 사랑이 첫번째보다 좋다’라는 이론. 물론 첫번째도 놀라운 경험이었지만 두번째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언어로는 표현이 불가능했다. 그는 평생 경찰, 군인, 형사, 헌병, 군 수사관, 파일럿, 연방 요원, 소방수, 방화수, 사격수, 척탄수, 폭격수 등 수많은 유니폼 입은 여성에 끌려왔지만 그녀처럼 그를 백기 투항하게 만드는 사람은 없었다. 과연 그가 현실주의자요, 또 지극히 현재중심적 사고방식을 갖고 있어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그녀가 평생 찾아 헤메었던 반쪽이어서 그런 걸까? 벅차오르는 감정 속에서 그는 소용돌이를 보았고 빛의 터널도 보았고 (어쩌면) 차원간 웜홀도 보았다. 평생 그는 사건을 따라다녔고 (물론 사건이 그를 따라다녔을 수도 있고) 사건에는 미인들이 따라왔고 또 때로는 훈장들도 따라왔다. 자기 몸의 흉터들이 만화경 속 아름다운 이미지처럼 떠올라 그의 머릿 속을 가득채웠다. 컬리플라워 훈장, 바나나넛 머핀, 세크리테리엇, 메달 오브 아너, 베레타 92, 해마, 딤섬, 마가리타, 케빈 베이컨, 물음표, F-워드, 그레이 하운드, 솜브레로, 양털나선은하, 팝 타르트, 대관람차, 유칼립투스, 메두사, 트레일 믹스, 우디와 버즈, 말편자… 이번에도 그의 이론은 맞았다. (사실 그의 이론이 틀리는 적은 별로 없었다.) 언제나 그 순간에 누리는 사랑이 역대 최고. 도마뱀 뇌의 불꽃놀이. 오늘의 폭발이 최고의 폭발. 기록 경신. 올림픽 레코드.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 수 있는지는 스스로도 설명할 수 없었다.  그가 아는 것은 단 한 가지였다. ’희망은 최선을 꿈꾸며 품는 것이고 계획은 최악을 대비하여 세우는 것이다.’ 그의 오래된 지론.


*  


  다음날 아침, 마을의 보안관보는 ‘에델바이스’ 모텔의 킹 사이즈 침대에서 혼자 깨어났다. 그녀는 간밤에 만났던 헌병 출신의 남자를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그런 장신의 거구가 뭐에 가려서 보이지 않을 이유는 (절대) 없었고, 그러니 아무래도 방 안에 없는 것은 확실해 보였다. 바닥에는 오직 그녀의 옷가지 뿐이었고 그 광경이 마치 지난 밤 대난장의 책임을 혼자 다 뒤집어 쓴 것 같은 생각에 살짝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녀는 미쳐라는 남자가 아침에 따뜻한 커피와 (자기 입으로 커피를 그렇게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프랭키와 그레이스’에서 산 바나나넛 머핀을 사서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그 머핀 가게는 읍내에 있었고 지금 그녀는 50 마일은 떨어진 모텔에 있었다. 그 남자에게는 바나나넛 머핀 모양의 훈장이 (상처가) 대퇴부에 있었지만 차량은 없었다. 차도 없이 그무슨 수로 읍내까지? 히치하이킹이라도 한단 말인가? 그 생각에 웃음이 터져나올 법도 했는데 전혀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사방은 고요했다. 덜덜거리는 냉장고 소리가 끔찍하게도 크게 들렸다. 그녀는 어느 순간엔가 깨달았다. 

 

미쳐라는 남자가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그리고 어쩌면 그 자식은 어젯밤 미스테리한 사건을 설명할 방법을 찾지 못해서 냅다 줄행랑 친 것인지도 모른다는 것을.

 

(2017년 05월)

# Inspired by Lee Chi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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